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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 3.근현대사

계초 방응모[方應謨]

by 사마르칸트 2014. 3. 4.


방응모(方應謨,

1883년 9월 29일 ~ 1950년 8월?)는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장,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쳐

1933년 3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제9대 조선일보의 사주를 역임하였다.

 

 

그밖에 금광을 경영하였으며,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고,

 

1945년 광복 직후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정치활동으로는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했다.

 

아호는 계초(啓礎)이다.

별호로 춘해(春海)라는 호도 있었다.[1]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수립이후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인 조소앙과 사회당을 결성해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제2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했으나 차점자로 낙선했다.

 

6.25 사변때 납북되었다. 평안북도 출신.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성장[편집]

 

 

방응모는 1883년 1월 3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에서 방계준의 농부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래는 온양 방씨의 후손[2]이었으나 평안북도로 이주한 뒤 집안은 몰락했고 아버지 방계준은 가난한 선비로 농업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 나갔다. 방응모의 위로 형 방응곤이 있었는데, 후일 조선일보의 사주가 되는 방일영과 방우영 형제의 아버지 방재윤의 생부, 즉 그들의 할아버지가 바로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이었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히다가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 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1911년에는 신식 학교에서 교사로 일시적으로 교편을 잡았으나 그만두었다. 11년 정주읍내 변호사 사무소에 취직, 1914년까지 대서업에 종사했다. 1915년 자신의 집을 이용해 여관업을 시작했다.

 

 

 

 

 

 

언론 활동[편집]

동아일보, 민립대학기성회, 브나로드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투신하여 인망을 쌓았다.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편집] .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평안북도 삭주의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여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1927년 동아일보 정주지국 지국장에서 물러나 고문을 맡았다.

 

1932년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3][4]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

 

 

 

 

 

언론, 사업 활동[편집]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편집]

 

 

방응모는 첫 부인 승계도에게서 아들이 없자 두 번째 부인 이인숙을 얻었다.[5]

그러나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곧 요절하고 만다.

 

첫 번째 부인 승계도와 두 번째 부인 이인숙 사이에서 자녀가 없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

친조카이자 양자가 된 방재윤은 방우영, 방일영 형제의 아버지이다.

 

방재윤은 곧 결혼하여 두 손자를 그에게 안겨주었고, 조선일보에 입사하였으며

그가 맡던 광산업의 일부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1940년 광산 현장에 나갔다가 병에 전염되어 방응모보다 먼저 요절하였다.

 


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1930년 세 번째 부인으로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을 정리하고 언론사업을 비롯,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6]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7]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8] 1935년 7월에는 경성 태평로1가에 새 사옥을 준공하는 한편, 출판부를 신설해 〈조광〉(1935. 10)·〈여성〉(1936. 6)·〈소년〉(1937. 4) 등의 월간 잡지를 차례로 창간했으며[6] 운영하였다.

 

1932년의 상하의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6]

 

 

 

 

 

 

 

조선일보 폐간 사건 이후[편집]
안창호,방응모 공저 십이명가 서첩 (1936년)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황군,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9]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8][10]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6]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6]

 

 

 

 

 

일제 강점기 후반[편집]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 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39년 2월 조선인의 군사동원을 위한 지원병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조직된 경성부지원병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7월에 영국 타도를 주장하며 전국 차원에서 적극적 배영운동을 벌이기 위해 결성된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의 상담역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3월 잡지 《조광》의 발행인으로 취임했다.

 

 

1940년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내 마음대로 바꿀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1943년 화신백화점 점원 출신인 노호용과 결혼하였다.[11] 1944년 첫 아들 방재선을 얻었다. 그가 바로 현재 조선일보 사주 일가와 재산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방재선이다. 이후에도 방응모는 노호용과의 사이에서 방재효, 방재규 등 두 아들을 출산하였다. 1944년 9월 군수산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설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이후 조선항공공업 감사에 피선되었다.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편집]광복 직후[편집]


1946년 3월 순국3의사 유해봉환일 김구, 위당 정인보 등과 함께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1월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12]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

10월 이승만(李承晩)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

 


임시정부 주석이자 한독당 당수 김구. 방응모는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과 재정부장으로 참여했고,

김구의 반탁운동과 3의사 유해 봉환 때 자금을 댔다.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13]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13]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14]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동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에 지명되고,

1946년 8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

946년 9월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에 선출되었다.

 

 

 

 

 

 

 

김구와의 결별과 만년[편집]

 

이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15], 당 재정부장 등을 맡기도 했으나,

1948년 1월 이후 김구의 노선변경과 함께 그를 지지하던 세력이 떨어져 나갔면서

조선일보도 김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16]

 

그러나 김구와의 결별이 괴로웠던지 방응모도 직접 나서서

<김구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바 태도>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16]

 

 

1949년 조소앙이 결성한 사회민주주의성향 정당인 사회당에 입당해

동당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17]

 

이듬해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경기도 양주군에 출마했으나 차점자로 낙선하였다.[18]

 

 

 

 

6월 25일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되어 끌려가던 중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고 전해진다.[19][20]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

 

 

 

사후[편집]

그는 한국 전쟁 직후 피신하라는 주변의 권고에,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며 완강하게 버티다가

조선인민군에 의해 끌려갔다.

 

6.25 직후 서울 종로에 있던 방일영과 방우영은

그의 두 번째 부인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그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으며,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 되었다.

 

그리고 1979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친일행위[편집]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편집]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21]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

 

 

? 원산에서의 순회 강연[22]

 

반민족행위[편집]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23][24]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25]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26]"는 것이다.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조광>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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