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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 3.근현대사

윤치호(尹致昊, 일본식 이름: 이토 지코(伊東致昊) 1

by 사마르칸트 2014. 3. 3.

 

 

윤치호(尹致昊, 일본식 이름: 이토 지코(伊東致昊),

 

 1865년 양력 1월 23일(1864년 음력 12월 26일) ~ 1945년 양력 12월 9일)는

 

조선, 대한제국의 개혁, 민권운동가·문신이자

외교관·언론인·교육자, 한국의 정치가·교육자·

독립운동가·사상가·언론인·종교가이며 기독교운동가였다.

 

 

일제강점기 중 활동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었다.

 

구한말에는 갑신정변으로 피신했다가 귀국, 독

립협회 활동, 독립신문 발행인과 제2대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 사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만민공동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강연, 계몽활동과

민권운동과 민중의 참정권 요구 운동·개혁운동에 참여했고,

 

서재필이 강제추방된 이후 독립협회와 애국계몽운동 활동을 지도했다.

 

 

그러나 민중의 호응 미진, 정부와 황국협회 등의 탄압으로 독립협회의 실패 이후,

민중 역시 그를 황제에게 불충하는 인물로 보면서 실망,

그는 민중을 계몽의 대상에서 개조, 훈련의 대상으로 시각을 바꾸고,

실력 양성론을 주장한다.

 

 

이후 관직에 투신하여 덕원감리사 겸 부윤, 삼화감리, 외무부 협판,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관하고 귀국하면서

서구 문물을 통한 계몽, 변화를 확신한다.

 

이후 한영서원,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활동하다

경술국치 뒤에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

 

 

 

교육활동으로는 한영서원을 창설하여 지도하고,

송도고보로 고쳐 재단 이사장과 초대 교장을 역임하고

사립학교의 재단이사로도 참여,

연희전문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의 재단 이사로 활동했다.

 

 

노동을 경시하는 사회분위기를 지적,

농·공업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한영서원의 학생들에게 농업, 목축 등의 실업교육을 지도했다.

 

 

사회활동으로는 YMCA 청년회 총무·회장,

 

1925년 11월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 회장,

1929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개최된 제3회 범태평양회의에 한민족 대표자로 참석하였고,

 

1931년 재만주한인동포위문사절단 단원으로 만주에 다녀온 뒤

흥업구락부 회장을 역임했고,

 

1928년부터 1937년까지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 제9대 회장을 역임했다.

 

 

 

 

1945년 2월 광복 직전에는 귀족원 의원에 선임되었다.

조선인 최초의 영어 통역관이기도 하였다.[1]

 

한국인 스스로 자치능력이 부족하다 판단한 그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지원을 해주면서도 일정 부분 거리를 두었다.

 

이솝 우화와 걸리버 여행기를 국내에 처음 번역해서 소개하였다.

 

또한 윤치호는 한국에서 최초로 자신의 노비를 전원 석방시켰다.

 

1930년 모교인 에모리 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박사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 선조때의 영의정 윤두수의 둘째 아들 윤흔의 8대손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초기 개화파 정치인 윤웅렬과 전주 이씨의 아들이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군의관 윤치왕,

사업가 겸 외교관 윤치창의 이복 형이며,

 

윤치소, 윤치오, 윤치영의 사촌이며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자 정치인인 윤보선(尹潽善)의 5촌 당숙이었다.

 

박규수(朴珪壽)와 어윤중(魚允中)의 문인이다.

 

본관은 해평(海平), 호(號)는 좌옹(佐翁)이다.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출신.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아버지 윤웅렬(왼편 담배 피우는 이)

 

 

좌옹 윤치호는

1865년 1월 23일(1864년 음력 12월 26일)

충청남도 아산 둔포면 신항리 신촌에서

 

서얼 출신 무관 윤웅렬(尹雄烈)과

이일영(李日永)의 딸인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정무의 아들로 태어났다.

 

윤치호의 위로는 2년(또는 3년) 연상의 친누나인 윤경희(尹慶姬)가 있었다.

 

그리고 서모 김정순(金貞淳)에게서는 30년 터울 이복 동생인 윤치왕(尹致旺), 윤치창(尹致昌) 등이 태어났다.

 


숙부 윤영렬그의 집안은

조선 선조(宣祖) 때의 형제 정승

윤두수·윤근수 형제의 후손으로

윤두수의 둘째 아들 예조판서를 지낸 윤흔(尹昕)의 후손이었다.[2]

 

순종비 순명효황후의 친정인 윤덕영·윤택영 일가와는 먼 일족이었다.

 

 

그의 집안은 18세기 중엽까지 명문 양반가문이었다가

그 뒤 고조할아버지 윤발은 관직을 얻지 못했고,

증조부 윤득실은 통덕랑을 지냈으나 일찍 사망한다.

 

증조부 윤득실의 대에 까지 경기도 수원부에서 거주했으나

 수원 화성을 건축하기 위해 천안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가세가 기울어 그의 집안은 향반(鄕班)으로 몰락하였다.

 

 

할아버지 윤취동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아산으로 분가, 자수성가하여 대지주가 되었다.

