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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과 망명[편집]자유 연애론, 무정 발표[편집]
소설 무정 초판본 (1913년)1917년 3월 와세다 대학교 철학과에 특대생으로 진급했으나 결핵을 앓아 고생했고, 격심한 과로 끝에 결핵과 폐질환이 심해졌다. 이때의 친구로는 안재홍, 송진우 등이 있었다. 그는 자유 연애론을 주장, 결혼할 자유, 연애할 자유가 있음을 역설했다. 그는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을 할 권리가 있음을 전제하고, 부모의 동의, 허락이 없더라도 연애하고,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1917년부터 매일신보에 연재한 장편 소설 무정은 청년층과 지식인층 사이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 화제가 되었다. 많은 청년들이 그의 집에 찾아와 팬이라며 서명을 받아가는가 하면, 이광수를 만나기 위해 그의 집 근처에서 노숙을 하거나 여관에서 생활하며 난처한 이광수가 그들을 설득한 뒤 돈을 손에 쥐여서 되돌려보내기도 했다. 작품 무정에서도 그는 낭만주의적인 사랑과 자유 연애를 옹호하였다.
1917년 1월 1일∼6월 4일 매일신보에 연재될 당시에는 화제만큼이나 논란도 컸다. '부도덕한 작품'이라는 중장년 독자층의 비난을 반박하는 연설회가 열리기도 했다.[20] 유림은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에 무정의 신문 연재를 중단시켜 달라는 진정서를 보내기도 했다. 이후에도 새로운 시대사조를 반영해 청년남녀의 신연애관과 이에 따른 번민과 갈등을 옮겨놓은 장편이 잇따라 선을 보였다.[20]
자유연애를 다룬 '무정'이 매일신보에 연재되는 동안 여학생들의 편지가 쏟아졌다. '영채가 불쌍하다', '형식이 영채를 버리면 안 된다'는 동정과 호소였다.[21] 중추원 양반들은 '이광수란 어미 아비 없이 자란 상놈의 자식'이라며 연재를 중단하라는 진정서를 냈다.[21] 가정 교육이 안된 상놈의 작품이 어린 자녀들의 도덕과 인륜을 흐리게 만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성리학자들의 항의 전화와 규탄 집회도 계속되었다. 그런데 월 5원이던 춘원의 고료는 10원으로 뛰었다.[21] 훗날 김동인이 동아일보에 소설 '젊은 그들'을 쓸 때 편집국장이던 이광수는 “작가의 자존심은 죄다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독자 본위로 써 달라.”고 주문했다.[21]
1910년대 이광수의 ‘무정’은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이자 연애소설이고 춘원의 출세작이었다.[20] 이전에도 조선 사회에 장편 소설과 신문에 연재되는 장편 연재 소설은 존재하였지만, 그의 작품 무정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장편소설[22]'로 평가된다. 매일신보의 연재를 마친 뒤 회동서관에서 무정을 정식 출간하였다.[23]
작품, 강연 활동[편집]문필 활동을 통해 이광수는 기존의 도덕과 윤리에 대한 강렬한 비판자로 등장하여, 근대주의적인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역설했으며, 그러한 주장은 철저하게 진화론적인 사고에 토대를 두었다. 그는 초기의 작품과 칼럼, 강연을 통해 허위와 이름뿐인 유교의 허례허식과 권위주의적인 문화를 조롱하였다. 장편 무정(1917)을 비롯하여, 장편 개척자 (1918), 단편 무정 (1910), 어린 벗에게(1917), 윤광호 (1918), 논설 자녀중심론(1918), 위선 수가 되고 연후에 인이 되라(1917) 등이 이 시기의 주요 저작들을 통해 사회 부조리를 지적하였다.
그는 작품과 강연을 통해 인간은 소중한 존재라는 점과, 여자도 사람이며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였다. 여자의 해방은 가정의 집안일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여자의 해방은 자유 연애로서 이룩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이에 유교 사상가와 조선 선비들은 풍속을 해치고 인륜을 어지럽힌다며 비난을 가하였다. 그는 성리학이 7백년간 조선 사회에서 허례허식과 위선, 이름 뿐인 도덕과 겉치레만 남겼고, 나만이 옳다는 관점은 당쟁과 배척의 원인이 되었다고 공격하였다.
