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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 -참고자료

삼국사기와 김부식...

by 사마르칸트 2016. 4. 5.

 

 

김부식이 만들 었다는 삼국사기는

 

과연 정사의 자격이 있는가...

 

간단하게

 

AD400년의 정황을 보자...

 

이때.. 가야,왜의 연합군이 신라의 금성을 포위하여

 

신라가 망할지경이 되어,

 

광개토왕에 원군을 청하여...

 

가야를 물리치고 경우

 

나라를 보전하는 위급한 상황이다.

 

그리고 신라는 이후 고구려의 속국이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 본기들에는 웃기게도

 

AD 400년의 거대한 사건을 한마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왠갓 쓰래기 같은 기록으로 가득 채운다.

 

-광개토왕의 비문에서 겨우 삼국시대 정황을 알수 있었다.

 

-이런 중요한 정보가 빠졌다는 것은

 

다른 중요한 기록이 얼마나 더

 

많이 빠졌을까 의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기록의 신빙성도 많이 떨어진다고 볼수 밖에 없다.

 

-마치 패전을 숨기는 중국기록처럼...

 

-이런 신라에 불리한 기록을 지우다보니...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그럴듯한

 

신라의 모습을 만들어 주고 있다.

 

 

-김부식은 망한 신라의 후손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중요한 기록이 거의 빠진

 

신뢰성이 많이 떨어지는 기록물이라고 할수 있다.

 

-오로지 신라를 위한 역사책이다.

 

삼국사기는 정사의 자격이 없다.

 

그냥 망한 신라 종자의 하품이라고 할까...

 

그러므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삼국의 역학을 설정하는 것은

 

한심한 짓이다.

 

 

-신라본기

[AD400년]45년 가을 8월에 혜성이 동방에 나 타났다.

겨울 10월에 왕이 늘 타고 다니는 궁중 마구간

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슬프게 울 었다.

 

->혜성이 동방에 나타났다...

혜성은 전쟁의 신이다...적이 동방에서 쳐들어 왔다.

왕의 말이 무릎을 꿇고 울었다...

왕이 항복했다...아니면 왕이 죽어서 항복했다....정도의 의미

 

->이런 글로 신라의 패망을 숨겼다고 하나,

삼국사기가 역사책이 아니라,

김부식의 시집이냐...

아주 멋진 은유법을 쓰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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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金富軾, 1075년 ~ 1151년)은

《삼국사기》를 쓴 고려 시대 학자·문신·역사가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1]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인종의 명을 받들어 정습명(鄭襲明), 김효충(金孝忠) 등 10인과 함께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로 증조부 김위영이 고려 태조(太祖)가 경주(慶州)의 주장으로 임명된 이래

경주 일대에 세거하였다.[2]

부친 김근이 좌간의대부로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높

은 지위의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김부식과 그의 형제들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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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0년

 

신라 구원과 남방 진출[편집]
이후 백제가 왜(倭)에 태자 전지를 보내는 등 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적할 준비를 한다.

광개토왕은 399년에 평양(平壤)으로 순행하였다.

백제와 왜는 신라를 공격하고, 신라(新羅)는 평양으로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광개토왕은 400년에 신라에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왜군을 물리쳤다.

이때 왜군은 금관가야 종발성까지 퇴각하였고,

고구려 군은 금관가야 지역까지 쫓아가 왜군을 격퇴시킨다.

학계에서는 이때 금관가야의 세력이 급속도로 약해져,

금관가야가 주도하던 전기 가야 연맹이 붕괴하고 대가야가 주도하는

후기 가야 연맹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광개토왕은 400년에 신라를 구원하면서

신라 왕을 내물 마립간에서 실성 마립간으로 교체한다.

이후 고구려 군은 백여 년 동안 신라 땅에 머물려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신

라는 고구려에게 조공하는 보호국이 된다.

 

404년에는 대방(帶方) 지역으로 쳐들어 온 백제와 왜군을 궤멸시켰다.

 

 

백제
진사왕 (385년~392년)
아신왕 (392년~405년)
전지왕 (405년~420년)


신라
내물 마립간 (356년~402년)
실성 이사금 (402년~417년)


가야
이시품왕 (346년~407년)
좌지왕 (407년~421년)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왕-

 

내물 이사금 내물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성은 김씨이고 구도 갈문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말구 각간이고,

어머니는 김씨 휴례부인이다.

 

왕비는 김시로 미추왕의 딸이다.

 

흘해가 죽었을 때 아들이 없으므로

내물이 왕위를 이었다.

 

 

2년 봄에 왕이 사신을 보내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들 을 보살피게 하고,

각각 곡식 3곡을 내려주었다.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행식이 빼어난 이들에게는 관직 한 등급씩을 주었다.

 

3년 봄 2월에 왕이 친히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더니,

자줏빛 구 름이 묘당 위에 서리고 신이한 새들이 묘당 뜰에 모여들었다.

