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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 3.근현대사

이광수(李光洙, 일본식 이름: 香山光郞 가야마 미쓰로) 5

by 사마르칸트 2014. 3. 4.

5

 

문학 세계[편집]기독교 사상을 접하면서 이광수는 마태오 복음서를 읽고 세례자 요한의 행위를 그대로 모방하고 싶어했을 정도로 감동받았으며, 레프 톨스토이의 작품, 기독교 사상이 나타나 있는 예술론에 심취하여 이같은 기독교 정신을 자신의 작품 속에도 구현하려 하였다.[103] 이광수는 1920년에 《금일 조선 야소교회의 문젯점》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이광수가 당시 조선교회의 문제점을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는 안목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조선 교회는 너무 권위적이고 계층적이다.
2.조선 교회는 세상과 교회를 너무 이분화해서 교회에만 치중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인 세상 일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는 외면한다.
3.상당수 개신교 목사들의 수준이 형편없다.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인 신앙들이 너무 많다. 기도가 만병통치약인 줄 안다. 한민족을 계몽하자면서 미신적 신앙을 전수하니 이게 왠말이냐?
4.조선교회는 개신교회와 천주교회 모두 합쳐서 100년이 넘는 선교역사를 가졌는데, 어째 조선에는 제 소리 하나 없이 다 가져온 것이냐?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정체성(자주성)이 없다.
5.선교사들과 그들이 인정하는 몇몇 개신교 목사들이 성서 해석의 독점권을 가졌다. 다양하고 자발적인 성서를 연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6.조선의 기독교는 감정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신비적인 체험만을 강조한다.
그의 작품에 기독교적 사상이 깃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송영옥에 따르면 기독교적 사상이 깃들어 있지만, 그는 기독교 사상을 교리로서가 아니라, 독자의 정서에 호소하고 고양된 정서의 감동을 통하여 깨닫도록 만들었다고 한다.[104]

이광수의 작품 ‘만주에서’의 화자는 한강,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을 연달아 언급한다.[105] 그런 화자의 시점은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관찰하는 시점이 아니라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펼치며 달리는 기차와 매개된 시점이다.[105] 그 중 강(江)의 자연적 위치보다는 경의선 철도의 노선에 바탕을 둔 시점이다. 근대인에게 자연은 재구성되고 정복된 존재다. 기차를 타고 누빌 수 있는 땅, 과학기술과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새롭게 재조직된 자연은 바로 인간이 정복한 식민지로서의 자연이다.[105]

상하이로부터 귀국한 후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지내면서 신문에 장편소설 《흙》 등을 발표하였다. 작품 흙에는 브나로드 운동의 활동상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작품 흙에서는 주인공 허숭 등이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스타일로 아침을 먹는 장면 등 서구식 생활을 소개하기도 했다.

춘원 이광수의 작품 '꿈'은 바로 낙산사에서 있었던 한 스님의 사랑을 관음상과 교감시킨 것이다.[106] 또한 삼국유사 '조신의 꿈' 설화에서도 힌트를 얻기도 했다. 그의 작품 꿈은 무용가 김복희의 '꿈 탐욕이 그리는 그림' 등에 영향을 주기도 했고[107], 1990년에는 영화감독 배창호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이순신관[편집]후대의 작가 김탁환은 이순신을 쓰면서 이순신의 적은 원균이 아니라 왜 수군 장수였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부각시킨다.[108] 김탁환은 작가의 말에서 “임진왜란을 바라본 구도는 조선 조정의 당파싸움 및 수군 내부의 쟁공과 반목 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정작 적이었던 왜군에 대해서는 거의 주의를 두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108]

김탁환은 “이것은 조선 수군과 왜 수군의 대립 구도 대신 이순신 대 이순신을 모함하고 핍박한 장수와 대신들을 대립구도로 택한 춘원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108] 이 구도에서는 조선과 왜군의 대립을 조선인 내부의 대립으로 치환시키려는 민족개조론의 발상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108]

로맨스 작품의 시조[편집]그는 작품에서 남녀간의 사랑과 낭만을 다루었다. 이광수가 '무정'에서 힘주어 강조한 것은 정(情)이고, 그것은 후대에 김동리나 박완서에게, 심지어 최근 젊은 작가들에게까지 이어져 변주되어 왔다.[109]

20세기의 한국의 소설, 작품, 드라마, 영화 등에는 남녀간의 사랑을 소재로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작품에서는 두 남녀 주인공은 그토록 그리워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만나서 손만 잡고 잔다.[110] 이는 20세기 초 이광수의 소설들에서부터 시작된 장면이다.[110]

사상과 신념[편집]그는 식민 통치의 억압과 현실의 부조리, 구 사상과 새로운 서구의 민주주의 사상과의 갈등, 유교적 가치관과 기독교 사상의 대립, 혹은 유교적 권위주의와 서구식 시민 민주주의 간의 갈등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작품에 투영하였으며, 넓게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억압과 폭력에서부터 가깝게는 가족과 친구, 주변인들에 의한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고발하였다. 그리고 권위와 관습이라는 이름 하의 폭력을 적극 지적하고 비판하였다. 그는 이를 방대한 양의 소설, 논문, 칼럼과 논설문, 시가, 수필류, 기행문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민족 개조론[편집]이광수는 늘 "(거짓말 잘하고 남을 속이고 하는) 민족성을 개량하고 조선민족의 내실을 철저히 다지자"고 주장하였다.[111] 이광수는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원인을 게으름, 나태함, 안일함, 위선, 허례허식 등으로 보았다. 그는 서구와 일본처럼 근면함, 성실성, 진솔함, 자유주의적인 가치관을 몸에 익히고 생각을 바꿔야만이 독립의 첫 걸음을을 뗄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의 요령과 술수, 시기심, 거짓말 등이 만연하다며 이러한 습성을 버리지 않고는 독립을 이룩할수 없으며, 독립하더라도 독립국가를 유지할 수 없으리라고 봤다.