성리학자들과 선비들의 비난은 계속되었고, 그가 유년 시절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것을 문제삼아 상놈, 호로자식이라는 등의 극언을 퍼붓는다. 그러나 성리학자들과 시골 선비들의 비방에 굴하지 않고 그는 계속 인간은 평등하며, 남녀는 평등하며, 사람이 귀중한 것이라는 견해를 설파하고 다녔다.
귀국과 애정 도피[편집]
후처 허영숙
(그는 한국의 초기 서양식 산부인과 의사의 한사람이었다.) 가부장제, 결혼, 동거혼, 여성주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격심한 과로로 폐질환과 결핵이 악화되었으나 병원 진료비가 없어 휴학하고 1917년 말 요양차 귀국, 《매일신보》 특파원 자격으로 한반도 남부지역 오도답파여행(五道踏破旅行)을 다녔다. 1917년 장편 소설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청년층의 호평을 받았다.
1918년 폐병이 재발하여 쓰러졌으나, 허영숙(許英肅)의 헌신적인 간호로 건강을 되찾았다. 이광수는 폐병 간호가 인연이 돼 의사 허영숙과 결혼했다.[24] 비록 폐병은 완쾌돼지 못하였지만 허영숙의 극진한 간호에 감격한 이광수는 그와 결혼을 약속한다.
이광수 (1919년)그런데 가부장제도와 중매 결혼에 심각한 회의를 품던 이광수는 가부장제도를 비판하고 자유로운 결혼 생활을 말하고, 아버지와 할아버지 중심의 가정에서 가족 구성원 모두의 발언권을 동등하게 부여해야 한다는 것과 애정 없는 결혼을 유지할 이유는 없으며 애정이 있는 결혼이라고 해도 애정이 사라진다면 언제든 이혼할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소문이 확산되면서 곤욕을 당했다. 또한, 그 해에 전통적인 부조중심의 가부장적인 가족제도를 비판하고, 봉건적인 사회제도를 비판하는 《신생활론》, 《자녀중심론》등의 논문을 발표하고, 가족 간의 평등한 발언권을 말하여 다시 많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는 여성에게도 자유와 권리가 소중하다는 주장을 했고, 여자가 해방되는 길은 오직 가사에서 해방되는 것과 자유 연애에 있음을 천명하여 다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백혜순과 이혼에 합의한 뒤 1918년 10월 여의사 허영숙과 장래를 약속하고 제물포항에서 배를 타고 베이징으로 애정도피를 떠났다. 이 애정도피 사건으로 그는 교사라는 사람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타락, 음란,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세간의 질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독립 운동과 사회계몽 활동[편집]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편집]독립운동 준비[편집]
그가 2·8 독립 선언을 낭독한 도쿄 히비코 공원 민족자결주의, 신한청년당, 2·8 독립 선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8년 백혜순과 이혼하고 4년 연하의 양천 허씨 허영숙(許英肅)과 재혼하였다. 허영숙은 일본 유학 당시 만나 연애하던 여성이었다. 그러나 1918년 11월 중순경 우드로우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14원칙에 의거한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였다가, 다음달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였다. 출국 직전 그는 윤치호를 찾아가 대표자 파견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윤치호는 그에게 여비만 주고, 운동 참여를 거절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몇몇 동지들을 만나보고 그 길로 다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다.[25] 일본 체류 당시 그는 글을 잘 지어서 유명하였다. 당시 유학생의 한 사람인 최태영은 후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 '2.8 선언'은 이광수가 썼는데 춘원은 글을 잘 써서 당시 이미 유명했지요.[26]'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1918년 12월부터 그는 2·8 독립 선언을 치밀하게 준비, 주도하였다. 상하이와 도쿄에 있던 유학생, 청년 독립운동가들과 2·8 독립운동 사건을 모의하면서 연락차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가담하였고, 여운형을 당수로 삼아 조직된 신한청년당에도 관여하였다. 도산 안창호선생의 민족주의 운동에 감화를 받아 일본 와세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1919년 2월 백관수(白寬洙), 김상덕, 최팔용(崔八鏞), 김도연, 송계백(宋繼白) 등과 재일 조선 청년 독립단(在日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였다. 또한 여러 선전 홍보물 등을 발간, 인쇄하여 양심적인 지식인 계층의 각성과 협력, 참여를 적극 호소하였다.
