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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 3.근현대사

윤치호(尹致昊, 일본식 이름: 이토 지코(伊東致昊) 4

by 사마르칸트 2014. 3. 3.

4

 

일제의 협력 제의와 거절[편집]

 

 


윤치호 가족 사진(1930년),

앞줄 왼쪽에 앉은 이가 윤치호, 가운데가 어머니 이정무 여사,

오른쪽은 셋째 부인 백매려, 뒷줄 맨 왼쪽은 장남 윤영선

 

 

1931년 친일 단체인 토요회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러자 송진우는 그가 토요회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비판해 주었다.[105]

 

송진우와의 언쟁 끝에 송진우는 그를 변절한 소인배라며 질타했다.

 

그러자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서

“송진우 같은 이는 내가 토요회와 같은 모임에 관여하는 것에 반대한다.

물론 나도 그런 회의 멤버가 되고 싶지 않다”라며 불가피성을 역설하였다.[106]

 

 

이후 각종 강연에 억지로 참여하였지만 그는 일부러 자신이 연장자라는 점을 이용,

맨 끝으로 순위를 미룬다음 "이미 훌륭한 연설은 앞의 연사들이 다 했으니 따로 할말이 없다"거나

 "오늘의 좋은 말씀은 먼저 연사들이 다 말씀하셨다"며 강연을 우회적으로 회피하였다.

 

1932년 일제는 다시 그에게 사람을 보내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원직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윤봉길, 이봉창 사건으로 이반된 한국인의 민심을 끌어들이려는 일제의 술책임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끊임없이 조선인들에게 천황 폐하의 은혜를 역설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조선에 충만한 것은 천황의 은혜가 아니라 천황의 악의일 뿐이다.[95]'며 반박했다.

 

조선총독부와 일제는 일제가 한일병합 이후 조선에 철도, 도로, 항만 등과 공장 등 산업자본을 건설한 것을 홍보하며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윤치호는 일본의 은혜 주장은 당치도 않다며 반박했다.

 

'일본이 조선을 개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수탈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며,

그 도로와 철도와 교량, 항만이 파괴되었을 때 손해를 입는 것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것이다.

 

 

 

 

내선일체론에 대한 저항[편집]


음봉면 음봉초등학교 신교사 부지 기탁 기념비 (1935년)

 

 

그는 조선총독부가 1930년대부터 내세운 내선일체론에 반발했다.

 

다만 일본인과 똑같은 권리를 주되, 조선인은 조선인대로, 일본인은 일본인대로 개별적인 민족, 인종으로 존재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일본이 대제국이 되고 싶거든 다민족 대국가로 생각의 폭을 넓힐 것과,

조선인들에게 일본식으로 강요하지 말고 조선인들 나름대로의 특징은 존중하라고 요구했다.

 

 

 1933년 그는 예종석의 대아세아 운동과 1934년 동아민족문화협회의 대아세아 운동에 대해 반대 의사를 분명히 나타냈다.[107]

 

또 1934년 최남선이 일선동조론을 주장하자,

그가 일본의 국수주의에 영합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107]

 

 

1933년에는 아산 음봉면의 음봉보통학교에 토지를 기부하였다.

이는 음봉보통학교가 이전할 부지를 찾지 못하자 윤치호는 자신의 신항리 땅을 기부하였다.

이 기념으로 음봉초등학교 앞에는 윤치호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1933년 2월 19일 이화여자전문학교 후원회에 참여하였다.

 

1933년 2월 19일자 동아일보는 "각 방면의 유지 회합, 이전 후원회 창립"이라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25명의 위원도 선정했다고 보도했다.[108] 바로 윤치호는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에 선정되었다. 창립총회에 이어 열린 위원회에서는 회장에 윤치호, 부회장에 김일선을 선출하였다.[108]

 

 그밖에도 윤치호는 숙명여자전문학교,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등에도 기탁금을 헌납하고, 재단을 후견하였다.

 

 

윤치호는 교육의 힘이 나라를 암흑에서 구원할 수 있다며 학생들은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열심히 할 것과, 선택받은 위치에 서 있음을 감사히 여길 것, 교사는 학생에게 지식을 알기 쉽게, 실무에서 응용할 수 있도록 가르칠 것을 당부하였다.

 

 

1934년 근화여고보의 교장이자 재단법인 근화학원(槿花學園)의 재단 이사장인 차미리사의 부탁으로 근화학원 재단 이사의 한사람으로 위촉되었다.

 

 한편 1934년 2월경 그에게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교장이 되어달라는 제의가 들어왔지만 능력 부족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1934년 3월 결성된 조선 대아세아협회에 가입했다.