“ ...(이하 중략)... 불행히 현재의 조선인은 이와 반대외다. 허위(虛僞)되고, 공상과 공론만 즐겨 나태하고, 서로 신의와 충성심이 없고 술수를 부리며, 임사(매사)에 용기가 없고, 이기적이어서 사회봉사심과 단결력이 없고, 극히 빈궁하고... (이하 중략)...[112] ”

그는 이렇듯 열등한 민족성을 지닌 조선인들이니 당장 독립하는 것은 시기상조요, 민족성부터 개조해야 독립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112] 신돌석을 밀고한 조선인부터 한일 합방 이후 다수의 조선인들이 일제 체제에 협력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점 등은 독립운동에 대한 환멸을 불러왔다. 또한 시기심과 술수와 요령, 거짓말이 만연한 것이야 말로 조선인의 가장 열등한 습성이라며 이러한 습성을 고치고 진실되고, 참될 것을 계속 호소하였다. 이광수가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직후 이광수의 집에 칼을 든 청년들이 난입했으며 개벽사의 기물들이 파괴되었고, 이광수를 강사로 초빙했던 사람까지 습격[42] 당하기도 했다. 이광수는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손해를 보는 지름길이라며 이를 한탄하였다.

이를 두고 언론인 김대중은 '춘원 이광수가 쓴 '민족개조론'을 읽으면 우리는 모두 슬퍼지기 마련이다. 우리 민족이 그렇게 비참하고 천박했었는가 하는 점이 슬프고, 그래서 나라를 빼앗긴 것이 슬프고, 옳은 소리를 옳지 못한 시기에 내놓은 작가의 시대착오가 슬프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 글의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가리고, 또 그 글을 쓴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다시 읽어보면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도 있다. 민족을 '개조'하기보다 민족을 '개선'하는 길을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113]'고 평하였다. 작가 이인화는 '그 논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수의 세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 사회가 가질 수 있는 극한의 비전을 제시했던 작가 이광수의 용기에 진정한 외경의 마음을 갖게 된다.[42]'고 하였다. 또한 김대중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읽어보면 우리는 그의 글에서 오늘의 고민을 발견할 수 있다.[114]'며 '그가 그 글을 쓴 시점과 상황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어도 그의 민족개조론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114]

이광수는 정신적으로 진실되고 참될 때만이 조선이 진정으로 독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1920년대에 이광수는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론을 품게 되었다. 1930년대에 가서는 독립무용론을 주장했다. 이때의 이광수는 3·1 운동을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지각없이 (남들이 하자 하니까) 따라서 한 것'이라 하고 식민지하에서의 모든 활동은 비정치적이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12] 1922년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낸 이후 한국사회와 한국인들에 대한 평가나 한국인론, 한국사회론은 늘 격렬한 논쟁을 촉발하는 강한 인화성을 보여왔다.[115]

또한 춘원 이광수는 “주정 잘하기로 첫째가 아라사(俄羅斯), 둘째가 일본, 셋째가 조선사람”이라고 지적했다.[116]

실력 양성론[편집]그는 민족의 정신 개조와 함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민족의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기틀이라 보았다.

1924년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5회에 걸쳐 발표한 ‘민족적 경륜(經綸)’은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117] 그는 조선에 새로운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그 새로운 문화는 바로 정치, 산업, 문화의 근대화였다.

조선에 새로운 문화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정치적, 산업적, 교육적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117] 이광수는 교육, 정치, 산업 운동이 연합해서 일어나야 하는데 이 중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교육 운동이라고 봤다.[117]

그는 독립 이전에 실력 양성이 우선이라고 보았다. 실력이 없이 의지만 갖고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여성 해방론[편집]그는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봉건적인 유교 사회에서는 여자들의 권리와 가치를 존중해주지 않았으며, 여자도 인간이고 따라서 여성을 해방시켜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여자가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가정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자유로운 연애와 자유로운 성관계를 포함한 자유 연애는 여성의 완전한 해방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이에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그가 고아인 점을 언급하며 상놈이 주장하는 못된 사상이라며 비방하고, 각 언론에 그의 작품이 실리지 못하게 전화항의나 방문 등을 통해 압력을 넣기도 했다.

그의 작품 중 무정 등은 이러한 여성해방론을 반영시킨 작품이었다. 이광수는 당시 전 조선 청년의 지적 표상이요, '전 조선 여서으이 연인'이라 일컬어질 만큼 인기 정상에 올라있는 작가이기도 했다.[112]

자유주의론[편집]그는 자유주의를 제창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 중 접한 미국과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에 탄복하고 이를 조선 사회에 알리는데 노력하였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는 열등감과, 고아인 그에 대한 부모 없는 자식이라는 지속적인 냉대와 멸시, 어머니 김씨가 세 번째 부인으로 사실상의 서자 취급을 받은 점 등은 그로 하여금 조선 사회의 인습에 저항하거나, 조선 사회의 기성 가치관에서 자유롭게 해 주었다.

그는 여성이 가정에서 해방되고, 자유롭게 연애하여 여성이 해방되는 것과 조선 사회에 잔존하는 양반, 상민의 신분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봉건의 늪에서 민족을 구제하고자 했던, 그 열의가 너무나 강렬해서 분별지마저 상실했다[109] 는 시각도 있다.

소 예찬론[편집]이광수는 늘 젊은이들에게 소처럼 살아야 된다고 하였다. 그는 성실성을 인간의 최고의 미덕이라 예찬했다. 춘원 이광수는 수필 '우덕송(牛德頌)'을 썼을 만큼 소를 좋아했다. '그의 느리고 부지런함, 그의 유순함. 그러면서도 일생에 한두 번 노할 때에는 그 우렁찬 영각, 횃불 같은 눈으로 뿔이 꺾이도록 맥진(驀進)함, 그의 침묵함….[118]'이라 하여 소의 정직함과 성실함을 예찬하였다. 또한 춘원 이광수는 '아이들에게도 순순히 끌려가는 모습이 예수와 닮아 거룩해 보이기도 하는' 소의 우직함을 칭찬한다.[119] 그는 소의 성실성과 우직함을 예찬, 강조하였다.

