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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 3.근현대사

윤치호(尹致昊, 일본식 이름: 이토 지코(伊東致昊) 5

by 사마르칸트 2014. 3. 3.

광복과 죽음[편집]광복 직전[편집]
만년의 윤치호 (1945년) 귀족원 (일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5년 2월 일본 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 의원에 선임되었다. 2월 박춘금이 결성한 대화동맹(大和同盟)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해 4월 박춘금을 위원장으로 앉히면서 그는 대화동맹 이사장으로 물러났다. 그는 태평양 전쟁 이후, 지하 한국인 독립운동단체의 조직을 인식, 감지하였으나 독립은 가망없다고 판단했다.[131]

1945년 2월 13일 송도고등보통학교 재단법인이 재단법인 송도중학교로 바뀌자 송도중학교 재단법인 이사가 되었다.

4월 3일 다시 일본 제국의회 칙선 귀족원 의원에 재선임되었다. 1945년 4월 '조선내 7인의 일본 귀족원 의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된 윤치호는 박중양 등과 함께 일본의 '망극한 처우개선'에 감사하고자 조직된 처우감사 사절단 대표사절로 선임되었다.[132] 이어 박중양이 윤치호를 수행하여 인천항에서 배편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윤치호는 먼저 조선신궁에 봉고제를 올린 후 총독과 군사령관을 방문하여 감사를 표하였다. 이어 서울을 출발, 일본으로 간 윤치호는 일본 관계 요로에 감사를 표한 후 귀국하였다.[132]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고문으로 재추대되었다. 8월 10일 광복 직전, 그는 개성의 광문암동 근처에 우거하고 있었다.

광복 직후[편집]그러나 8월 15일 일본이 패망, 방송을 통해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이를 당연한 결과로 여겼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그는 친일반민족위원회 및 경향갤러리에 체포되어 명동재판소를 거쳤으며 3개월간 투옥당했다가 풀려났다.[출처 필요] 광복 직후 그는 애국가의 친필 사본을 셋째 딸 윤문희(尹文姬)에게 비밀리에 전달하였다. 자신이 친일파로 규탄받는 시점에서 애국가에 관련된 것이 알려지면 애국가에 타격을 주리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그를 찾아온 지인들에게도 자신이 애국가의 원 가사를 지었다는 사실은 당분간 비밀로 붙여둘 것을 당부하였다.

1945년 8월 19일 개성 자택에 괴한이 침입하여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128] 그러나 피습은 실패하고 괴한은 도주했다. 이후 윤치호에 대한 비난과 규탄이 줄을 이었고, 외출시에도 그를 친일파, 매국노라며 매도하는 학생들이 나타나 돌과 휴지를 던졌다. 그러나 그는 학생들의 비난과 투석에 개의치 않고 개성과 서울을 활보하였다. 고향 신항리 신촌에 세워진 '전 협판 윤치호 불망비'는 파괴되었고, 음봉면 음봉국민학교에 세워진 기념비는 학교 구내로 옮겨간 탓에 무사하였다. 9월 서울에서 한민당(韓民黨)이 창당되자 그를 원로로 추대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133]

1945년 9월 2일 인천을 통해 미국 육군 24군단이 주둔하였다. 이때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파견한 대표단은 미군정이 한국 정부의 조직에 활용하길 바라는 믿을 만한 인사들의 명단에 여운형과 여운홍, 안재홍 등의 건준 지도부와 당시 보성전문대학장인 김성수를 포함한 전, 현직 교육계 종사자 6명 등 모두 17명의 인사를 추천하였다.[134] 그리고 적극 배제해야 할 인사로는 미국과 기타 외국에서 교육받은 친일파로서 윤치호, 박흥식 등 14명의 명단을 제시하였다.[134] 이는 CIC보고서 'G-2, 1945. 9.9: I'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군정은 이를 무시하였고 그는 별다른 불이익은 받지 않았다.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면서 9월 23일 미군정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에 의해 중추원이 해체되면서 중추원 고문직에서 파면되었다.[135] 그러나 그는 의미없는 자리였을 뿐이라며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감정적 친일청산론에 대한 비판[편집]그는 미군정 주둔 이후 군정청의 권위주의적인 통치 내지는 조선인을 적국민으로 다루는 것을 비판했고, 군정과도 충돌하였다. 그는 군정청 소속 군인들 사이이 세상에서 무서운 세가지가 다이어리아, 고우너리아, 코리아라는 농담을 하는 것을 이해하고 이 농담을 하는 저의가 뭐냐며 영어로 추궁하였다.