 

 193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언문 철자법이 제정되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표기법이 달라지게 되자 윤치호는 최남선, 지석영 등 지식인 112인과 함께 '정음(正音)지' 제5호에 조선총독부의 언문철자법을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109]

그는 총독부의 언문 철자법 개정이 누구를 위한 개정이냐며 개악은 아니냐고 비판하였다.

 

 

수연 거부와 고희연[편집]

 

 


회갑 때
좌옹 윤치호 칠순 축하기념회 발기회 (1864년 12월)그는 1923년 육순 때의 생일 잔치를 성대하게 할 것을 누군가 권고했지만 내가 환갑상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면서 거절했다. 이듬해 회갑 때에는 생모 이정무가 살아있었으므로 억지로 회갑잔치를 하였으나, 조촐하게 가족 친지들만 불렀다. 그러나 문장(종친회장)이었던 숙부 윤영렬의 후광 덕에 많은 일가 친족이 참여하게 되었다.

 

 

1934년 12월의 그의 칠순 생일도 그는 간략하게 추진하려 했다.

 

칠순 때의 생일 잔치는 인생칠십 고래희라 하여 흔치 않음을 들어 성대하게 할 것을 누군가 권고했지만 그는 큰 바위 얼굴의 이야기를 사례로 들며, 자신이 사회적으로 생일축하를 받을 만큼 덕망 높은 사람이 아님을 들어 사양하였다. 그러나 양주삼, 김창제, 허정, 권동진, 신흥우, 조만식, 앨리스 아펜젤러 등이 특별히 좌옹선생 칠순 기념위원회가 조직하여 그의 칠순 잔치를 준비하였다.

 

1934년 12월 서울 종로에서 그의 칠순잔치가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총독부와의 갈등, 교육 지원 활동[편집]


윤치호 풍자 만화 1931년작1934년 12월 조만식, 김성수의 주도로 고희연이 성대히 개최되었다. 이광수 등이 참석했고, 총독부는 특별히 그의 고희연을 감시하였다. 12월 차미리사의 부탁으로 근화여학교(덕성여자대학교의 전신)의 재단이사의 한사람으로 취임하였다.

 

1935년 10월 일왕의 국민정신 작흥조서(作興調書)에 바탕한 내선일체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등에 가입 활동하였다. 동년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지만 조선인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며 중추원 의원직을 다시 제안하였으나 '내가 취임하는 동시에 그대들이 원하는 영향력이 사라질 것'이라며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은 자신들이 조선의 왕실을 핍박하지 않고 살려두었으며, 조선을 위해 도로와 철도를 놓아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무책임하게 일본 정부가 주는 왕,공위를 받은 조선 왕실을 규탄했고, 일본을 위한 도로 철도와 일본의 체면을 위한 조선왕실 보호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1935년 12월 크리스마스 준비를 이유로 연말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사촌 제수 이범숙[110] 의 회갑연(1936년), 넷째 줄 가운데, 색동옷을 입은 윤치소의 뒤측 오른편, 한진숙의 바로 뒷쪽열이 윤치호, 둘째 줄 왼쪽에서 일곱번째는 조카 윤보선, 셋째 줄 가운데는 사촌동생 윤치소, 그 옆은 숙모 한진숙, 넷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범숙, 다섯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는 윤치호의 장남 윤영선, 오른쪽 끝은 사촌 동생 윤치영1936년 2월 어머니 전주 이씨 이정무가 사망했다. 모친상 기간 중 그는 흰 옷을 입고 다녔다. 총독부는 그에게 신사에 참배할 것을 권고했지만 그는 신앙상의 이유와 모친상중임을 들어 신사 참배를 거절하였다. 모친상을 치루는 동안 그는 노부모의 존재 때문에 1910년 당시 조선 땅을 떠나지 못했던 것을 통탄해하였다.

1936년 윤치호는 이화여전 재단이사로 선임되었다. 이화여전 재단이사로 재직 당시 그는 학교내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111] 하기도 했다. 자신이 설립한 송도고보에도 운영 비용과 시설 비용을 지원하고 토지를 기부하여 운동장을 확장하고 체육관을 설립했다. 일본 와세다 대학보다 크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일본인들은 송도고보의 크고 넓은 건물과 시설물, 넓은 운동장을 보고 질리기도 했다.

 

 

 

 

 

 

 

독서와 사색[편집]
일제 강점기 후반의 윤치호혹자는 윤치호의 직계선조인 윤근수, 윤두수로 그의 문중은 당색으로는 서인 소론 계열 출신이었지만 당색에 구애됨없이 정약용의 《목민심서》, 《흠흠신서》, 유형원의 《반계수록》 등 남인계 실학자들이 쓴 저서들도 사서 탐독한 점을 높게 평가한다.

