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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 -600-800; 수,당

백31대-의자왕(義慈王, [ 재위: 641년 ~ 660년)

by 사마르칸트 2016. 3. 26.



의자왕(義慈王, ?[1] ~ 660년, 재위: 641년 ~ 660년)은 백제의 마지막 국왕이다.

이름이 부여의자(扶餘義慈)로 시호를 받지 못했다.

태자 시절부터 아우들과 우애가 깊고 사려가 깊어 중국의 사상가 증자에 견주어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어졌다.

말년의 실정으로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멸망하고 낙양으로 끌려갔다.




즉위와 정변설(說)[편집]


무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632년(무왕 33년) 정월에 왕태자로 책봉되었다.

641년에 아버지 무왕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었고, 당으로부터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으로 책봉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용맹하고 결단력도 있다는 평가와 함께 총명하고 우애가 깊어서

 '해동증자(海東曾子)' 또는 '해동증민(海東曾閔)'이라는 찬사도 따라다녔다고 하고[2],


그의 아들 부여융의 묘지(墓誌)에도 의자왕을 가리켜 "과단성이 있고 침착하고 사려 깊어서

그 명성이 높았다."[3] 라고 평가되고 있다.

최근 일부 학자들은 의자왕을 ‘개혁 군주’로 재평가하고 있다.[4]




한편,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이 의자왕대에 있었던 모종의 정변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을유에 백제에 보냈던 사신 대인(大仁) 아즈미노무라치(阿曇連) 히라후(比羅夫)가 쓰쿠시 국(筑紫國)에서 역마를 타고 와서 말했다.


"백제국은 천황(天皇)께서 붕어하셨다는 말을 듣고

조문 사절[弔使]을 보내 왔습니다.

신은 조문 사절을 따라 함께 쓰쿠시 국에 왔습니다.

신은 장례에 참석하고자 먼저 혼자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 나라는 대란(大亂)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월 정해 초하루 무자(2일)에

아즈미노 야마베노무라지 히라후와

쿠사카베노키시(草壁吉士) 이와카네(磐金),

야마도노아야노 후미노아타이(倭漢書直) 아가타(縣)를

백제의 조문 사절이 머무는 곳에 보내어 사정을 물었다.



조문 사절이 대답했다.


"백제국주가 신에게 말하기를 '새상(塞上)은 항상 나쁜 짓만 일삼는다.

귀국하는 종자에게 딸려서 돌려보내 달라 청해도,

천조(天朝)는 허락치 않으리라'라 말하셨습니다."



백제 조사의 종자들이 말했다.
"지난해 11월에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이 돌아가셨습니다.

또 백제의 사신이 곤륜의 사자를 바다에 처넣었습니다.

금년 정월에, 국주모(國主母)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또한 제왕자인 교기(翹岐) 및 동모매(同母妹) 여자 네 명과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마흔 명 정도의 고명한 사람이 섬으로 쫓겨났습니다."[5]



이에 대해, 기록에 실려있는 대로 고교쿠(皇極) 원년(642년)[6] 으로 해석하여,

의자왕이 즉위한 직후에 대규모의 정치적 숙청을 단행하여

동생(대체로 이복동생)인 부여교기를 비롯해

교기의 동복 여동생까지 모조리 추방한 사실을 《일본서기》가 수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나아가, 선화공주가 죽자마자 의자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동생을 포함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고,

이것은 의자왕과 선화공주 간의 갈등 관계와

비교적 늦은 나이에 태자로 책봉된 이유를 암시한다는 주장도 있다.[7]


하지만 이러한 통설과는 반대로,

같은 책의 같은 해 4월에 앞서 백제에서 바닷섬으로 추방되었다던

왕자 교기가 불과 2,3달만에 백제의 대사(大使)로서 왜국에 파견되었다[8]

고 적고 있어, 두 기록 사이에 다소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의자왕이 부여교기를 숙청하고자 했다면 이미 바닷섬으로 추방한 교기를 왜국에

 '대사(사신단의 수장)'의 자격으로 파견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의자왕 2년(642년) 정월조에는 사신을 보내어

당에 조공하고,[9] 2월에는 주·군을 돌며 죄수를 재심하여 사형죄 말고는 모두 풀어주는 등[10],

정변이 발생하고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은 만큼 불안한 정국이 아직 가라앉지도 않은 시점에서

수도를 떠나 지방을 순시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분석도 있다.