1945년 10월 20일 친일파 청산 문제가 거론되자 그는 이승만과 김구, 미국 군정청에게 각각 <한 노인의 명상록>이라는 제목으로 역사의 불가항력을 역설하는 편지서신을 보냈다.[136] 편지에서 그는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자신들이 독립을 쟁취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애국자연 하는 독립운동가가 독립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독립을 달성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일본의 신민으로서 '조선에서 살아야 했던' 우리들에게 일본 정권의 명령과 요구에 응하는 것 외에는 어떤 대안이 있었겠습니까? 우리의 아들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딸들을 공장에 보내야만 했는데, 무슨 수로 군국주의자들의 명령과 요구를 거역할 수 있었겠습니까? ...(중략)... 그러므로 누군가는 일본의 신민으로서 한 일을 가지고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중략)...


우리는 해방이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솔직히 시인하고, 그 행운을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잃었던 보석을 찾은 듯한 은혜를 입은 만큼,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는 그것을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소한 개인적 야심과 당파적인 음모와 지역간의 증오심일랑 묻어두고,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나라의 공익을 위해 다 함께 협력하여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지정학적 상황을 미루어 볼 때, 민중들의 무지와 당파간의 불화 속에서 우리 조선의 미래를 낙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분열되지 말고 단결해야 합니다. ...(중략)...


마치 자기들의 힘과 용맹성을 가지고 일본 군국주의로부터 조선을 구해내기라도 한 것처럼 어딜 가느 으스대며 다니는, 자칭 구세주들의 꼴이란 참으로 가관입니다. 그들은 아둔하거나 수치심이 없는-아마도 그 둘 다인-사람들인지라, 조선의 자유는 달나라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의 자유만큼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중략)...

이른바 그 '해방'이란, 단지 연합군의 승리의 한 부분으로 우리에게 온 것 뿐입니다. 만일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더라면, 저 허세와 자만에 찬 (자칭)'애국자'들은 어떤 사람이 큰 지팡이로 일본을 내쫓을 때까지 계속해서 동방요배를 하고 황국신민서사를 읊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허세와 자만에 찬 저 '애국자'들이 일본을 몰아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137]

광복 직후 그는 친일파로 몰리며 수시로 규탄과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귀국한 독립운동가들이 개선장군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을 보고 영웅심리에 들뜬 자들이라며 경멸하였다.

사망[편집]
윤치호 임종 기사
대중일보 1945년 12월 9일 일요일자, 제2면1945년 11월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했다. 임정 요인 환국 직후 김규식이 그를 찾아왔다. 이후 여러 번 김규식의 방문을 받았으나 그는 김규식에 대한 정치적 지지표명은 하지 않았다. 그 뒤 그는 다시 친일파의 석방, 사면론을 주장하였다. "애국자들의 공갈협박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도록 고도의 정치행위이자 보편적 정의로 일반 사면을 단행해야 하는[138]"것이 그 이유였다. 그에 의하면 친일파들을 사면, 석방해주어야 되는 이유로 그는 사이비 애국자들의 공갈과 위선, 폭력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11월초 윤치호는 이승만, 김구와 면담하려 하였으나 모두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특히 이승만의 비서로 있는 사촌동생 윤치영을 통해 이승만 측과 교섭하였으나, 이승만은 바쁘다는 핑계로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경교장 역시 윤치호의 방문 요청에 답변을 회피했다. 광복 직후 그는 친일 협력자 내지는 거물 친일파 정치인으로 수시로 규탄, 비판당하였고, 수시로 비난과 논쟁에 시달리며 이를 반박하였다. 11월 말 치아에 통증을 느낀 그는 경성부에 있는 치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오던 중 노상에서 갑자기 졸도하였다.

만년의 윤치호는 기간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였다.[139] 이후 병석에 누워 있었다.