잠이 적었던 그는 새벽에 비교적 많은 시간을 독서와 사색을 할 수 있었고, 나이가 들면서는 더욱 잠이 줄어들어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졌다. 1894년 이후 조선에 수입된 커피 역시 그의 피로를 일시적으로 덜어주어 정력적인 독서와 사색의 시간을 돕는 역할을 한다.

 

“ 어젯밤 추도식을 지낸 다산 정약용이야말로 이조가 배출한, 아니 박해한 위대한 학자다. 그는 천주교로 개종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의 정적들은 그를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 학자의 진가를 알고 있었던 정조(正祖)가 그를 어여삐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처형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16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70여 권의 귀중한 원고를 남겼다. 그런데 요즘에도 노론계에 속하는 인사들은 그가 남인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112] ”

윤치호는 다산 정약용을 가리켜 조선왕조가 낳은 위대한 천재라며 격찬했다.[112]

1930년대 후반 일본 당국과 조선총독부는 조선인과 타이완 등의 식민지와 포로들에 대한 징집, 차출, 공출량을 늘렸으며 황국 신민 교육을 한층 강화했다. 동시에 무장단체들의 활동도 격해져 갔다. 윤치호는 사회가 미쳐돌아가고 있다며 일본과 조선인 간에 벌어지는 광기와 적개심을 비판하였다.

 

 

 

 

 

 

 

 

 

일본의 감시와 충격[편집]
수감 중인 안창호 (1937년)일제로부터 협력 제의가 들어오자 그는 교육, 사회활동으로 만족한다며 일단 거절하였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민조선총독력연맹에 참가하고 미나미 지로(南次?) 총독의 정책에 찬성 하고, 1937년 7월 총독부 학무국 주최의 시국강연회에 이어 2차 전선순회 시국강연반 강사에 명단이 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참여 동기를 묻는 지인들에게 간단하게 언급하거나 언급을 회피하였다. 1938년 일제가 조선인의 병력자원화를 위한 제1차적인 조치로 '육군특별지원병제' 실시를 결정했을 때, 이것을 내선일체의 합당한 조치로 보고, 환영하였다.

한편 그는 안창호의 석방을 탄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안창호가 쇠약해지자 보석 탄원을 냈고 1937년 12월 출감,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한다. 그러나 안창호는 간경화, 폐렴, 만성기관지염, 위하수증, 복막염, 피부염, 소화불량 등의 합병증으로 고생했고 막대한 병원비가 들어갔다. 병원에 입원한 안창호의 치료비를 김성수와 함께 부담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치호와 김성수의 비용 조달에도 고문으로 쇠약해진 안창호는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안창호의 장례식날 그는 대성 통곡하였다. 안창호의 죽음에 감정이 북받친 그는 일주일 이상 밤낮으로 통곡하다가 청년들과 가족의 만류로 겨우 진정한다.

 
1930년대 중반의 윤치호1938년 초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조직중이라고 연락이 왔으나 그는 참여를 거부하였다.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경성부에서 결성되었으나 불참했다. 이때 그는 "내가 회장으로 지명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 후에도 직책을 맡게 되지 않기만을 바란다[113]"고 하였다.

 

1930년대 후반 그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하시 코이치로(三橋孝日郞)에게 불려가 협박을 당했다.[114] 미하시 코이치로는 자신이 윤치호를 공갈, 협박한 것에 대한 회고를 남겼다.

 

“ 윤치호를 집으로 불렀다. 당신도 스스로의 신앙이 있으니 확신이 있겠지만 자계(자숙)하지않으면 곤란하다.

그러면(자계하면) 우리 쪽에서도 세상의 말에 편승하지 않고 충분히 당신 쪽과협력해 우선 조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 집에서 수시간에 걸쳐 설득했다.
그랬더니 매우 쾌히 승낙해주었다. 아주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윤치호는 다양한 단체(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도 스스로 머리를 내밀게 됐다. 세상으로부터 다양한 비판을 받았지만 잘돼 주어서 결국은 매일신보의 사장도 했다.[114]
 ”

1938년까지 그는 일본 천황과 일본 왕족의 생일과 결혼식 등의 행사를 기념하는 공 · 사적 파티나 모임에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3월 18일 공익에 기여한 이에게 상훈을 수여할 때 그에게 포장(褒狀)이 수여되었지만 역시 불참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사실을 모두 파악, 기록해 놓았고, 그해 5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경찰관 등으로부터 1938년 4월 29일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한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탄신일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놓고 추궁당했다.

그의 일본인 친지였던 야마가타 데이사부로(山縣悌三郞) 역시 그가 총독부에서 주최한 천황 탄신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질문하며, 과거 일본 천황과 천황가의 경조사 기념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점, 총독부에서 그의 행적을 파악한다는 것을 귀띔해주었다. 일본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미행, 정탐했다는 것을 깨닭게 되자 그는 경악한다.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사건 전후[편집]


윤치호 흥업구락부 사건, 수양동우회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8년 5월 23일 오후 2~3시 조선총독부를 방문, 총독과 정무총감, 경무국장을 상대로

자신이 중추원에 들어가는 것을 고사하는 이유를 해명하고 되돌아왔다.

