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4일,
제 1여단(노즈 시즈오 소장)과 제 2여단(미요시 시게오미 소장)은 잇달아 남하 중이었다.
구루메(久留米)에서 고노하(木葉)에서의 패전 정보를 들은 양 여단장은 남하를 서두르는 한편, 미이케(三池)가도에 일부 부대를 분견(分遣)하였다. 보병 제 14연대(노기 소좌)는, 이시누키(石貫)로 향하는 한편 다카세 방면으로 수색을 보냈다. 25일, 보병 제 14연대는 야마가(山鹿)가도와 다카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야마가 방면으로는 제 3여단의 선봉 1개 중대의 증원을 얻어 24일에 전진해온 노무라 오시스케의 5개 소대와 대전하게 되었지만, 다카세 길로 간 부대는 사쓰마 군과 전투도 없이 다카세를 점령하였다.
이 당시 사쓰마 군의 배치는 대략 아래와 같다.
야마가 - 노무라 오시스케(5개 소대)
우에기 - 고시야마 규조(3개 소대), 이케베 기치주로(구마모토 부대 주력)
이쿠라(伊倉) - 이와키리 기지로, 고다마 교노스케등(3개 소대), 삿사 도모후사(구마모토 부대 3개 소대)
이에 비해, 신정부군의 토벌 여단은 차례차례 난칸에 들어가 본진을 마련하여, 즉시 이시누키로 파병, 이와자키(岩崎) 언덕에 증원을 보냈다.
신정부군이 다카세 강선에 진을 구축하는 것을 본 이와키리 등은 다카세 강의 교량에서 공격, 구마모토 부대는 도하하여 골짜기, 이와자키 언덕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이와키리는 이시누키 동쪽 대지에서의 감사(瞰射, 높은 위치에서 총, 활을 쏨)에 애를 먹고, 구마모토 부대는 증원을 받은 제 14연대 우익에 방해받아, 격전 대치하고 나서 2시간, 밤이 되어서 퇴각하였다.
2월 26일, 에쓰 산(越山)의 3개 소대는 신정부군의 다카세 진출에 대비하여, 야마베타(山部田)와 성 아래 사이에서 만나는 선에 진을 치고, 삿사의 구마모토 부대 3개 소대 및 이와키리, 고다마의 3개 소대는 데라다(寺田)과 다테 산(立山) 사이 만나는 선에 진을 치고 다카세 전진을 저지하려 하였다. 이케베의 구마모토 부대 주력은 삿사 부대가 고전중이라는 오보를 듣고 데라다로 진격하였고, 야마가의 노무라의 부대는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기리노, 시노하라, 무라타, 벳푸등이 이끄는 사쓰마 군 주력은 오쿠보(大窪, 구마모토 시 북쪽)에 집결중이었다.
사쓰마 군 주력은 오쿠보에서 좌, 중, 우 3익으로 나뉘어, 다음 방향에서 다카세 및 다카세로 진격하는 신정부군을 협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우익부대(야마가 방면) - 기리노 도시아키(3개 소대 약 600명)
중앙부대(우에기, 고노하 방면) - 시노하라 구니모토, 벳푸 신스케(6개 소대 약 1,200명)
좌익부대(기치지, 이쿠라 방면) - 무라타 신파치(5개 소대 약 1,000명)
이에 대해 신정부군은 사쓰마 군 주력의 북진을 알지 못하고, 전면의 사쓰마 군이 아직 우세하지 않다고 판단, 다음과 같이 부서를 정하였다.
제 1진
전구(前驅) - 노기 마레스케 소좌(4개 중대)
중군 - 사코다(迫田) 대위(2개 중대)
후군 - 오하사(大迫) 대위, 지시키(知識) 대위(2개 중대)
제 2진
예비 부대 - 하세가와(長谷川) 중좌(4개 소대)
야마가 방면 수비대 - 쓰게(津下) 소좌(3개 중대)
응원(총 예비부대) - (2개 중대, 1개 대대 우측 반 부대)
사쓰마 군의 우익 부대는 새벽, 야마가에서 기쿠치 강(菊池川)을 따라 남하, 다마나시(玉名)부근의 신정부군 좌익을 공격, 중앙 부대는 다바루 언덕을 넘어, 고노하에서 신정부군 수색대와 조우전을 벌였고, 좌익 부대는 기치지 고개, 하라쿠라(原倉)로 진격, 여기서 오른쪽 종대는 다카세 다리에, 왼쪽 종대는 이쿠라, 오하마(大濱)를 지나 이와자키 언덕으로 진출했다. 신정부군은 수색대의 정보와 각지에서의 급보로 비로소 사쓰마 군의 대거 내습을 알아차려, 각지에 증원 부대를 파견하는 동시에 미요시 여단장 스스로 골짜기로 진출하였다. 신정부군, 사쓰마 군 양군의 전투는 격렬해지고, 미요시 소장이 총상을 입을 정도로 총포격전, 접전이 일어났다.