“ 모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는 삼가라![139] ”

1945년 12월 9일 오후 4시 경기도 개성부 송도면 고려정(開城府松都面高麗町) 자택에서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하였다.[137] 임종 직전 그는 중풍으로 불편한 몸으로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들은 삼가하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비장한 유언을 남겼다 했다.[139] 독립 후 친일파로 규탄받자 그의 병세가 악화되었으며, 시중에는 친일파로 몰리자 슬퍼하여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사후[편집]
제2공화국의 대통령인 조카 윤보선(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총리 장면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석곡1리 독골마을 선영에 안장되었다. 윤치호의 묘소는 둔포면 석곡1리 선영 중 가장 오른쪽에 있으며, 마애방, 백매려 두 부인과 합장되었고, 큰 평면 돌무덤으로 되어 있다. 묘소 옆에는 검은색 오석 재질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1950년 1월 그의 장남 오당 윤영선은 농림부 장관을 지냈고, 1960년 8월에는 조카 윤보선이 대한민국 제2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냈다.

이후 그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대상에 선정되었으나 독립·계몽운동가였다가 후에 부일, 친일협력 활동 등이 감안되어 건국공로훈장 수훈에서 제외되었다. 1995년 광복회 주관으로 한 “윤치호 친일 협력에 대한 재평가” 강연이 개최되고[140], 1998년 4월 3일 서울 종로2가 YMCA 강당 2층에서 윤치호기념사업회가 출범하였다.

2002년 3월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는 7일 '친일파 윤치호 동상을 철거하라'는 성명서를 통해 일본 귀족원 의원으로 선정된 윤치호가 인천 모중학교 교정에 설립자로서 1968년 세워진 것으로 확인했다며, 해당 학교는 청소년들의 민족의식을 위해 이 동상을 자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1] 인천연대는 이와 관련 "윤치호의 동상이 인천에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치욕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동상이 청소년의 배움터인 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는 것에 대하여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2001년 12월23일 서울의 광신학원이 설립자 박흥식의 동상을 친일파라는 이유로 교정에서 철거했음을 참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바르게 심어주는 것만큼 중요한 교육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학교 당국이 윤치호의 동상을 스스로 철거하지 않을 경우 역사바로세우기 및 인천정체성 바로찾기 차원에서 철거운동을 벌여 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141]

 
사촌 동생 윤치영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연세대학교 교내 단체가 선정 발표한 “연세대학교 친일파 명단”[142] 과 기독교대한감리회가 2005년 공개한 감리교 내 친일 부역자 명단에도 포함되었다.[143] 변절자라는 견해와 나약한 지식인이라는 비판과 근대인, 냉철한 합리주의자라는 상반된 시각과 평가가 존재하고 있다.

2008년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교수 박노자는 그를 영화화 할 역사인물로 추천하기도 했다.[17] 그에 의하면“윤치호는 어찌 보면 한국 근대사 최초의 ‘세계인’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또 한편으로는 애국가를 작사한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일제 시절에는 ‘조선민족에 자립의 능력이 없다’고 판단해 대지주인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따라 친일을 한 것도 사실이다. 국제성, 민족주의, 친일… 근대적 이념과 지향의 다면적 구도에서 한 개인이 배회하는 과정은 윤치호를 통해 대단히 잘 보여줄 수 있다. 그를 영화화하자면 그건 ‘시대와 개인’의 극이 될 것이다. 매혹적이면서도 잔혹한 격변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개인에게 요구하는지, 개인으로서 새로이 열린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기가 얼마나 힘드는지 보여주는[17] ”인물이라는 것이다.

2009년 7월 민족문제연구소 전라북도지부에 의해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에 세워진 윤치호의 공적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3기 중 2기가 발견되어 강제 철거당했다.[103]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는 2010년 4월 제보를 받고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현장을 답사, 부귀초에 철거 협조 공문을 발송하는 등 학교측과 부귀면의 협조로 일제잔재물인 윤치호 불망비를 철거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103] 그러나 곧 반환되었다.