2.8 독립 선언[편집]
1919년 12월,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기관지인 『신한청년』의 창간호 표지이다. 주필은 이광수(李光洙)였다.
단재 신채호 신한청년당, 2·8 독립 선언, 3·1 만세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상하이에서 그는 김규식, 신채호, 신성모, 신규식, 신익희, 윤보선 등의 청년 지사들을 만났다. 한편 신채호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김규식이 문법문제를 고집하다가 뜻만 알면 그만이 아니냐는 신채호와 심하게 싸운 뒤, 그가 대신 신채호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김규식은 상하이에서 신채호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신채호는 영어를 읽을 때마다 우리말 조사(助詞)를 꼭 넣었다. 'I는 am a boy'라고 하는 식이었다.[27] 문장마다 '하여슬람'이라며 한문 읽듯 토도 달았다. 김규식은 매번 "발음을 똑바로 하라"고 신채호에게 야단쳤다.[27] 신채호는 "발음은 쓸데없으니 뜻만 가르쳐달라 해도 까다롭게 군다"며 투덜댄 뒤 영어 선생을 소설가 이광수로 바꿨다.[27] 상하이에서 만난 인사들 중 김규식과는 호형호제 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같은 불우한 환경에 멸시와 고난을 받고 자란 점 등에 대해 동병상련을 느꼈고 김규식은 더욱 그를 친동생처럼 각별하게 챙겨주었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 당원으로 일본에 파견, 상하이를 출발하여 베이징을 거쳐서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재일본 한국유학생들을 만나고 2월 8일 2·8 독립 선언의 선언문을 기초[1] 하였다.
그는 도쿄에서 조선유학생들과 독립운동 거사에 관한 모의를 하고 스스로 도쿄의 조선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문을 작성한다.[25] 2월 8일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인 신익희, 최팔용, 김도연, 김준연, 안재홍, 윤치영, 나혜석, 김상덕 등과 함께 2·8 독립 선언을 발표한다.
“ 1. 본단은 일한합병이 오족의 자유의사에 출치 아니하고 오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요란케 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2. 본단은 일본의회 및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야 대회의 결의로 오족의 운명을 결할 기회를 여하기를 요구함.
3. 본단은 만국평화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오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함. 우 목적을 전달하기 위하야 일본에 주재한 각국대사에게 본단의 의사를 각해정부에 전달하기를 요구하고 동시에 위원 3인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함. 우위원은 기히 파견된 오족의 위원과 일치행동을 취함.
4. 전제항의 요구가 실패될 시에는 일본에 대하야 영원히 혈전을 선함. 차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오족이 기책을 임치 아니함.
”
? 2·8 독립 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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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독립선언서
학생 시위대는 춘원 이광수가 기초를 세운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한 뒤 거리행진을 벌이려 했다.[28] 그러나 일본 경찰이 막아섰고 양측 사이에는 격투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최팔용 등 시위 학생 60여 명이 체포됐다.[28]
경찰이 들이닥치자 그는 변장하고 재빨리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조선의 독립은 전체 조선민족의 의사라는 것을 세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다.[25] 중국에 도착하자 그는 영자신문 차이나 프레스(미국계)와 데일리 뉴스(영국계)를 찾아가 동경 조선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운동을 알려 세계에 보도케 한다. 춘원은 그 두뇌의 뛰어남으로 해서 후일 임시정부에서도 큰 비중을 두게 된다.[25] 다시 도쿄로 돌아온 그는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조선반도 내에서 사건을 일으켜야 한다는 김규식의 발언에 적극 호응, 공감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칼럼과 전단지를 익명으로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활동에 가담한 이광수의 와세다 대학 학적부 이름은 검은 줄로 지워져 있었는데 퇴학사유란에는 「학비미납」이라는 내용의 일본 한자로 적혀 있었다.[29] 이광수와 최팔용, 송계백 등 2.8 독립 선언 주동자 3인의 학적부는 1996년 케이블 TV Q채널의 취재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담당PD인 김권재는 '다니구치 구나오 와세다대학 교무과장이 학칙상 공개가 불가능하지만 이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역사적 인물이므로 특별히 공개한다며 보여주었다.[30]'고 밝혔다.