오전 10시 즈음, 기리노가 이끄는 우익 부대는 우회하여 이시누키에 있는 신정부군의 배후 연락선을 공격하였다. 이때 제 2여단 본진에 마침 거기에 있던 노즈 미치쓰라 대좌(동생)는 여단 간부와 궁리하여 증원을 보내는 동시에, 이나리 산(稻荷山) 확보를 명했다. 이 산을 점령한 신정부군은 몇 번이나 탈취를 시도하는 사쓰마 군 우익 부대를 감사(瞰射)하여 물리쳤다. 뒤이어 남하해 온 노즈 시즈오 소장(형)의 병사가 우익 부대의 우측면을 찔러, 맹장 기리노가 이끄는 우익 부대도 견디지 못하고, 에다(江田)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나리 산은 저구릉 지대였지만, 이 지역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 곳을 둘러싼 쟁탈전은 세이난 전쟁의 덴노 산라고도 전해진다. [13]
우익 부대의 왼쪽 종대는 신정부군을 이와자키 언덕에서 가즈라하라 산(葛原山)으로 퇴각시켰지만, 중앙 부대는 탄약 부족으로 인해 퇴각하였다. 이때 원군을 얻은 신정부군 중앙 여러 부대는 반격에 나섰다. 사이고 고베, 아사에 나오노신, 사가라 나오노신 3소대도 적전 도하를 강행하여 다카세 탈회를 시도하였지만 신정부군의 증원과 일몰이 다가와 오하마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신정부군도 피로로 인해 추격할 여유가 없었다. 이 방면의 전투는 격전이었으며 사이고 고베 이하 사쓰마 군 여러 장수가 전사하였다.
다바루(田原)언덕, 기치지(吉次)고개 전투[편집]
3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현재의 구마모토 현 가모토 군 우에기 마을에서 다바루 언덕, 기치지 고개의 격전이 전개되었다. 이른 봄이라 매우 쌀쌀했고, 비도 내리는 힘겨운 상황 속에서 전투는 시작되었다.
신정부군은 다바루 언덕 방위선 돌파를 위해, 3월 11일, 군을 주력과 별동대로 나누었다.
주력은 다바루 언덕과 기치지 고개 돌파를, 별동대는 야마가의 기리노 부대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력군은 현지 지형에 밝은 사이고군의 거센 총격과 발도(拔刀) 백병전에 손도 제대로 못 쓰고[14] 다바루 언덕의 정면 돌파를 단념하고 서쪽에서 공격하여 요코히라 산 (나치那智 산)을 빼앗으려 했다. 사쓰마 군의 가공할 백병 발도 공격에 맞서기 위해 신정부군은 사족 출신의 병졸을 뽑아 발도대(拔刀隊)를 조직하지만 토벌당하자 3월 13일, 새로운 경시(警視)발도대를 조직하였다.
3월 14일의 다바루 언덕의 공격 시도에서 결국 요코히라 산을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경시발도대가 사쓰마 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때의 발도대의 공을 칭찬하여 유명한 발도대의 노래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다음날인 15일, 사쓰마 군의 수비를 깨고 신정부군은 드디어 요코히라 산을 점령, 사쓰마 군의 방위선을 뚫고 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전선 정리를 위한 하루 동안의 휴전을 거쳐 3월 17일, 신정부군은 서쪽에서 정면으로의 공격을 개시했지만, 지형을 이점을 살려 배치한 사쓰마 군의 다바루 언덕 방위선을 깨는 데는 실패했다. 3월 4일부터 신정부군과 사쓰마 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에서 신정부군 전사자는 약 2,000명, 부상자도 2,000명에 달했다.