 

조부 윤득실은 술을 좋아하다가 일찍 죽고 가세가 몰락했지만

일찍 고아가 됐던 할아버지 윤취동은 빈 손으로 재산을 마련,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와 석곡리에 여러 농지를 사들여 대지주가 되었다.

 

 

이후 할아버지 윤취동이 지중추부사가 되고 아버지 윤웅렬,

숙부 윤영렬이 무관으로 출세하여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다시 가세를 일으켰다.

 

 

할아버지 윤취동은 늦도록 아들이 없어 염수대에 기도를 드린 뒤 서자 웅렬과 영렬을 얻었다.

 

자수성가하여 대지주가 된 할아버지 윤취동과 역시 자수성가하여 관직에 오른 아버지와 숙부 덕에

윤치호는 비교적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유년기에 그는 한학을 수학하였고, 충남 아산 둔포면 고향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는 100칸에 가까운 대저택에서 생활하였는데,

이 저택은 아버지 윤웅렬 사후 매각되었다가 여러차례 주인이 바뀐 뒤

 이복동생 윤치창이 매입하여 일시 거주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비상하였고,

3세가 되기 전에 글을 읽었으며 한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아버지 윤웅렬은 글재주가 있고 암기력이 좋은 장남 치호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아버지 윤웅렬은 자신이 서자 출신[3] 이었다는 점이

아들과 자손들의 앞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

 

 

 

 

유년기[편집]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일본 망명중인 아버지 윤웅렬(오른쪽에 앉은 이)과 함께

 

중국인 아내 마애방과 자녀들(왼쪽으로부터 아들 광선, 영선, 딸 봉희) (1902년)

 

윤치호는 9세에 한성으로 유학하여 서당에 입학하여 2년간 한학을 배웠다.

 

 1875년 11세 때부터 개화파 인사 서광범(徐光範)의 친척 김정언(金正言)의 집에서 숙식하며 수학하였으며,

영특했던 그는 15세에 스승 김정언에게 과거에 응시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때 김정언의 인척 서광범이 그의 사랑에 있었는데

스승 김정언은 나이가 되지 않았다며 거절하였으나,

 이를 목격한 김정언과 서광범은 그의 글재주가 비상함을 알아보았다.

 

 

1879년 15세에 한성부 정동 출신 진주강씨 부인과 결혼하였으나

7년만인 1886년에 사별하였다.

 

부인 진주 강씨 역시 서자 출신이었으나

자신을 양반가문이라 속이고 그와 결혼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역시 서자였으므로 이해하려 하였으나

강씨는 그가 출타중인 사이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다가 발각되었고 그는 상심하게 되었다.

 

 

1885년 백랑 등 첩들을 정동 집으로 들이면서

본부인 강씨는 본가로 되돌려보냈다.

 

친정으로 돌려보낸 강씨 부인은 이듬해 사망한다.

 

아버지 윤웅렬이 향반에다가 서얼 출신 무관이라서 동료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게 된

그는 열심히 한학 공부에 몰입하였다.

 

 

한편 아버지 윤웅렬의 주선으로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생이 된다.

 

이때 그는 서재필, 김옥균, 서광범, 안경수, 홍영식 등을 만나게 되는데,

뒤에 그는 1896년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게 된다.

 

 

 

 

수학과 소년기[편집]

 

박규수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실학과 외부 신문물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중국 밖에도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서구의 선진 문명을 접하게 되면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었고,

이어 신분제 철폐, 서구 문물 개방 및 수용, 민중들의 권리 향상, 민중의 참정권 획득 등

사회 개혁에 대한 의지로 승화시키게 된다.

 

 

또한 여성을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는 유교적 가치관 역시 그릇된 사고방식으로 철폐되어야 한다고 봤다.

 

 

그는 1894년 중국 여인 마애방(馬愛芳, 1871-1905)을 만나,

그해 3월 재혼한다.

 

마애방과의 사이에서 윤영선(尹永善), 윤봉성(尹鳳成, 요절) 윤광선(尹光善), 윤봉희(尹鳳姬), 윤용희(尹龍姬)를 두었다.

 

 

인내심이 강하고 배려가 깊던 마애방은 남편의 방황과 정치적 불운, 생계를 돌볼수 없는 환경, 유흥가 출입 등을 모두 너그럽게 이해하였고, 자신이 직접 길쌈과 바느질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오히려 마애방은 시대를 앞서간 남편 윤치호의 불행을 위로하였다.

 

그녀는 1905년에 병사하지만 윤치호는 오래도록 마애방을 그리워하였다.

 

마애방이 죽은 뒤에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혹은 '천당에 먼저 가 계신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스승 어윤중의 편지

 

아버지 윤웅렬은 무관이나 서얼출신으로 제2차 수신사 일행을 따라가 메이지 일본의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와 개화파 인사로 활약하였으며 교련병대 창설을 주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문적 수준은 높았지만 몰락한 향반가에다가 서얼이었던 신분 탓에 아들 치호가 문과 과거에 응시, 급제할 길이 막혀있는 현실에서 아들의 장래를 염려하였다.