2009년 7월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는 어린이를 위한 교육의 요람에 친일파를 기리는 비석이 서 있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수치라며 불망비 2기를 철거했다.[144] 같은 해 7월 충북 충주에 위치한 민족문제연구소 일제강점기 역사관 자료실로 옮겨졌다.[145] 그러나 '친일이라도 진안군의 역사를 담은 문화재'라는 일부의 주장과 윤치호의 종중 후손들의 끈질긴 요구로 불망비는 2012년 반환됐다.[144]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는 비석 옆에 친일행적을 비판하는 안내판을 함께 세워두었다.[144]

연보[편집]1865년 1월 23일 충남 아산 에서 군부대신, 판서를 지낸 해평 윤씨 윤웅렬의 3남 2녀 중 큰아들로 태어남. 누이 윤경희와 그는 전주이씨 소생이고, 이복동생 윤치왕과 윤치창은 서모 김정순 소생이다. 그 밖에 일찍이 김씨에게 시집간 이복 누나가 한 명 더 있었다.[146]
1881년 신사유람단 조사 어윤중을 수행하여 일본에 건너가 도진샤에서 수학하였다.
1882년 김옥균의 권고로 영어를 배웠다. 일본어를 다시 영어로 해석하는 것이라 시간이 오래 걸렸으나 당시 조선인 중 간단한 회화라도 할 수 있는 몇안되는 사람이었다.
1883년 초대 주한공사 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 바로 외무아문 주사에 임명, 겸임하다. 이때 윤치호는 고종과 푸트의 통역을 담당했고 그때 통역하던 내용 일부가 보존되다가 아들 영선, 정선에게 전해졌다.
1884년 당시 근대화론자로 갑신정변을 지지했으나 급진성에는 반대하다. 그러나 정변 실패 후 상하이로 망명.
1885년 고종의 허락으로 상하이에 가다.
1885년 봄 정변의 실패에 좌절하여 상하이에서 방황, 술과 기방에 출입하며 몸을 망치던 중 어느 선교사의 충고로 기독교인이 되어 거듭나다.
미국으로 건너가 밴더빌트 대학(Vanderbilt Univ)에서 수학(한국인 최초의 미국유학생)
에모리 대학교(Emory Univ)에서 석사학위 받음 졸업
1895년 귀국, 외무부협판과 학부협판을 역임하다
1896년 조선인 축하사절단 대표 민영환의 수행원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 러시아로 가던 중 선상에서 중추원 1등의관 칙임관 3등에 특별 임명되었다.
1896년 귀국하는 길에 베트남을 경유하여 귀국, 이때 베트남에 들어온 프랑스의 문물과 청결성을 보고 감탄, 충격을 받음
1897년 독립협회에 참가, 서재필, 이상재, 유길준 등과 독립협회 운동 이끌고 만민공동회를 주최
1898년 제 2대 독립협회 회장, 만민공동회 회장, 헌의 6조를 국정에 반영시킴
독립신문 2대 사장
1898년 12월에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
1899년 1월 중추원 부의장직을 사퇴
1899년 원산감리 겸 원산항재판소 판사
1901년 함경도 덕원감리사 겸 덕원부윤(德源府尹) 겸 원산항재판소 판사
1902년 삼화감리 겸 삼화부윤이 되고 삼화항재판소 판사를 겸임하다.
1903년 함경도 안핵사
1903년 천안군수가 되었다가 인접 직산군수가 살해당했으므로 직산군수도 겸임하다.
1904년 무안군수 겸 무안감리
1904년 다시 외부협판에 임명
1904년 특명으로 외무협판 자격으로 하와이 이민자들을 시찰하고 귀국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을사조약의 무효성을 외치고 다녔으나 실패하다. 바로 책임자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린 뒤 관직을 사퇴, 외부대신서리에 임명되었으나 수락 거부
1906년 도서관 설립 운동에 참여하다
1906년 대한자강회 조직, 회장으로 추대되어 교육의 확대와 산업개발로 자강독립을 달성 한다는 목표를 표방하고 국민사상계몽에 노력
1907년 자헌대부로 승진
1907년 신민회 회원의 한사람으로 활동, 평양의 대성학교 설립에 동참하고 안창호의 양보로 교장에 추대되다.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의 이사, 부회장맡고 청소년 계몽운동을 통한 기독교구국운동 전개
1910년 10월 한일병합 직후, 윤치호 자신의 품계가 당시 정2품이었으므로 남작직을 수여받았으나 거절하다.
1911년 아버지 윤웅렬의 죽음으로 남작직을 습작받았으나 사양하다.
1912년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복역
1914년 총독부에서 천황 명의로 목배를 주었으나 거절하였다.
1915년 형문을 받던 중 반성문을 쓰고 특사로 풀려남
1917년 중앙 기독교 청년 회장에 취임
1918년 12월 신익희, 송진우 등이 찾아와 만세 운동에 동참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승산이 없다며 거절하다.
1919년 3월 3.1 운동 초반, 학생들이 체포되었으나 민족대표 서명자들이 나서지 않자 이들을 규탄했다.
1921년 미국에 가서 외교 활동을 하라는 이상재, 이승만, 서재필 등의 권고를 거절하다.
1922년 송도고등보통학교장에 취임
1930년 모교인 미국 에모리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 받음
1930년 조선체육회 회장에 피선되고, 흥업구락부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
1931년 충무공 이순신 후손의 빚을 대신 갚아주고 나머지 빚을 갚기 위해 모금운동을 추진하다. 그해 5월 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재단이사의 한사람에 피선
1937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들의 신원을 보증하고 석방을 탄원하다. 그러나 안창호 석방은 거부당하다.
1938년 1월 안창호의 병보석을 탄원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의 책임자로 일제로부터 취조를 당함
1939년 야마가타 테이사부로 등 일본인 지인들로부터 조선총독부의 내사, 감시를 당한다는 소식을 입수. 그때까지 그는 조선총독부 주최 행사 중 상당수 불참했고, 일본 천황이나 일본제국주의의 영웅을 기리는 행사에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1940년 5월 창씨개명에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연행되었다 풀려났다. 곧 미나미 지로 총독을 찾아가 창씨개명을 연기해줄 것을 촉구하여 성사됨
1941년 종로방 가회동의 취운정을 매입했다.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 고문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임전보국단 주최 행사에 번번히 불참하여 관계자들을 당황하게 하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교장에 임명됨
1945년 2월 귀족원 의원에 선임
1945년 8월 해방. 이후 그가 창씨개명이나 소극적 협력을 하게 된 배경은 무시당한 채 인신공격과 비난에 시달림당하다.
1945년 8월 자객이 개성의 집에 침투하여 피습을 당함
1945년 11월 경성부의 치과에 다녀오던 중 노상에서 졸도, 이후 몇번 쓰러져 의식불명
1945년 12월 9일 개성 고려정 자택에서 사망
기타 활동[편집]
아들 피아니스트 윤기선1890년대 미국에서 돌아와 한국에 자전거를 처음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본인이 타고 다녔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147]