신정부군 주력 부대의 본진에서는 3월 18일, 노즈 시즈오 소장(제1여단장), 미요시 시게오미 소장(제2여단장), 참모장 노즈 미치쓰라 대좌, 다카세 토벌 본진의 오야마 이와오 소장 등에 의해 막료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작전 계획을 세움과 그 의사를 통일하기 위해 열렸다. 여태까지의 전투에서 신정부군은 많은 병력을 쏟아붓고도 이렇다할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 병력만 낭비되었다. 우수한 병사를 보유한 사쓰마 군이 지리의 이점을 잘 이용해 다바루 언덕의 방위선을 구축하고 있었고 상태를 타파하기 위해선 어서 다바루 언덕의 견고한 방어선을 돌파할 필요가 있었지만, 병사들이 지쳐 있던 점을 감안해 19일에는 휴식을 취하고 20일 이른 아침에 두 방면에서 총공격을 결행하기로 정하였다.
20일 이른 아침 신정부군은 개전 이래 최대 병력을 다바루 언덕에 투입하였다. 주력 부대는 호우와 안개로 혼란을 겪는 와중에 양쪽으로 골짜기를 넘어, 다바루 언덕 부근에 접근하였다. 그리고 빗속에서 양쪽의 요코히라 산의 포병진지에서 다바루 언덕 일대에 유래없는 대포격을 개시했다. 포격이 멈춤과 동시에 사쓰마군의 본진으로 목표로 일제히 돌격했다. 신정부군의 맹포격과 쏟아진 비 때문에 응전이 늦어진 사쓰마 군은 상황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사쓰마군은 서서히 우에기 방면으로 패주했다.
신정부군의 공격을 성공에 이끈 기치지 고개 부대의 활약은 컸다. 기치지 부대의 사쓰마 군에 대한 견제 공격으로 신정부군 주력을 '다바루 언덕 돌파' 하나로 집중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기치지 고개 부대의 피해는 막대하여 고마이(駒井) 대위를 비롯한 많은 목숨을 잃었다.
다바루 언덕에서의 공방전은 17일간 계속되었다. 사쓰마군이 우에기 방면으로 패주하면서 다바루 언덕의 중후한 방어선은 무너졌다. 이후 신정부군은 다바루 언덕에서 우에기 방면까지의 침공을 시도했지만 도중에 사쓰마군의 공격을 받아 중지되었다. 다바루 언덕 전투는 사쓰마군의 패배로 끝났지만, 사쓰마군은 다시 21일 아리아케 해, 기치지 고개, 우에키, 와이후(?府)를 잇는 방위진을 구축하여 신정부군의 구마모토로 향하는 길을 차단, 공격을 지연시켰다.
3월 1일에 시작된 다바루를 둘러싼 전투(다바루 언덕, 기치지 고개)는 이 전쟁의 분수령이 된 격전으로,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현지에서는 당시의 총탄이 다바루나 경사면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사쓰마군에서는 부사령격이었던 1번대대 지휘장 시노하라 구니모토를 비롯하여 용맹한 무사가 잇따라 전사했다. 신정부군도 3월 20일 하루 동안에만 전사자가 495명에 달했다.[15] 많은 전사자를 내면서도 신정부군은 다바루 언덕 전투에서 사쓰마군을 압도하여, 착실히 구마모토 진다이 구원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우에기(植木), 기도메(木留)전투[편집]
3월 23일 신정부군은 우에기, 기도메를 공격, 일진일퇴의 진지전에 돌입하였다. 3월 24일에도 신정부군은 다시 기도메를 공격, 3월 25일 우에기에 책루를 설치, 공격 주력을 기도메로 이동시켰다. 3월 30일, 신정부군 주력은 산노타케(三ノ岳)의 구마모토 대를 공격, 4월 1일에는 한코(半高)산, 기치지 고개를 점령하였다. 4월 2일, 신정부군은 기도메도 점령, 사쓰마군은 헤타노(邊田野)로 후퇴, 헤타노, 기도메의 취락은 불에 탔다. 4월 5일에는 신정부군본영에서 군의가 열렸다. 4월 8일, 헤타노 방면은 격전(激戰)이 되었고, 신정부군은 하기사코(萩迫)의 가키노키(枾木)포대를 점령하였다. 4월 12일에 사쓰마군은 최후의 반격을 하였지만, 4월 15일, 우에기, 기도메, 구마모토 방면에서 철퇴하여, 성 남쪽 방면으로 물러났다. 이를 쫓아 신정부군은 대진격을 개시하였다.
도리스(鳥巢) 방면[편집]도리스에서는 3월 10일에 사쓰마군이 이 지역의 수비를 시작하고 나서 4월 15일에 철퇴할 때까지 신정부군과의 사이에서 치열한 싸움이 펼쳐졌다. 먼저 3월 30일 새벽에 근위병 2부대가 양쪽으로 나뉘어 와이후로 쳐들어갔다. 처음에는 사람이 부족하여 사쓰마군이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그 사이 이토 부대의 응원도 있어, 겨우 신정부군을 패주시켰다.