 

아버지 윤웅렬은 김옥균과 민영익과 접촉, 그들에게 부탁하여 아들의 일본 유학을 주선하였다.

 

 

1881년 1월 어윤중(魚允中)의 문하생이 되어 수학했다.

어윤중은 성리학자였지만 박규수와 유대치의 문하에 출입하며 개화 사상에 눈떴기에

그에게도 기회가 닿는다면 일본, 청국 등을 다니면서 새로운 것을 많이 보고 접하라는 말을 하였다.

 

아버지 윤웅렬은 개화승 이동인과도 교류하며 아들의 유학을 주선하였고,

 그의 스승 어윤중 역시 그의 도일을 적극 추천, 지원하였다.

 

 

 

출국과 일본

 

유학[편집]

 

 


아버지 윤웅렬아버지 윤웅렬 등의 노력으로 윤치호는

1881년 17세 때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조사(朝士)였던 어윤중의 수행원의 한사람으로

일본에 건너가, 조선의 첫 공식적 동경 유학생의 한 사람이 되어 개화사상을 수용하였다.

 

서얼의 후예였던 그는 농업학교와 기술학교 중에 택일하게 되었으나

아버지 윤웅렬의 부탁과 노력으로 기술학교나 농업학교 대신

일본 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가까이하며

 이노우에 가오루의 주선으로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했다.

 

 

비상한 기억력과 암기력이 눈에 띄어 이노우에 가오루,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등을 수시로 만나 면담했다.

 

일본 체류 중 그는 일본이 빠르게 서양문물을 받아 들여 근대국가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문명개화가 시대의 정신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보다도 서양에 더 관심이 많았다.

 

독학으로 일본어 공부를 한 뒤,

 

1882년 도쿄 제국 대학 철학교수의 부인 밀레트(L. G. Millet)와 도쿄제국대학 영어강사 간다(神田乃武) 등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일본어와 영어를 배우고 유학생활을 하면서도 여가에 그는

김옥균(金玉均)·서광범·박영효(朴泳孝)·유길준(兪吉濬) 등 개화파 인물과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의 경영자 후쿠자와(福澤諭吉), 동인사의 경영자이며

도쿄제국대학 교수인 나카무라(中村正直) 등 당대 일본의 문명 개화론자을 만나 가까이 지냈다.

 

 

한편 임오군란의 책임자로 지목된 아버지 윤웅렬이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곧 귀국하였다.

윤웅렬은 일본에 있는 동안 아들과 함께 보냈다.

 

 

 

 

 


일본 체류중 촬영한 사진
(우측 앞의 인물이 윤치호, 맨 왼쪽은 박영효, 그 뒤는 서광범, 우측 두 번째가 서재필, 우측 앞이 윤치호
(1883년)

 

 

이때 영어를 배우는 것을 두고 고민하던 중 김옥균이 비밀리에 그에게 일본어와 영어를 익혀두라고 충고하였다.

 

그의 충고로 그는 일본어를 수학하고 뒤이어 영어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일본 유학 중 그는 여행을 하며 견문을 시찰하기도 했다.

 

동시에 낙후된 조국 조선에 대한 비판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또한 일본을 통해 신분 차별이 없고, 적서 차별이 없고,

남녀 차별이 없는 미국과 유럽의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그는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신념으로 삼았다.

이후 그는 조선의 문명개화에 뜻을 두고 본격적인 개방, 문명개화노선을 걷게 되었다.

 

 

인종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중국,

그리고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낙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 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4]

 

김씨, 조씨에 이어 민씨 척족 세력이 전권을 장악하고 부패와 전횡을 일삼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기도 했다.

 

임오군란 무렵 유길준과 윤치호는 대원군을 타도하기 위한

일본군의 파병을 청하는 서한을 일본정부에 보냈다.

양쪽 모두 모처럼 시작된 개화가 무산될까봐 우려했던 것이다.[5]

 

 

 

 

청년기[편집]

 

조선인 영어 통역사[편집]


고종과 미국 푸트 공사의 대담 내용,

 

윤치호 기록1883년 1월~4월간에 일본의 요코하마에 있는 주일본 네덜란드 영사관의 서기관 레온 폴데르 씨에게 영어를 배웠다.[4]

 

1883년 4월까지 일본에 체류하였고 이후 미국에 건너가 신학문을 접한뒤, 직접 신학문을 배웠다.

 

당시 그는 미국 사회에서 인맥에 의존하지 않고, 실력에 따라 공개채용하는 제도를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또 1883년 5월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이 체결될 때는 초대 주한 미국공사 존 루시우스 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여, 주한미국공사관 통역관으로 활동했다.

 

원어민이 아닌 네덜란드인에게 배운 어설픈 수준의 영어 실력이었지만

당시 영어 통역관이 없는 조선에서는 그의 통역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통역관과 외무 아문의 주사로 활동하는 중에도 그는 틈틈이 미국인들을 찾아가 영어를 배우며

 철자와 어투를 고치며 영어 실력을 가다듬곤 했다.