한국인 최초로 캐나다를 방문한 인물이기도 했다.[148] 미국에서 유학한 후 귀국길에 밴쿠버에 들렀던 것으로 전해진다.[148]

천자문을 본따 《유학자취》 (幼學字聚)라는 책을 출간하였다.[149] 천고지원(天高地圓)·일승월조(日昇月照) 등 모두 1,200자로 되어 있으며, 간편하고 쉬운 내용으로 구성되어 초학자인 어린이들을 가르치기에 편리하게 엮었다.[149] 이 중 ‘효조오석(曉朝午夕)’이라 하여 “새벽에서 아침이 되고 아침에서 낮이 되며 낮에서 저녁이 된다.”든가, ‘주명야암(晝明夜暗)’과 같이 “낮은 밝고 밤은 어둡다.”는 식으로 새로운 문자학을 도입한 것이다. 이 책은 개화기 아동교육을 위한 문자학습서로서 많은 노력과 연구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149] 라는 평가도 있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암살되자 그는 명성황후의 암살에 조선인 협력자들이 존재했다고 확신했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명성황후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150]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사실을 은폐시킬 의도로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츠카가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41]

한편 일본의 귀족화된 조선 왕족에 대하여 비판을 하였다.

일본인들은 이씨 조선의 지난 왕실에 대하여 무척 호의적이라고 뽐내 왔다. 동양역사에서 몰락한 왕조가 이토록 존엄한 대우를 받았던 예는 찾아볼 수가 없다.[151]

윤치호는 한일병합 이후 조선과 대한제국의 황실에서 책임을 통감한 인물이 의친왕 외에는 거의 없었다는 점과, 대부분의 황족들이 일제가 주는 공작, 백작, 남작의 작위를 받은 점을 무책임하다고 비난했다. 그에 의하면 일제에 협력한 양반고관 외에 일본이 주는 작위를 받았던 대한제국 황실 역시 한일병합의 원흉이자 무책임한 존재로 비춰졌다.