4월 5일 제 3여단(미우라 고로소장)은 도리스를 공격, 사쓰마군의 히라노부대와 신구지 부대가 수비하고 있는 한가운데에 공격, 허를 찔린 양 부대는 순식간에 패주했다. 이를 들은 사쓰마군의 노무라 오시스케는 우에기에 있던 부대를 거느리고 도리스로 향해, 만회하려고 분전하지만 결국 이 날 하루로는 결착이 나지 않았고 4월 7일 신정부군이 일단 이 지역은 단념하고 고가(古閑)를 먼저 공략하자 하여 일시적으로 휴전상태가 되었다. 한편 고가에서는 히라노 부대, 시게히사 부대의 필사적인 항전으로 인해 신정부군은 부득이하게 철퇴하였다.
사쓰마군은 용감히 싸워 4월 9일 다시 와이후로 공격해온 신정부군을 격퇴하였지만 탄약, 무기 부족으로 인해 이 이상의 전투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아카보시 고개(赤星坂)로 철퇴하였다. 4월 10일부터 4월 13일에 걸쳐 신정부군에 의한 도리스 재공략이 시작되어 사쓰마군도 이에 대해 용감히 응전하였지만 점점 무기가 부족해져, 도리스 철퇴 명령이 내려져 이 지역을 뒤로하고 오즈(大津)로 향했다.
사쓰마군의 장기간 포위책의 파탄과 신정부군 충배군(衝背軍)의 상륙[편집]사쓰마 군의 주력이 북부 전선으로 옮긴 후에도 구마모토 성의 포위는 계속되었지만, 신정부군 충배군의 상륙과 구마모토 부대와의 연락이 닿은 점에서 포위책은 파탄, 전선은 구마모토 성의 남부, 동부로 이동하였다. 이 지역에서 일어난, 이른바 성동회전(城東會戰)의 귀추는, 다바루의 패전에 뒤지지 않는 타격을 사쓰마군에 주게 되었다.
구마모토 성 포위[편집]성 안의 식량이 바닥나기를 기다려 함락시키려는 이른바 장기간 포위책을 채용한 사쓰마군이 대포전을 주로 삼았기 때문에 수비 측에서는 그로 인해 고심하였다. 3월 12일, 다니 산(段山)을 둘러싼 양군의 쟁탈전이 일어났다. 이 쟁탈전은 13일까지 계속되었다. 안개 속에서 포격, 총격이 섞인 격전은 안개가 개일 때에는 쌍방의 거리가 10발자국인 접근전 이었다. 결국 다니 산 배후에 선 진다이(鎭臺)측이 사쓰마군을 패주시켰다. 이 전투는 신정부군 사상자 221명, 사쓰마군 사망자 73명 포로 4명이라고 하는 포위전 최대의 격전이었다.
사쓰마군 주력이 북쪽에서 전전(轉戰)하였기 때문에 진다이의 수비담당이 약간 줄어들었다고 해도, 개전 전의 화재로 잃은 식량의 보충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량부족에 시달려, 극력 소비를 막음으로써 견디고 있었다. 이케노우에가 이끄는 포위군은 당초 21개 소대, 1개 포대 합 4,700명 가까이 있었지만 포위책이 채용되자 16개 소대, 2개포대로 감소, 3월이 되자 다카세, 야마가, 다바루, 우에기 등 북부 전선이 격전이 됨에 따라 증원부대를 격전지에 파견시킴으로 인해 더욱 더 감소하였다. 그로 인해 포위군은 아주 적은 병사로 거대한 구마모토 성을 전면 포위하는 점에서 고심하였다. 한편, 진다이 측은 이를 기회로 때때로 소량의 식량을 성 안으로 운반해 왔다.
포위군이 감소한 사쓰마군은, 기리노가 구마모토 부대의 계책으로 3월 26일 쓰보이 강(坪井川), 이세리 강(井芹川)의 물을 성 주위에 끌어들였다. 이로 인해 구마모토 부대의 동북쪽 및 서부의 논밭일대가 호수로 변했다. 이 방책에 의해 사쓰마군은 성의 동북 및 서부를 지키는 병사를 수백 명 절약하였지만 진다이쪽에서도 성의 서부를 지키는 병사를 절약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상황이 좋게 되었다.