3월 1일 국내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은신해 있다가 변장을 하고 중국인을 가장하여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상하이 임시 정부 활동[편집]
충칭 임시정부 청사 상하이 임시정부, 독립신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9년 4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설립에 참여하였고,[31] 임정 공보국장으로 임정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사장을 겸하며 임시정부의 선전활동을 담당했다. 또한 겸임 《독립신문》 주필과 신한청년당 기관지 《신한청년》 주필로도 활동하였다.[32] 상하이에 와서 그는 다시 홍명희를 만났다.
1919년 5월 안창호가 상하이로 오자, 다시 안창호를 만나 그의 민족운동에 크게 공명하여 안창호를 보좌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창립 발기인이 되고,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 주필에 취임하고 애국적 계몽의 논설을 많이 쓰면서 안창호의 인도로 주요한(朱耀翰), 박현환 등과 독서·정좌·기도를 함으로써 수양생활에 힘썼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하면서 상하이에 있을 때 그는 실력양성을 부르짖으며 “독립국민의 자격자를 키우라.”라는 안창호의 권고에 감화하여, 이광수는 1920년 흥사단에 가입하고 문학 활동과 저술을 통한 국민계몽을 하기도 했다.
독립신문, 1919년 8월 21일자1919년부터 그는 잡지 《독립》지를 발행하였고, 사장 겸 주필이었고, 또한 임시정부 사료 편찬위원회 주임이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임시정부의 사실을 알렸으며 대한민국의 자주성과 우수한 민족문화를 소개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고, 출판부장으로 주요한을, 기자로는 조동호 등을 영입하였다.[33] 《독립》은 창간 후, 주 2~3회 발간하였으나 자금난이 심해지자 그는 1925년 18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고 말았다.[33] 그는 국내에 보내는 선전 홍보물을 통해 국내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독립 운동 참여를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그는 실천하지 않는 지식인,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은 무지한 자들만 못하다, 배움의 의미를 알 수없다며 분노하였다.
1920년에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온 소년 김산 등을 만났다.[34] 그러나 김산은 곧 무정부주의자와 의열단 등과 가까이 지내게 된다. 1920년 2월 김일엽, 나혜석 등이 여성잡지 신여자지를 창간하자, 이광수는 김일엽, 나혜석, 김명순, 정칠성, 박인덕 등과 함께 신여자지의 필진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신여자지는 재정난으로 4호를 끝으로 페간되고 만다.
임정 일에 대해서 그는 많은 일에 적극적인 활동, 발언을 하여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25] 1919년 9월 임정 통합 개편때는 공보국장직을 사직하고 임정 사료편찬위원의 한 사람으로 역사서 편수를 담당하였다. 1920년 7월 국내에서 간행된 잡지 《폐허 (廢墟)》지의 동인으로 참여, 원고를 국내로 송고, 택배로 부쳐서 발표하였으나 폐허지는 반일사상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총독부에 의해 곧 폐간당하고 만다.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론[편집]
임시정부 직원 시절의 이광수 (1920년)그러나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조선인 대표들은 출입조차 거부당했다. 이광수가 기대한 것처럼 조선독립은 쉽사리 실현되지 않아고, 앞으로도 독립의 기회는 찾아올 것 같지가 않았다. 일본은 패전국이 아니라 연합국의 한 나라요, 승전국 측에 속해 있었으며, 국력도 나날이 강해지고 국제적 지위도 날로 높아져갔다.[25] 그러한 일본으로부터 조선이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거의 희망이 없는 일로 보였다.[35] 이광수는 조선 사회에 만연한 요령과 술수, 위선, 속임수 등에 좌절, 절망하였다. 요령과 술수, 속임수를 걷어내지 않고는 독립을 할 수가 없으며, 독립한다손 치더라도 그러한 독립은 오래 갈 수 없다며 절규했다.
