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난 전쟁(일본어: 西南?? (せいなんせんそう)
세이난 센소[*])은 1877년(메이지 10년)에
현재의
구마모토 현·
미야자키 현·
오이타 현·
가고시마 현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맹주로서 주도하여 일으킨 사무라이의 무력 반란이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하야 후 설립한 사학교가 중심이 되었던 사건이기 때문에
사학교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메이지 초기에 일어난 일련의 사무라이 반란 중 최대 규모였으며,
개국 이래 메이지 시대까지의 일본 역사상 마지막 내전이 되었다.
일본도 동서의 갈등이 심했나보다...
서쪽의 사무라이 세력이
교토나 도쿄의 중앙세력에 대하여 일으킨 반란
경과[편집]
직접적인 원인(사학교와 사족반란)[편집]
메이지 6년 정변으로 하야한 사이고는
1874년, 가고시마 현 전역에 사학교(私學校)[1]와 그 분야를 창설하였다.
사이고처럼 하야에 불만을 품은 사족들의 통솔과 현 내의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해서였지만,
외국인 강사를 채용하거나 우수한 학생을 유럽으로 유학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서구문화를 받아들여 외국 정벌을 위해 굳건한 군대를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결국 사학교는 그 여당을 포함해 현 지사 오야마 쓰나요시의 협력 아래
현지 정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한편, 근대화를 추진하던 신정부는
1876년 3월 8일 폐도령(廢刀令),
8월 5일 '금녹공채증서 발행조례'를 발포하였다.
이 두 가지는 칼을 차는 특권, 녹봉의 지급이라는
구 무사 최후의 특권을 빼앗는 것이며,
사족에게 정신적ㆍ경제적인 손해를 주었다.
이를 계기로 1876년 10월 24일 구마모토 현에서 '신푸렌의 난',
27일 후쿠오카 현에서 '아키즈키의 난',
28일 야마구치 현에서 '바키의 난'이 일어났다.
우나기 온천에 있던 사이고는 이 난의 정보를 듣고
11월 가쓰라 히사타케에게 서한을 제출한다.
이 서한에는 사족의 반란을 유쾌하게 생각한
사이고의 심정 외에 '일으키기로 결심한 이상 천하를 놀라게 하겠다.'라는 의미도 쓰여 있었다. [2]
한편 1871년 중앙정부로 귀국하여 하야하기까지의 2년간,
상경 당초 품고 있던 사족을 중심으로 하는
'강병(强兵)' 중시 노선이 사민평등이나 폐번치현을 전면에 내세운
기도 다카요시, 오쿠마 시게노부 등의 '부국(富國)' 중시 노선에 의해 거절당한 점에 대한 불만이나 반발이
사이고를 중심으로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는 없다 해도,
사이고의 진의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억측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다.
사학교 설립 이래, 정부는 조기에는 대책을 세우지 않았지만,
사학교 당(黨)에 의한 현 정치의 장악이 계속됨에 따라
사학교를 '반(反)정부 지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보는 곡해도 본격화되었다.
1876년 내무대신 오쿠보 도시미치는 내각 고문 기도 다카요시를 위시한 조슈파의 맹렬한 제안에 의해,
가고시마 현 정치 개혁안을 수락하였다.
이 때 오쿠보는 밖으로는 사학교,
안으로는 조슈파라는 몹시 괴로운 입장에 서 있었다.
이 개혁안은 현령 오야마 쓰나요시의 반대와 지방의 난 발생으로 대부분 실행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실행된 것도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1876년 1월, 사학교의 내부정찰과 이간공작을 위해
경시청의 가와지 도시요시 대총경이 나카하라 나오오 이하 24명의 경리를 '귀향' 명목으로
가고시마로 파견한 것이었다.
현지 사학교 학생들은 나카하라 나오오 등의 '무더기' 귀향을 수상히 여겼고,
그 목적을 알아내려 경계하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세키류마루와 탄약 약탈 사건[편집]
1월 29일, 신정부는 가고시마 현에 있던 육군성 포병 소속 창고에 있던
무기와 탄약을 오사카로 옮기기 위해 비밀리에 세키류마루(赤龍丸)를 가고시마로 보내 반출하였다.
