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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 2.중세사

제2차 진주성 전투 [1593년, 7월 20일~27일]

by 사마르칸트 2016. 3. 12.


-1차 전투..


임진년 1592년 11월 8일(음력 10월 5일)부터 13일(그달 10일)까지 6일간에 전투에서..

약 3만의 왜군을 물리침..



-현재의 성터인 내성이 있고, 1591년 임난직전에 증축한 외성..

-외성을 증축함으로써, 성주민들의 수용능력은 크졌지만,

방어하기 힘든 거성이 되었다.




-진주성은


진주 남강변의 둔덕을 이용해 만들었다.


서쪽은 높고, 동쪽으로 낮아진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격전끝에 왜군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린다.




진주성터를 언뜻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실전적으로는 아주 잘 만든 성이다...




성의 서북은 경사가 가파른 높은 언덕이라


접근하기 힘들다.



북문부터...동문까지...


경사 40-50도의 가파른 둔덕위에


토성을 쌓은 형태이다..


성벽에 접근할려면...가파른 둔덕을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면서... 활에 노출되고..


올라가더라도...성벽을 넘을 사다리를 설치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유일한 약점은 동문이다...


여기에 모든 방어병력이 집중된다...


현재 북문은 평지이나..


이전에는 경사진 둔덕이 있었을 것이다.



성내는 무척 넓다...


수만의 사람이 피난해도 좋을 정도이다..


강을 끼고 있는 성은 강점이 많다...


강을 이용해 보급을 할수 있다.


물론 강 반대편에 우군이 있어야 가능하다..



우군이 호응했던


1차 진주성 전투와는 달리...


2차 전투에서는 거의 고립무원상태에서 전투가 진행된다.




-아군들마저 버린 전장...


-아무리 잘 만든 성이라도..고립무원에서는 버틸수 없는 것...


그냥 물러났으면..이런 희생이 없었을 것을..



-성내는 약 3천명의 병사와 6만의 민간인이 있었다 한다.


-적은 약 10만병...


-적은 성의 약점인 동문을 집중공격하고...


-주야...연속적인 공격으로


성내 방어군이 거의 고갈될 무렵...


기습적으로


가파른 서북문을 넘어 공격해온다....



-그들의 의기는 높지만...


불리할 때는 과감히 물러 날줄 알아야...



-전쟁은 명분으로 싸우는 게 아니다.


그들이 왜 성을 비우고 달아나지 않았는지 알기 어렵다.


왜병은 진주성 함락 후 이렇다할 전과가 없다...


즉...정유재란 발발후...


왜적 또한 조선에서의 전략적 승리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장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윗선의 압력으로 어쩔수 없이 진주성 공략에 나선 것이다...


왜군은 모든 전력을 기울여 공격해 올 것이라고


미리 경고까지 한다.


-당연히 성을 비우고...백성을 이끌고


적의 예봉을 피했어야 옳다.


많지도 않은 병력으로


굳이 적의 대병과 정면 대결한다는 것은


병법에 있지 않다.



진주성이 아무리 전술적으로 괜찮은 성이라고 해도...


이런 대병을 장기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참 어렵다...어리석은 역사의 선택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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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년 1593년 거의 모든 일본군을 동원한 10만과 800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함안, 반성, 의령을 차례로 점령하고 진주성 공격에 다시 나섰다.


-그 당시 명나라와 일본군이 화의를 교섭하고 있었는데,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통하여 전쟁이 속히 종결되기를 원하였던

조선은 사실상 협상에서 배제되었고,

조명연합군의 추격도 멈추었다.


일본군은 이 때를 이용하여 진주성을 총 공격 하였다.


-심유경이 이에 공격 중지를 요구하였으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번 공격은 보복전의 성격으로서

태합의 명령이 절대적이라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고니시는 도저히 조선측에 승산이 없으니,

차라리 진주성을 비워놓으면 일본군이 일시점령했다가

물러갈 것이라고 심유경 편에 충고까지 해 주었다.[1]



-진주성 안에는 수천 명의 병사만이 있었고,

9만을 넘어 10만에 육박하는 일본군과 비교하면 전투력은 전무했다.