 
윤영선1909년 윤치호는 케롤라이나 학당의 이름을 배화라고 지어주었다. 1898년 10월 2일 미국인 선교사 조세핀 켐벨 여사가 서울 종로구 내자동에 세운 것이 '케롤라이나 학당'이었다. '배화'는 1909년 윤치호가 꽃을 기른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152] 이는 배화여중, 배화여고, 배화여자대학의 교명으로 이어졌다.

1929년 3월 12일 셋째 딸의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153]

1945년 광복 직후 그는 친일파로 몰려 규탄받고 몰락했으나, 그의 이복 동생 윤치왕과 윤치창, 아들 윤영선은 연좌되지 않았다.[154] 4촌 동생 윤치영과 조카 윤보선은 이승만의 측근으로 있었으며, 윤보선은 후일 이승만과 결별하고 민주당원으로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여섯째 사위 현영학은 이화여대 신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민중신학자와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로 활동했다.

그의 손녀 윤효진은 1970년대에 피겨 선수로 활동했다. 그의 손녀인 윤효진(미국 거주)과 주영순은 70년대에 주니어선수권에 도전했다.[155]

1900년대 중반 윤치호의 둘째 아들인 윤봉성(尹鳳成, 요절)과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한영서원 동창 최규남(崔奎南)은 몰래 남의 앵두밭에 들어가 앵두를 서리해서 배불리 먹고 있었다. 지나가다 이를 본 윤치호는 아들 윤봉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고 한다. 윤봉성이 호되게 매를 맞고 통곡하는 것을 본 최규남은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봉성이는 아무죄가 없어요 라며 윤치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걸복걸하였다 한다. 이를 본 시민들이 달려들어 윤치호를 말리니 윤치호는 내 아들을 도둑놈으로 만들 셈이냐며 분을 참지 못하고 아들 윤봉성을 호되게 질책하였다.

인간 관계[편집]그는 개인적으로는 서재필, 유길준, 안창호, 이동녕, 이상재, 양기탁, 박중양, 송진우, 김성수, 여운형, 김규식, 이승만, 이광수 등과 친분관계를 쌓고 교류하였다. 이 중 서재필과 이승만, 김규식이 망명하고, 박중양은 3·1 운동 이후 절교하였으며, 유길준은 일찍 사망하면서 그의 인간관계의 폭은 다소 줄어들었다.

사회주의자였던 허헌 역시 그의 집에 자주 출입하였는데, 성공 가능성을 장담못하면서도 대가 없이 그에게 광산사업에 쓰라고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애국가 작사자설[편집]
윤치호가 셋째 딸 윤문희에게 준 애국가 필사본 이 부분의 본문은 애국가 (대한민국)입니다.
그의 사촌동생 윤치영에 의하면 그는 대한민국의 애국가를 일부 작곡했다고 한다.[156] 윤치영에 의하면 애국가 가사의 앞부분은 최병헌 목사가 짓고, 후렴구는 윤치호가 지었다는 것이다. 최병헌 목사는 윤치호가 다니던 정동감리교회의 목사였다.[156] 윤치호와 최병헌이 함께 지었다는 애국가 사본이 2002년 한남대학교 교수 박정규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 이는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157] 또한 애국가의 원본은 그가 지었으나,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부 개사했다고도 한다.

그밖에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로 시작되는 협성회 무궁화가 역시 윤치호가 작사를 하였다는 설이 있다.[158] 안창호가 가사의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를 문제삼아 가사를 바꾸라고 요청하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고쳤다. 그러나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안창호는 윤치호가 지었다가 본인 스스로 수정한 부분 중에서도 '우리 대한 만세'를 '우리 나라 만세'로, '이기상과 이맘으로 임금을 섬기며'를 '이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며'로 다시 고쳤다.

주요한[159] 과, 안태국[160] 의 사위 홍재형 등은 그가 지은 협성회 무궁화가를 안창호의 요청으로 개사한 것이 애국가의 기원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이는 홍재형이 안태국의 말을 회고하는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 의 내용에서 살펴 볼 수 있다.[74]

본래 애국가 가사의 첫 절이 '성자 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 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라고 되어 있었는데, 도산(안창호)이 하루는 서울서 내려 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않으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하자 윤치호가 도산의 생각을 물었고, 도산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을 보여주자 윤치호가 기뻐하면서 찬성하자 도산이 이를 당시 교장인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하여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74]