 

일제는 민족주의 인사들을 일망타진할 목적으로

1937년 8월부터 1938년 3월 수양동우회 사건을 날조하여 민족인사를 검거한다.

 

 

윤치호는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들의 신원보증을 하거나 탄원서를 작성하여 석방케 하였다.

 

 

 1938년 5월경 흥업구락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는 그의 사촌동생인 윤치영도 연루되었는데,

윤치영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전기고문과 팔다리를 옭죄는 고문을 당하였다.

 

 

윤치영의 면회를 왔다가 고문장면을 본 동아일보 기자 서정억이

일본 경찰에 항의했다가 구타당하여 뼈가 부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윤치호는 윤치영 등의 신원보증과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서명을 받고,

탄원서를 제출하여 흥업구락부 관련자들을 모두 석방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언론인을 구타했다는 데 대한 일본 언론계의 항의와

 기독교대회 참석차 방문했던 일본의 기독교 YMCA 청년회 인사들의 협력도 작용하였다.

 

 

동년 7월 황국신민화 실천운동의 조직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창립총회 준비위원 및 상임이사로 선정된 윤치호는 창립식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세 번 외치기도 했다.

 

 

1939년에 우가키의 중화민국과 합동하는 협상에도 반대한다.

 

그는 농촌 진흥 운동에 참가하기도 한다.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일제가 전시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내세운 '내선일체'의 실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와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를 지내며 강연회에서 '반도민중의 협력'을 강조했다.[13]

 

한편으로 1934년에 윤치호는 조선물산장려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황민화 운동을 거쳐 농촌 계몽 운동과 사회주의, 광복군, 독립군, 임시정부, 경학사, 동제사 등의 해산을 주장하고

창조파, 개조파도 해산하자는 주장을 하는 조선총독대회와 조선력강연대회에 참가하였다.

 

국민참가조선참가대회 사장을 거쳐 국민조선총독력대회에 가담했으나,

 한편으로는 조선어학회 사건,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의 석방, 탄원을 맡기도 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관련자로 불려가 취조를 받았다.

 

 

1939년 1월 박희도가 창간한 잡지 《동양지광》의 고문으로 위촉도었다.

그해 2월 7일 배영동지회 회장과 지원병 후원회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봉급을 주지 않는 자리라서 내가 선출되었을 뿐이다[115]"

라며 냉소적인 시각을 보였다.

 

 

 2월 9일 동양지광사 창간 기념 시국강연회에 참석, '내선일체에 대한 소신'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고,

 

2월 11일 경성부 지원병후원회 회장을 맡았다.

 

 3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중추원 참의직을 다시 제안받았다.

그러나 그는 참의직 취임을 거절했다.

 

 

 

1939년 6월 일선장병 휼병금 2000원을 조선군 제20사단 사령부에 납부했다.

그해 7월 중국을 지지하는 영국의 외교정책을 비판할 목적으로 조직된 배영동지회의 회장을 맡았다.

 

 8월 30여개의 지방 배영동지회가 연합한 배영동지회연맹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의 식민통치 정당화 이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식민통치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던 그는“도로를 놓고 학교와 병원를 세우는 등 조선에 큰 혜택을 줬다”는 일제 통치자들의 주장은 조선인들보다는 일본인 이주자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간파[89] 하였다.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116]

윤치호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116]

 

 

반영, 반미 활동과 소극적 저항[편집]1930년대 중반부터 그는 영국과 영미권 국가들에 대한 실망을 품게 되었다. 1920년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김성수와 조만식의 물산장려운동에 호의적이고, 그들을 격려하는 편지를 보낸 것을 계기로 인도의 독립운동가인 수바스 찬드라 보세, 마하트마 간디, 자와랄할 네루 등의 책과 칼럼을 구해서 읽어보았다. 1934년에는 인도의 독립운동가 찬드라 보세가 망명 중 한반도를 방문했는데, 그때 그를 직접 찾아가 면담을 하였다. 이후 윤치호는 찬드라 보세의 저서 '질곡의 인디아(Fettered India)'를 구해서 탐독했다. 이 책을 읽은 뒤 윤치호는 영국이 인도를 잔인하게 학대, 억압통치한다는 사실을 접한다. 한때 일본의 통치가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강압적이며 영국의 식민통치를 본받아야 된다고 봤던 그는 영국에 대해 실망하게 된다.

 

 

1937년부터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서는 반미, 반영 활동을 강요하였다.