또한 앞의 기록에서

641년 11월에 사망했다고 전하는 대좌평 지적이 사망 이듬해인

642년 7월 왜의 왕궁에서 백제사인(百濟使人)의 자격으로 나타나

왜국 조정의 향응을 받고 있다.[11]


부여에서 발견된 『사택지적비(沙宅智積碑)』의 사택지적과

《일본서기》에 나오는 대좌평 지적이 동일인물이라면,

 일러도 『사택지적비』가 세워진 갑인년(654년)까지는 지적

즉 사택지적이 생존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근거를 들어《일본서기》의 황극기 원년(642년)에 나오는 정변기사는

실은 654년 말에서 655년 초에 벌어진 일로 해석해야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655년은 고토쿠(孝德) 천황의 죽음와 함께, 앞서 퇴위했던

고교쿠 천황이 사이메이(齊明) 천황으로 즉위한 원년이기도 한데,


고교쿠 천황과 사이메이 천황은 사실 동일인물이라는 점에서

사서 편찬시 착오가 발생할 소지가 있었고, 실

제로는 사이메이 원년에 있었던 일을 고교쿠 원년의 일로 기록하는 실수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12]

앞의 기록에서 천황의 상이라고 한 것도 실은 조메이(舒明) 천황(고교쿠 천황의 남편이자

고교쿠 천황 선대왕)이 아니라 고토쿠 천황의 상을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13]





신라 공격[편집]


2년(642년)에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미후성(獼猴城)을 비롯한 40여 성을 빼앗았다.


이어 장군 윤충(允忠)이 신라의 옛 가야 지역에 두었던 최대 거점인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키고

주민 1천여 명을 사로잡아 백제의 서부 지역 고을에 나누어 살도록 했는데,

이때 대야성 성주로서 성이 함락되자 처자와 더불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품석과

그 아내 고타소랑은 신라의 유력자였던 김춘추(金春秋)(훗날의 태종 무열왕)의 사위와 딸이었다.


윤충(允忠)은 이 공으로 말 스무 필과 곡식 1천 섬을 하사받았으며,[14]

의자왕은 대야성을 함락시킨 그 달에 다시 한 번,

신라의 대당 교통로였던 당항성(黨項城)을 공격하여

당이 신라에 개입하는 것을 원천봉쇄하려 했지만,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은 당의 항의를 받고 철수, 당에 사죄문을 보냈다.


한편 백제를 칠 원병을 청하려 고구려로 향했던 김춘추는

그곳에서 고구려가 신라를 도울 마음이 없다는 것만 확인한 채 돌아와야 했다.


이후 의자왕은 3년(643년)에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였는데,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연합 내지는 각자의 군사작전으로 신라를 압박하였다.

(다만 이러한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에 대한 양동공격을 두 나라 사이의 동맹으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신라는 백제에 대한 반격을 단행해 백제의 7개 성을 공취했지만,[15]

이듬해(645년) 당 태종(재위: 626년 ~ 649년)이 고구려를 치고자

신라에서 3만의 원군을 징발한 틈을 노려

의자왕은 다시 신라의 7성을 빼앗았다.[16]


 647년에는 장군 의직(義直)이 지휘하는

 3천의 정예 보기가 무산성 아래에 주둔하면서

감물성·동잠성을 비롯한 지금의 김천·구미 등지를 습격했고,[17]


 이듬해에는 다시 신라의 서쪽 변경인 요거성을 비롯한

10여 성을 빼앗기도 했다.[18]


그리고 좌장 은상이 정병 7천으로

신라의 석토산성을 비롯한 7성을 쳐서 차지했다. (649년) [19]


한편 그 해 겨울에 신라의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당 태종의 신임을 얻고,

649년 당 고종이 즉위했을 때 진덕여왕이 태평송을 써서 보내는 등 당과의 외교를 긴밀히 하였다.


