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廣開土王, 374년 ~ 412년, 재위: 391년 ~ 412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왜 이분이 위대한 왕이라 불리는 지 알것이다.
장성밖의 유일한 나라...고구려 홀로 있었다.
단군조선이래로 옛땅을 모두 수복하였다.
광개토왕(廣開土王, 374년 ~ 412년?, 재위: 391년? ~ 412년?)[1] 은 고구려의 제19대 태왕이다.
이름은 담덕(談德) 또는 안(安)으로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崗上廣開土地好太聖王) 등의 시호가 전해진다.
또한 광개토왕릉비에는 연호인 영락(永樂)을 왕호로 사용한 영락태왕(永樂太王)[2] 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중국과 일본 등지에는 호태왕(好太王)으로 알려져 있다.
생애[편집]
38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391년에 즉위하였다.
《삼국사기》에는 392년에 즉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광개토왕릉비의 기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3] 연호는 영락이다.
백제와의 전쟁[편집]
광개토왕은 392년 7월에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의 북쪽 변경을 공격해서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4]
진사왕은 광개토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다수 함락되었다.
8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해 오자, 장수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다.
승기를 탄 고구려는 10월에 백제 북방의 천혜의 요새이자 중요지인 관미성(關彌城)을 20일에 걸친 포위 끝에 쳐서 함락시켰다.[5]
이 해 12월 백제 진사왕이 구원에서 사망하고 아신왕이 즉위하였다.
백제는 빼앗긴 성을 회복하기 위해 계속해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393년 8월에 아신왕은 진무를 좌장으로 삼고 목책에 이르렀다.
광개토왕은 백제의 공격을
393년에는 관미성,
394년에는 수곡성(水谷城)에서 격퇴하였으며,
394년에 고구려는 백제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남쪽 변경에 7개의 성을 쌓았다.[6]
395년에는 패수(浿水)에서 백제군 8000여 명을 생포하거나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7]
396년 고구려는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아리수(阿利水) 이북의 58개 성,
700여 개 촌락을 점령하고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였다.
이때 백제 아신왕에게서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항복을 받아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고 노비 일천 명을 잡고 개선하였다.(→고구려 백제 전쟁)
거란 및 숙신 정벌[편집]
백제와의 전쟁과 더불어, 거란을 정벌하여
소수림왕 8년(378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잡혀갔던 1만 여 명의 백성들을 되찾는다.(392년[8] 9월) [9]
395년에는 염수(鹽水)[10] 로 진출하여 거란의 일파로 추정되는 패려(稗麗)를 정벌하여
6~700영을 쳐부수고 수없이 많은 소, 말, 양떼를 노획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거란 정벌(392년)과
광개토왕릉비의 비려 정벌(395년)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11]
한편 398년에는 숙신을 정벌하여 동북 국경 지대를 안정시켰다.
신라 구원과 남방 진출[편집]
이후 백제가 왜(倭)에 태자 전지를 보내는 등 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적할 준비를 한다.
광개토왕은 399년에 평양(平壤)으로 순행하였다.
백제와 왜는 신라를 공격하고, 신라(新羅)는 평양으로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광개토왕은 400년에 신라에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왜군을 물리쳤다.
이때 왜군은 금관가야 종발성까지 퇴각하였고,
고구려 군은 금관가야 지역까지 쫓아가 왜군을 격퇴시킨다. 학
계에서는 이때 금관가야의 세력이 급속도로 약해져,
금관가야가 주도하던 전기 가야 연맹이 붕괴하고
대가야가 주도하는 후기 가야 연맹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광개토왕은 400년에 신라를 구원하면서 신라 왕을 내물 마립간에서 실성 마립간으로 교체한다.
이후 고구려 군은 백여 년 동안 신라 땅에 머물려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신라는 고구려에게 조공하는 보호국이 된다.
404년에는 대방(帶方) 지역으로 쳐들어 온 백제와 왜군을 궤멸시켰다.
후연과의 전쟁[편집]
한편 광개토왕은 모용씨(慕容氏)의 후연(後燕)과도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400년 2월에 고구려 주력군이 신라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있을 때
후연의 왕 모용성(慕容盛)은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한다.
이에 광개토왕은 보복전을 펼쳐
402년에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였으며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연군(燕郡)까지 공격하였다.[12]
이를 회복하기 위해 쳐들어온 후연군을
405년 요동성,
406년 목저성(木抵城)에서 격파하여 요동 장악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407년에는 5만 군대를 동원하여 후연 군대를 격파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돌아오는 길에 6개 성을 점령하였다.[13]
후연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연(南燕)과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연이 멸망하고 고구려계인 고운(高雲)이 북연(北燕)을 건국하자
408년에 우호관계를 맺음으로써 서쪽 국경을 안정시켰다.[14]
동부여 정벌[편집]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공격하여 굴복시켰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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