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동(好童, ? ~ 32년 음력 11월)[1]은
고구려의 제3대 국왕 대무신왕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갈사왕의 손녀이자 대무신왕의 차비(次妃)이다.
낙랑 정벌에 공을 세웠으나
원비(元妃) 소생의 이복동생 해우(훗날 모본왕)와의 태자 다툼에서 패하여 자살하였다.
아내 낙랑공주와의 이야기가 창작물의 주요 소재가 되고 있다.
출생[편집]
대무신왕과 그 차비에게서 태어났다.
생모는 갈사왕의 손녀이다.
얼굴이 아름답고 왕이 총애하여 호동이라 이름 지었다.
원비도 아들 해우가 있었는데 호동보다는 나이가 어렸다.
고구려 초기 왕족의 성씨는 고(高)씨[2]인지 해(解)씨[3]인지
불분명하므로 호동의 성씨 역시 명확하지 않다.
낙랑공주와의 혼인[편집]
32년(대무신왕 15년) 음력 4월,
호동이 옥저로 출타했을 때
낙랑왕 최리(崔理)를 만나 그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였다.
이후 호동 혼자 고구려로 돌아와 낙랑공주에게 사람을 보내
낙랑 무기고 안의 북과 나팔을 부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면 예를 갖춰 맞이하겠다고 하였다.
그 북과 나팔은
적이 침입하면 저절로 소리를 내는 물건이었다.
낙랑공주는 북을 찢고 나팔을 쪼갰으며
이에 호동은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리는 미처 대비하지 못하다가 고구려군이 성 밑에 와서야
그 침입과 딸의 배반을 알았다.
결국 자신의 딸을 죽이고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태자 다툼과 자살[편집]
대무신왕의 원비는 호동이 태자가 될 것을 염려하여 왕에게
‘호동이 자신을 예로써 대하지 않고 음행을 하려는 것 같다’고 거짓을 꾸며 헐뜯었다.
대무신왕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왕비가 울면서 자신의 목숨까지 걸자 호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이내 죄를 주려고 하였다.
어떤 자가 왜 스스로 해명하지 않느냐고 했지만
호동은
“내가 만약 변명을 하면 그것은 어머니의 악함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어떻게 효도라 할 수 있겠소?”
라는 유언을 남기고 칼에 엎드려 죽었다.
때는 대무신왕 15년 11월(음력)이었다.
다음달 해우가 태자가 되었다.
cf) 자명고란 아마도
경고 시스템일겁니다...
봉화로 전달된... 신호가 도달하면...
큰 북을 치는데...
이 큰북을 찢어
큰소리가 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아무래도 대응이 늦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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