이 반출은 당시 일본 육군의 주력 장비였던 스나이더 총의 탄약 제조설비를
오사카로 반출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며,
육군성의 조슈파와 사쓰마파의 대표자 야마가타 아리토모, 오야마 이와오가 협력해 이루어진 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스나이더 총을 주력 장비로 채용한 일본 육군에서,
그 탄약은 사쓰마 번이 설립한 병기, 탄약 공장이 전신인 가고시마의 공장에서 제조되어
거의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었다.
후장식 스나이더 총을 재빨리 도입하여,
슈세이칸(集成館) 사업[3]의 축적으로 근대 공업 기반을 지니고 있었던
사쓰마 번은 영국에서 설비를 수입해 메이지 5년에 육군성 설치 이전부터
이미 스나이더 탄약의 국산화에 성공한 유일한 지역이었다.
화약, 탄약, 뇌관만 있으면 사용할 수 있었던 전장식 총과는 달리
후장식 스나이더 총의 탄약(실탄)은 놋쇠를 주재료로 하여
수압 프레스로 성형된 탄피가 필수적이었고
이것이 없으면 총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탄피 토대는 단순한 구조였기 때문에 개인 레벨의 소규모 양만 있으면 가내 생산으로 제조할 수 있었지만,
소규모라도 군이 전투에서 사용하기 위한 분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용 대량 생산 설비가 필요했고
그 정도 설비는 당시의 일본 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공업 기반의 유무도 당시 일개 지방에 불과했던
가고시마와 신정부 사이의 역학관계를 균형짓고 있던 주 요인 중 하나였다.
또한 옛 사쓰마 번 무사들의 경우, 가고시마 창고의 화약이나
총알, 무기, 제조기계류는 번의 무사가 갹출한 돈으로 만들거나 사들인 것으로서
유사시에 필요한 경우 그 자금을 댄 번의 무사나 그 자손들이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학교 학생은 신정부가 '도둑'처럼 사쓰마의 '재산'을 반출한 사실에 분노하였고
그와 동시에 예상되는 충돌에 대비한 무기, 탄약을 입수하기 위해
밤중에 소모타(草牟田) 화약 창고를 습격하여 총알과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 밤을 시작으로 일본 각지의 화약 창고가 야간에 습격당하는 '탄약 약탈 사건'이 연일 일어난다
(사학교 학생이 입수한 것은 야마가타와 오야마가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던 구형 엔필드 총과 그 탄약뿐이었지만).
스나이더 탄약의 제조설비를 잃은 것은 사쓰마를 상징하는 신병기였던
스나이더 총의 무용지물과 이미 구식화된 전장식인 엔필드 총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을 뜻했고,
후장식과 전장식의 연사속도차가 초래하는 결정적인 전력차를 보신 전쟁에 임전했던
사이고를 비롯한 많은 사쓰마 사족들은 직접 체험하여 잘 이해하고 있었다.
사이고 암살 계획[편집]
1월 30일, 사학교 간부 시노하라 구니모토, 고노 슈이치로, 다키 시치노조 등 7명은
회합, 다니구치 도타에게 나카하라 등 경시청의 내탐을 의뢰하여 같은 날 저녁,
다니구치의 정보로 나카하라 일행의 귀향은 사이고를 암살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정보를 듣게 된다.[4]
시노하라, 후치베 군페이, 이케노우에 시로, 고노 슈이치로 등 사학교 간부는
선후책을 의논하여 고네지메(小根占, 현재 미나미오스미 정)에서 사냥을 하고 있던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그의 넷째 동생 사이고 고베를 파견하였다.
또한 탄약 약탈 사건 소식을 접하고 요시다무라(吉田村)에서 가고시마로 돌아온
기리노 도시아키는 시노하라 구니모토 등과 담합하여,
2월 2일 헨미 주로타 등 3명을 고네지메로 파견보냈다.