진다이(鎭臺)[16] 병사 출격[편집]
구마모토 진다이의 성 밖출격은 사쓰마군 주력이 북부 전선으로 이동한 2월 27일부터 시작되었다. 이 날, 오사코 나오하루대위가 이끄는 정찰대는 쓰보이 방면 위력 정찰로 출격하였다. 3월 26일, 우에기 방면에서 총성을 들었지만 토벌군이 나타나지 않아, 후방 교란 부대를 3부대로 나누어 교마치구치(京町口), 이세리(井芹)마을, 혼묘 사(本妙寺)로 출격시켰다. 이들 부대는 잠시 사쓰마군을 달아나게 하려고 하였지만, 역습을 만나 철퇴하였다.
농성이 40일에 이르자, 식량, 탄약이 결핍된 진다이는 여력이 있을 때에 토벌군과 연락하기 위해 남쪽의 가와지리 방면으로 출격하기로 한다. 부대를 오쿠 야스카타 소좌가 이끄는 부대, 오가와 대위가 이끄는 침습(侵襲) 부대 및 예비부대 세 개로 나누어, 4월 8일 출격하였다. 침습 부대가 안세이(安巳) 교를 급습, 싸우고 있는 사이에 오쿠 부대는 전진하여 스이젠지(水前寺), 나카무타(中牟田), 겐군(健軍), 구마노쇼(?庄)를 지나 우토의 충배군과 연락하였다. 한편 침습 부대는 사쓰마군의 혼란에 기세를 몰아 구혼 사(九品寺)에 있는 쌀 720가마, 소총 100정등을 빼앗아 철수하였다.
충배군(衝背軍)상륙[편집]
신정부군 남하군은 2월 다카세 전투 이래 두드러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였다. 그래서 다카시마 대좌의 건의에 의해, 구마모토 진다이와 연락하여 사쓰마군의 가고시마와 구마모토 문 사이의 보급, 연락 차단, 사쓰마군을 앞뒤에서 협격을 기도한 군을 파견하게 되었고 구로다 기요타카중장이 상륙 충배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최초의 충배군은 3월 18일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야쓰시로(八代)로 향한 다카시마 도모노스케(高島?之助) 대좌가 이끄는 별동 제 2여단이었다. 이 여단은 3월 19일 함포사격에 원호, 히나구(日奈久)남쪽 입구 및 야쓰시로 배후에 상륙하여 사쓰마군을 두 방면에서 공격하여 야쓰시로 점령에 성공하였다. 20일에는 구로다 기요타카가 이끄는 1개 대대 반과 경시부대 500명 정도가 히나구에 상륙하였다. 사쓰마군에서는 2번대대 1번소대가 히나구, 2번대대 5번소대가 마쓰자키(松崎) 서남쪽 가메자키(?崎), 2번대대 6번소대가 2번대대 6번소대가 구마모토 서북의 시라하라(白浜)에서 해안 경비를 하고 있었지만 조금도 효과적인 방어가 되지 않았다.
신정부군의 야쓰시로 상륙의 정보를 얻은 사쓰마군은 구마모토 포위군의 일부를 나누어 3번대대 지휘장 나가야마 야이치로가 이끄는 5개 중대, 도성부대, 2번 포대를 야쓰시로에 파견하였다. 3월 20일, 사쓰마군 선발부대와 다카시마 대좌가 이끄는 신정부군은 히가와(氷川)를 사이에 두고 격전을 벌였고 사쓰마군은 건너편 기슭으로 진출하였다. 하지만 다음날 21일에 증원을 얻은 신정부군이 되물리쳐, 사쓰마군을 스나가와(砂川)로 퇴각시켰다. 22일, 구로다는 야쓰시로에서 미야노하라(宮の原)로 나와, 여기서 사쓰마군과 격전을 벌인다. 증원을 얻은 사쓰마군과 신정부군의 전투는 24, 25일에도 계속되어 전황은 일진일퇴하였다.
3월 24일, 나가사키를 출발한 별동 제 2, 3여단은 25일 오후 야쓰시로에 상륙하였다. 이때 일단 각 여단의 명칭이 변경되었지만 후에 29일에 다시 변경되었고 다음과 같다.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대좌의 여단 ─ 별동 제1여단
야마다 아키요시 소장의 여단 ─ 별동 제2여단
가와지 도시요시 소장의 여단 ─ 별동 제3여단(경시부대를 주체로 하여 편성)
구로카와 미치노리 대좌의 여단 ─ 별동 제4여단
오가와(小川)방면 전투[편집]3월 26일, 구로다군은 별동 제 1여단을 좌익, 별동 제 2여단을 중앙, 경시부대를 우익으로 배치, 함포사격 원호 아래 세 방향에서 오가와 방면의 사쓰마군을 공격, 격전 끝에 사쓰마군을 격퇴하여 오가와를 점령하였다. 이 때, 사쓰마군의 맹장 나가야마 야이치로는 병사들을 격려하였지만 전황을 역전시키지는 못했다.