 

윤치호는 서서히 미국인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어법과 어투를 고쳐나갔는데,

 

1884년 봄에 이르면 당시 한글에 없던 단어까지도 명확하게 파악할 정도의 영어 구사 실력을 갖추게 된다.

 

 

2003년 그의 서한을 검토했던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 박노자가

경희대학교 교수 허동현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1883년~1884년에 그가 작성한 영문 문서를 보면

요즘 웬만한 대학생의 영어 작문보다 훨씬 고급으로 보인다[4] 고 평하였다.

 

 

그가 영문으로 번역한, 조선의 첫 공식적 도미(渡美)사절로

1883년에 미국에 건너간 민영익(閔泳翊,1860~1914)의 신임장[6] 을 보면

“비준”(批准:ratification)처럼 그 당시에 한글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근대적 한자어의 영문 번역어까지 다 보입니다.

 

웬만한 조선 선비 같았으면, 한자로 써도 정확하게 무슨 소리인지 모를

그 단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윤치호가 이미 영어로 파악했다는 것이다.[4]

 

 

 

 

 

귀국과 갑신정변 전야[편집]


푸트 공사 일행과 함께 (오른쪽 세 번째, 미국인 일행을 보고 서있는 관복입은 이가 윤치호)

 

 


1883년 5월 그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푸트의 통역관을 겸하며 푸트와 고종, 개화파 사이를 오가며

푸트와 고종, 개화파를 연결시키며 교량 역할을 하면서

 

청나라의 조선 내정간섭 배제와 미국,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와 유대 강화, 각종 정치기구 개편과 민중들의 정치참여와 참정권 부여를 역설했다.

 

동시에 문호를 개방하고 서구의 민권사상과 문물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해 아버지 윤웅렬이 향헌비(鄕憲碑)의 비문을 깎아내린 것과,

 별기군을 유임시킨 일로 탄핵을 받자

아버지 윤웅렬의 무고함을 변론하는 상소를 써서 올리기도 했다.

 

 

“ 신의 아버지 윤웅렬(尹雄烈)은 외람되게 특별한 은혜를 입고 나아가 곤수(梱帥)의 직임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삼가 북백(北伯) 임한수(林翰洙)가 북청(北靑) 유생(儒生) 조면한(趙冕漢) 등의 말에 근거해서 정부(政府)에 올린 장계의 내용을 보니, 논계(論啓)한 것은 터무니없이 날조하여 모함한 것이 끝이 없었는데,

심지어 가렴주구 하였다고 말하기까지 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신의 아버지는 북청 관리가 백성들의 돈 1만 냥을 더 거둔 것을 조사해 내어 민간들에게 돌려주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가렴주구라고 한다면 관름(官?)을 착취하고 아전들의 급료에서 거두어들였다는 말입니까?


또 ‘열 집에 한 명의 병정을 내면서 어찌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가?’라고 말합니다.

대개 장정을 뽑아서 새로 군사 편제를 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진다면 본토에서 첨병(簽兵)을 모집하지 않고

어느 지방의 백성들을 모집하겠습니까?

 

 

또 ‘향헌비(鄕憲碑)의 비문을 깎아버렸다.’고 한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신미년(1871)에 북청 사람이 사적으로 비 하나를 세우고 비액(碑額)에 ‘빈척신유(?斥新儒)’라고 크게 썼는데, 이것은 대략 《향헌록(鄕憲錄)》의 문구를 베껴서 권위 있는 것에 의거하는 것입니다.

 

가령 《향헌록》에 초목을 지어 나열한 것 가운데

어찌 유생(儒生)과 향인(鄕人)을 구별한 것과 신진 유생을 배척한 글이 있습니까?

 

지난 을해년(1875)에 세유(世儒)들이 전하께서 행행하는 길에서 원통함을 호소하여

계하된 관문(關文)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정부(政府)에서 관문으로 신칙하였는데도 그대로 가로막혀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향인이 감영과 고을에서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의 아비는 삼가 판하(判下)한 사목(事目)에 따라 시행하였고,

 ‘유생을 배척한다.’는 들의 글자를 깎아버리도록 허락했을 뿐입니다.

 

또 ‘별기군(別技軍)이 재임(齋任)이 된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삼가 열성조(列聖朝)에서 판하한 남병영 친기위 사목(南兵營親騎衛事目)을 살펴보니,

향임(鄕任), 교임(校任), 무임(武任)에 대해서는 친기위를 지내지 않은 자는 차임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전부터 외병방(外兵房)이 재임을 지낸 경우가 있었고 전전 별장(別將)이 향임을 지낸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아버지도 사목에 의거하여 친기위를 몸이 좋고 재주가 있으며 글과 식견을 겸비하고 부지런한 사람으로 차출하게 함으로써 격려하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지금의 별기군은 바로 예전의 친기위이니, 이것은 신의 아비가 처음으로 행한 일이 아닙니다.

대체로 일의 상황이 이처럼 명백한데도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남을 구렁텅이에 빠뜨리기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신의 아비가 모함을 받은 것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그의 아들 된 자로서 어떻게 진심과 정성을 피력하여 한 번 그 원통함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엄하게 사핵(査?)하여 주소서.
 ”

이 상소를 보고 일각에서는 그를 방자하다고 비판했지만 고종이 이를 무마시켰다.