사이고 고베와 헨미에게서 탄약 약탈 사건의 전말을 들은 사이고는
'ちょしもた?(아차)!' [5] 하고 중얼거렸고,
암살 계획의 소문으로 비등한 사학교 학생들을 수습하기 위해 가고시마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사이고를 지키기 위해 각지에서 사학교 학생이 급히 몰려와,
가고시마에 도착했을 때에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2월 3일,
사학교당은 나카하라 등 60여 명을 일제히 포박, 가혹하게 고문한 결과
가와지 대총경이 사이고 다카모리를 암살하도록 나카하라에게 지시했다는
'자백서'를 받아냈고, 많은 사학교 학생들이 격앙하여 폭발상태가 되었다.[6]
사이고군의 결성과 출발[편집]
2월 4일 밤, 고네지메에서 돌아온 사이고는 간부들을 거느리고 사학교 본교로 들어갔다.
다음날 5일, 사학교 간부 및 분교장 200여명이 집합하여 대 평의(評議)가 행해져 차후의 방침이 의논되었다.
벳푸 신스케와 헨미는 죄를 묻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가야마 야이치로는
사이고, 기리노, 시노하라 셋이 상경하여 정부를 힐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야마노 다잇포, 고노 슈이치로가 동조하지만,
이케노우에는 암살을 꾸미는 정부가 상경 도중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하여 반대하였다.
무라타 산스케는 세 사람에게 적은 병력이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노무라 오시스케는 노무라 자신이 적은 병력을 이끌고
해로로 오바마(小濱)로 나와 거기서부터
육로로 교토에 가서 천황에게 직접 아뢰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천황은 행차 문제로 교토에 있었다)
이리하여 여러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최후에 기리노가
"단(斷)이라는 한 글자만 있을 뿐, …
군대의 총 출병 외에 취할 수 있는 길은 없다."라고 단안하여
전군 출병론을 많은 사람이 찬성하였다.
(나가야마는 이후로도 출병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기리노의 설득에 후일 종군을 승낙)
2월 6일,
사학교 본교에 '사쓰마 본당'이라는 문패가 걸려 종군자 명부 등록이 시작되었다.
이 날, 사이고를 중심으로 작전회의가 열려 고베의 '해로에서 나가사키를 빼앗아,
거기서 군을 둘로 나누어 고베, 오사카와 요코하마, 도쿄의 본거지를 급습'하자는 안과
노무라의 '세 길로 나누어, 하나는 해로로 나와 나가사키에서 상경,
하나는 해로에서 부젠(豊前), 분고(豊後)를 지나 시코쿠, 오사카에서 상경,
하나는 구마모토, 사가(佐賀), 후쿠오카(福岡)를 지나 육로로 상경'하는 즉 3도 분진(分進)안이 나왔지만
고베, 노무라의 안은 증기선 3척의 군함밖에 가지지 않은 사쓰마군에게는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이케노우에의 '구마모토 성에 일부 방비역을 두고
주력은 육로로 상경'하는 안이 채용되었다.[7] [8]
2월 8일에 부대편성이 개시되었다.
2월 9일, 사이고의 친척 가와무라 스미요시 중장이 군함을 타고
사이고한테 면회하러 왔지만 만나지 못하고
현 지사 오야마 쓰나요시와 가고시마만 내의 함선 위에서 회견하였다.
이 때에 오야마가 이미 사학교 당이 상경했다고 전하여
가와무라는 사이고와 담합을 포기하고 돌아가,
나가사키에 전보를 쳐 경계시켰다.
한편 가고시마에선 2월 9일 현청에 자수하러 온 노무라 쓰나에게서,
'오쿠보에게서 가고시마 현 내의 정찰을 의뢰받아서 왔다.'라는 내용의 자백을 얻어,
사이고 암살 계획에 오쿠보 도시미치도 관여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사이고군에서는 시노하라가 편성 책임자가 되었고
기리노가 군수품 수집 조달, 무라타 신파치가 병기 조달 정리,
나가야마 야이치로가 신병 교련, 이케노우에가 모병을 각각 담당하였고,
12일 즈음에 대강의 준비가 되었다.