-또한 당시 진주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대구, 남원, 상주의 명군들은 다 합쳐 봐야 1만 명을 상회할 뿐이라,

열 배 가까이 되는 일본군을 상대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명군은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수성을 포기하라고 권고했다.


-곽재우와 선거이, 홍계남 등 조선군 장수들조차도 진주 근교까지 갔다가

10만 대군을 보고 도저히 무리라고 판단하여 진주를 포기했다.


하지만 진주에 주둔하고 있던 진주목사 서예원, 방어사 황진 및 의병장들은

조정과 명군의 권고와 일본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주에 남아 싸울 것을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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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실록]



六月 19일 전

라병사 선거이와 홍계남(洪季南)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사태를 보고는,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가서 내면(內面)을 지키는 낫다고 하자,

김천일이 강력히 저지하였으나 (선)거이와 (홍)계남 등은 성을 나가 운봉(雲峰)에 진을 쳤다.



21일에 적 2백여 기(騎)가 동북 산 위에 출몰하였고


22일, 진시(辰時)에 적 5백여 기가 북산(北山)에 올라 진을 치고서 병위를 과시하였으나

 성안에서 출동하지 않자

사시(巳時)에는 적의 대부대가 뒤이어 와서 2기(起)로 나누어 1기는 개경원(開慶
院)의 산 허리에 진을 치고, 1기는 향교(鄕校) 앞길에 진을 쳤다.


처음으로 교전할 때 성안에서 왜적30명을 쏘아맞히니 적이 군대를 거두어 물러갔다.

초저녁에 다시 진격해 와서 한참동안 크게 싸우다
가 2경에 물러갔고 3경에다시 진격해 와서 5경이 되어서야 물러갔다.


이보다 앞서 성안에서는 적이 오려 한다는 것을 듣고서,

성남(城南)은 촉석(矗石)과 남강(南江)이 매우 위험하므로 적이 감히 범하지 못할 것이니

서북에 호(壕)를 파야한다고 여겨 해자(垓字)를 파서 물을 담아 두었으므로

적이 공격할 수 있는 곳은 동편뿐이 었다.


그런데 이때에 적이 그 해자를 파내어 물을 빼고서 다 마른 뒤에

흙을 운반하여 해자를 메워 큰 길을 만들었다.



23일 낮에 세 차례 공격해 온 것을 세 차례 물리쳤고 밤에 또 네 차례 공격해 온 것을 네 번 물리쳤는데,

적이 밤을 이용하여 일시에 크게 고함을 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성안에
서 어지럽게 쏘아대니 맞아 죽은 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24일에 적의 증원군 5~6천 명이 와서 마현(馬峴)에 진을 치고

또 5~6백 명의 증원군이 와서 동편에 진을 쳤다.


25일에 적이 동문 밖에 흙을 메워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토옥(土屋)을 세워 성을 내려다보고서 탄환을 비처럼 퍼부었다.

그러자 충청 병사 황진(黃進)도 성안에 높은 언덕을 쌓았는데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황진이 전복(戰服)과 전립(戰笠)을 다 벗고 몸소 돌을 짊어지고 나르니

성안의 남녀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축조를 도
왔으므로 하룻밤 사이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현자총통(玄字銃筒)을 쏘아 적굴(賊窟)을 파괴하였으나

적은 즉시 개수(改修)하였다.


이날 세 차례 진격해 온 것을 세 차례 다 물리쳤고 또 밤에 네 번 접전하여 네 번 다 격퇴하였다.



26일에

적이 나무로 궤짝을 만들어 생가죽을 씌워 각자 그 궤짝을 가지고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와서 성을 헐므로 성안에서 큰 돌을 밑으로 떨어뜨리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대니 적이 물러갔다.

적이 또 동문 밖에 큰 나무 두 개를 세워 그 위에 판옥(板屋)을 만들어놓고는

 그 위에서 많은 불화살을 성안으로 쏘아대니 성안의 초가집이 일시에 연달아 불에 타서 연
기와 불꽃이 하늘까지 뻗어 올랐다.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이 겁을 먹고서 당황하니, 김천일이 의병부장(義兵副將) 장윤(張潤)을 임시 목사로 삼았다.

