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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 -400-600; 남북조

프랑크 왕국[481~843년]-로마 이후

by 사마르칸트 2018. 11. 28.

프랑크 왕국

프랑크 왕국(라틴어: Regnum Francorum, 독일어: Fränkisches Reich, 프랑스어: Royaumes francs, 이탈리아어: Regno franco, 영어: Francia)은


5세기 말 게르만족의 한 부족인 프랑크족이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아우르는 지역에 세운 왕국이다.


이 왕국은 현재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형성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프랑크 왕국은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탈리아의 동고트족과 아프리카의 반달족을 격멸하고,

아랍인이 에스파냐의 서고트왕국을 제거한 와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존속·확장한 게르만족의 정치체제였다.


이 왕국의 영토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 경제공동체 지역(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베네룩스 3국)과 대체로 일치한다.


따라서 1950년대에 여기에 속하는 나라들은

기꺼이 카롤루스 대제의 기독교화된 서구를 거론했으며

카롤루스 대제의 수도 아헨에 카롤루스 대제상(償)을 제정했다.[1]



프랑크 왕국이 수립된 5세기 말은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고,

걸림돌이 사라진 서유럽으로 게르만족이 대거 이동하면서

국가를 수립하던 혼란의 시기였다.


게르만족이 갈리아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의 일이었지만,

이 시기에는 부족 단위로 대규모로 이동하였다.


이 시기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동쪽으로부터 훈족이 압박해온 것이 이유였지만,

로마 제국이 더 이상 이들을 막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게르만족들은 이동 후에 자신들의 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서고트족, 동고트족, 반달족 등은 멸망하였고,

부르군트족의 부르군트 왕국은 백년 전쟁 후에 프랑스로 통합되었다.


게르만족의 그 흔적을 남긴 것은

프랑크족의 프랑크 왕국과

앵글로-색슨족의 잉글랜드 정도이다.


한편,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일으킨 훈족은

5세기 중엽에 가장 세력을 떨쳐

아틸라의 지휘 아래 서쪽은 라인강에서 동쪽은 카스피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루었지만,

 453년 아틸라가 죽은 후 왕자들의 분열과

게르만 여러 부족의 반란으로 훈 제국은 무너지고,

다른 민족에 동화됨으로써 전통이 사라져 버렸다.



반면에 프랑크족은 기존의 근거지였던 라인강 하류 지역을 계속 유지하면서

부족의 세력권을 근접한 지역에 자신들을 이동이 아니라

복사한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기존 게르만계 중소부족을 통합하고,

갈리아의 원주민인 로만-갈리아인들을 통치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훈족의 쇠퇴 이후,

프랑크족은 클로비스 1세가 메로빙거 왕조를 개창하면서 481년에 왕국을 수립하게 된다.




프랑크족은 라인강 하류 유역에서 차츰 용병과 그 밖의 형태로 로마제국 영내에 침입하여,

5세기에 들어서자 몇 개의 프랑크족 소왕국이 건설되었다.


5세기 말기에 프랑크 왕국이 성립되어서 메로빙거 왕조가 군림했다.


특히 창시자 클로비스왕은 훈족의 격퇴에 공을 세워 라인강에서 피레네에 이르는 대영토를 수중에 넣었다.


더욱이 동게르만 제족(諸族)과는 달리,

 클로비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은 프랑크 왕국 발전의 열쇠가 되는 사건이기도 했었다.


한편 클로비스는 로마 황제의 관리로서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왕국도 분할 상속제나 왕위의 공동세습제 등에 의해서 분열과 내란에 시달렸다.


그러나 후의 카톨링거 왕조의 동향에 비추어서 생각할 때,

프랑크 왕국의 성립은 서유럽 세계의 형성과

그리스 교회에 대한 로마 교황의 지위 확립,

그리고 봉건제의 성립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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