모병, 신병교련을 끝낸 사쓰마군에서는
2월 13일, 대대편성(저격대, 마바리부, 1~5번 대대, 독립대대인 6~7대대 즉 기지마貴島 부대)이 이루어졌다.
(대장의 정식 명칭은 지휘장이었으나 일반적으로 대대장이라고 불렀다.
부장 역할은 각 대대의 1번 소대 대장이 맡았다.)
2월 14일,
사학교 학교 옆의 연병장 [9]에서, 승마 한 사이고에 의해 1번~5번 대대의 열병식이 행해졌다.
다음 날 15일, 60년 만의 폭설이라 불리던 눈보라 속에서
사쓰마군의 1번 대대는 가고시마에서 구마모토 방면으로 먼저 출발하였다.
세이난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후 계속해서 대대가 가고시마를 출발하였다.
17일에는 사이고 다카모리 자신도 기리노와 함께 출발하여,
가지키ㆍ히토요시(人吉)를 지나 구마모토로 향했다.
이를 배웅하러 간 가쓰라 히사타케는 빈약한 치중대에 대한 걱정과
사이고에 대한 우의(友義)에서 서둘러 종군하여,
사이고군의 대소 마바리 본부장(치중대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날, 독립부대도 가지키를 출발하였다.
한편 가고시마에서 귀경한 가와무라 중장에게서
사이고군의 문죄(問罪) 출병 정보를 얻은 정부는
2월 19일, 가고시마 현 반역자 토벌의 조서를 얻어,
정식으로 사이고군에 대해 출병하기로 결정되었다.
토벌군 파견[편집]
사이고군이 구마모토 성에 도착하지 않은 사이에 이미 정부측은 토벌 명령을 내려,
사이고군의 요격에 움직이고 있었다.
사이고군이 가고시마를 출발한 것이 2월 15일로
구마모토 성을 포위한 것은 2월 21일.
이에 대해 정부가 토벌 칙서를 내린 것이 2월 19일이었다.
즉 사이고군이 움직이고 나서 불과 4일 만에,
구마모토 성을 포위하기 2일 전이었다.
이 점에서 메이지 정부의 빠른 대응의 배경에는 전신 등의 근대적인 통신망이
이미 둘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
메이지 정부는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을
가고시마 현 반역자 토벌 총독(총사령관)에 임명,
실질적 총사령관인 부사령관에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육군 중장과
가와무라 스미요시 해군 중장을 임명하였다.
이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인 사이고에 대항하여 권위 있는 귀한 혈통을 기치로 이용하기 위해,
어느 한쪽을 총사령관으로 하지 않고,
같은 중장 2사람을 부관에 앉힘으로써, 육군과 해군의 세력 다툼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사쓰마, 조슈의 균형을 잡아 사이고의 친척인 가와무라를 더해
사쓰마 출신자의 동요를 방지하는 등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전에 사이고 아래서 고신페이, 일본 육군성 창설 당시 같이 일했으며,
가고시마 사학교 학생을 격앙시킨 가고시마 스나이더 탄약 제조 설비 반출에서
사쓰마 파벌의 오야마 이와오에게 협력하는 등,
사쓰마 파벌 내부의 사이고 대(對) 오쿠보의 다툼에 조슈 파벌이 편승하는 구도가 되었다.
당초, 제 1여단(노즈 시즈오 소장),
제 2여단(미요시 시게오미 소장),
별동 제 1여단(다카시마 도모노스케 대좌),
별동 제 2여단(야마다 아키요시 소장)외에
가와지 도시요시 소장 겸 경시청 대총경이 이끄는 경시대(후에 별동 제 3여단의 주력)등이 출동하여,
차례차례 다른 여단도 출동하였다.
그 중에서도 임시징집 순경으로 편성된 신센료단(新撰旅團)은 사족이 중심인 여단으로,
그 명칭에서 신센구미가 재편성되었다고 오인되기도 했다.
