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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 2.중세사

이성계의 조상과 쌍성총관부...

by 사마르칸트 2015. 11. 2.




과연 쌍성총관부는 1356년 그 종말을 고하게 된다.




공민왕은 동왕 5(1356) 5월에 기철 일당을 주멸하고


그 세력의 본거지인 요ㆍ심 지역과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작정으로,


서북변병마사 인당(?)에게

 

 

요양과 심양의 동녕부를 정벌하게 하였다.



 


 

인당은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의 의주에서 강을 건너


 요양행성에 이르는 동팔참(東八站)을 쳐서 점령하였다.




그와 동시에 유인우(柳仁雨) 등을 보내어


동북면의 등주에서

 

쌍성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쌍성총관 조소생(趙小生)


천호 탁도경(卓都卿) 등이 이끄는

 

쌍성총관부의 세력이 강하여 쉽게 함몰시킬 수 없었다.





고려군은 그 해 7월에 조씨 세력의 반대파인


이씨의 이자춘(李子春)과 조씨 일파의 조돈(趙暾), 조인벽(趙仁壁) 등의 내응을 얻어

 

비로소 쌍성총관부가 함락될 수 있었다.

 


이 때 쌍성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은 처자를 버리고


이판령(마천령) 북쪽 여진 땅으로 도망하였다.




유인우는 쌍성총관부를 수복한 다음

 

조소생과 탁도경의 무리를 추격하여,


합란(함흥)ㆍ홍긍(홍원)ㆍ삼살(북청) 등을 거쳐

 

마천령을 넘어 두만강 하류 여진의 지역까지 진격하였다.


 

쌍성총관부가 개원로(開元路)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다.


동진국은 포선만노가 죽은 뒤에 와해되어

 

원의 개원로와 합란부 수달달로 등으로 개편되었는데,


쌍성총관부는 개원로에 속하였다.





쌍성총관부에 있어서 대토호 세력은 조씨와 이씨의 두 집안이었다.



조씨는 조휘의 집안으로서

 

조휘(趙暉)-조양기(趙良琪)-조돈(趙暾)-조소생(趙小生)으로 습직이 되고,



이씨 집안은

 

이안사(李安社)-이행리(李行里)-이춘(李春)-이자춘(李子春)-이성계의 계열로 습직이 되었다.



 

조씨는 본래부터 고주ㆍ화주의 토호였으나,


이씨는 충렬왕 16(1290)에 두만강 중류 알동(斡洞)에서 등주로 이주하였다가


함주로 근거지를 옮긴 새로운 세력이었다.



이씨는 천호의 지위였으나

 

다루가치를 겸하였기 때문에 총관을 감독하는 입장에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의 " 태조총서


공민왕이 환조에게 쌍성의 백성을 진무하게 하다.

 


처음에 쌍성(雙城)의 토지가 비옥하고 관리의 행정(行政)이 소홀하니,


동남방의 백성으로서


"일정한 재산"[恒産]이 없는 사람이 많이 와서 있었다.


공민왕이 원(元)나라에 이 사실을 알리니,


중서성(中書省)과 요양성(遼陽省)에서 모두 관원을 보내 오고,

 

왕도 또한 정동성(征東省) 낭중(郞中) 이수산(李壽山)을 보내어 가서 회합하여

새로 온 사람과 그전에 있던 사람을 분간하여 백성을 등록시키고,


이를 삼성(三省)의 조감호계(照勘戶計)라 하였다.

 

 

그 후에 무수(撫綏)함이 적당하지 못하니,


백성들이 점점 이사해 떠나갔다.

 

왕이 환조(편집자주: 태조 이성계의 부(父) 이자춘)에게 명하여


이를 진무(鎭撫)하게 하니,


백성이 이로 말미암아 그 직업에 안정하게 되었다.

 

 

명년(1356) 병신에 환조가 들어와서 왕을 뵈오니,


왕이 맞이하여 말하였다.

 

“경(卿)이 완민(頑民)을 무수(撫綏)하는 데 또한 수고하지 않는가?”

 

 

 

 

환조가 기철등의 당여를 물리치고 쌍성을 수복하다.

 

이때 기황후(奇皇后)의 종족(宗族)이 황후의 세력을 믿고 몹시 난폭했으며,


황후의 형 대사도(大司徒) 기철(奇轍)은 쌍성(雙城)의 관리


조소생(趙小生)·탁도경(卓都卿)과


몰래 통하여 서로 당(黨)을 지어 반역을 꾀하였다.

 

왕이 환조에게 이르기를,

 

“경(卿)은 우선 돌아가서 우리 백성들을 진무(鎭撫)하라.


혹시 변고가 있으면 마땅히 내 명령대로 하라.”

 

하였다.

 

 

 

 

이해 5월에 기씨(奇氏)를 평정하고

 

밀직 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명하여 가서 쌍성(雙城)을 토벌하게 하였다.

 

인우(仁雨) 등이 등주(登州)에 머무르니 쌍성과의 거리가 2백여 리(里)였다.

 

그곳에 머무르면서 나아가지 않으니,

 

왕은 이 소식을 듣고 환조에게 시소 부윤(試少府尹)을 제수(除授)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내리고 중현 대부(中顯大夫)로 계급을 승진시키고는,

 

병마 판관(兵馬判官) 정신계(丁臣桂)를 보내어

 

교지(敎旨)를 전하여 내응(內應)하게 하였다.

 

 

 

환조는 명령을 듣고 즉시 <군졸과 말을> 함매(銜枚)하고

 

행군(行軍)하여 인우와 더불어 군사를 합쳐 쌍성을 쳐부수니,


소생(小生)과 도경(都卿) 등은 처자(妻子)를 버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이에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

 

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와

 

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

 

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

 

여러 성(城)과

 

함주(咸州) 이북의 합란(哈蘭)·홍헌(洪獻)·삼살(三撒)의 땅을 수복(收復)했으니,

 

 


고종(高宗) 때 원(元)나라에 점령당한 때로부터

 

 99년만에 지금에 와서 이를 모두 수복하였다.

 

 

왕이 환조를 승진시켜 대중 대부(大中大夫) 사복 경(司僕卿)으로 삼고,

 

 

서울에 제택(第宅) 1구(區)를 내리고 이내 머물러 거주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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