이광수는 정신적으로 점점 지치기 시작하였따. 약 1년간은 도산 안창호와 함께 방을 얻어 자취생활도 하고 또 이리저리 생활의 방편을 찾아서 중국신문에 구직광고를 내기까지 했다.[35] 생활고와 함께, 국내에 밀파되었던 비밀요원들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에 무관심한 민중들의 현실을 접하면서 실망하였다.
1920년에 이광수는 흥사단 상하이 조계의 임시 반장을 맡기도 하는데, 1920년 여름 방학 무렵 일본에서 허영숙이 이광수를 찾아왔다. 허영숙의 상하이 임시정부 방문은 당시 상해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논란거리를 만들었다 한다. 월탄 박종화는 그의 '일기' 에서 이광수가 이때 허영숙으로 인해 조선총독부에 매수당한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기록을 남겼다. 조선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허영숙이 이광수에게 '총독부의 신변보장을 언질 받고' 이를 설득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품기도 했다. 박종화에 의하면 이 소문이 확산되면서 허영숙의 첫 애인 진학문은 충격을 받고 홧김에 일본 여자와 결혼해버렸다고 한다.
그의 생활이 어려워진 것과 함께 임정의 재정형편도 점차 어려워졌다. 1920년말 재정난으로 사료편찬위원회가 해산되고 독립신문도 속간이 어렵게 되었다. 이광수는 임정으로부터 제네바 주재 대표로 선임되었으나 여비 사정으로 떠나지 못했다.[35] 건강이 악화되어 안창호의 적극 주선으로 병원에 입원한 일도 있었다. 이 무렵부터 이광수는 점점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희망 없는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지 어떤지에 관해 그는 점차 깊은 회의에 빠졌다.[35]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의 파벌 다툼과 독립운동 단체와 파벌 간의 이권다툼 등도 점차 그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감과 환멸감을 강화시켰다.
귀국 직전[편집]이광수와 홍명희, 조소앙은 상하이에서 궁핍한 생활을 계속 지내왔는데, 2년 뒤인 1921년 3월 이광수는 도저히 상하이 생활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귀국길에 오른다.[36] 폐병의 악화와, 국민대표자대회 등 임정 요인과 독립운동가들간의 파벌다툼과 의욕 상실 등이 원인이었다. 1921년 2월 이광수가 안창호에게 귀국할 뜻을 보이자 안창호는 적극 만류하였다.[37] 그러나 이광수는 그의 만류를 듣지 않고 귀국한다.
이광수·허영숙군을 방문하다. 2인이 같이 본국으로 갈 뜻을 말하는지라 내 이르기를 지금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적에게 항서(降書)를 제납(提納)함이니 절대 불까요 군(君) 등 양 개인의 앞길에 대화(大禍)를 만드는 것이라 속단적으로 행치 말고 냉정한 태도로 양심의 지배를 받아 행하라 하다.[37]
1921년 2월 13일자 안창호 일기
한편 국민대표자대회는 임정과는 다르다며 국민대표자회의에 참여하라는 설득들도 있었지만, 춘원은 모두 사양하고 귀국을 택한다. 안창호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보내주었다. 그가 상하이를 떠날 때는 안창호와 신채호 만이 마중나와 그를 배웅하였다.