 

7년 여름 4월에 시조묘 뜰이 나무들이 가지를 이어 하나로 어우러졌다.

 

9년 여름 4월에 왜병이 크게 들이닥쳤다.

왕이 듣고 대적할 수 없을 까 두려워해

풀 인형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서 토함산 아래에 벌려 세우고,

용사 1천 명을 부현 동쪽 들에 매복시켰다.

왜인들이 수가 많은 것을 믿고 곧바로 나오니,

복병을 일으켜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인들이 크게 패해 달아나자 우리 군사가 추격해 거의 다 죽였다.

 

 

11년 봄 3월 에 백제 사람이 와서 방문하였다.

여름 4월에 홍수가 나서 산 열세 군데가 무너졌다.

 

13년 봄에 백제 가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진상하였다.

 

17년 봄과 여름에 가물더니, 이 해에 흉년이 들어

백성 이 굶주리고 떠돌아 다니는 이들이 많았다.

왕이 사신을 보내 곡식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휼하였다.

 

18년에 백제 독산성주가 무리 3백 명을 거느리고 와 투항해 오니,

왕이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백제 왕이 글을 보내 말하였다.

 "우리 두 나라가 화목하고 우호하여 형제처럼 지낼 것을 약속 했는데

이제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간 백성을 받아들이니,

이는 화친하는 뜻에 매우 어긋나는 것이며 대왕께 기대하던 바가 아닙니다.

돌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왕이 대답해 말하였다.

"백성이란 변함없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이 있으면 오고 싫증이 나면 가는 것은 본래부터 그 러한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백성이 편안하지 못한 것을 근심하지는 않고

도리어 과인을 나무라는 것 이 어찌 이리 심합니까?"

 

크게 풍년이 들었다.

 

24년 여름 4월에 양산에서 작은 참새가 큰 새를 낳았 다.

 

26년 봄과 여름에 가물더니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렸다.

위두를 부견의 전진에 보내 방물을 바 쳤다.

 

부견이 위두에 물었다.

"그대의 말을 들어보니 해동이 일들이 예전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 가?"

 

위두가 대답하였다.

"역시 중국에서 시대가 변하고 국호가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지

금 해 동이 어찌 예전과 같겠습니까?"

 

33년 여름 4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더니,

6월에 또 지진이 있었다.

겨 울에는 물이 얼지 않았다.

 

34년 봄 정월에 수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2월에 흙이 섞인 비가 내렸 다.

 

가을 7월에 누리가 생기더니, 곡식이 잘 여물지 않았다.

 

37년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 왔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하다 하여,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38년 여름 5월 에 왜인들이 와서 금성을 에워싸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울 것 을 요청했으나,

왕은 "지금은 적들이 배를 버리고 깊숙이 들어와 죽을 곳에 있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다"

하여 성문을 닫아 걸고 있자, 적들이 아무 소득없이 물러갔다.

 

왕이 먼저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보내 그들이 돌아가는 길목을 막게 하고,

다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끼고 공격해 크게 쳐부수니,

죽이고 잡은 수가 매우 많았다.

 

40년 가을 8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 므로 군사를 내보내 실직의 들에서 크게 쳐부수었다.

 

42년 가을 7월에 북쪽 변경의 하슬라에 가뭄이 들고 누리가 생겨서 농사를 망치고 백성들이 굶주리니,

죄수들을 살펴 사면하고 1년의 납세를 면제 해주었다.

 

44년 가을 7월에 날고 있는 누리떼가 들판을 뒤덮었다.

 

[AD400년]45년 가을 8월에 혜성이 동방에 나 타났다.

겨울 10월에 왕이 늘 타고 다니는 궁중 마구간

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슬프게 울 었다.

 

46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가을 7월에 고구려에 가 있던 볼모 실성이 돌아왔다.

 

47년 봄 2월 에 왕이 죽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제17대 아신왕<阿莘王 392~405 재위기간 13년>

아신왕[혹은 아방이라고도 한다.]은 침류왕의 맏아 들이다. 그

가 한성의 별궁에서 태어났을 때 신비로운 광채가 밤을 밝혔다.

그가 장성하자 의지와 기 풍이 호방하였으며,

매사냥과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침류왕이 붕어하였을 때,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의 숙부 진사가 왕위를 이었는데

진사왕이 재위 8년에 붕어하자 그가 즉위하였다.

 

2년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또한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진무를 좌 장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진무는 왕의 외삼촌으로서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많았 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가을 8월, 왕이 진무에게

"관미성은 우리 나라 북쪽 변경의 요새 이다.

그 땅이 지금은 고구려의 소유로 되어 있다.

이것을 과인은 애통해 하니,

그대는 응당 이 점에 마음을 기울여, 이 땅을 빼앗긴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마침내 1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계획하였다.

진무는 병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 고

석현 등의 다섯 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둘러 싸 고 굳게 방어하였다.