그해 5월 의정부주사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윤웅렬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여

5월 10일에는 부사과(副司果) 김명기(金命基)의 규탄상소와

 6월 9일에는 함경도(咸鏡道) 유생(儒生) 전승준(全昇濬)의 상소가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고종이 무마시켰다.

 

6월 10일 다시 통리기무아문의 주사로 발령되었다.

 

 

 

 

 

 

갑신정변 전후[편집]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윤치호는 평생 그의 요절을 애통해했다.

 

1884년 1월 18일부터 8월 9일까지 윤치호는 거듭하여 사관학교 설립을 상주한다.

 

윤치호는 군대 통솔권의 일원화 군인정신의 합일, 상무정신의 강화를 통하여 충성스럽고 용감한 국방군을 양성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서 그는 미국인 군사교관을 초빙하여 각 영을 통합훈련할 것[7]과 사관학교 설립을 건의했던 것이다.[8]

 

이어 병원과 학교의 설립 및 전신국의 설치를 미국인에게 허가해줄 것을 건의하는 등 근대시설의 도입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8]

 

 

1884년 7월에는 선교사들을 통해 신식 병원과 전화국을 유치, 개설할 것을 고종에게 상주하여 허락받았다.

 

그러나 신식 병원 도입과 전화국 개통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전면 백지화된다.

 

 

 

1894년 9월 무렵 그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예상하였다.

 '일본은 이제까지는 개혁을 조선인 스스로 하도록 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볼 때 조선인들이 개혁의 의욕도 능력도 없음을 보고

주도권을 잡기로 결심한 것 같다[9]'며

일본이 미구에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리라고 전망했다.

 

 

1884년 12월의 갑신정변 직전까지 그는 온건파 개화당의 일원으로 자주독립과 참정권, 부국강병을 위해 활동하였다.

 

영어 실력의 부족함을 느낀 그는 다시 주조선미국 공사관의 직원들과 교류하며

자신에게 영어를 가르쳐줄 것을 부탁하여

주조선미국공사관 직원 미군 중위 존 B. 베르나든(John B. Bernadon)이 이를 수락하였다.

 

 5월 그는 1개월간 베르나든에게 하루 한 시간씩 영어 개인 지도를 받기도 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 초기에 윤치호는 정변 계획을 접하고 혁명의 성공을 기대하였다.

 

당시 김옥균을 믿고 따랐던 그는 1894년 9월에 접어들면서 윤치호는 아버지인 윤웅렬과 함께 '개화당의 급진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개화당의 급진성을 겨냥, 근신을 촉구하는 입장을 보였다.[10][11]

 

며칠 뒤 윤치호는 김옥균에게

 "가친(아버지)이 기회를 보고, 변화를 엿보아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10][12]"라는 말을 전했다.

 

 

그는 서광범,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과 가까이 지냈고 혁명의 성공을 내심 기대하였지만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는 개량적 근대화론자로서, 주도층과의 시국관 차이로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다.[13]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에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음력 10월 18일 윤치호와 윤웅렬은 "(개화당)이 무식하여 이치를 모르고, 무지하여 시세에 어두운 것"이라고 논했다.[10][14]

 

 

우선 윤치호는 이들의 거사 준비가 허술하고, 거사 기간이 짧다는 점과

인력을 많이 동원하지 못한 점을 보고 실패를 예감하였다.

또한 윤치호는 독립과 개화를 달성하는데 고종 만을 믿을 수는 없다고 봤다.

 

그러나 김옥균, 박영효 등과 절친했기 때문에 정변 실패 후 신변의 위협[13] 을 느껴 출국을 결심하게 된다.

사실 갑신정변의 실패를 예감했던 그는 망명할 계획을 미리 세워놓기도 했다.

 

 

 

 

 

 

유학과 서구 문물 수용[편집]

 

갑신정변의 실패와 망명[편집]


1884년 12월의 출국 요청 상소문,

1885년 1월 고종의 지도(知道) 라는 허가 서명이 좌측 상단에 있다.

 


모교 중서서원[15]


모교 중서서원[15]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1884년 12월 27일 그는 해외로 나갈 뜻을 건의했고,

1885년 1월 고종의 윤허를 얻어 1월 19일 출국한다.

 

 

이때 척족 대신들은 그가 유학을 빙자하여 도피하려 한다고 탄핵했으나

 고종의 특별 배려로 출국할 수 있었다.

 

고종은 그에게 지도(知道)라는 친필 서명을 한 서신을 그에게 내려주어 출국을 허용하였다.

 

명성황후는 그에게 어느날 꿈을 꾸고 보니

네가 앞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게 될 것 같다고 점을 쳐주었는데,

훗날 윤치호는 왕비의 예언이 맞아떨어졌다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1884년 정변에 비록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개화파의 일원으로서 망명성 유학을 떠났다.[16]

 

따라서 미국 유학 시절에도 미국 공사관의 박정양, 이완용이나

시카고 박람회 대표였던 정경원과 관계를 맺지 않았다.[16]

 

 

1885년 1월 19일 오후 프트 공사의 추천서를 가지고 배를 타고 인천항을 출발

일본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1월 23일 청나라 상하이(上海)에 도착했다.