탈권위주의적 인간관[편집]소파 방정환을 만나 어린이도 인간이라는 말을 듣고 감화된 그는 평생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반말을 쓰지 않고 존댓말을 썼다. 또한 자신보다 10세, 20세 이상 연하인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형님, 아우님 하기도 했다. 그가 한때 사귀었던 나혜석의 조카인 나영균은 해방 직후에 그를 만났는데 그가 반말을 쓰지 않고 정중하게 인사한 것을 회고하기도 했다.[120]

"춘원은 내가 인사하면 어린 나에게도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절을 했어요. 말소리와 표정이 언제나 부드러웠고 눈동자 빛깔이 엷어 꼭 서양사람 같았죠." [120]"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10세, 20세 이상 어린 사람에게도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았고, 또한 젊은이들의 의견이라 하여 무조건 반박하거나 비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를 두고 그를 줏대없다, 체신없다는 비난이 가해졌다. 또한 이광수는 조선 사회가 지나치게 엄숙함만을 강조한다며 이것 역시 가식적인 조선의 한 모습으로 규정했다.

자유 연애론[편집]그는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며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 외에도 소설과 작품을 통해 남녀간의 평등과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점과 여자에게도 욕망과 애정, 성욕 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설파하면서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비난 과 함께 1920년대, 30년대, 40년대 뭇 여성팬들의 인기와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는 연애는 남녀 본연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며 자유로운 연애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인생의 연애는 예술이요, 남녀간의 예술은 연애'라 주장했는데 이는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춘원은 조선 사회가 비인간적으로 여성을 괴롭히고 억압하고 학대해왔다 전제하고, 봉건 제도의 압제와 유교 이념의 억압 하에 수백년을 신음하고 시달려 온 여성의 해방은 자유로운 연애로서 완성시킬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나혜석, 김일엽의 연인이었고, 김명순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1917년-1918년 무렵에는 잠시 나혜석의 연인이었고 1930년에는 김일엽과도 잠시 사귀기도 했다.

그는 나혜석이 정조 취미론과 이혼 고백장 등으로 지탄을 받을 때도 그를 도와주었고, 김일엽의 자유 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적극 옹호하였다. 또한 김명순의 후견인으로 그를 문단에 발탁하였으며 이병도의 집에 머무르도록 주선해주었고,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는 당시 사회에서 이들의 자유연애를 비난할 때마다 이들의 자유 연애론을 인간 본연의 감정이며 솔직한 자기 표현이라며 옹호하였다.

문인 발굴, 육성[편집]이광수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자신이 김성수, 송진우 등과 중앙학회, 윤치호 등의 후원으로 유학 생활을 한 것을 늘 인식하고 있었고, 일본 유학 시절부터 젊은 중고등학생 문인, 청년 문인들을 발굴하여 소개하고, 지도, 후원하였다.

시인 구보 박태원도 춘원(이광수)에 의해 여러 지면에 시를 발표하여 알려지게 되었다.[121]

소학교에 다니던 소년 피천득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발굴하였다. 이광수는 그를 금아(琴兒), 즉 거문고소년으로 불렀다.[122] 소학교 4학년 때 월반해 제일고보(경기고)에 다니던 소년의 재능을 맨 먼저 알아본 이도 춘원이었다.[122] 금아라는 호는 춘원 이광수가 가야금을 잘 탔다는 그의 어머니를 떠올려 지어줬다.[123] 이후 피천득은 금아를 자신의 아호로 평생 사용하였다.

1930년대 열린 시 창작 대회에서 김영랑은 화려하게 핀 모란을 보며 시를 썼지만 마음에 안 들었던지 쓰레기통에 던지려 하자 춘원 이광수가 왜 그걸 버리느냐며 시를 낭송해 박수를 받았다.[124] 그는 여러 신진 문인과 작가, 시인들을 발굴했고, 형편이 어려운 문인들의 작품 활동을 적극 지원, 독려하였다.

청년들에게 영향[편집]1936년 연희전문을 수석으로 졸업한 송방용은 바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춘원 이광수의 소설 '흙'을 읽고 농촌 계몽 운동을 펼치고 싶어서였다.[125]

고려대학교 교수 김용준은 그의 책을 읽고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였다고 생각된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당시 종로 네거리에 있었던 화신상백화점 4층 서적부에서 춘원 이광수의 소설 <그의 자서전>이라는 책을 사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줄거리는 다 잊었지만 친구의 부인과 불륜의 사랑에 빠져 친구의 부인과 애정도피 생활을 하는 말하자면 평범한 애정소설이었다고 기억되는데 그들이 애정도피 생활을 하게 되는 만주 간도의 한국인 마을의 배경이 나에게는 너무나 낯설은 광경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천황폐하의 적자(赤子)로서 천황폐하를 위해 내 생명을 새털과 같이 바치는 일이야 말로 남아로서 가장 보람있는 삶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고 충직한 황국신민이었던 홍안의 소년에게는 그 소설에 전개되는 조선 사람들의 생활 배경에서 분명히 황국신민의 세계와는 어딘가 분명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 것이었다. 어떻든 나는 이 소설을 읽은 후부터 춘원의 소설을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역사소설을 많이 읽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느덧 매주 담임선생에게 제출하는 일본어 일기 외에 한글의 일기장이 따로 생겼다.[126]'고 하였다.

대학을 중퇴하고 실의에 빠진 채만식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발탁한 것도 이광수였다. 일본 와세다 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 문과를 중퇴한 채만식은 1924년 단편 ‘세길로’가 이광수에 의해 조선문단에 추천되면서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다.[127] 이후 그는 채만식의 사람됨됨이를 높이 평가해 그를 동료 문인들에게 널리 소개해주었다. 자신의 작품 애욕의 피안 등을 읽고 작품평을 한 신인 박태원을 건방지다는 혹평 대신 문단에 추천하기도 했다.

3·1 운동에 참가해 모진 고초를 겪은 추계 최은희를 추천하여 조선일보에 입사, 최초의 여기자로 필명을 날리게 했다.[128]

그의 작품은 일본인들과 중국인, 외국 교포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안창호의 측근인 구익균은 그의 작품이 일본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진술했다. '일본 사람들도 춘원을 숭배했어. 이광수 문학을 좋아했다.[129]'는 것이다.

사후 영향력[편집]사후에도 그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승려 법정은 자신의 사촌 동생에게 이광수의 책들을 추천하였다. 사촌동생들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에서 법정은“좋은 책을 많이 읽어라. 춘원(이광수)님 지은 것은 대개가 믿고 읽을 만하다. 내 책장에서 읽을 만한 것을 골라사 읽고 잘 보존하여라. 나플탈렌을 넣어두면 좀이 들지 않을 것이다.(1958년 5월 13일[130])”라고 하였다.