백제도 조공 사절을 보내(651년) 관계개선을 시도했으나,

당이 신라로부터 빼앗은 땅을 반환하라고 하자[20]


12년(652년)이후로는 당과의 교섭을 중단했다.

이후 백제와 당의 외교관계는 멸망시까지 단절되었다.


당과의 관계가 악화된 대신 고구려나 왜국과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완화되어,


13년(653년)에는 왜와 우호를 통하고 [21]

동왕 16년(656년)과 17년(657년)에는 왜국에 앵무새·낙타·당나귀 등의 희귀품을 선물하고 있다.


신라에 대한 백제의 공세는 계속되어

동왕 15년(655년)에는 고구려·말갈과 연합해

신라의 북쪽 변경지대의 33성을 빼앗고,[22]


19년(659년) 4월에는 다시

신라의 독산성과 동잠성을 쳐들어오는 등 맹렬하게 밀어붙였다.[23]


신라는 대야성 함락 이후 옛 가야 지역을 대부분 잃어,

방어 거점을 낙동강 동쪽의 압량주(押梁州, 경산)로 옮길 정도로

줄곧 백제에게 밀리는 형국이었고,

빈번한 백제의 침공을 견디지 못한

신라는 마침내 당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청할 생각을 굳힌다.





나당 연합군의 공격 개시[편집]
의자왕의 정치는 재위 15년(655년)을 기점으로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태자궁을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지은 것을 시작으로[24],


 16년(656년) 3월에는 궁인과 더불어 밤낮으로 사치스러운 잔치를 매일 열면서,

이에 대해 간하는 좌평 성충(成忠)을 옥에 가둬버리기까지 한다.

옥사하면서 성충은 앞으로 반드시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며


“육로는 탄현(炭峴)에서, 수로는 기벌포(伎伐浦)에서”막으라는 말을 왕에게 올렸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25]


17년(657년)에는 서자 41명을 모두 좌평으로 임명하고 식읍을 내린다.[26]


오늘날 이것은 기왕의 귀족들이 전국 각지에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왕토사상의 명분을 들어 몰수해 왕자의 식읍으로 재편함으로써,

귀족 소유의 재산을 왕실 소유로 전환시키고 왕자 중심의 친위체제 구축을 추구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19년(659년)부터 백제에는 온갖 괴변이 잇따라 일어났다.[27][28]


거듭된 당의 경고를 무시하고 신라를 압박하자 마침내 당과 신라는 밀계하여


동왕 20년(660년) 마침내 수륙(水陸) 18만 연합군으로 백제를 협공하였다.


즉, 당 고종은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을 거느리고

군사 13만 명을 통솔하여 와서 정복하게 하고,

 아울러 신라 태종무열왕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신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세력을 합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백제 서쪽의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

신라 왕은 김유신 장군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 방면으로 나아가게 하였다.[29]





나당 연합군에 대한 대책[편집]


일단 '망국의 군주'라는 평가와 함께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나라를 내주었다는 혹평이 '황음무도하여 놀기만 했다'는 혹평과 함께, 의자왕에 대한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표적인 것이 나·당 연합군을 맞아 적들을 막을 수 있는

최고의 요새인 백강과 탄현에 군사를 배치할 수 있는 기회마저도

자신의 기득권에 집착한 나머지 그것을 내버린 채 헛다리만 짚다가 끝내 멸망에 이르고 말았다는

《삼국사기》의 해석은

오랫동안 백제 멸망에 대한 주요 사관(史觀)으로서 존재하며

백제 멸망과 그 주역인 의자왕에 대한 비판에 힘을 실어주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처음 나·당 연합군의 침공을 맞아

백제 조정에서 어떤 논의가 있었는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들은 대체로 중국의 《구당서》와 《신당서》를 참조한 것이다.