 

미국으로 가고 싶었으나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미국행을 단념하고 청나라에서 유학하였다.

 

상하이에 도착 직후, 윤치호는 그길로 청나라로 망명하여 주한미국 총영사 G. 스탈을 찾아갔다.

 

스탈의 알선으로 그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A. J. 앨런이 세운 중서서원(中西書院, the Anglo-Chinese College)[15] 에 입학했다.

그러나 척족 대신들은 그를 제거할 자객을 상하이로 보낸다.

 

 

망명 직후 조선에서 파견한 자객들을 피하여 스탈의 연락을 받은 미국인의 집에 은신하였다.

 

이후 며칠동안 윤치호는 갑신정변의 실패와 성급한 계획에 대한 통한,

동지들의 아까운 희생을 슬퍼하며 통곡,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상하이 도착 직후 그는 아무일도 못했고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고국에서 어머니가 부쳐주는 생활비에 의존하며 겨우 연명하였다.

 

 

 

방황과 재각오[편집]

 

갑신정변의 실패에 절망한 그는 상하이에서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한달 가까이 여관방에 틀어박혀 크게 대성통곡하며 식음을 전폐하였다.

 

상하이 체류 한달여 만에 겨우 정신을 차려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다.

 

20대 초반의 윤치호는 상하이에서 '색루'(사창가)에 수시로 출입했고,

음주에 몰두[17] 했다.

 

 

후일 정운현은 그의 <일기>(日記)에 따르면 초기 2년간(1885년 2월∼1887년 2월) 음주 횟수 67회,

 밤의 여성과 동침횟수는 11회. 망명객의 울분과 20대 초반의 객지생활의 외로움이 겹친 것이었으리라고 분석하였다.[18]

 

 각혈하여 거리에서 쓰러지기도 했다.

 

개혁의 실패에 좌절한 그는 술과 사창가에서 살았고,

양깅방의 일본인 기생 오꼬마상(낙랑)에게 2백원 이상의 거금이나 민괴 향수 등을 선물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를 암살하려 파견된 자객들 역시 그의 망가진 모습을 보고 그대로 되돌아갔고,

더이상 그를 추격하는 추격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상하이에서 방황하던 중 그를 발견한 한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를 만나 그의 설득에 감화받고,

선교사의 인도로 교회에 나간 뒤,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태어나기로 다짐하고 공부에 몰두한다.

 

 

또한 목장과 밭일 등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청나라 사람들의 불결한 위생상태를 보고 처음에는 구토를 하는 수준이었으나 이내 적응한다.

 

청나라 사람들의 불결한 위생상태에 실망한 그는 중화사상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된다.

 

상하이 체류 중 그는 선교사를 통해 그는 기독교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더이상 사창가를 출입하거나 음주와 흡연을 그만두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 뒤로도 1년 이상을 사창가에 출입하게 된다.

 

교회에 출석하면서 그는 다시 조선의 개화를 위해 투신할 것을 재다짐한다.

 

상하이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윤치호는 더럽고 냄새 나는 중국인을 보며

조선인의 미개한 삶을 더욱 부끄럽게 생각했다.

 

 

청인(淸人)의 집은 음침하기 측량 없어 일본 사람의 정결하고 명랑한 집에 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의 똥뒷간 같은 집이야 어찌 청인의 2층집에 비하겠는가.

 

? “여인의 악수에도 놀랐던 그들, 문명(文明)을 동경하다”, 《조선일보》, 2009.12.05 작성.

 

당시까지도 조선내에 중국을 부모의 나라로 인식하고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의 은혜를 외치던 소중화주의자들을 심히 경멸하게 된다.[19]

 

대역무도(大逆無道)의 주범 김옥균의 잔당으로 몰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조선을 떠나야 했던 윤치호는 고국과의 지리적 이별 속에서 자신의 과거와 단절을 하게 된다.

 

서자(庶子)의 아들이었던 윤치호는 강요된 출국 이전에도 그를 진짜 양반으로 대우해 주지 않는 사회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20]

 

 

개신교 개종과 중국 유학 생활[편집]중서서원에서 3년간 공부하며

윤치호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중서서원 재학 동안 열심히 서양의 문물을 접하며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던 조선인들의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입각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낙후된 조선과 중국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과 낙후된 조선 사회의 현실에 절망, 조선 근대화에 대한 비판적,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 상하이에서 3년 반을 보낸 후 청국(淸國) 사회에 대한 그의 소감은 ‘더러운 물로 가득 채워진 연못’이었다.

 

 

반면 일본은 ‘동양의 한 도원(桃園)’이었다.[18]

 

 

윤치호에게는 본부인 진주강씨 외에 두 명의 첩이 있었던 듯 하다.

그가 상하이에 체류하는 동안 그의 두 번째 첩은 다른 남자에게 개가했다.[21]

 

1886년에는 그의 첫 부인인 진주강씨가 사망했다.