대학 시절 이광수의 집에 드나든 문학청년이던 법철학자 이항녕은 후일 소설 '교육가족', '청산곡'과 수필 '객설록' 등의 작품을 썼다.[131] 기업인이자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은 그의 작품 흙을 읽고 변호사가 될 꿈을 품기도 했다.[56]

후대의 작가인 양귀자 역시 그의 작품 유정을 보고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양귀자는 후일 '초등학생때 외삼촌 책꽂이에서 이광수 전집을 발견, '유정'을 읽고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흐느껴 울었다. 너무 좋아서 말이다. 이런 세계도 있구나, 소설만 있다면 이 괴로운 세상(학교 가기가 끔찍히 싫었단다)도 얼마든지 살아나갈수 있겠구나[132]'라고 했다 한다.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지낸 현재(鉉齋) 김흥호(金興浩)는 1948년 춘원 이광수의 소개로 다석 유영모(柳永模)를 만나고 6년간 사사하였다.[133]

국민성 비판과 자치론[편집]1922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논문 민족개조론과 1923년에 발표한 동아일보 사설 <민족적 경륜>을 통해 그는 한국인의 위선, 편협함, 정직성의 결여, 무질서, 잔꾀, 요행을 바라는 심리, 음험한 술수 등을 지적했다.

민족 개조론에 이어 민족적 경륜은 당시의 국민적 감정을 자극했고, 종교계까지 가세하여 그를 비난하자 물의를 일으켜 결국 동아일보를 일시적으로 퇴사하게 되었다. <민족개조론>과 <민족적 경륜>에서 그는 나라 잃은 원인을 그는 당파 싸움과 한국인의 위선, 편협함, 정직성의 결여, 무질서, 잔꾀, 요행을 바라는 심리, 음험한 술수 등 국민성 자체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교육을 통해 계몽하고 민족운동을 문화운동으로 전환할 것과 독립이 어렵다면 치권이라도 획득하여야 된다며 자치제에 대한 강력한 희망의 의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의 조선 사회는 사기, 협잡, 위선이 만연한 사회라고 규정했다. 또한 신의가 없고, 이조 당쟁의 악습을 답습하여 끼리끼리 파벌 짓기를 좋아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태를 개선하지 않고는 독립이 불가하며 독립을 하더라도 유혈사태나 큰 갈등이 수시로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정치적 독립 이전에 국민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서로간의 신뢰하는 사회로 거듭나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한국인 단일민족설[편집]그는 1930년대 초, 한국인은 단일민족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였다. 1933년에 쓴 이광수의 ’조선민족론’의 일부에서 “조선 민족이 혈통적으로, 문화적으로 대단히 단일한 민족이라는 것은 우리 조선인 된 이는 누구나 분명히 의식하여 일점의 의심도 없는 바다.”라고 발표했다.[134]

이전에도“2천만 민족은 동일한 단군의 자손”이라는 식으로 단일 혈통을 강조한 표현이 간간이 신문 등지에 보이기는 하지만, 거꾸로 한국인이 단일민족이 아니라 다종족으로 구성됐다는 주장도 제기될 정도로 단일민족설은 드문 주장이었다.[134]

단재 신채호는 1908년에 발표한 ’독사신론’에서 동국민족(한국인)이 부여족을 주 종족으로 하는 6종족으로 구성됐다고 주장했고, 박은식은 ’몽배금태조(꿈에 금나라 태조를 뵙다)’에서 조선족과 만주족이 모두 같은 단군의 자손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134] 이광수는 신채호의 6종족론을 비판, 조선인은 다같이 단군이라는 한 조상에서 갈라진 단일 민족이며 단일 인종으로 규정하였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한국학 교수 신기욱은 그를 한국형 파시즘과 권위주의의 뿌리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신기욱은 '1930년대 이광수의 ‘조선민족론’에는 전체주의를 강조하는 파시즘적 요소가 있다. 이광수 식의 민족주의는 해방 이후 이승만, 박정희로 연결되면서 한국적 권위주의의 뿌리가 됐다고 생각한다.[135]'고 지적하였다.

문학 계몽론[편집]1910년대에는 이광수 이해조 등에 의해 계몽주의 문학이 주도되었다.[136] 그는 소설과 시 등 문학작품이 시대의 정신, 시대의 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자유연애론, 자유주의, 개화, 계몽 등 소설과 시를 통해 계몽주의적인 가치관을 드러냈다. 그는 시와 소설, 희곡 등 문학작품을 통해서 대중을 계몽해야 한다는 점과 문학작품의 대중화를 통해 계몽해야 된다고 확신하였다.

1919년 김동인은 이광수 등의 계몽주의에 반기를 들고 순수문학 운동을 전개[137] 하기도 했다. 김동인은 문학은 어디까지나 예술 작품일 뿐이며 정치성을 띄워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광수는 문학 작품 역시 그 시대 문화의 하나이니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전혀 도입하지 않을수는 없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김동인은 이광수의 계몽주의 문학에 맞서 사실주의 수법을 썼으며, 신경향파와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고 순수 문학 운동을 벌였다.[138] 김우진도 이광수의 문학 계몽론을 비판하고 자연주의적인 것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49]

시대상의 반영[편집]그는 자신의 소설과 칼럼, 시 에는 당대 사회 문제를 반영하거나 언급하였다. "세말이 되면 진고개와 종로에서 장, 단스 같은 것을 일등상으로 걸어놓고 경품부 대매출을 한다. 그때마다 안해는 장이 빠지기를 바라고 물건을 삿다. 그러나 뽑는 것마다 타울수건, 화저까락 따위요, 바라는 장은 아니 빠졌다.(동광 1932년 1월 25일자)[139]" 이광수(李光洙)가 그린 자개장 당첨을 꿈꾸며 물건을 사들이는 아내 모습이다.[139]

