정인보(鄭寅普,
음력 1893년 5월 6일/양력 1893년 6월 19일 ~ 1950년 9월 7일)
일제 강점기의 한학자·역사학자·작가이며,[1]
대한민국의 언론인·정치인·작가이다.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감찰위원장이었으며,
1950년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다.
본관은 동래,
자는 경업(經業),
호는 담원(薝園)··미소산인(薇蘇山人),
아호는 위당(爲堂)이다.
생애 초기
1893년 서울 명동에서 명문가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유명한 학자인 이건방에게서 사사했으며,
1913년 상하이로 건너가 박은식, 신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를 결성했다.
일제시대 후반
귀국한 뒤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하는 한편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저술 활동을 했다.
그는 역사학에 관심을 가졌는데,
조선후기의 실학자, 양명학자, 그 밖의 학파의 저술을 해제(解題)하고 그 학통을 밟혔으며,
또 그 출판에 임해서는 이를 교열하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심혈을 기울여 정리한 것은
실학자 특히 성호(星湖)와 다산(茶山)의 저술이었다.
그가 역사연구에 몰두하게 되는 것은 1930년대의 일이며,
그 직접적인 동기는 일제 관학자들에 의한 우리 역사의 왜곡이었고,
이를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본격적인 역사연구가 시작되고
그것은 <5천년간 조선의 얼>이란 표제로 동아일보에 연재되기에 이르렀는 데
이것은 후에 <조선사연구>로 간행되었다.
그의 역사학에서 가장 정채를 발하는 부분은 그 정신사적인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역사연구는 단재사학(丹齋史學)에서 계발되고
그것을 계승하면서 행하여졌으며
그 해박한 한학의 지식과 광범한 사료의 섭렵은
단재사학의 고대사의 전개를 보다 더 완벽하게 체계화했으며
그와 아울러 단재사학의 사론(史論)의 일부를 더 충실한 이론으로 완성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민족사학의 역사의식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얼>의 사관(史觀)을 보여 주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저항하여 산 속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광복 직후
은둔생활을 하다가 1945년 8월 광복 후에 국학대학의 초대 학장을 지냈다.
광복 초에 정인보는 광복절노래를 직접 짓기도 하였다.[2]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3]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3]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4]
1946년 3월 순국3의사 유해봉환일 김구, 계초 방응모 등과 함께
1946년 《조선사연구》(서울신문사)를 저술했다.
2월 14일 민주의원결성대회가 열렸으나
정인보는 여운형, 함태영, 김창숙, 조소앙 등과 함께 민주의원 의원직을 거부하였다.[5]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윤봉길(尹奉吉) ? 이봉창(李奉昌) ? 백정기(白貞基) 삼의사의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생애 후반
그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에 의해 삼고초려로
초대 감찰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2]
이승만의 측근이던 임영신의 독직 사건을 두고 엄한 처벌을 요구했다가
대통령 이승만과 갈등을 빚고 물러났다.
1949년 민족진영강화추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난 그해 7월 31일 서울에서 공산군에 의하여 납북된[1] 이후
사망 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한동안 신경완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정권에 의해 '반동'으로 분류되어
국군 북진중 적유령 산맥에서 10월 23일에서 25일 사이 방치되었다가
그 후 병원으로 후송되어 결국 그해 11월 사망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으나,
북한에서는 공식 사망일은 9월 7일로,
북행 직후 황해도에서 폭격을 받아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납북자들 죽음의 책임을 미국에 돌리기 위함이다.
사후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001년 연세대학교는 민족사관 정립과 국학 진흥에 헌신한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2인문관을 위당관(위당 정인보 선생 기념관)으로 지정하였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교육,학술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6]
가족 관계
북한 부수상을 지낸 홍명희와는 자녀끼리 결혼하여 사돈간이다.[7]
증조부 : 정원용
조부 :
아버지 : 정간조 ---> 정은조(誾)
부인 : 조경희
딸 : 정정완, 정양완, 정평완
딸 : 정경완,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무와 결혼
아들 : 정연모, 정상모, 정흥모 (한국 전쟁시 제 5사단 일원으로 철원지구에서 전사), 정양모
저서[편집]《조선고전해설》(1931년)
《양명학연론》(1933년)
《조선사연구》(1946년)
《담원 정인보 전집》(1983년)
《담원문록》(2006년 4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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