1939년 7월 23일 그는 경성부에서 인파 4만 명이 모인 전 조선 배영궐기대회 회장에 추대되어 회의에 참석하였다. 여기에서 장덕수 등은 영국을 흡혈귀라고 맹비난했으나 그는 흡혈귀는 아니라고 부인했다. 어쩔수 없이 참석한 그는 형식적인 인사말만 하고 내빈석에 앉아있었다. 윤치호는 참석자들이 영국, 미국을 동아시아를 가로챌 강도, 혹은 영국은 동아시아의 흡혈귀라고 비난하였으나 호응하지 않았다. 이 대회에 참석을 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단지 자신은 '회장 자격이라서 어쩔수 없이 참여해야 한다.[117]'고 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 각종 반영 시위, 반미 시위를 기획하고 그에게 초청장을 보냈을 때에도 초청장만 받거나, 참석을 거부하였다. 오히려 윤치호는 영국이 제국주의 국가들 중에서는 나름대로 관대함을 베푼다고 보고 있었다.

“ 마하트마 간디가 위대한 인물이기는 하나 영국 정부가 마하트마 간디를 위대해지도록 내버려두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만약 스페인, 일본, 독일, 프랑스 조차 그런 인물은 30년 전에 죽여버렸을 것이다.

윤치호일기 1939년 4월 1일자 ”

 

영국의 인도 식민통치를 통해 실망했으면서도 그가 영국이 그래도 관용을 베푼다고 확신한 것은 마하트마 간디 같은 인물들이 죽임당하거나 박해당하거나, 국외로 출국하지 않고도 국내에서 자유롭게 민족 독립운동을 하도록 방관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편집]

창씨개명[편집]

 

 


문중 회의에 참석한 윤치호와 조카 윤보선(1943년),

 

세 번째 줄 왼쪽 끝 도포를 입은 이가 윤치호, 윤치호와 여성 사이로 보이는 네 번째 줄 왼쪽 끝 양복을 입은 남자가 윤보선 창씨개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0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제의 담화문을 발표했고 이는 조선 사회에 논란이 되었다.

 

1월 4일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천명했다.[118]

 

그런데 그가 뒤이어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면 흐뭇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바람에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118]

 

 총독에게 아부하는 조선인 지식인들은 당연한 것이라며 총독을 추켜세웠다.

 

 

1월 7일 그는 사촌 동생 윤치오의 집으로 형제와 사촌들을 소집했다.

 

그날 오후 3시 30분 윤치소, 윤치영, 윤치왕, 윤치창 등과 함께 윤치오 집에 모여 창씨개명 문제를 논의했다.

 

윤치창, 윤치왕, 윤치오는 아이들을 위해 창씨개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118]

 

반면에 윤치영은 창씨개명을 완강히 반대했다.[118]

 

 윤치소는 아직 그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118]

 결정된 것은 없었고 윤치호는 고민하였다.

 

 

 

1940년 4월 그의 집에서 해평 윤씨 종친회가 열렸다.

 

숙부 윤영렬이 사망하고 공석인 후임 문장(門長, 종친회장)을 선출하기 위한 모임이었는데,

이때 그는 연령으로 최연장자였고 항렬 역시 가장 높았으므로

문장 후보자로 지명되었으나 그는 문장 자리를 사촌 동생 윤치소에게 양보했다.

 

 

조선총독부에서 창씨개명을 요구하자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계속 압력이 들어오자 창씨개명을 고민한다.

 

 가족들과의 논의 끝에 창씨개명을 다짐하고 성을 윤(尹)의 파자인 이토(伊東)로 정하였다.

 

창씨개명 직전에 윤덕영 등이 반대하여 장내가 소란해지기도 했었다.

 

그가 문중 결정에 따라 창씨개명을 단행하자 실망한 학생들이 그의 집앞에 와서 연좌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1940년 5월 당시 창씨개명은 그의 자의에 의한 창씨개명은 아니었다.

 

1940년 4월에 열린 해평 윤씨 문중의 문중회의 결과 창씨개명을 하기로 결의되었고,

문중회의에서 창씨 성을 이토(伊東)로 하기로 정해지자 그는 이토 치코로 개명했다.

 

 

1940년 4월 29일자 일기에서 그는 문장(門長, 종친회장) 선출보다 중요한 안건은 '창씨개명 문제에 대한 윤씨 문중의 거취문제[119]'라고 기록했다.

 

당시 문장선출보다 중요한 안건은 창씨개명 문제에 대한 윤씨 문중의 거취문제였다.[119]

 

이때 윤덕영은 창씨개명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윤치호에 의하면 그는 이런 모임에 참가하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강했던 나머지,

추종자들을 동원해 이 문제(창씨개명)가 아예 거론되지 못하도록 봉쇄하려 했다.[119]

 

그러나 참석자의 절대 다수는 이 문제를 안건으로 채택한 후, 만장일치로 창씨개명하기로 결정했다[119] 는 것이다.