나당 연합군이 들이닥치자 의자왕은 대신들을 불러모아 작전회의를 열었지만,

대신들은 멀리서 와서 백제의 지리를 잘 모르는 당병을 먼저 치자는 쪽과

오랫동안 백제와의 전쟁에서 치른 패배로 백제에 대해 은연중 두려움을 품은

신라군부터 먼저 치자는 쪽으로 나뉘어 팽팽하게 맞섰다.[30]


이 기록은 나·당 연합군의 침공이라는 국난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국

론이 제대로 통일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백제 조정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오랫동안 해석되어 왔지만,

사실 적이 쳐들어오는 와중에 여는 회의인 만큼 그에 맞설 전략을 논의하는 자리인데,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의견을 듣다 보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그것이 쉽게 통일되지 못해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로,

 기록을 보면 그들 개인의 사리사욕 때문에 전혀 타당성이 없는 전략을 제시해놓고 고집을 부린 것이다.




우선 의직의 경우 멀리서 바다를 건너와 지친 상태의 당병을 치자는 것이 그의 전략의 핵심인데,

무모하기는 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나·당 연합군의 주력인 10만 이상의 당병을 꺾어놓아

앞으로의 전쟁에서 백제가 우세할 수 있다는 기대를 얻어 사기를 진작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당과 백제의 병력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백제가 당에 비해 훨씬 수적으로 열세라

당병을 모두 막아내기엔 힘이 부친다는 지적이 있지만,


몇십 척의 소수 함대도 아니고 2천 척에 달하는 대함대가 해안을 따라 이동해온다면[31]

해안에 감시 초소 몇 개만 설치해도 그 이동상황을 일일이 파악해,

상륙에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다. 무엇보다

상륙 과정에서 서해안의 개펄과 모래밭 등을 지나야 하는

당병으로서는 운신의 폭이 제한될 수밖에 없으며,

 상륙하는 동안에는 별다른 방어구도 갖추지 못하고 거의 일방적으로

방어측의 쇠뇌와 화살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즉 상륙해오는 공격측이 가장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상륙이 개시되어 교두보를 확보할 때까지의 타이밍만 노리면 백제로서는 상당한 전과를 노릴 수 있다.



하지만 적의 함대의 동향을 파악했다고는 해도 상륙 부대가 방어선을 우회하여 전혀 엉뚱한 곳에

상륙하는 곳까지는 막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전략은 한계를 보인다.

(실제로 당병은 백제군의 방어선을 우회하여 상륙했다.)



당병의 상륙 자체를 막는다는 의직의 전략을 보완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당병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약점 즉 보급의 약점을 노릴 수 있는 다른 전략이 요구되는데,

여기서 상영이 주장한 전략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일단 상륙에 성공한다고 해도 당병의 주요 공격목표인 사비성을 함락시키는 데는 시간이 소요될 것이므로,

사비성이 버틸 때까지 버티는 동안 일부 부대를 움직여 당병의 보급

즉 신라병의 움직임을 차단하자는 것이 상영의 전략이었다.


 보급은 일단 전적으로 신라의 몫이었고,

한반도 지리에 어두운 당병이 백제 땅을 통과하면서 신라 땅에서 물자를 나르는 데에도 난점이 많았다.


 신라병만 격파하면 당군에 대한 보급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고,

굳이 싸울 필요도 없이 농성하면서 당군이 알아서 철수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더욱이 '신라 사람은 예전에 우리에게 여러 번 패해서 우리를 보면 일단은 겁부터 먹는다'고 한

상영의 주장도, 10만에 달하는 당군과 맞서는 것보다는

차라리 전투 경험이 있는 상대인 신라와 싸우는 것이 심적으로도 부담이 적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다.