1921년 4월말 단신으로 상하이항를 떠나 배편으로 개성으로 귀국, 열차를 타고 가던 중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검문검속을 하던 일본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곧 풀려났다. 그가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나자 이때부터 시중에는 그가 변절자라는 의혹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해 4월 허영숙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귀국 직후 일제나 총독부의 식민 통치에 별반 저항없이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에 그는 환멸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뒤 재정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던 이광수는 1921년 11월부터 1922년 3월까지 《개벽》에 논문 〈소년에게〉를 연재해 출판법 위반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입건되었다가 풀려났다. 1922년 종학원 교사로 초빙되어 철학,윤리학,심리학,종교철학,논리학 등을 강의했고,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는 영어를 가르쳤다. 이 무렵 《원각경 圓覺經》을 탐독하면서 단편 〈할멈〉, 〈가실 (嘉實)〉을 집필하였다.
불운한 개인사[편집]이광수는 가운이 기울어짐에 따라 가난을 체험하면서 청일 전쟁을 겪었고, 어린 나이에 부모와 할머니를 여의고 재종조부의 손에 양육되었다. 또한 동학당인 천도교도가 되면서 천도교의 일을 본 탓으로 일본헌병에 쫓겨 고향을 떠났고 일본, 미국 유학의 꿈도 좌절되었다. 그는 오산학교 교원시절에는 경술국치의 망국인의 설움을 겪었고, 방랑시절 시베리아의 치타에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들었으며, 그 종말을 사랑의 도피처인 북경에서 알았다.
중매로 만난 본부인 백혜순과는 사랑없는 결혼 생활에 회의감을 겪고 이혼을 결심, 합의하에 이혼하였지만 그에게 가해진 것은 조강지처를 버린 인간, 타락한 인간, 향락과 음란의 상징이라는 꼬리표였다. 또한 결혼할 자유가 있고, 이혼할 자유도 있다는 그의 견해와 그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점 등을 들어 그를 멸시하였다. 그리고 이광수의 생모 충주 김씨가 세 번째 부인(3취 부인)이라는 점을 들어 그는 서자로 취급당하고 무시당했다. 또한 1919년 1월부터 국내의 지식인들과 민중들에게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적극 호소했지만 이 역시 무시되었다. 어려서부터 폐렴과 결핵, 손발 동상 등의 질병을 앓았는데 치료시기를 놓쳐 평생 고생하였다. 후처가 된 허영숙의 극진한 간호로 위기를 여러번 모면하였다. 그러나 동료 문인들이나 독립운동가들은 허영숙이 그를 타락시켰다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들 이봉근
그는 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춘원은 허영숙과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맏아들 봉근은 여덟 살 때 잃었다.[38] 두 번의 결혼에서 얻은 자녀들은 대부분 요절하였고 아들 이영근, 딸 이정화 등만이 살아남았다. 춘원은 아이들에게 더없이 자상한 아버지였던 듯하다. 틈만 나면 허생전, 율곡선생, 원효대사 이야기를 해주었고 아이의 친구들이 놀러오면 함께 끼어 노래를 부르고 윷놀이도 했다. 그래선지 아버지와 엄마 사이에 다툼이 있으면 아이들은 늘 아버지 편이었다.[38]
귀국과 방황[편집]
석전 박한영귀국 직후 폐질환으로 요양하였으나, 병세가 완화된 뒤에는 독립운동의 실패와 임시정부의 혼란, 협력해서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 등을 보며 정신적으로 방황하였다. 1921년말과 1923년 두 차례에 걸쳐 이광수는 금강산을 방문하고 기행문인 금강산유기를 지었다. 여기에는 장안사, 유점사 등 한국전쟁 때 유실된 사찰과 사라진 기암괴석의 존재를 정밀하게 묘사하였다. 1922년 1월 9일 박종화, 현진건, 이상화 등과 함께 잡지 《백조 (白潮)》지의 필진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경 아내 허영숙이 상하이에 이광수를 찾아왔을 때 아내와 함께 돌아오다가[32](일설에는 홀로 돌아왔다고도 한다.[1]) 선천(宣川)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가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난 뒤에는 변절자로 비난받았다.[1][32] 이에 대해 이광수가 상하이에 가기 전부터 총독부와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는 의견과 이광수와 상해 임시정부를 이간질하려는 총독부의 책략이라는 의견이 있다.[32]