그는 이상도 좋지만 당대의 시대상, 현실 문제, 현실의 모순 등을 다루지 않는다면 그는 참된 작가로 보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과 당면 문제를 다루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소설이 구전과 민담으로 전해지는 소설과 시문, 풍경 등에 대한 것이 주류였다. 그 역시 자신의 작품에 현실이 반영되었음을 밝혔다. 무정에는 '노일전쟁과 새로운 사회상에 눈뜬 조선'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 했고, 개척자는 '한일합방으로부터 대전(大戰) 전까지의 조선', 재생은 '만세운동 이후 1925년경의 조선', 군상 群像은 '1930년대의 조선의 기록'이라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

현대미에 대한 관점[편집]춘원 이광수는 이상형인 여성의 기준을 밝히면서 “체격이 팔다리나 몸통이 자로 잰 듯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게 바로 맞고, 몸 쓰는 것, 걷는 것 등 모든 동작이 날씬하여 남의 눈에 조금도 거슬리게 보이지 않고... (이하 중략)... 또 취미와 그 정신이 아울러 고상하다면 그야말로 내가 찾는 미인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140] 그는 “얼굴은 둥글둥글한 타원형의 윤곽에다가 눈은 어디까지든지 크고 처진 듯하며 코나 귀가 복스럽게 예쁘고 살결이 하얀 분”이어야 한다며 얼굴 생김새에 대한 여러 가지 기준도 빠뜨리지 않았다.[140] 그러나 남사스럽고 음란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가 자신의 이상형인 여성을 공개적으로 밝히자 다른 작가, 문인, 시인, 예술가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거나 언론에 발표하기도 했다. 소설가 현진건은 “첫째로 키가 조금 큰 듯하고 목선이 긴 여자가 좋다. 제아무리 얼굴이 예쁘장하고 몸맵시가 어울려도 키가 땅에 기는 듯하고 목덜미가 달라붙은 여자는 보기만 해도 화증이 난다”며 노골적으로 밝히기도 했다.[140] 이광수의 공개발언 이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형 여자, 이상형 남자에 대한 의견이 나타났다. 중추원의 귀족들과 일부 유학자들은 그가 상스럽고 음란한 사상을 부추긴다면 비난하였다.

근대화에 대한 관점[편집]그는 조선 사회를 개선하려면 문명화, 근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조선 사회의 새로운 문화의 하나로 철도와 열차를 지목했다.

"'도회의 소리?' 그러나 그것이 '문명의 소리'다. 그 소리가 요란할수록 그 나라는 잘 된다. 수레바퀴소리, 증기와 전기기관소리, 쇠마차소리… 이러한 모든 소리가 합하여서 비로소 찬란한 문명을 낳는다.(이광수 ‘무정’)[141]"

그는 인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장점을 취하고 사회를 개선시키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에서 기차역은 주인공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무대다.[141] 그의 작품 무정을 두고 "철도가 작품의 한가운데를 횡단하고 있다. (작품에서) 기차는 근대성의 상징[141]"이라는 분석도 있다. 또한 작품 흙에서는 주인공들이 서양식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을 묘사하여 서구 문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등산 활동[편집]이광수는 1936년 '계명'이라는 잡지에 남긴 기고문을 통해 백두산 등반에 대한 소감을 남겼다.[142]

“세상에 백두산만한 명산도 없지만, 백두산만큼 매몰된 명산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 주인인 조선인에게 가장 심하게 백두산이 대접받지 못함이 가장 애닯습니다. 백두산이란 이름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또 백두산이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산인 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한 걸음 나아가 백두산의 국토적 성질, 민족적 관계, 자연 및 인문상 실제적 사정에 대하여 묻는다면 우리가 가진 지식이 너무 작고 부족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알아야 할 까닭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알고자 하는 노력도 있을 까닭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두산을 우리가 이렇게 알아야 옳으며, 또 이렇게 알아도 그만이리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이광수‘계명’1936)[142]”

금강산을 오른 뒤에는 '나는 천지창조를 목격하였다/ 신천지의 제막식을 보았다.[143]'며 그 절경을 칭찬하였다. 춘원 이광수는 '금강산유기'를 통해 내금강의 빼어난 경관을 묘사하였다.[143]

산을 좋아한 그는 여러 산을 등산하였지만 그는 백두산을 비롯한 일부 산에 대해서는 등산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이광수는 등산을 좋아하여 전국 각지의 명산을 찾아가 등산, 답사하였다.

논란과 의혹[편집]소설 원효대사의 작품성 논란[편집]2006년 소설가 한승원은 이광수가 전쟁 독려의 목적으로 작품을 지었다고 비판했다. 작가 한승원은“이광수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한 '원효대사'에서 원효가 신라 젊은이들에게 ’성스러운 전쟁에 기꺼이 몸을 던져라’라고 부르짖게 했다”며 “춘원의 '원효대사'는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에 기꺼이 참여하도록 충동질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원효의 삶과 사상을 오독(誤讀)한 결과라는 것이다.[144]

이광수작 '원효대사'의 작품해설을 쓴 동국대학교 명예교수인 국문학자 이병주는 "일제가 춘원에게 '원효대사'의 집필을 허락한 것은 원효가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에 충성한 불요불굴의 정신을 비상체제하의 한인(韓人)에게 알려 이른바 '국가총동원'의 선정성을 노린 것이었다."면서도 "이광수는 이를 역이용해 한민족의 민족정기를 불러일으키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삼았다."고 반론을 제기했다.[144]

2006년 4월 원효대사의 재출간 문제를 놓고 화남출판사 편집주간 이승철 시인과 한승원 작가 사이에 논쟁이 오갔다. 한승원 작가가 "원효의 사상을 오독한 것[144]"이라며 이광수의 소설을 비판한 것에 대해 이승철 주간은 "어떤 이유로도 출판의 자유는 침해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원효의 사상은 여러 작가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144]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김준태 시인은 “이광수가 문학적으로 원숙기에 접어들어 쓴 이 소설은 그가 작가로서 야심을 저버리지 않고 창작에 전력투구했다는 것을 엿보게 한다”면서 “소설 ’원효대사’의 한계는 주인공 ’원효의 한계’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를 살다간 춘원 이광수의 한계였다”고 지적했다.[144]

적극적 친일 문제[편집]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들어 있으며, 당시 총 103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145] 되어 친일 문학인으로 선정된 42인 가운데 가장 많은 편수를 기록했다.