 

한편 윤치호는 창씨개명에 부정적이었다는 이유로 5월 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으로 소환되었다가 풀려났다.

 

 

 

 

 

 

 

 

 

창씨개명 사태 중재[편집]


창씨개명의 법원공고

 

 


가나와 한글이 혼용되어 있다.

 

1940년 5월 1일 오전 창씨개명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소환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한편 창씨개명령이 떨어지자 독립운동단체에서는 성과 이름을 바꿔서 민족혼을 말살하려 한다며 조선총독부를 규탄했다.

 

5월 1일 오전 11시, 미나미 지로 총독과의 면담에서 그는 사회적 갈등 완화를 위해 창씨개명 기일을 연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 저는 내선일체를 완성하는 수단으로 조선인들의 창씨개명을 찬성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개진하는 세 가지 이유를 총독 각하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이들은 도쿄에서 창씨개명을 반대하고 있다는 이유를 듭니다.

전 이것이 합당한 사유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총독부가 도쿄에 있는 특정 인사들의 의견을 추종해서 조선의 세부정책을 입안해 실행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 때문이지요.

 

 


2.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이들은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창씨개명을 반대한다는 이유를 듭니다.

 창씨개명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의 구별이 사라지게 될까봐 그렇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조선인 모두가 일본식 이름을 갖게 되면 자기들의 우월감이 사라지게 될까봐 우려하는 일본인들이 있다는 겁니다. 저는 특정 부류의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 우월감을 타파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총독 각하께 우리 조선인이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조선인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조선인 이름을 간직해온 우리 조선인들이 지금처럼 김씨, 이씨 등으로 살면서도 충량한 일본 신민이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전 이 주장에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인들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있게 마감시한을 오는 8월 11일로부터 6~10개월 정도 늦추면 어떨까 싶습니다.[119]


 ”

윤치호는 거듭 창씨개명 기일을 연기해달라고 청했고,

 그 뒤 윤치호의 청을 받아들인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령 시한을 늦춰

 1941년 1월부터 창씨개명이 대대적으로 단행된다.

 

 

창씨개명을 한 문중의 결의와 관계 없이 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조카 윤보선 같은 경우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창씨개명하지 않으면 일본인들이 자신을 감시할 것이라고 봤다.

 

'당국이 이미 창씨개명하기로 결정한 이상, 그들은 조선인들이 창씨개명 하도록 조치를 취할 것이다.[120]

 

그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저명한 조선인들을 반일분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이다.

 

난 차마 우리 아이들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창씨개명을 결정한 것[120]'이다.

 

 

그는 창씨개명을 조선인에게 일본 시민권을 준 것이라는 찬양과는 달리 일본이 조선인의 일본인화를 위한 작업이라고 봤다. 그는 '내선일체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하라고 격려하거나, 심지어 강요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조선민족을 일본의 근간이 되는 민족으로 틀어쥐기 위한 방법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120]'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1940년 7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동양문화학회(東洋文化學會) 주최 동양정사(東洋事情) 강좌에 연사로 참석하다.[121] 그의 창씨개명은 자의라기 보다는 문중회의에 의한 것이었으나, 그의 창씨개명이 한알려지면서 9월 그의 창씨개명을 비난하는 투서가 나돌아 서대문 경찰서에서 수사하기도 했다.

 

 

1940년 10월 4일 송도고등보통학교 재단법인을 등록하고 송도고등보통학교 재단(재단법인 송도학원) 이사장이 되었다. 10월부터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장직에 취임해줄 것을 청하는 부탁이 계속 들어왔다.

여러번 고사하던 그는 12월 연희전문학교 교장직을 수락한다.

 

 

“ 교장직을 수락해서 속을 끓이게 될 게 뻔하다. 만족시켜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군당국, 경찰당국, 도청 및 총독부 당국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연희전문 내부에도 달래기가 쉽지 않은 파벌들이 도사리고 있다.[122] ”

12월 연희전문학교로부터 온 학교장직 수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연희전문학교 교장직 역시 번거로운 자리라며 달가워하지 않는다.

