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요서군(遼西郡)
료서군(遼西郡),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작은 강들이 48개이고 모두 합쳐 3416리를 흘러간다.
유주(幽州)에 속한다. 가구수는 7,2654이고 인구수는 35,2325명이다. 현은 14개이다.
1) 차려현(且慮縣), 고묘(高廟)가 있다. 왕망은 서려(鉏慮)라고 하였다.[1]
2) 해양현(海陽縣), 룡선수(龍鮮水)가 동쪽으로 봉대수(封大水)로 들어간다. 봉대수(封大水)와 완허수(緩虚水)는 모두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염관(鹽官)이 있다.
3) 신안평(新安平), 이수(夷水)가 동쪽으로 새(塞) 밖으로 들어간다.
4) 유성현(柳城縣), 마수산(馬首山)이 현의 서남쪽에 있다. 참류수(參栁水)가 북쪽으로 海로 들어간다. 서부도위(西部都尉)가 다스린다.
5) 영지현(令支縣), 고죽성(孤竹城)이 있다. 망(莽)은 령씨정(令氏亭)이라고 하였다.[2]
6) 비여현(肥如縣), 현수(玄水)가 동쪽으로 유수(濡水)로 들어간다. 유수(濡水)는 남쪽으로 해양현(海陽縣)으로 들어간다. 또한 로수(盧水)가 있어 남쪽으로 현수(玄水)로 들어간다. 왕망은 비이(肥而)라고 하였다.[3]
7) 빈종현(賔從縣), 망(莽)은 면무(勉武)라고 하였다.
8) 교려현(交黎縣), 유수(渝水)가 상류에서 새(塞) 밖에서 만나서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동부도위(東部都尉)가 다스린다. 왕망은 금로(禽虜)라고 하였다.[4]
9) 양락현(陽樂縣),
10) 호소현(狐蘇縣), 당취수(唐就水)가 도하현(徒河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11) 도하현(徒河縣), 망(莽)은 하복(河福)이라 하였다.
12) 문성현(文成縣), 망(莽)은 언로(言虜)라 하였다.
13) 임유현(臨渝縣), 유수(渝水)가 상류에서 백랑수(白狼水)를 받고 동쪽으로 새(塞) 밖으로 들어간다.
또한 후수(侯水)가 있는데 북쪽으로 유수(渝水)로 들어간다. 왕망은 풍덕(馮徳)이라 했다.[5]
14) 류현(絫縣), 하관수(下官水)는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또한 게석수(揭石水)와 빈수(賔水)가 있는데
모두 남쪽으로 하관수(官)로 들어간다. 망(莽)은 선무(選武)라 했다.[6]
⑧ 요동군(遼東郡)
료동군(遼東郡), 진(秦)에서 설치하였고 유주(幽州)에 속한다. 가구수는 5,5972이고 인구수는 27,2539명이다. 현은 18개이다.
1) 양평현(襄平縣), 목사관(牧師官)이 있다. 왕망은 창평(昌平)이라 했다.
2) 신창현(新昌縣),
3) 무려현(無慮縣), 서부도위(西部都尉)가 다스린다.[1]
4) 망평현(望平縣), 대료수(大遼水)가 새(塞) 밖을 나와서 남쪽으로 안시현(安市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1250리를 흐른다. 왕망은 장설(長說)이라고 했다.[2]
5) 방현(房縣),
6) 후성현(候城縣), 중부도위(中部都尉)가 다스린다.
7) 요대현(遼隊縣), 망(莽)은 순목(順睦)이라 했다.[3]
8) 료양현(遼陽縣), 대량수(大梁水)가 서남쪽으로 료양현(遼陽縣)에 이르러 료수(遼水)로 들어간다. 왕망은 료음(遼隂)이라 했다.
9) 험독현(險瀆縣),[4]
10) 거취현(居就縣), 실위산(室偽山)은 실위수(室偽水)가 나오는 곳인데, (실위수는) 북쪽으로 양평현에 이르러 량수(梁水)로 들어간다.
11) 고현현(高顯縣),
12) 안시현(安市縣),
13) 무차현(武次縣), 동부도위(東部都尉)가 다스린다. 왕망은 환차(桓次)라고 했다.
14) 평곽현(平郭縣), 철관(鐵官)과 염관(鹽官)이 있다.
15) 서안평현(西安平縣) , 망(莽)은 북안평(北安平)이라고 했다.
16) 문현(文縣), 망(莽)은 문정(文亭)이라고 했다.
17) 번한현(番汗縣), 패수(沛水)가 새(塞) 밖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5]
18) 답씨현(沓氏縣). [6]
[한서 흉노전]
연나라 또한 장성(長城)을 쌓아 조양(造陽)으로부터 양평(襄平)에까지 이르렀고 [5]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해 호(胡)를 방비했다.
이에 한나라가 마침내 하남 땅을 차지하여 삭방(朔方)에 축성하고
옛 진(秦)나라 때 몽념이 만든 새(塞)를 보수하며 하수에 의거해 방비를 굳건히 했다.
한나라는 또한 상곡(上谷)의 궁벽하고 외떨어진 조양(造陽) 땅을 버려 호(胡)에게 주었다.
(漢亦棄上谷之斗辟縣造陽地以予胡) [3]
이 해가 원삭(元朔) 2년(b.C 127)이다.
->조양땅은 한나라에서도 멀고 궁벽한 곳이었다...
흉노의 침략으로
겨우 황하강 이남땅을 수복하던 단계이므로...
->역사적으로 요동이라면
요동반도 전체를 말하는 같지만...
사실...연이 가장 강성할때
대요수유역을 잠시 점령한 것이다...
->한서지리지의 요서지역을 보면....
대부분 유수지방이 지금의 난하...
즉 장성 안밖의 지방일뿐이다...
->요동의 지명이라야,,
요하 유역의 지명일뿐이다...
->위만조선이 무너지고
잠시 한4군이 설치되었지만...
곧 밀려서 명맥만 유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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