원래 끝 구절의 첫 가사는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임금)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였으나 1919년도부터 상해에서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는 분명 안창호가 고친 것[74]

? 주요한, <안도산전서>

한편 전택부 역시 윤치호가 애국가의 유력 작사자라 주장하였다.[161] 그 근거로는 첫째로, 1907년 윤치호의 역술로 출판된 <찬미가>중에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애국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 둘째로 미국에서 살고 있는 양주은이 소장한 국민가 중에 애국가가 윤치호의 작사로 되어 있다는 사실, 셋째로 해방 후 윤치호가 친필로써 ‘윤치호 작’ 애국가(사진 10번)를 쓴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1955년 벌써 밝혀졌던 사실[161] 이라는 것이다.

윤치호가 지은 찬미가의 개사본이 1910년에 실렸다. 애국가가 수록된 기록상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이 윤치호의 “찬미가”이고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에 애국가의 전문이 윤치호 작사의<국민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어 윤치호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162]

윤치호는 안창호의 노력으로 신학문을 수용하고 체계적 교육이 시행되고 있던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느낀 바 있어 자신의 작품격인 찬미가를 저술하며 여기에 도산이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애국가를 수록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74]

 
김활란음악 평론가인 김종만은 1904년 부터 1920년 사이에 부른 미국 한인 찬송가 속에 “윤선생 티호 군 작사”로 적힌 현행 애국가를 보관 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 적십자가 발간한 “National Anthems-And How They Came to be Written” 이란 영문자 책에서도 애국가 작사자가 Chiho Yun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40] 1902년에 윤치호가 지었다는 무궁화 노래가 애국가의 원형과 같다는 자료도 나타났다. 2006년 2월 27일에는 박정규(朴正圭) 한남대 교수가 충북 청원군에서 열린 단재 순국 70주기 추모 학술발표회 발표문 ‘신채호의 국내에서 쓴 글에 대한 고찰’중에서 애국가의 원형이 된 노래도 함께 발표하였다.[157] 신채호가 지은 '광무(光武) 5년 신축(辛丑) 2월 7일 신채호 배(拜)'라고 쓴 노래와 함께 발견된‘애국가’도 있었다. 이 애국가는 현재 애국가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157]

이화여자대학의 김활란 박사는 윤치호로부터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140] 김활란이 해방직후 개성에서 은둔하고 있던 좌옹을 문안 하였는데 그는 당부하기를 "애국가를 내가 작사 했다고 말 하지 마시오, 내가 지은줄 알면 나를 친일파로 모는 저 사람들이 (애국가를) 부르지 않겠다고 할지 모르니까[140]" 라고 당부 했다는 것이다.[140] 후일 김활란은 그 이야기를 연세대학교 교수 김동길에게 전하였다.[140]

그 후 윤치호는 죽음 직전인 1945년 10월에 애국가 가사를 옮겨 쓴 '가사지' 필사본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가사지 사본을 셋째 딸인 윤문희(尹文姬)에게 주었다.

윤치호 일기[편집]
윤치호 일기 (1882 ~ 1943)
윤치호 일기 (1882 ~ 1943) 이 부분의 본문은 윤치호 일기입니다.
그는 1883년부터 1943년까지 60년간 일기를 썼는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다. 처음에는 한글로 쓰다가 뒤에 한자로 쓰다가 뒤에는 영어 필기체로 기술했는데, 이때문에 후일 1968년부터 그의 아들 윤영선으로부터 자료를 기증받아 국역(한글본)으로 옮길 때 난해한 점,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상당수 되었다고 한다. 이는 타인이 자신의 일기를 볼 것을 우려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윤치호가 영어로 일기를 쓴 다른 이유로는 당시 조선에 '자유', '권리', '의회' 등 서구 시민사회의 산물을 번역할 만한 마땅한 국문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문에는 언문일치나 고백체가 없어 '고백적 글쓰기'가 어려웠기 때문[163] 이기도 했다.

1883년부터 1943년까지의 일기이며 6.25 전쟁이 발생하자 개성에 있던 윤치호의 장남 윤영선은 일기의 일부는 자신이 갖고 월남하고, 나머지 일제 강점기의 중요한 부분은 보존을 위해 미국에 체류중이던 윤장선에게 보냈다. 휴전 뒤 1968년 윤영선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자신이 소장하던 일부 내용을 기증하면서 미국에 있던 윤장선 역시 형에게서 받은 일부를 택배로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했다.