대만 침공 당시에 사이고 주도가 장비했던 개틀링 포도 규슈로 보내지는 등,
징병으로 구성된 정부군은 강한 사쓰마 사족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 의욕이 상당했지만,
가장 중요한 보병 총의 탄약조달에서 트러블이 발생하였다.
개전 원인 중 하나였던 가고시마 창고 등에서 이루어지던 스나이더 탄약 제조 설비는
2월 13일에 오사카 포병 공창에 설치되었지만
가고시마에서 반출할 때 부품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점이나, 파손이 생겨 가동시키려면
수리와 부품의 추가 구입이 필요했다.
또한 각 군대에서 규슈로 본격적인 동원이 개시되면 방대한 양의 탄약이 필요하게 되고,
6,000발/일 정도의 생산수로는 임시방편적 효과밖에 없음이 확실했기 때문에,
더욱 더 증산이 시도되어 탄환용의 연용해로나 뇌관 제조소를 병설한 신공장이 건설되었다.
스나이더 총이 육해군에 제식 채용된 이후, 그 탄약 공급이 가고시마 창고들이 독점했기 때문에,
중요 거점인 도쿄, 오사카의 군사들에게는, 후장식이면서 종이로 만든 탄피를 사용하는
드라이제 총을 장비한 병사가 많았지만, [11] 드
라이제 총과 스나이더 총은 전혀 다른 탄약을 사용하고 있었다.
보급의 혼란을 막기 위해, 일본 육군성은 규슈에 파견시킨 병사의 장비를
일단 스나이더 총으로 통일시켜 보냈지만,
동원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3월에는 벌써 비축해둔 스나이더 탄약 500만발을 다 써버려 탄약이 부족했다.
이 시기, 규슈에서는 여전히 격전이 계속되어,
1,800만 발의 조달이 더 필요하다고 견적도 낸 적이 있어,
탄약 재고가 많이 남아있던 드라이제 총을 규슈로 보내는 안이 검토되었고
실제로 와카야마(和歌山, 구 기슈 번)의 임시 소집 부대는
번 병사 시대부터 손에 익은 드라이제 총 장비인 채로 규슈에 파견된 이외에,
오사카 군대의 의보병 등 후방부대도 드라이제 총을 장비하여 파견되었다.
이밖에도, 후에 무라타 총의 개발로 유명해진 무라타 쓰네요시가 구 막부에서 넘겨받은
샤스포 총을 스나이더 총과 다른 금속 탄피를 사용하는 탄약용으로 개조 계획을 하는 등[12]
더욱 더 보급을 혼란시키는 사태가 진행되고 있었다.
스나이더 탄약의 조달을 담당하던 육군성의 사이고 주도와 하라다 이치도는,
대량의 탄약 조달을 위해, 일본 해군성에서 탄약 제조 설비를 빌리거나,
외국 상인에게서 빈 탄피 500만개 구입을 계획하거나,
혹은 청나라한테서 탄약을 빌리는 등,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의 화력을 유지하는 탄약조달에 동분서주하였다.
구마모토 성 강습과 고쿠라(小倉) 전격 작전[편집]
2월 19일, 구마모토 진다이가 지키는 구마모토 성 내에서 화재가 일어나,
강풍 속에서 불은 성루까지 번져, 천수각까지 소실되었다.
이 화재의 원인은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단, 신정부군설이 유력하다.)
2월 20일, 벳푸 신스케가 이끄는 가지키(加治木)의 여러 부대가 가와지리에 도착하였다.
이윽고 구마모토군에서 파견된 정찰대가 벳푸의 부대에 발포하여,
세이난 전쟁의 실전이 시작되었다.
구마모토 군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사쓰마 군은,
잇달아 대대가 가와지리에 도착한 21일 밤,
가와지리에서 군의가 열렸다.
군의에서는 이케노우에가 주장한 ‘구마모토에 일부 군사를 두고, 주력 상경’책과
시노하라가 주장한 ‘전군 구마모토 성 강습’ 책이 대립하였지만,
강습책이 채용되었다.
2월 21일 한밤중부터 22일의 이른 새벽에 걸쳐 사쓰마군의 대대는 차례차례 구마모토를 향해 발사,
구마모토 성을 포위, 강습하였다.