마쓰바세(松橋)부근 전투[편집]
3월 30일, 구로다군은 별동 제 3여단에게 사바가미 고개(娑婆神嶺), 별동 제 1여단, 2여단에게 마쓰바세(松橋)를 공격시켰다. 별동 제3여단은 사바가미 고개를 점령, 별동 제 1여단과 2여단은 오노 강(大野川)선까지 진출하였다. 다음날, 별동 제2 및 제 3여단은 양쪽에서 마쓰바세를 공격, 별동 제 1여단은 기타토요 곶(北豊崎)에서 미후네로 진출, 사쓰마군의 우측을 공격하였다. 이에 견디지 못하고, 사쓰마군은 가와지리로 후퇴하였고 신정부군은 마쓰바세를 점령하였다.
우토(宇土), 가타시다(堅志田), 미도리(綠)강 전투[편집]4월 1일, 별동 제1여단이 사쓰마군 야습 부대를 추격하여 우토를 점령하였다. 또한 별동 제 3여단은 고사(甲佐)로 퇴각한 사쓰마군을 추격, 가타시다를 점령하였다. 3일, 이른 아침의 안개를 틈타 사쓰마군을 급습하였고, 별동 제 3여단은 5시간의 격투 끝에 이를 격퇴, 추격하여 미도리 강을 넘어 사쓰마군의 측배를 공격, 고사를 점령하였고 사쓰마군은 모두 미후네로 퇴각하였다. 6일, 구로카와 미치노리 대좌가 이끄는 별동 제 4여단이 우토 포구에 상륙하였다. 7일에는 미도리 강 왼쪽 해안에 진출해있는 사쓰마군을 별동 제 2여단이 별동 제 1 및 제 4여단의 원호를 받아 오른쪽 해안으로 되물리쳤다. 또한 제 2 및 제 4여단은 기와라 산(木原山)을 급습, 사쓰마군을 협격하여 가와지리로 패주시켰다.
미후네(御船) 전투[편집]
구로다 군은 충배군의 부서를 정하고, 다음 방면으로 일제 진격을 기도하였다.
고사, 미후네, 요시노(吉野) ─ 별동 제 3여단
구마노쇼(?庄), 나마즈무라(?村), 가미지마(上島) ─ 별동 제 1여단
위 여단의 예비 부대 ─ 별동 제 1, 제 2여단의 일부
미도리 강, 가와지리 ─ 별동 제 2여단, 별동 제 4여단
4월 12일, 별동 제 3, 제 1여단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별동 제 1여단은 미야지(宮地)를 출발하여 미도리 강을 건너 사쓰마군을 공격하였다. 사쓰마군은 계속되는 패전으로 인해 기세가 점점 누그러져, 민가에 방화하고 퇴각하였다. 이 때, 달려간 나가야마 야이치로는 패주하는 사쓰마군 병사를 질타, 격려하였지만 만회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민가를 매입, 불을 질러 할복하였다. 이리하여 미후네는 신정부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같은 날 별동 제 2여단은 신 강(新川)둑에서 사쓰마군의 맹사격에 저지당했고, 제 4여단도 진격을 저지당했다. 다음날 13일 별동 제 2여단도 별동 제 4여단을 연계하면서 가와지리를 향해 진격하였다. 별동 제 4여단의 일부가 닛타(新田)를 공격하여 사쓰마군을 견제하는 사이에 주력이 미도리강을 건너 사쓰마군과 격전을 펼치면서 가와지리로 향했다. 가와지리로 향한 별동 제 4여단과 제 2여단은 양쪽에서 사쓰마군을 공격하여 물리치고, 가와지리를 점령하였다.
충배군의 구마모토 입성[편집]
4월 13일 별동 제 2여단의 야마카와 히로시 중좌는 미도리 강의 모래톱에 있었지만, 우군의 가와지리 돌입을 보고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고 생각하여 병사를 나누어 스스로 선발부대를 이끌고 구마모토성을 향해 돌입, 결국 성 아래에 도착했다. 성 안에 있던 모두는 다시 살아났다 생각해 매우 기뻐했지만, 나중에 야마카와 중좌는 작전을 무시한 독단전행을 문책 받았다고 한다.