그러나, 일부 이광수를 옹호하는 측에서는“항일 민족주의자로서 35-36년을 살고 47세경부터 일제 패망 때까지 약 6년간을 친일로 살았다.”는 점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146] 이들에 따르면 "이광수의 친일 활동은 어쩔 수가 없었으며 동료 지식인을 구출하기 위한 행동이였고, 이광수는 사실 거짓 친일, 실제는 독립 염원"이라고 주장하면서 '이광수는 민족의 양심수'라고 주장하고 있다.[147] 반면에 1909년 〈사랑인가〉를 탈고한 시점에서 이미 친일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6]

1948년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군상' 보고서에 따르면, 이광수는 '광병적(狂炳的) 친일 급 열렬 협력자'로 평가되었다.[148]

한편 소설가 복거일은 '이광수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친일한 것은 아니[149]'라고 하였다.

친일 의혹에 대한 반론[편집]2007년 10월 원로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문학계간지 《휴먼메신저 가을호》에 발표한 논문 '우리가 사랑하다 버린 선구자'에서 “친일에 대한 이광수의 업보는 남들에 비해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다”며 “수십년 간에 걸친 그의 항일운동과 문학적 업적을 제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며 친일 의혹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였다.[111]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우선 해방 정국에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이광수를 친일혐의로 구속 투옥한 것에 대해 “친일인사 다수 중에서 특히 죄질이 나빴던 문인은 빠지고 이광수 등 선배 문인만 기소한 것은 잘못이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참작 없이 구속투옥에 의한 재판을 진행한 것은 결코 공정한 처사가 아니었다”며 “힘 없는 사람들만 처벌했다는 점에서 큰 과오가 있으며 법이 대중적 인기 논리에 편승한 것”이라고 비판했다.[111]

정신분석학자 이중오는 민족개조론을 친일의 증거로 지목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에 의하면 민족개조론은 하나의 텍스트로 접근하는 한 어떤 친일의 흔적도 찾아낼 수 없다고 단정한다. 이광수 대신 도산 안창호 이름으로 출간됐다면 그 논문은 지금 다른 운명을 맞고 있을 것[43] 이라며 이광수 비판론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또한 다른 문인들은 무책임하게 친일 의혹을 회피하고 그에게 책임을 전가했다고 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친일 문인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이광수라는 희생양을 통해 누구도 주지 않는 면죄부를 강탈해 간 친일파 지성인들의 책동[43]'이라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이중오는 '그가 「왜 친일을 했을까」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그를 친일 인사의 대명사로 인식하는 흑백논리만 있을 뿐, 「인간 이광수」에 대한 이해는 없는 것이다.[43]'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적극적 친일론에 대한 반론[편집]2009년 단국대학교 김원모 교수는 "이광수의 친일은 민족의 보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겉으로는 친일을 했지만 내면으로는 철저히 독립을 원했다.[84]"고 주장하였다. 김 교수는 춘원이 도쿠토미 소호에게 1940년 일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창씨개명의 이유를 밝힌 편지를 1989년 발견했다. “처음엔 편지 내용에 수치심을 느꼈죠. 하지만 자료를 뒤져 연구를 계속하면서 친일과 관련된 이광수의 다른 면모를 이해하게 됐습니다.[84]”라고 밝혔다. 이어 김원모는 이광수 친일연구와 관련해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처럼 좁은 대롱으로 대상을 보듯 실증 연구 없이 일제강점기 인물의 한 면만 편협하게 부각해 매국노로 매도하는 학계의 분위기는 잘못됐다”고 밝혔다.[84]

김재용 원광대 교수는“이광수의 삶을 볼 때 친일 행적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광수는 1937년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자 조선 독립의 가능성이 없어졌다고 보고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이 일본의 국민으로 동등하게 사는 것이 우리 민족의 살길이라고 본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 하였다.[84]

독립운동 연장선론과 그 반론[편집]2007년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이광수의 친일 행위 중 일부는 친일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연장선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때 문학계간지 《휴먼메신저 가을호》에 발표한 논문 '우리가 사랑하다 버린 선구자' 김우종은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광수가 친일 활동을 시작한 시점으로 간주되는 《개벽》에 발표된 ’민족개조론’에 대해 김씨는 “(거짓말 잘하고 남을 속이고 하는) 민족성을 개량하고 조선민족의 내실을 철저히 다지자고 주장한 것이었다”고 강변하며 “이것을 일제에게 식민 통치의 구실을 주었다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라고 말했다. 또한 “’민족개조론’이 발표되기 넉달 전 베이징에서 안창호를 만나 흥사단 운동에 관해 협의하고 1923년에 함께 조직한 것이 수양동맹회였다”며 “민족개조론의 내용과 안창호의 준비론을 비교해보면 이 논문은 안창호의 독립운동노선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111]

김우종은 이광수가 어린 시절 동학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일본 유학생 시절 3.1 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 '2.8 독립 선언문'을 주도적으로 작성했다는 점 등을 거론하며 “수십년 간에 걸친 항일투쟁의 노력과 문학적 업적은 친일행적을 상쇄하는 바가 있다”고 거듭 변호했다.[111]

이에 대해 김재용 원광대 국문과 교수는 “1938년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이광수는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는 길은 ’독립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모두 일본국민이 될 것을 주장했다”며 “1940년에는 자신의 이름마저도 일본식 이름으로 바꿨다. 그의 행적은 모두 기록으로 남아있다”고 반박했다.[111] 김 교수는 특히 이광수의 문학적 성과와 항일투쟁의 노력이 친일 행적을 상쇄한다는 김씨의 주장에 대해서도 “당시 이광수보다 지명도가 높았던 홍명희는 일제의 종용에 결코 굴하지 않았다”며 “공과(功過)를 다 같이 다뤄야지 공 때문에 과가 지워지거나 과 때문에 공이 지워지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111]

허영숙에 의한 매수론[편집]그의 부인 허영숙이 조선총독부가 매수한 밀정이고 허영숙이 그를 포섭했다는 의혹은 소설가 박종화 등을 통해 제기되었다. 이후 부인 허정숙이 밀정, 조선총독부에 포섭되었느냐 여부 역시 논란 중에 있다.

