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세계-역사/-BC~0년; 진,한

조선왕조실록의 ‘전조선(前朝鮮) 단군’

by 사마르칸트 2016. 1. 7.



조선의 단군(檀君)은 동방(東方)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箕子)는 처음으로 교화(敎化)를 일으킨 임금이오니,


평양부(平壤府)로 하여금 때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



— 《조선왕조실록》태조 1권,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8월 11일(경신) 2번째기사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 중국 제요)의 무진년(戊辰年)에 있었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이 됩니다.


 (중략) 혹은 말하기를, ‘단군은 해외에 나라를 세워 박략(朴略)하고 글이 적고

중국과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찍이 군신(君臣)의 예를 차리지 않았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에 이르러서

은(殷)나라의 태사(太師: 기자)를 신하로 삼지 아니하고

조선에 봉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 《조선왕조실록》태종 31권, 16년(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6월 1일(신유) 2번째기사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유사눌(柳思訥)이 상서하기를,


“신이 삼가 세년가(世年歌)를 보건대, 단군은 조선의 시조입니다.

(중략) 신이 세년가로 상고해 보건대,

단군이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했다가 후에는 백악(白岳)에 도읍했으며,

은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서 신이 되었는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1천 48년 동안 나라를 누리고,

지금도 사당이 아사달에 있네.’ 했으니, 어

찌 그 근거가 없겠습니까.


또 더군다나 고려에서는 구월산(九月山) 밑에 사당을 세워

그 당우(堂宇)와 위판(位版)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세년가와 합치하니,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서는 이 곳(구월산)을 버리고

 다시 사당을 다른 곳(평양)에다 세운다면 아마 그 장소가 잘못된 듯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성상께서 재결(裁決)하시옵소서.”하니,

명하여 예조에 내리게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세종 75권, 18년(1436 병진 / 명 정통(正統) 1년) 12월 26일(정해) 4번째기사


예조(禮曹)에서 황해도(黃海道) 삼성사(三聖祠)에 있는

단군(檀君)의 축문(祝文)을 평양(平壤) 단군사(檀君祠)의 예(例)에 의거하여

 ‘전조선(前朝鮮) 단군’이라 쓸 것과 (중략)



— 《조선왕조실록》숙종 28권, 21년(1695 을해 / 청 강희(康熙) 34년) 6월 6일(병신) 1번째기사


전조(前朝: 고려)의 옛 능(陵)과 단군(檀君)·기자(箕子)·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始祖)의 능을 수축(修築)하라고 명하였다.



— 《조선왕조실록》영조 101권, 39년(1763 계미 / 청 건륭(乾隆) 28년) 4월 22일(기유) 4번째기사
예조 판서 심수(沈鏽)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삼성묘(三聖廟)의 위판(位版)의 흙으로 만든 것이 많이 훼손되었으니,

마땅히 개조(改造)해야 합니다.”하니,


임금이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을 불러 삼성(三聖)의 고적(故蹟)을 물으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삼성은 곧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이며,

역사에서 말하는 바 아사달산(阿斯達山)은 곧 지금의 구월산입니다.”하고,


그 고사(故事)를 심히 상세하게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환웅은 곧 단군의 아버지이고,

환인은 곧 단군의 할아버지이다.”하였다.





— 《조선왕조실록》영조 106권, 41년(1765 을유 / 청 건륭(乾隆) 30년) 12월 8일(기유) 1번째기사


《동국통감 외기(東國通鑑外紀)》에는 "동방(東方)에는 최초에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국인(國人)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이가 단군(檀君)이며 국호(國號)는 조선(朝鮮)이었는데,

바로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 서기 전 2333)이었다.


처음에는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뒤에는 백악(白岳)으로 도읍을 옮겼다.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서기 전 1317) 을미(乙未)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문, 檀君朝鮮《東國通鑑·外紀(동국통감·외기)》〈

徐居正·崔溥 等 共撰(서거정·최부 등 공찬)〉


東方初無君長, 有神人降于檀木下, 國人立爲君, 是爲檀君, 國號朝鮮, 是唐堯戊辰歲也. 初都平壤, 後徙都白岳, 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爲神)


기타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에 전해지는데,

일반적으로 《삼국유사》의 내용이 알려져 있다.


위서(魏書)에 기록하길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阿斯達, 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는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는데

백주(白州)에 있었다.

혹은 또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요(堯)와 같은 시기였다."



단군신화라고도 부르는 이 건국신화는 고조선의 건국과 사회상을 알려주는 기록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역사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는 기록은 없다.

20세기 초에 일반에 알려진


《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 《부도지》 등이


역사서의 형식으로 고조선의 역사를 상세하게 서술한 서적들이 있으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들을 위서로 판단하여 인정하지 않는다.




-역사로 밥먹고 사는 것들이...


스스로 무리를 이루어


역사를 그르치고 있으니,


다 들 자기 밥그릇을 위해


나라를 파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