 

 

 

 

 

 

 

 

 

 

 

태평양 전쟁 이후[편집]


연희전문학교 교장 시절 태평양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1년 1월 국민정신총력연맹 이사에 선출되었다. 1941년 2월 제4대 연희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언더우드 2세 교장이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반일 선동을 한다는 이유로 추방된 뒤 연전 이사회는 재단 이사의 한 사람인 그를 천거했다. 미국에 유학한 일이 있는 그는 연희전문학교의 실정을 동정하고 있었고 총독부에서도 명사 대우를 하는 터이므로 학교를 지키는데 다시 없는 적임자로 보여 이사회가 천거한 것이었다.[123] 사람들은 조선총독부가 연전을 빼앗기 위해 그 다리로 그를 사용하는 것으로 판단했다.[123] 윤치호는 거부하였지만 이사회의 무기명 투표 결과 윤치호가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 교장직을 수락해서 속을 끓이게 될 게 뻔하다. 만족시켜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군당국, 경찰당국, 도청 및 총독부 당국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연희전문 내부에도 달래기가 쉽지 않은 파벌들이 도사리고 있다. ”
  ? 윤치호일기 1940년 12월 9일자

 

윤치호 역시 연희전문 교장직을 달가워하지는 않는다.

 

1941년부터 3년간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뒤 태평양 전쟁 이후 그는 1941년 5월 12일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中樞院顧問)에 임명되자[124], 이를 받아들였지만 3개월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5월 27일 사립연희전문학교 기독교재단법인(私立延禧專門學校基督敎聯合財團法人)의 재단이사장이 되었다. 이후 사망 직전까지 연희전문학교 재단법인이사장의 직위를 보유했다.

그러나 1942년 8월 17일 총독부는 연전을 아주 접수하면서 윤치호를 물러나게 하고 일본인 다카바시 하마치(高橋濱吉)를 교장으로 앉혔다.[125]

 

 

 

 

 

 

 

 

 

관변단체 선임과 회피[편집]
태평양 전쟁그는 1941년 1월에 국민정신총력연맹 이사에 선출되었으나 총련 모임에 거듭 불참하다가 1943년 1월 국민정신총력연맹 참여로 바뀌었다. 1941년 8월 24일 조선호텔에서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을 조직, 결성하는데 참석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맞아서는 전시결전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에 참가하여 ‘우리는 황국신민으로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성(誠)을 맹서하여 협력할 것을 결의함’이라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18]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찾아와 한국이 독립할 것이며, 임정에서 조직한 독립군이 국내에 진주하게 될 것을 시사하였다.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하는 것을 보고 그는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일본이 승리하게 된다면 한국의 독립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고, 미국이 승리한다면 한국의 독립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불확실한 가능성을 두고 어느 쪽의 편을 들어야 하느냐며 번민하였다.

이후 자신이 조직한 흥아보국단과 김동환(金東煥) 등이 이끄는 임전대책협의회의 통합을 추진하여 1941년 9월에 조선임전보국단의 창설을 본다. 그러나 그는 1941년 10월 21일 친일 단체들의 결집체인 조선임전보국단 결성식에 불참하였다. 10월 22일 윤치호는 조선임전보국단 조직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임전보국단 행사에 번번히 불참하고 행사를 펑크내어 임전보국단 인사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그해 말 '극동의 결전과 오인의 각오' 라는 주제로 황국신민으로서의 충성과 협력에 대한 결의문을 낭독하였다.[13]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좌절하였다. 이후 그는 두가지 가능성을 점지하였다. 일본이 승전하고 세계를 정복하는 일과 일본이 미국과 국제사회에 의해 패전하고, 조선은 독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판단내렸다. 전쟁을 진심으로 찬양하는 불교, 천주교인에 이어 개신교계에서도 전쟁을 자발적으로 찬양, 독려하자 그는 좌절한다. 1942년 8월 17일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연희전문학교 교장직을 사퇴하고 물러났다.

태평양 전쟁 기간 중 그는 정치적 발언을 삼가하며 사태를 예의주시했다. 이후 그는 중추원의 정기 모임에 간간히 출석하였으며, 1943년 9월 23일에는 중추원 모임에 나가 점심을 먹은 뒤, 중추원 의원들이 매주 목요일마다 10~20인이 출근한다는 기록을 남겼다.[124] 그러나 그에 의하면 중추원의 참의들은 출근하여 '1~2시간 동안 잡담과 흡연으로 시간을 보낸다[124]'고 질타했다.

1943년 8월 11일 차미리사의 부탁으로 재단법인 덕성학원(財團法人德成學園)의 재단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태평양 전쟁 후반[편집]
1943년 11월 3일자 매일신보에 올린 학도병 권유 기고문1943년 11월 윤치호는 이광수·박흥식·송진우·주요한·한상룡 등과 함께 학도병 종로익찬위원회를 개최하여 학병 권유를 위한 호별 방문, 권유문 발송, 간담회, 학교강연회 개최 등을 결의하였으며 5일간 진명학교 등 10개소에서 학병권유 부형간담회를 열었다. 11월 6일 언론에 '내 아들 이어든 속히 지원하라는 전보를 발송하자'는 제목의 담화문을 기고하였다. 그 날 중추원에서 개최한 단합회에 참석했고 학병제의 솔선협력을 결의한 후, 평남지역 독려강연반 연사가 되어 이튿날 90여 명과 함께 YMCA에서 학병제 경성익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1월 12일 평양에서 열린 학도병독려 연찬회에 연사로 참석하여 강연하였고, 매일신보에 학병 독려 담화문을 발표했다.