다시, 왕은 고마미지현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던

흥수(興首)에게 사신을 보내 계책을 묻자 흥수는 성충과 같은 계책을 일러주었고,

이 계책은 흥수를 시기하던 간신들에 의해 결국 채택되지 못하였다.[32]


보통 이것은 백제가 백강과 탄현이라는 최적의 요충지,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천연의 요새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그 이유는 자신의 기득권을 뺏길 것을 두려워하고 쫓겨난 신하가 조정에 복귀하는 것에

시기심을 품은 간신들의 몽니 때문이었으며

결국 이러한 지도층의 한심한 생각 때문에 백제는 멸망해버리고 말았다는 내용으로 해석되어 왔다.


다만 오늘날에는 어느 쪽의 계책이라 해도 모두 그들 나름의 근거와 허점이 존재했으며,

백제는 어느 한쪽의 의견을 버리고 우왕좌왕한 것이 아니라

여러 주장들을 절충해 작전을 세웠던 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이 기록에서는 황산벌 전투 이후 백제군이

 다시 웅진강(백강)으로 투입되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 있다.


더구나 이는 소정방의 당병이 상륙한 뒤가 아니라 상륙하기 전의 일이라는 점은

 '백강 지역의 방어를 소홀히 했다'는 기존의 해석과는 서로 맞지 않는다.


따라서 백제 지배층의 분열로 요충지인 백강을 막지 못했다는 내용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봐야 한다.


더욱이 백제 지도부는 백강과 탄현을 주요 요충지로 지목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방어 전략을 짜야 한다는 성충·흥수의 주장을 아

주 간과하지는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롱 속의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듯'


 백제 지도부는 백강과 탄현의 험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나·당 연합군이 이곳을 모두 통과하기 전에 가두어 놓고 처치하자는 것이었는데,

 성충이나 흥수의 주장과 비교하면 이곳을 나·당 연합군이 통과하기 전에

처음부터 진입 자체를 막는 '원천봉쇄'를 주장했던 점이

서로 다를 뿐, 이곳을 적이 '지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발상의 기본 베이스는 다르지 않다.




무작정 백강이나 탄현이라는 요충지를 믿을 수만도 없다는 딜레마도 있다.

후대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병자호란 때의 청(淸)의 조선 침공 루트에서도 보이듯,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공격측에서 수비측이 기껏 형성한 방어 라인을 우회하여 치는 경우도 상정해야 하며,


만약(성충이나 흥수의 주장대로) 백제군이 탄현에 진을 쳤다 해도

신라측에서 탄현이라는 요충지가 백제에게 가져다주는 강점과 약점을 간과했을 리가 없으며,

실제로 탄현을 거치지 않고 우회할 경우에는 오히려 탄현의 험한 지형 때문에

그곳에 병력을 배치했다가 빼내는 시간에 신라가

거의 '무저항' 상태로 수도 사비성까지 진군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더욱이 신라군은 백제의 전략 거점을 공격해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당군에게 군량을 보급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으므로

백제와 굳이 험한 전투를 벌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현대전과는 달리 전체 전선에 병력을 배치하여 적군의 모든 진격루트를 봉쇄하는 식으로

1차 저지를 하는 것이 불가능한 고대의 전투양상에서

백제로서는 방어거점들을 이리저리 우회해 빠져나갈 신라군을 마냥

백강이나 탄현 같은 요충지 한 군데만 지키면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신라군의 주력을 포착하는 즉시 그 방면으로 달려가 방어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판단인 것이다.


 백강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정확히 백강의 어느 지점에

상륙할 것이냐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맹점이 있다.





수도 함락과 항복[편집]


의자왕은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階伯)에게 5천의 군사를 주어 막게 했지만,

백제군의 열 배나 되는 신라군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계백은 죽고 그의 군사는 전멸하였다.


백강 어귀에서 당군의 상륙을 저지하려던 백제군은 대패하였다.[33]


마침내 8월 22일(음력 7월 11일)에 신라군과 합류한 당병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泗沘城)을 향해 육박해왔다.