기리노의 제 4대대,
이케노우에의 제5대대는 전면공격,
시노하라 구니모토의 제 1대대,
무라타 신파치의 제 2대대,
벳푸 신스케의 가지키 대대 및 나가야마 야이치로의
제 3대대의 일부는 배면(背面)공격을 담당하였다.
한편, 신정부군은 구마모토 성을 중심으로 수비병을 배치하였다.
이때 신정부군측에서는 사령관 다니 다테키 소장, 참모장 가바야마 스케노리 중좌을 필두로,
고다마 겐타로 소좌, 가와카미 소로쿠 소좌, 오쿠 야스카타 소좌 등,
후에 거물 군인, 정치가 등이 참가하였다.
이때의 전력 차는 사쓰마 약 14,000명, 군 약 4,000명이었다.
예로부터, 공성측은 성을 수비하는 측보다 10배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아무리 날래고 사나운 사쓰마병이라고 해도, 1대 3의 포위강습은 무모한 작전이었다.
이 강습 중의 오후에, 늦게 사이고가 가와지리에서 요쓰기 궁(代繼宮)에 도착하였다.
같은 날 오후, 사쓰마 군은 신정부군 일부의 우에기 출진을 듣고,
오후 3시에 노무라 오시스케, 이토 나오지 소대가 우에기로 파견,
저녁 무렵 이토 부대의 이와키리 쇼쿠로가 제 14 연대(노기 마레스케 소좌)의 군기를 빼앗았다.
한편, 총공격한 구마모토 성이 견고하여 이 날 상황에서 간단하게는 공락할 수 없었다.
밤, 혼조(本莊)로 본진을 이동, 여기서 군의를 열던 도중,
신정부군의 제 1 및 제 2여단은 본격적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 군의에서는 일단 시노하라의 강습책 속행으로 결정되었지만,
늦게 도착한 고베나 노무라 오시스케의 강한 반대로,
심야에 열린 재 군의에서 구마모토 성을 강습하는 한편,
일부는 고쿠라 전격 공격이 결정되었다.
다음날 23일 이케노우에가 무라타, 헨미등의 소대를 이끌고 고쿠라를 향해 출발했지만,
도중에서 격전의 총성을 듣고 이케노우에는 다바루로 전진,
무라타 신스케의 소대만 고쿠라 방면으로 전진했다.
하지만 이 소대도 우에기에서 신정부군과 조우, 고쿠라 전격작전은 실패하였다.
사쓰마군 주력 북부진출과 포위[편집]
사쓰마군은 적은 대포와 장비가 뒤떨어진 소총으로, 견고한 성을 굳게 지키면서
우세한 대포, 소총과 풍부한 탄약을 보유한 부대를 공격하는 등 무모한 작전을 채용하였다.
따라서 2월 21일부터 24일까지 사쓰마 군의 공격은 모조리 실패 한 뿐만 아니라,
무사 대부분이 이 공성전으로 소모되어,
24일 이후 양군 대치상태에 빠졌다.
거기서, 사쓰마 군은 남하해오는 신정부군, 또한 상륙해온다고 예상되는 신정부군,
구마모토 부대에 대처하기 위해, 구마모토 성 강습책을 포위책으로 변경하였다.
우에기 방면, 기도메, 기치지 방면, 도리스 방면, 구마모토 방면에서는
연달아 신정부군과 사쓰마 군의 공방전이 전개되었고,
2월 20일?27일에는 구마모토 방면,
3월 1일?31일에는 다바루, 기치지 방면,
3월 10일?4월 15일에는 도리스 방면,
3월 4일?4월 15일에는 우에기, 기도메 방면에서 격렬한 전투가 일어났다.
다카세(高瀨)부근 전투[편집]다카세 부근 전투
결과 신정부군의 승리
교전국
제 1, 2, 3여단(신정부군) 사쓰마 군
지휘관
노즈 시즈오
노기 마레스케 기리노 도시아키
병력
알 수 없음 약 2,800
세이난 전쟁의 의의[편집]
경제적 의의[편집]
1871년 폐번치현으로 전국 직할화를 완성한 메이지 정부였지만,
반면 각 번의 빛 및 사족한테의 봉록 지불의무를 이어받게 되어
가록지급이 세출의 30%이상이 되어 버렸다.