윤치호 일기는 1968년 그의 장남 윤영선이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한 이후, 난해한 필기체 영어와 상류층 언어, 지방 방언 등의 해독오류 등으로 1973년부터 1989년까지 일부만이 한글로 번역되었고, 2000년대 이후 다시 한글로 번역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고종 독살설[편집]
대한제국 고종의 장례 행렬 - 고종의 독살설로 일본식민지배의 반대 여론이 높았다. 이 부분의 본문은 고종 독살설입니다.
윤치호는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고종 독살설을 신뢰한 것은 아니었다. 윤치호는 1919년 고종 사망 당시에는 고종 독살설에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이었으나 후에 고종독살설에 가능성을 두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1919년 초까지만 해도 그는 고종 독살설에 부정적이었다.

“ 이태왕(李太王·고종)이 왕세자 이은(영친왕)과 나시모토 공주(이방자 여사)의 결혼식을 꼭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고 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다. 1907년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3년 후 나라마저 빼앗긴 굴욕을 감수한 이태왕이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억장이 무너져 자살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더구나 어린 왕세자와 일본 공주의 결혼이야말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경사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 결혼을 통해 두 왕실 간의 우호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왕세자는 조선의 어떤 여성보다 우아하고 재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만약 이태왕이 ‘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 가며 이태왕을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 

 

 

 

 


  ? 1919년 1월26일자, 윤치호 일기

윤치호에게 고종독살설을 전한 무관 출신 한진창은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였다.[164] 그리고 한진창은 자신의 누나 한진숙의 시조카 윤치호에게 고종이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전했다.[164]

 

 

윤치호는 자신이 한진창에게 들은 내용을 1920년 10월 13일자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1.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2.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30센티 미터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5.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164]

 

 


윤치호는 한진창 역시 고종 독살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들었는데,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내관) 등과 함께 시신의 염을 한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이 내용들을 말해주었다[164] 고 했다.

 

윤치호는 처음에 고종 독살설을 유언비어라며 부정하였으나

후에 조선총독부에 빌붙고 일제의 통치를 찬양하는 일부 구 대한제국 대신들의 행위를 보면서

고종 독살설을 확신하게 되었다.

 

 

 

또, 그는 고종의 죽음을 '조선의 자결권이 끝내 소멸되었다는 상징적인 사건[165]'이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안질환과 호흡기 질환[편집]

 

평소 눈 질환과 호흡기 질환이 있던 윤치호는 안과와 이비인후과를 자주 다녔다. 그 중 그는 당시 서울에 있던 정귀섭 안과·이비인후과 단골이었다.[166] 정귀섭 안과와 이비인후과는 윤치호 외에도 이승만, 윤보선도 단골이기도 했다.[166]

 

 

조선 최초의 영어회화[편집]조선인 최초로 영어를 배웠던 사람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영어사전을 저술하지는 않았으나 영어 단어를 소개하고 문법을 기술한 준 영어사전급인 《영어문법첩경》을 저술했다. 그는 미국에 처음으로 한국의 민담들을 전래하기도 했다.

 

 

어느 노인과 승려가 길동무가 됐다. 노인은 상투를 틀었으나 머리가 빠져 상투가 엉성하게 되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승려는 노인의 상투를 자르고 노인에게 장삼을 입힌 뒤 도주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난 노인은 승려가 없어진 것을 알고 거울을 보고 자신의 상투를 만졌으나 상투가 없었다. 노인은 거울을 보며 그러면 중은 여기 있는데 나는 어디를 갔다는 말인가?

 

 

그는 1890년대, 1900년대 무렵 조선에서 영어를 구사한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사상과 신념[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윤치호의 사상입니다.
독립협회와 계몽운동 당시 윤치호는 무지한 조선의 민중을 계몽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그가 미국 유학 당시 기독교에 입교하고 교리를 배우고 서구의 사상을 접하면서 이를 조선에 받아들여 사회를 바꿀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독립, 계몽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원인을 그는 민중의 무지함 때문이라 보았고 이는 후에 조선이 일제 식민지가 되는 것을 당연한 징벌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계몽과 개혁으로 근대 한국이 소생할 기회를 한국인 스스로 저버렸다고 판단한 그는 독립운동에도 회의적인 시각을 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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