사쓰마군의 야쓰시로 급습[편집]이 즈음, 사쓰마군은 다바루 방면에서의 전투가 격화됨에 따라 병력이 부족하게 되었고, 기리노의 명으로 후치베 군페이, 벳푸 신스케, 헨미 주로타 등이 가고시마에 돌아가 새로운 병력을 징집하였다. 3월 25, 26일 양일로 1500명 정도를 징집하였지만 신정부군이 야쓰시로에 상륙, 우토에서 가와지리로 향했기 때문에, 이 병력은 구마모토에 있는 사쓰마군과는 합류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 부대는 히토요시에서 내려와, 야쓰시로에서 구마모토로 진군중인 신정부군을 배후에서 공격하여, 퇴로를 끊어 고립시키는 작전 아래 행동하게 되었다.
4월 4일, 히토요시에서 구마 강(球磨川)을 따라, 혹은 배로 내려가 야쓰시로 남부에서 나온 사쓰마군은, 먼저 사카모토 마을(坂本村)의 신정부군을 공격하여 패주시킨 것이 시초가 되어 5, 6일 승리, 야쓰시로로 향했지만 7, 8일 신정부군의 반격에 의해 야쓰시로에 당도하지 못하고 다시 사카모토 부근까지 되돌아갔다. 4월 11일, 다시 사쓰마군은 야쓰시로를 공격. 피로도 있어서 신정부군이 일시패퇴하였지만, 13일에 신정부군에 원군이 투입되어, 사쓰마군, 신정부군 모두 철수하지 않고 4월 17일까지 이 상황이 계속되었다. 17일 1개 대대에 사쓰마군의 우익을 찌른 작전이 성공하여 신정부군이 유리하게 되었고, 사쓰마군은 패주하였다. 이 사이의 하기와라 둑(萩原堤)에서의 전투 당시 협동 부대 미야자키 하치로가 전사, 벳푸 신스케가 다리에 중상을 입었다.
성동(城東)회전(會戰)[편집]
기리노 도시아키는 4월 14일, 구마모토대 대대장 이케베 기치주로의 건의로, 니혼기(二本木) 에 있는 본진을 기야마(木山)로 이동했다. 당시, 가노코기(鹿子木)의 나카지마 다케히코(中島健彦), 도리스의 노무라 오시스케에게 급사를 보내 가와지리의 패전을 전하고, 적당한 병사를 기야마로 철수하라고 전달했다. 사쓰마군 여러 부대가 구마모토 성, 우에키에서 차례대로 철퇴해온 4월 17일, 기리노측은 본진 기야마를 중심으로 우익에는 오즈, 나가미네(長嶺), 호타쿠보(保田窪), 겐군(健軍), 좌익에는 미후네에 걸쳐 20km정도의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 여기서 남하하는 신정부군을 격파, 전멸시키는 작전을 취했다. 이 때, 사쓰마군이 본진의 기야마(현재의 마시키 정)를 둘러싼 형태였다. (약 8천명) 이에 대항하는 신정부군도 야마가타군등이 구마모토성에서 일으킨 군의로 각 여단으로 나누었다. (합계 약 30000명)
사쓰마군 최우익 오즈에는 오노 오시스케가 지휘하는 부대가 배치되었다. 4월 20일 새벽, 제1, 2, 3여단이 연계하여 오즈가도로 진격했지만 오노의 여러부대는 분투하여 이를 방어, 그 상태 그대로 해가 지게 되었다.
4월 19일 구마모토 진다이, 별동 제 2,5여단은 연계, 겐군지구의 노베오카(延岡)부대를 공격했다. 노베오카 부대는 교즈카(京塚)를 지키면서 건투했으나 탄약이 떨어져 후방으로 후퇴, 대신 고노 슈이치로 중대의 역습으로 신정부군을 격파했다. 신정부군은 별동 제 1여단에서 지원을 받았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다. 더욱 더 신정부군을 지원을 받아 사쓰마군의 성채 2개를 빼앗았지만 사쓰마군이 우위인 채로 해가 지고 말았다.