정부는, 적자 재정 건전화를 위해,
생산 활동을 하지 않고 봉록을 받고 있는 특권계급의 사족 폐지를 목적으로
사민평등을 강조,
1873년 징병제,
1876년 녹봉처분을 시행하였다.
이로써 사족해체 방향이 결정되었지만,
사족의 반란이 빈발하였고, 결국 세이난 전쟁까지 이르게 된다.
정부의 세이난 전쟁의 군사비는 4100만엔에 달해,
당시의 세수(稅收) 4800만엔의 대부분을 다 써버릴 정도로 막대했다.
정부는 전투비 조달을 위해 불환지폐를 활발히 하여 결국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다.
후에 일본 대장성 마쓰카타 마사요시에 의해 증세, 관영기업의 불하, 통화가 정리되어
지폐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하여 일본이 구미 열강에 필적하는 근대 국가가 되는 바탕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마쓰카타 디플레이션[17]로 농민의 소작화가 진행되어(소작농률의 전국평균 38%→47%),
대지주가 발생하였다.
또한, 소작을 계속 할 수 없을 정도로 곤궁한 자는 도시로 유입되어,
관영기업의 불하로 발생한 재벌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저임금 노동을 하여,
도시부의 빈곤층이 확대되었다.
또한 재정난이 된 일본은, '원칙국유(原則國有)'로 했던 철도 건설이 곤란하게 되어,
대신 사유자본에 의한 철도 건설이 진행되었다.
세이난 전쟁의 결착이 난 시점에서,
사족계층의 특권은 명백히 부정되었고, 몰락이 결정지어졌다.
전쟁으로 인한 경제 혼란은 빈부격차 확대를 초래하여 많은 농민이 몰락, 소작농이 되었다.
그 한편으로는, 일부 대지주나 재벌은 자본을 축적하여,
그 중에서 초기 자본가가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다.
'신분'보다도 '돈'이 우월한 사회가 도래,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근대화가 진행 되었다.
군사적 의의[편집]
세이난 전쟁은 일본 최후의 내전이며 사족이라고 하는 군사전문직의 존재를 소멸시켰다.
사족 중심의 사이고군을 징병 내지 직업군인을 주체로 한 정부군이 승리함으로써,
사족 출신 병사나 농민 출신 병사나 전투력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징병제에 의한 국민개병체제가 정착되었다.
정부군은 승리의 원인이 근대적 장비, 화력, 통신수단, 지휘능력의 차이에 있음을 바로 파악하여
세이난 전쟁 후, 군의 근대화노선에는 징병을 기반으로 한 상비군을 두었고,
장비통수의 근대화를 추구하는 노선으로는 변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진다이 병사는 징병과 화력으로 이겼으면서도,
전술적 전투에서는 여러차례 사이고 군의 사족 병사에게 패배하였다. [18]
병사의 전의, 사기 문제는 정부군에 있어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세이난 전쟁의 교훈으로 징집된 병사들에 대한 정신교육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사이고 군의 사기가 높았던 것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총대장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메이지 정부는
천황을 일본제국 육군, 해군의 대원수로 앉혀 군의 사기 고양을 도모하게 되었다. [19]
스나이더 탄약 제조 장치를 채택했어도 사이고 군이 엔필드 총으로 싸웠기 때문에,
거액의 전비를 소비, 이를 진압하지 못한 점을 반성하였고,
구식이어도 전투 능력에 뛰어난 전장(前?)총이 각지에 분산 보관된 상황을 위험시한 정부는
세이난 전쟁 후 메이지 11년부터 이것을 회수, 모아서
스나이더 총으로 개조하여 군에 의한 무기 제조시설의 독점과
군용 총의 소지를 엄격히 규제함으로써 국민의 무장에 대해 내란의 재발을 방지하는데 힘썼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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