그가 상하이로 망명하고, 그의 아버지 윤웅렬은 능주로 유배되었을 무렵이었다.[22]

 

 

이후 윤치호는 10여 년간 중국과 미국으로 망명·유학하여 문물을 접하고,

서구 민권사상과 기독교 신앙을 수용했으며, 그는 부유했던 집안의 지원과 동시에 그를 높이 평가한 개신교 선교사들, 조선의 개화파 인사들, 일본인 개화인사 등 여러 곳에서 지원받으며 마음껏 학업에 정진할 수 있었다. 영 J. 알렌과 W. B. 보넬 교수의 영향으로 개신교에 귀의를 결심하여 1887년 4월 3일 상하이에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그가 개신교 신자가 되게 된 배경에는 4년 여되는 기간 동안의 개신교 연구와 수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23].

 

 

그는 노동을 천시, 경시하는 사농공상의 풍조와 출세욕, 관직열에 빠진 조선의 배관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유학기간 중 그는 서구의 민권사상과 합리주의, 직업윤리 의식, 민중의 참정권을 수용, 개혁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 내나라 자랑할 일은 하나도 없고, 다만 흉 잡힐 일만 많으매 일변 한심하며, 일변 일본이 부러워 못견디겠도다. ”
  ? 윤치호, 윤치호일기 1888년 12월 29일자
“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 ” 


  ? 윤치호, 윤치호일기 1890년 5월 18일자[24]

 

 

1890년대 초반 미국 체류시 윤치호는 사회진화론을 최고의 진리로 받아들여 중국인들에 대한 미국 사회의 무시와 억압과 중국인에 대한 인종주의적인 차별 행위까지도 옹호했다.[25] 그러나 합리주의적인 사회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미국 유학[편집]1888년 중국 짱수 성 상하이에서 일하던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사 알렌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1888년 9월 28일 상해를 출발하여 일본을 경유, 11월 4일 미국 테네시 주의 내시빌에 도착했다.[26] 미국으로 가기 전 도쿄를 경유하여 박영효, 김옥균을 만났다.

김옥균은 망명 직후 야마토의 히가시 히라노초 1465번지에 있는 야마구치의 집에 잠시 기식하는 동안, 야마구치의 어머니 나미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이듬해 사내아이가 태어났다.[27]

“ 조선에서 김을 죽이려 자객을 보내자 그의 신변이 걱정된 나는 그에게 충고했다. 일본 고사(古事) 중 오이시우치가 교토에서 기라의 첩자를 방심시킨 내용을 인용하면서, 우국적 행위를 버리고 주색에 빠진 바보 시늉을 해보라고 권했다. 그랬더니 그가 매일같이 도쿄 유라쿠초의 여관에서 시바우라의 온천장까지 들락거리며 홍등가를 방황했다.[27] ” 


  ? 도야마 미치루의 증언

 

김옥균은 반쯤은 자객의 칼끝을 무디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반쯤은 망명유랑에 지치고 지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도쿄의 윤락가를 배회하였다.[27] 박영효는 이런 김옥균을 싫어하고 지겨워했다.[27] 윤치호가 도쿄를 방문했을 때 박영효는 김옥균을 사이비 지도자라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 옥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대는 무능한 자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탕아지. 도쿄에서 조선 사람, 일본 사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물쓰듯하고 말이지. 결국 갑신혁명이 실패한 것도 그런 엉터리 지도자 때문일세. 그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 꼴이 난 걸세. 그렇다고 옥균이 진짜 리더였나? 나와 홍영식이 다 했지.[27] ”
  ? 윤치호의 도쿄 체류 중 박영효의 불만

박영효는 김옥균의 여자 관계를 두고 망명 동지들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짓이라고 비판도 했다. 미국으로 건너가던 윤치호가 도쿄에 들렀을 때도 박영효는 김옥균을 격하게 비난했다.[27]

밴더빌트 대학교 재학 시절[편집]
에모리 대학 재학 시절그는 곧 밴더빌트 대학교영어 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 밴더빌트 대학교 재학 중에 그는 감옥의 수인선교를 위해 1년 6개월간 매주일 오후에 형무소를 방문하여, 미국인 죄인들에게 기독교 강론이나 성경을 가르쳤다.[23] 조지아 주에 가서는 가난한 흑인들에 비참한 생활에 관심을 가지며 그들에게 개신교를 전도하기도 했다.[23]

한편으로 그는 학비걱정이나 일본 학생친구들과의 대화, 교수들의 초청과 교제, 자신의 이성이나 성적인 혹은 음주문제의 고민, 그 절제를 위한 노력과 실패 등도 언급하며 자신의 수련의 결의를 때로 ‘머리를 깎는 삭발’로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치호의 떠나지 않는 고뇌는 역시 약소하고 미개하며 썩은 관료들로 인해 피폐한 조선을 구할 수 있을가 하는 것이었다. 그의 여러 미국의 스승들 중에 조직신학 교수 틸레트와 성경사 교수 호스, 워런 A. 캔들러(Warren A. Candler) 총장 등은 특별한 영향을 윤치호에게 주었다. 특히 캔들러는 윤치호의 정치 사회 역사의식이나 기독교적 원숙한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23]