진무는 군량의 수송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3년 봄 2월, 왕의 맏아들 전지를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왕의 이복동생 홍을 내신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고구려와 수곡성 아래에서 싸워 패배하였다.

낮에 태백성이 나 타났다.

 

4년 봄 2월,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사라졌다.

 

가을 8월, 왕이 좌장 진무 등에 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니,

고구려왕 담덕이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에 진을 치고 대 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니 사망자가 8천 명이었다.

 

겨울 11월, 왕이 패수 전투의 패배 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 아래에 진을 쳤다.

그 때 마침 큰 눈이 내려 병졸들 가운데 동사자가 많이 발생하자 왕은 회군하여

한산성에 와서 군사들을 위로하 였다.

 

6년

여름 5월,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다.

가을 7월, 한수 남쪽 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7년

봄 2월, 진무를 병관 좌평으로 삼고 사두를 좌장으로 삼았 다.

 

3월, 쌍현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왕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군사를 출동하여 한산 북쪽 목 책에 이르렀다.

그 날 밤에 큰 별이 떨어졌는데 진영에서 소리가 났다.

왕은 이를 매우 불안하게 생각 하여 공격을 중지하였다.

 

9월, 서울 사람들을 모아 서대에서 활쏘기를 연습하게 하였다.

 

 

8년 [AD 398년]

가을 8 월, 왕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군사와 말을 대대적으로 징발하니,

백성들이 병역을 고통스럽게 생각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라로 도망하였고,

 지내니 곧 비가 내렸다.

 

5월, 왜국에 사신을 보내 큰 구슬을 요구하였다.

 

[AD 403년]

12년 봄 2월, 왜국에서 사신이 오자 왕이 이들을 환영하고 위로하였으며,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였다.

 

가을 7월, 군사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공하였다.

 

14년 봄 3월, 흰 기운이 왕궁 서 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가을 9월, 왕이 붕어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제 19 대, 광개토 대왕 (광개토 왕) (재위 기간 : 서기 392 ~ 413 년) ..

 

광개토왕의 이름 은 담덕이며,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그

는 태어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의지가 당당하고 뜻이 대범 하였다.

 

고국양왕 3년에 태자가 되었다.

 

9년에 왕이 사망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가을 7월, 남쪽 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10개의 성을 점령하였다.

 

9월, 북쪽으로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5백 명을 생포 하고,

또한 본국에서 거란으로 도망갔던 백성 1만 명을 달래어 데리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바다로 감싸여 있었다.

왕이 일곱 방면으 로 군사를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 만에 점령하였다.

 

2년(서기 393)가을 8월에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략해 왔으므로,

장수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다. 아홉 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하였다.

 

3년(394) 가을 7월에 백제가 침략해 왔는데,

왕은 정예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맞아 쳐서 이겼다.

 나머지 적들이 밤에 도주하였다.

 

8월에 나라 남 쪽에 일곱 성을 쌓아 백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가을 8월에 왕은 패수에서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8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AD400년]

9년(400) 봄 정월에 왕은 연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에 연나라 왕 모용성이 우리 나라 왕의 예절이 오만하다고 하여

스스로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습격했는데,

표기대장군 모용희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과 남소성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700여 리의 땅을 넓혀, 5천여 호를 옮겨놓고 돌아갔다.

 

 

11년(402) 왕이 군사를 보내 숙군성을 공격하니,

연나라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 을 버리고 달아났다.

 

13년(404) 겨울 11월에 군대를 내어 연나라를 침공 하였다.

 

14 년 (405) 봄 정월에 연나라 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침공 해왔다.

성이 함락 되려 할 즈음에 모용희가 장병들에게

 “먼저 성에 오르지 말라. 성을 깎아 평지가 될 때를 기다려서

내가 황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들어갈 것이다.”라고 명하였다.

이 때문에 성 안에서 엄히 방비할 수 있어서 연나라는 마침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15 년 (406) 가을 7 월 에누리가 날아 들고 가뭄이 들었다.

 

겨울 12 월에 연나라 왕 모용 희가 거란을 습격하여 형북에 이르렀다가,

거란의 무리가 많은 것이 두려워 돌아가려고 하여,

마침내 군대의 무거운 짐을 버리고 가볍게 무장한 채 우리를 습격하였다.

 

연나라의 군대는 3천여 리를 행군 하였으므로

병사와 말이 피로하고 얼어 죽은 자가 길에 이어졌고,

우리 목저성을 공격하였으나 이 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16년 (407) 봄 2 월에 궁궐을 증축 수리 하 였다.

 

17년(408) 봄 3월에 사신을 북연에 보내 종족의 정을 베풀자 북연 왕 운이 시어사 모용씨의 성을 내렸다.

 

18년(409) 여름 4월에 왕자 거련을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에 나라 동 쪽에 독산성 등 여섯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옮겼다.

 

8월에 왕은 남쪽으로 순행하였다.

 

22년(413)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광개토왕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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