한편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이광수의 갑작스런 귀국도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이광수는 일제 총독부의 밀사로 의심받던 아내 허영숙을 만난 뒤 돌연 귀국, 변절자로 의심받았다.[111]

김우종은 “이광수에게 있어 허영숙은 아내 이상의 존재였다. 이광수가 일본에서 폐결핵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의사였던 허영숙이 살려주지 않았다면 당시 집필 중이던 ’무정’도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의 개인적 환경을 일체 무시하고 비난만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111] 또 “조선문인협회가 일제 총독부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일본인까지 회원으로 참여해 그들의 지휘 감독 하에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이광수의 친일은 자발적인 것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부연했다.[111]

위장 이혼 논란[편집]해방 후 1946년 이광수는 허영숙은 이혼을 하는데,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그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축적한 부동산과 같은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기 위한 위장이혼이었다고 비판한다. 또 일각에서는 친일파로 몰린 자신 때문에 가족이 피해 받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족 관계[편집]
이광수의 가족사진. (1940년 8월 27일자 매일신보에 실렸다.)후일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지낸 백두진은 그의 두 번째 부인 허영숙의 친정 조카사위였다.

할아버지 : 이건규(李建圭, ? - 1910년)
아버지 : 이종원(李鍾元, 1850년 - 1902년 8월 14일)
어머니 : 충주 김씨(忠州金氏, 1869년 - 1902년 8월 22일)
형 : 3명, 요절
여동생 : 이애경(1895년 - 1936년)
여동생 : 이애란(1900년 - ?)
처 : 백혜순(1918년 이혼, ? - ?)
아들 : 이진근(李震根, 1914년 - ?)
처 : 허영숙(許英肅, 1895년 음력 8월 18일 - 1975년, 1946년 이혼)
아들 : 이봉근(李鳳根, 1927년 5월 30일 - 1934년 2월 22일)
아들 : 이영근(李榮根, 미국으로 이주.)
손녀 : 이성희(미국명 앤 리)
딸 : 이정란(李廷蘭)
딸 : 이정화(李廷華. 1935년 - , 미국에 거주, 1998년 미국 시민권 취득, 펜실베니아 대학교 교수 역임.)[150]
외할머니 : 양씨(梁氏, ? - 1897년)
사촌형제 : 이학수(李學洙, 1921년 스님으로 출가)
장인 : 허종(許鍾, 허영숙의 친정아버지), 허영숙은 허종의 넷째 딸이었다.
기타
처조카 : 허명재, 두 번째 부인 허영숙의 친정 조카
처조카사위 : 백두진(白斗鎭,1908년 10월 31일 - 1993년 9월 5일)
평가와 비판[편집]그는 한국 '현대소설의 아버지[151]'라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후반의 행적을 두고 논란의 여지가 존재한다.

당대의 평가[편집]일제 강점기 후반의 미군은 그의 교육을 잘 받았다는 점과 소년 활동에 적극적이다[152] 는 점을 주목했다. 미군은 그에게 '교육을 잘 받았다. 한국의 대표적 작가이자 언론인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안창호와 긴밀한 관계다. 조선문인협회 회장이며, 소년회 활동에 적극적이다. 1930년대 붙잡혀 투옥된 바 있으며, 일제에 의해 고문을 당했다. 석방된 후 일제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며, 이로 인해 이전까지 쌓아 왔던 영향력을 잃게 됐다.[152]'고 평가하였다.

긍정적 평가[편집]이광수는 최남선과 함께 언문일치의 신문학 운동을 전개하여 한국 현대 문학의 여명을 이룩한 공헌자로 높이 평가되며, 근대 문학과 현대 문학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고리, 역사 소설의 대중화에 기여한 작가로로 평가된다. 이광수는 한국근대문학사에서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현실주의, 인도주의적인 작가로 평가받는다. 단순히 대중에게 영합하지 않고 애국적인 작품, 역사 소설 외에도 가부장제, 조혼풍습 등을 비판하고 사회 계몽과 신교육, 과학 기술 문명을 수용할 것을 주장한 점과 자유 연애론 등 다양한 사상과 신념을 작품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것은 시대분위기와 사회적 조건 그리고 개인의 취향에 의한 결과라는 반론도 있다.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이다. 계몽주의·민족주의 문학가 및 사상가로서 한국 근대 정신사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153] 는 평가도 있다.

숭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인 한승옥은 그의 작품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라며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이광수는 문장을 쉽게 쓰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분이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도, 초등학교만 나와도, 읽을 수 있다. 역사 소설을 봐도 정사는 물론, 야사와 민담까지 아우르고 있다. 불교용어가 많이 나오지만, 어려운 말을 쉽게 풀어쓰는 능력을 가졌다. 그것은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가 요새 태어났다면 세계적인 문호가 됐을 것이다. 요즘 작가들이 단명한 것은 공부를 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요즘 학생들은 이광수라면 무조건 싫어한다. 80년대에는 친일파라고 싫어했는데, 90년에 들어와서는 아예 읽을 생각조차 않는다. 대학 국문과에서도 문학사나 작가론에서 스쳐지나갈 뿐 비중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154]"고 하였다. 또한 한승옥은 "친일 여부를 앞에 놓지 말고 문학 자체를 봐야 한다. 이광수의 복합적인 면, 인간적인 점을 조명해야 한다. 이광수처럼 드라마틱한 사람도 없다. 그의 시대로 들어가서 장단점을 재평가해야 한다.‘무정’이 현대소설의 효시라는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 없을 것이다. 춘원은 장편을 주로 썼는데, 작가는 본래 장편소설에서 역량이 드러나는 법이다. 기회가 닿으면 제대로 된 이광수 평전을 쓰고 싶다. 이제는 이광수 문학상이 나올 때도 된 것 아닌가.[154]"라며 맹목적인 비판을 비판하였다.

작가 이인화는 "이광수야말로 시대정신이 '근대의 초극'이 아니라 '근대의 재평가'로 돌아설 때마다 끊임없이 재론될 전형적인 근대인이다.[42]"라고 평하였다. 또한 '이광수가 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시대의 닦달을 겪으며 기어올라간 성취의 드라마는 필자에게 가장 좋아하는 것에 각고면려를 쏟아부어 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근대의 자유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일제 말기의 친일행적이 가져온 그의 불행한 말년은 근대가 부여한 자유의 공포를 가르쳐주었다.[42]'고 하였다.