1922년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문인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을 찾아갔다. 그는 박한영의 지도로 마음을 다스리는 법과 서예와 한시(漢詩) 짓는 법을 배웠고, 그의 불교전문강원에도 출입하며 설법을 들었다. 1926년 무렵 박한영은 서울 안암동 개운사 대원암에 개설한 불교전문강원에서 신석정, 서정주, 이광수, 조지훈, 김달진 등을 지도했으며 3000수에 이르는 한시를 남겼다.[39] 서정주는 "매우 견디기 어려운 한밤중에 홀로 깨어 고민하는 때의 언저리쯤에는 반드시 다시 이 분의 깊은 도애(道愛)를 돌이켜 생각하곤 어머니의 품속에 파묻히는 아이처럼 파묻히어 새로 살 힘을 얻는다"고 회고했다.[39] 이광수는 일시적으로 승려가 되려고 했지만 박한영은 그대는 중노릇 할 사람은 아니라며 설득해서 되돌려보낸다. 심리적 안정을 회복한 그는 이후 문필 활동과 사회 활동에 전념한다. 귀국 이후 그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등에 기사를 쓰거나 칼럼과 논설과 소설을 송고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22년 초부터 경신학교의 교사로 출강하며 영어를 가르쳤다.
언론, 사회 활동[편집]
1922년 흥사단 원동위원부 창립식, 맨앞줄 가운데가 이광수1922년 흥사단의 측면 지원 조직인 수양동맹회를 조직하였다. 1922년 3월 잡지 《개벽》에 발표한 〈소년에게〉의 내용이 출판법위반혐의를 받아 종로서에 연행된 바 있었다. 이후 그는 요시찰 인물로 조선총독부 경무국 당국의 관리 대상이 되어 감시, 내사당했다. 그 뒤 1922년 9월 30일 밤에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와 첫 면담을 가졌으며, 그때부터 사이토의 정치참모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와 빈번히 접촉하였고, 그들의 주선으로 월수당 3백 엔을 받는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입사한다. 그러나 얼마 뒤 퇴사한다.
1922년 흥사단의 국내 지부인 흥사단 원동위원부 창립을 주관하였다.
1922년 주요한 등과 함께 안창호의 연락을 받고 경성부에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와 평양에 동우구락부 (同友俱樂部)의 발족을 지시했다. 안창호는 단체의 기준과 회원 자격, 단체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이광수와 주요한 등에게 지시하고 거사자금을 보내 설립에 착수하게 하였다.
1923년 5월 김성수와 송진우의 권유로 다시 《동아일보사》에 입사할 것을 권고받았다. 이광수는 그들의 후원을 받아들여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객원논설위원이 되었다.[40] 5월 16일 동아일보 사회부 촉탁기자가 되었다.
동성애 허용론 논란[편집]
동아일보 시절의 친구들과 함께(오른쪽부터 진학문, 심우섭, 이광수, 이상협 순)그는 여자도 인간이며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여자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결혼과 가족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이는 유교학자들의 분노를 초래했다. 또한 1918년부터 그는 칼럼과 논설에서 동성애에 대한 것도 다루기 시작했다. 그는 동성애 역시 존중받아야 될 사랑이며, 사랑할 권리가 있고, 사랑할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동성애 옹호론을 작품에도 일부 반영하였다. 후일 2007년 서울대 인문학연구소의 한국문학자 미국 출신의 가브리엘 실비안은 이광수 문학에 나타난 '동성애'를 연구한 논문이 함께 게재됐다.[41] 여기에서 실비안씨는 이광수 문학에 나타난 동성애 코드에 대한 기존 이론을 재검토하며 “이광수야말로 동성애 담론이 보편화하기 이전에 동성애를 반감 없이 다뤄온 작가”라고 주장했다.[41]
그는 시중의 동성애에 대한 편견에 대해, 동성애는 정신병이 아니라고 하였다. 동성애를 정신병이나 광증의 일부로 보던 조선 사람들에게 그의 동성애 옹호는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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