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184) 한나라 요동태수가 군대를 일으켜 우리를 쳤다.
왕은 왕자 계수(須)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은 친히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나라 군대와 좌원에서 싸워서 이겨 벤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삼국지』‘공손도전’에 의하면
공손도는 요동태수로 부임한 후,
동쪽으로 고구려를 치고
서쪽으로 오환을 공격하여 위엄을 해외에 떨쳤다.
또 요동군을 갈라 요서중료군遼西中遼郡을 설치하고 태수를 두었으며,
바다를 건너
동래東萊의 여러 현들을 거두고
영주자사營州刺史를 두었다.
스스로 요동후, 평주목에 올랐다.
그 후 고구려에서 발생한 ‘발기의 난’으로 요동 땅을 모두 차지한 공손씨 정권은
공손도(재위 189~204), 공손강(재위 204~220), 공손공(재위 220~228),
공손연(재위 228~238)으로 이어지며 50여 년 동안 하북성 요동 땅을 지배하게 된다.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倭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세 종족이 있으니,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세째는 변한인데,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 한韓’
(후한의) 환제·영제 말기에는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후한의) 군·현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군현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유입되었다.
건안 연간(A.D 196~220)에
공손강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장창 등을 파견하여 한漢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
(한·예에 있던)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에 복속되었다
『삼국지』‘위지동이전 한韓’
『삼국지』‘무제기’와 ‘공손도 전’에 따르면
건안 12년(207년)
위나라의 조조가 3군 오환을 정벌하고
유성(柳城, 현재의 북경 부근임.통설은 요령성 조양으로 보고 있다)을 도륙했다.
원소의 아들인 원상 등이 요동으로 달아나니
공손강이 원상을 참수해 그 수급을 보냈다.
조조가 공손강을 양평후에 봉하고 좌장군으로 임명했다.
공손강이 죽자 아들인 공손황과 공손연 등이 모두 어렸으므로
그 무리들이 공손공을 요동태수로 삼았다.
황초 원년(220년), 조조가 죽고 조비가 제위에 올라
공손공을 거기장군, 가절로 임명하고 평곽후平郭侯로 삼았다.
당초 공손공은 병으로 음경이 소실되어 고자가 되었고,
유약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다.
태화 2년(228년), 공손연이 공손공을 위협하여 그 지위를 빼앗았다.
태화 7년(233년) 공손연은 오나라 사자 장미, 허안 등을 참수하여 위나라로 보내고
대사마에 임명되고 낙랑공에 봉해졌다.
(234년) 손권이 사굉과 진순을 고구려에 보내어
고구려 왕 고궁高宮을 선우單于로 책봉하게 하자,
진순 등이 안평구安平口에 도착하였다
『삼국지』‘오서’
10년(236년) 봄 2월, 오나라 왕 손권이 사신 호위를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왕이 그 사신을 억류했다가,
가을 7월에 그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전하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서기 234년 제갈공명 사후 촉한의 세력이 약화되자,
위나라는 236년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공손연을 토벌하기로 했다.
경초 원년(237년) 유주자사 관구검을 파견하였으나,
관구검 등이 싸움에 불리하여 돌아왔다.
이듬해 봄,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 사마의)을 보내 공손연을 쳤다.
이때 고구려도 주부 대가가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도왔다.
사마선왕은
고죽국을 지나고
갈석을 넘어
요수를 건넜다.
공손연은 요동 양평성에서 항거하다가 참수되었고,
이로서 낙랑‧ 대방‧ 요동‧ 현토 등이 모두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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