“ 其大將禰植 又將義慈來降
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거느리고 항복하게 하였다. ”
— 《구당서》, 〈소정방전〉


“ 其將禰植 與義慈降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하였다. ”
— 《신당서》, 〈소정방전〉



사비성 부근에서도 결전이 벌어졌으나

백제군 1만이 전사하며 대패하고[34]

수도인 사비성이 포위되자,

백제는 군사작전을 포기하고 대신

제사에 쓰는 소와 많은 음식들을 당군 진영에 보내기도 하고,

백제 태자가 직접 소정방에게 나아가 철군해줄 것을

요청하는 등의 외교전으로 선회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결국 왕은 태자 융과 함께 8월 24일(음력 7월 13일)에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했으며,[35]


사비에는 둘째 아들 태가 남아 왕을 자처하며 항전하다가 곧 항복했다.


그 후 8월 29일(음력 7월 18일)에 의자왕도 항복했다.[36]


중앙군의 전멸과 왕성이 무너지며 거의 모든 왕족과 의자왕의 측근 최고 지배층들이

모조리 포로가 되자 가망없다고 여기고

 의자왕을 배신한 웅진성 방령 예식(禰植, 예식진祢寔進)에 의해 항복이 진행되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


삼국사기》 태종무열왕본기는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령군을 거느리고 스스로 웅진성을 나와 항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자왕이 너무 쉽게 항복한 것에 대해서는

오늘날 의자왕에 대한 재조명 차원에서 여러 가지 분석이 시도되었는데,

의자왕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이미 패배한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은

백성들의 희생만 커지게 만든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당은 이후 부여융을 웅진도독,

신라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삼아 동맹을 맺게 하는 의식을

웅진의 취리산에서 행한 바 있다.


즉, 당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37]


당으로서는 백제에 친당정권을 수립하여 고구려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로서 활용하고자 했으며,


이에 당군의 철수를 담보로 당과의 새로운 관계를 닦고

국가의 활로를 트고자 했던 것이 의자왕의 본래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은 이후 의자왕에게 전승축하연에서 술을 치게 하기도 하고,


군사를 풀어 사비도성을 크게 약탈하여 젊고 건장한 백제인들을 살육하면서

백제 땅에 설치한 웅진도독부를 통해 백제 땅을 당의 치하에 두고 직접지배하려 했다.


이것은 백제인들을 자극해 3년에 걸친 백제흥복운동의 불길을 지핀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왕자들과 대신 88명을 포함하여 백성 1만 2천 명과 함께 당의 낙양으로 압송되었고,


 11월 1일에 낙양의 조당에 포로로서 바쳐져

당 고종 앞에서 문책을 들어야 했다.


(측천문루 앞에서 이루어진 이 자리에서 고종은 의자왕과 태자, 백제의 여러 신료들을 꾸짖은 뒤 용서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죄를 사함으로써 당의 신민으로 받아들이는 의례 절차이기도 했다.)


의자왕은 그 해에 병으로 죽었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위위경(衛尉卿)[38] 의 벼슬을 추증받고

낙양의 북망산에 손호(孫皓)·진숙보(陳叔寶) 옆에 묻혔다.


 이때 당 고종은 그의 장례에 백제에서 끌려온 옛 신하들이 참석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전한다.[39]




낙화암과 3천 궁녀[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낙화암입니다.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이 술과 여흥에 빠져 국사(國事)를 돌보지 않아

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상징적 존재로 낙화암에서 투신한 3천 궁녀가 거론되곤 하지만,


지도층의 분열과 학민자(虐民者)의 최후를 역사의 필연성으로 기술했던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마지막까지 군대를 보내어 싸웠다고 하고 있으며

술과 여흥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없다.


낙화암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기록은

일연이 쓴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인데,


"궁녀들이 왕포암(王浦巖)에 올라 물로 뛰어들어 자살하여 타사암(墮死巖)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라고 쓰여 있다.


이후 고려 시대에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안정복의 《동사강목》 권2에는 "여러 비빈(諸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3천 궁녀를 맨 처음 언급한 글은

윤승한(尹昇漢)이 지은 소설 《김유신》(野談社, 1941년)이고,

최초의 공식 기록은 이홍직(李弘稙)이 쓴 《국사대사전》(지문각, 1962년)의 "낙화암" 조항이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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