국민대학교 교수 방민호는 "이광수의 산문은 종교적인 깊이가 있다.[155]"고 평하였다.

기독교운동가인 함석헌은 '육당, 춘원의 밤은 지나가다'라는 글에서“육당, 춘원이 무엇인가?… 이 나라가 기울어지려 할 때, 이 민중이 고난에 빠지려 할 때, 그 불평을 잘 울라고 하늘이 세웠던 이들 아닌가? 그들은 참 잘 울었다. 그 소년 잡지, 그 역사, 그 단군론, 그 백두산 참관, 그 백팔번뇌, 그 무정, 그 개척자, 그 단종애사, 이순신, 원효, 이차돈, 그것이 다 이 민족을 위해 울고 이 나라를 위해 슬프게 힘있게 우렁차게 운 것 아닌가?” 춘원보다 10년 아래인 함석헌은 “그들을 위해 분해하고 아끼고 의아해 하는 것은 그렇게 울던 그들이 내처 힘있게 울지 않고 중도에 그 소리가 그만 막혀버렸기 때문”이라고 안타까워 하였다.[156]

작가 겸 시인인 피천득은 "나를 문학의 길로 이끈 이광수 선생은 재주가 많고 착하셨지만, 바보같은 분이기도 했다.[59]"고 평하였다.

고려대학교 교수 김용준은 '철학과 현실' 가을호에 “(춘원 이광수는) 나를 충직한 황국신민으로부터 한국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157] 김용준은 그를 친일파로 볼 수만은 없다고 평하였다. '때론 춘원 이광수를 친일문인 운운하여 그를 매도하는 신문기사를 대할 때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춘원을 나무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글쎄, 그의 친일행각을 옹호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에 앞서 그는 나를 충직한 황국신민으로부터 한국사람으로 만들어 준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126]'라고 하였다.

미국의 한국학자 가브리엘 실비안은 "이광수야말로 한국 사회에 동성애 담론이 보편화하기 이전에 동성애를 반감 없이 다뤄온 작가[41]"라며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교수 한승조는 최남선ㆍ이광수 선생처럼 민족문화를 위해 노력한 분들을 크게 이해해야 한다[158] 고 주장했다.

부정적 평가[편집]평론가 김현은 '이광수는 만지면 만질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상처와도 같다. 한국 현대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족적을 남겼지만, 그의 친일 행위로 한국 정신사에 감출 수 없는 커다란 흠집을 만든 사람 또한 이광수이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한편 당면한 사회적 갈등에 철저히 대응하기보다는 이상적인 설교에만 치중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그에 대한 호평은 시장성 거품이라 비판했다. 소비 지향성 경제의 거품에 들떠서 '이광수가 친일은 했어도 소설은 훌륭했다', '서정주가 역사적 과오는 범했지만 시는 좋다'는 식의 미학적 착시현상이 90년대 한국문학을 흐렸다는 것이다.[159]

작가 공임순은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에 대해 '이순신은 무능하고 부패한 조정과 나약하고 무기력한 백성과 대조적으로 외롭고 고독한 영웅으로 그려진다. 이런 순결 지상주의는 이순신을 단 하나의 민족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대신, 조선의 역사 전체를 오욕과 부정의 역사로 경계짓기 때문이란 것.[160]'이라고 주장했다.

국수주의와 파시즘, 역사 왜곡과 미화 등의 부작용을 낳았다는 비판도 있다.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조선의 대중들을 길들이려 한 기득권층적인 논설이라는 비판도 있다.[161]

기타 시각[편집]소설가 김원일은 “일제 말기에 그가 보인 친일행각은 따지더라도 그의 문학은 우리의 자산으로 존중을 받아야 한다”면서 “인간의 흑백논리로 단칼에 재단해서는 안된다”고 평하였다.[162]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 박노자는 이광수를 양면적인 인물이라 보았다. 그에 의하면 춘원 이광수는 두 얼굴의 지식인이라 한다. 춘원은 간디에 대한 예찬을 통해 톨스토이의 화두인 평화와 비폭력을 옹호했지만, 한편으로는 ’힘이 있는 자만이 자유와 개성을 논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사회진화론의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신조로 삼은 인물이었다.[10] 박노자는 이런 춘원의 두 얼굴이 민족을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근본단체’로 본 데서 연유한다고 말한다.[10] 그는 춘원이 근대를 배우면서 독립적인 개인의 존엄성과 권리, 개인의 생명과 자존 같은 부분을 거의 처음부터 제외했기 때문이라며 “’계급’을 아예 ’이기적 욕망의 결과물’로만 치부해 배제하고 ’개인을’ 개인 그 자체가 아닌 하나의 부속으로만 인식하는 거대 담론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이와 같은 비극적 결과는 거의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10]

경희대학교 교수 허동현은 그를 민족주의자로 봤다. 춘원이 한결같이 국가주의 내지는 민족주의 가치를 추구했으며 기독교나 불교를 비롯한 여러 사상은 민족과 국가에 유익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취사선택됐던 종속적 가치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10] 허동현은 그 근거로 춘원이 1910년에 쓴 '나(余)의 자각한 인생' 중 한 구절을 제시한다. 그는 ’국가의 생명과 나의 생명과는 그 운명을 같이하는 줄을 깨달았노라… 나는 이름만일 망정 극단의 크리스천으로, 대동주의자로, 허무주의자로, 본능만족주의자로 드디어 애국주의에 정박하였노라’라는 구절을 통해 춘원이 사회진화론의 세례를 받기 훨씬 이전부터 관념적인 '민족'이나 '국가'를 최고의 가치로 삼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10] 이런 관점에서 허 교수는 춘원이 종교적 사랑을 예찬하면서 한편으로는 일그러진 근대를 찬양한 야누스적 존재라기보다는 ’민족’이라는 실에 자신이 삶의 궤적에서 만난 다양한 사조라는 구슬들을 꿴 일관된 민족주의자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였다.[10]

작가 김현주는 “이광수의 미적 기획을 전체주의 정치학의 표현[163]”이라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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