1941년 이후 그는 이승만의 미국의 단파방송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프로그램인 미국의 소리 VOA방송에 출연하였고, 그 단파방송이 라디오를 타고 조선에 보급되었다. 그러나 그는 태평양 전쟁으로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인다는 것에 회의적이었으며, 설령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게 되었으나, 일본이 패배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패배한다는 보장은 없다고 전망했다.

이 기간 중 미국은 한국인 지도자 5명의 정치적 성향을 체크하기도 했다. 미국의 당시 보고서에 의하면 그는 "일제와의 협력을 강요받았지만, 한국에서의 위상이 아직까지 높기 때문에 연합군의 한국내 활동에 귀중한 협력자가 될 것[126]"이라고 전망하였다.

1944년 종로의 인사들이 학도병을 독려하기 위해 조직한 종로익찬위원회의 회원[127] 이 되고, 1944년 5월 12일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10월 연희전문학교장 직을 사퇴하였다. 한편 그는 학도병 강연을 다니면서도 한국어로 학도병을 되도록 회피할 것을 주문하고, 일본이 패망할 수도 있으니 섣불리 저항하다가 화를 입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1944년 조선인 우대 감사 사절단의 단장으로 도일하였다.[128]

 

 

 

 

 

 

 

 

 

 

신앙 활동 및 기타[편집]
1927년 남북감리교회 연합전권위원 모임에서 (1927년 5월 18일)
(가운데 앉은 이가 윤치호)1907년(융희 1년) 윤치호는 로마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대회에 한국기독교대표단의 단장으로 다녀왔다. 1910년(융희 4년) 미국 애틀랜타 주에서 개최된 남감리회 평신도협회 총회에 참석하였고, 미국 감리교선교부의 초청을 받고 영국 에딘버러에서 개최된 제1차 기독교 세계선교회의(I.M.C)에 참관하고 돌아왔다. 1916년에는 YMCA 청년회 총무, 1930년에는 YMCA 연합회 회장을 맡는 등 기독교계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 활동하였다.[1] 1913년 황성 YMCA 총무에 취임한 이상재를 도와 YMCA의 혼란을 수습하였으며, 기독교 청년 지도자들의 이탈과 구속, 추방 등의 가운데 이상재와 함께 YMCA의 간판을 지키고 청년회를 사수하였다. 그 뒤 남부감리교를 한국에 설립하고 선교하는 활동을 하였고, 국제 교회연합사업을 주관하였으며 1930년부터 윤치호는 한국내 남·북감리교회 연합을 추진하기도 했다.

 
1935년 2월 17일 조선기독교감리회총리원 이사회에 참석한 윤치호1936년에는 새문안교회 건축공사비 중 40%를 원한경 장로가 섭외하자, 기독교계 원로인 윤치호는 거액헌금[129] 을 새문안교회 신축공사비로 기부하였다. 그밖에 오지 선교사들과 개척교회에 파송되는 목사들의 여행 경비를 직접 후원해주기도 했다.

1938년 5월 결성된 경성기독교연합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6월 기독교의 일본화를 달성하기 위해 소집된 전조선기독교청년연맹위원회에 참가한 후 "이제야 대임(大任)을 마쳤습니다. 우리 기독청년들도 이제는 완전히 내선일체가 되었습니다"라는 요지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한편 현실생활의 구원을 통하여 기독교를 정착시키기 위한 실천을 직접 선보였으며 기독교신앙인들의 신앙 모범촌 건설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13]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의 이사와 부회장, 세계주일학교 한국지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1938년 7월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39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감리교의 통합을 위하여, 조선감리교회와 일본의 메소디스트 교회의 합동을 논의하는 일선(日鮮)감리교회 특별위원회가 개최되자, 그는 김영섭(金永燮), 신흥우(申興雨), 양주삼, 유형기(柳瀅基), 정춘수 등과 함께 조선인전권위원으로 참가하였다.

1943년 10월부터는 각지의 기독교단체 및 기독교계 사립학교의 지원을 목적으로 YMCA 재단법인 등록사업을 추진, 11월 10일에는 YMCA의 재단인 재단법인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유지재단(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維持財團)을 구성하고 이사장에 피선되었다.

한편 1908년 그가 역술한 ‘찬미가’에 수록된 가사는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번역본과 유사하다는 의견이 나왔다.[130] 1941년 부인 백매려가 사망했다. 이후 윤치호는 재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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