별동 제 5여단의 주력은 4월 20일, 호타쿠보지구의 사쓰마군을 공격했다. 오후3시에는 맹렬한 화력을 집중해서 사쓰마군의 선진을 돌파, 후진으로 다가섰지만 나카지마가 지휘하는 사쓰마군의 역습으로 인해 좌익부분이 모두 붕괴되고 말았다. 배후에 공격을 받은 신정부군은 겨우 포위를 벗어나 후퇴했다. 이 결과, 별동 제 5여단과 구마모토 진다이의 연락은 밤이 되어서도 두절된 채 였다.
나가미네지구의 기지마는 발도대를 이끌고 전진, 별동 제 5여단의 좌익을 돌파, 구마모토성으로 돌입했다. 구마모토성에 있던 야마가타 군은, 시나가와 야지로에게서 신정부군고전의 보고와 오야마 소장에게서 사쓰마군이 구마모토에 돌입할 우려가 있다는 보고를 듣고, 급히 구마모토성에 있던 예비 부대 제 4여단을 전선에 투입시킨 상태였다.
사쓰마군의 우익인 미후네에는 사카모토(坂元)가 지휘하는 여러부대가 구마모토에 들어간 신정부군과 교대하는 형태로 진주해왔다. 별동 제 3여단은 4월 17일, 구마모토에서 미후네를 공격하기를 반복했다. 사카모토의 부대는 이 공격에서는 퇴각했지만, 이에 계속해서 별동 제 1,2,3여단의 서,남,동쪽에서오는 포위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미후네에서 패퇴했다.
양군의 충돌은 4월 19, 20일에 신정부군이 사쓰마군에 공격을 시작으로 전투는 단번에 구마모토 평야지역으로 이르렀다. 먼저 사쓰마군 가장 좌익의 미후네가 무너지고, 20일 밤에는 가장 우익인 오즈의 노무라부대도 퇴각하여 다음날 21일 이른 아침, 제 1,2여단은 오즈에 진입, 계속하여 사쓰마군을 추격, 작은 전투를 거듭해 기야마로 진출하였다. 제 3여단은 오즈로 진출, 그곳으로 본진을 옮겼다.
이처럼 '성동회전'에서는 사쓰마군은 우익에서는 패했지만, 우익의 나가미네, 호타쿠보, 겐군에서는 계속 우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정부군은 오즈와 미후네에서 사쓰마군 본진의 기야마를 협격하는 형세를 취했다. 이에 대항하여 기리노는 기야마에서 죽을 각오로 결전을 할 셈이었다. 하지만 노무라 오시스케, 이케베의 필사의 설득으로 기리노는 생각을 바꾸어 본진을 동쪽의 야베마치(矢部町, 현재의 야마토 정)으로 이전하기로 결정, 스스로 사쓰마군 퇴각부대의 후미를 맡았다. 이리하여 본진이 후퇴함으로써, 우세였던 사쓰마군 우익 각 부대도 동쪽으로 후퇴시킬 수 밖에 없었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래 최대의 야전인 '성동회전'은 불과 하루의 전투로 결착이 났다.
사쓰마군의 세 지역 반거책과 히토요시 공방전[편집]4월 21일, 사쓰마군은 야베마치에서 열린 군의에서 무라타 신파치, 이케노우에가 대대 지휘장을 사퇴, 본진의 가까운 진영에서 열리는 군의에 참여할 것, 전군을 중대편제로 할 것, 세 주의(사쓰마 국, 오스미 국, 휴가 국)반거책을 정할 점, 히토요시를 그 근거지로 하는 점 등을 결정했다. 이 후 당일, 사쓰마군은 전군을 양쪽으로 나누어 시하라(椎原)를 넘어 히토요시 분지로 퇴각했다.
4월 27일, 히토요시 분지로 들어온 사쓰마군은 본진을 히토요시에 두었다. 28일에 에시로(江代)에 도착한 기리노는 여기에 출장 본진을 두고 군의를 열었다. 에시로 군의에서 정해진 사항은 히토요시에 병원이나 탄약 제작소를 설치할 것, 각 방면에 여러 부대를 배치하는 점 등으로 순차적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이 때, 기리노가 히토요시를 중심으로 남하, 양 날개를 펼치는 형태로 사쓰마군을 배치했다.
간세(神瀨)방면[편집]
5월 8일, 헨미, 고노 슈이치로, 히라노, 후치베는 각자 4개의 부대를 이끌고 간세(神?) 에비라세(??)방면으로 향했다. 신정부군과의 전투는 5월 9일에 시작 됐지만, 15일에는 하치쿠 대(破竹隊)의 아카쓰카 겐타로(赤塚源太?)이하 1개 중대가 신정부군에 항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간세 주변에서의 양군의 공방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6월 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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