때 날씨가 크게 궂어 궁시(弓矢)가 모두 느슨 하게 풀리고 병력도 매우 지쳤다.

이날 낮에 세 번 싸워 다 물리쳤으며, 밤에 또 네 번 싸워 네 번 다 물리쳤다.


27일에 적이 동문과 서문 밖 다섯 군데에 언덕을 쌓고

그 위에 대나무를 엮고 붕(棚)을 만들어 놓고서 성을 내려다보고 탄환을 쏘아대니

성안에 죽은 자가 3백여 명이나 되었다.

또 큰 궤짝으로 사륜거(四輪車)를 만들어 적 수십 명이 각각 철갑을 입고 궤를 옹위하고

나와서 철추(鐵錐)로 성을 뚫으려 했다.


이때 김해 부사 이종인(李宗仁)의 힘이 군중(軍中)에서 으뜸이었는데

(이)종인이 연거푸 5명의 적을 죽이니 나머지 적이 모두 도주하였다.

성안의 사람들도 기름을 부은 횃불을 계속 던지니 적들이 다 타죽었다.


초저녁에 적이 다시 신북문(新北門)으로 침범해 왔는데

종인이 그 수하(手下)와 더불어 힘을 다해 싸워서 많은 적을 물리치자 적이 물러갔다.



28일 여명(黎明)에 종인이 지키던 성비(城陴)로 돌아가 보니

전날 밤에 서예원이 야간경비를 소홀히 하여 적이 몰래 와서 성을 뚫었으므로

성이 무너지려 하였다. 종인이 크게 노하여 서예원을 꾸짖었다.

적이 성 밑까지 바싹 다가왔는데 성안 사람들이

모두 죽을 각오로 힘을 다해 싸웠으므로 죽은 적이 매우 많았으며,

그 중에 적의 장수 하나가 탄환을 맞고 죽자 뭇 적이 그 시체를 끌고 물러갔다.


진이 성안을 굽어보며 ‘오늘 전투에 죽은 적이 1천여 명은 충분히 될 것이다’ 고 말하고 있는데,

성 밑에 잠복하고 있던 적이 위로 대고 철환을 쏘았다.

그 철환이 목판에 비껴 맞고 퉁겨 나와서 황진의 왼쪽 이마에 맞았다.

이때 황진과 장윤의 역전이 여러 장수 중에 으뜸이라고 칭해졌기 때문에 온

 성안이 그에 의지하여 중히 여겼으므로 황진이 탄환을 맞고 죽자

【혹자는 황진이 탄환을 맞았으나 죽지 않았고 성이 함몰될 때 피살되었다고 하였다】

온 성안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29일에 서예원으로
미시(未時)에 비로 인하여 비로 인하여 동문쪽의 성이 무너져

적이 개미떼처럼 붙어 올라오자 종인이 수하의 병사들과

더불어 궁시는 놓아두고서 창과 칼을 들고서 상대해 육박전을 하여 쳐 죽인

 적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니 적이 물러갔다.


또 서북문에서 적이 고함을 치며 돌진해 오자 창의사의 군사가 무너져 흩어져 모두 촉석루로 모였다.


적이 성으로 올라와서 칼을 휘두르며 날뛰자

서예원이 먼저 달아나니 제군(諸軍)이 일시에 궤산되고

종인도 탄환에 맞아 죽었다.


좌우가 김천일을 부축해 일으켜서 피하기를 권하였으나, 천일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좌우를 돌아보며 ‘나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하


마침내 아들 김상건(金象乾)과 더불어 서로 끌어안고서 강으로 몸을 던져 죽었다.


적이 본성(本城)을 무찔러 평지를 만들었는데 성안에 죽은 자가 6만여 인이었다.


【어떤 이는 8만여 인이라 하고, 또어떤 이는 3만여 인이라고 한다.

뒤에 감사 김륵(金玏)이 사근찰방 이정(李瀞)을 시켜 조사하게 하였는데 성안에 쌓인 시체가 1천여 구이고,

촉석루에서 남강의 북안까지 쌓인 시체가 서로 겹쳤으며 청
천강(菁川江)에서 옥봉리(玉峰里) •천오리(遷五里)까지 죽은 시체가 강 가득히 떠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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