1888년 테네시 주 하니발에서 그리고 에모리 대학 재학 중인 1892년 옥스퍼드에서 두 차례에 걸쳐 미국 대통령의 민선 광겨을 목격하고, 미국인들의 고도의 정치의식과 자유로운 정치토론 , 그리고 국민의 여론과 다수결에 의해 통치자가 선출되는 민주주의의 진면목을 목격하였다.[28] 그리고 그는 조지아 주의회 및 미연방 상, 하원을 견학하여 국민의 대표자들이 제정한 법률에 의하여 통치되고, 민의가 반영되는 합의의 정치 곧 의회민주정치의 일단을 주시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흑인 강도에 대한 재판을 방청하고, 방대한 인원구성과 피의자의 충분한 변호 그리고 증거에 의한 판결과 공개재판 등 인권보장의 장치가 잘 갖추어진 미국의 사법 제도에 큰 감명을 받기도 했다.[28]

이때 그는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미국의 ‘위대함’을 목격하고는 미국은 일본보다도 한 수 위의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미국사회의 ‘인종차별’로 깨지고 말았다.[18] 내심 미국의 민주주의와 청교도적 합리주의 사상과 일한만큼 받는다는 사상에는 경의를 표하면서도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들에 대한 백인종의 차별대우를 보고 그는 분개했다.

 
모교 에모리 대학교
모교 에모리 대학 전경밴더빌트 대학교에서 그는 주로 신학(神學)과 영어 등을 배웠으며, 1891년 초 밴더빌트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밴더빌트 졸업 직후 윤치호는 조지아 주로 건너가 조지아 주 카빙턴(Covington)에 있는 옥스퍼드 대학(Oxford College of Emory University)에 입학한다. 그러나 1891년 가을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중퇴한다. 이 기간 중 그는 성서사학자 워런 A. 캔들러(Warren A. Candler) 박사, 조직신학 교수 틸레트, 호스 박사, 에비 호스 부인, 조선에 있던 아버지 윤웅렬, 어머니 전주이씨, 삼촌 윤영렬 등이 보내주는 용돈 외에도, 스스로 강연과 상점 점원, 사탕수수 농장, 식당 서빙, 오렌지 농장, 커피 농장의 열매 수확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한다. 낮선 환경에서 넉넉치 않은 환경은 그의 체력과 학업에 어느정도 지장을 가져다 주었다.

에모리 대학 수학과 졸업[편집]그러나 다시 1891년 미국 조지아 주 옥스퍼드에 정착한 뒤 다시 에모리 대학(Emory University) 옥스포드 컬리지에서 2년간 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을 수학하였다.

윤치호는 대학 교육을 받으며 조선 문제에 끊임없는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억압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을 가졌고 반면에 구미국가를 모델로 한 근대화를 구상하였다. 나아가 청국의 외압 하에 있느니 다른 문명국에 의한 지배하에 있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16]

귀국 전 윤치호와 서재필은 한 차례 만났었다. 1893년 가을 에모리 대학을 마치고 상하이로 되돌아가기 전인 윤치호는 인사차 서재필을 방문했었다.[29] 서재필은 윤치호의 방문이 내키지 않았다. 그를 만나자 잊고 있었던 십년 전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모했던 정변이 떠올라 회한에 잠겨 스스로 부끄러워지며 자신 때문에 죽은 부모와 처자를 떠올렸다. 서재필은 졸업을 축하한다는 의례적인 인사만 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윤치호는 왜 그런지 알면서도 무척 서운해했다.[29] 윤치호는 서재필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를 보내주었다.

1893년 가을 윤치호는 미국 에모리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인 중 손꼽히는 미국내 대학 졸업생의 한사람이었다. 한편 그에게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면 장학금 전액을 지원하겠다는 미국 남감리교회의 제안이 들어왔으나 그는 조국을 위해 할 일이 있다며 양해를 구하고 배편으로 귀국한다.

미국 유학기간 동안 윤치호는 기독교와 민주주의, 과학문명 등을 목격하였고, 기독교 사상, 민주주의, 과학 문명에 기초한 합리주의적인 사회를 경험하면서[13] 조선의 체제에 실망을 느끼는 한편 이를 조선의 근대화의 기본방향으로 설정했다. 이후 윤치호의 사상적 기초는 '힘의 정의'라는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으로 변모해갔으며, 사회개혁에서는 미개한 전통사회를 선교와 교육이라는 국민개조를 통하여 근대사회를 형성한다는 국민계몽의 이상을 품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조선 사회에 대한 경멸감도 품기도 했다.

 

 

 

 

 

 

 

 

 

 

 

 

 

 

졸업과 귀국[편집]
두 번째 부인 마애방, 청나라 사람이었다.1893년 9월 윤치호는 에모리 대학교의 캔들러 총장에게 $200를 기탁하며 남감리교의 한국 선교를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23] 그는 이 편지에서 자신이 세례와 신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음을 감사히 여기며 조선에도 그와 같은 교육이 시행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 내가 모은 돈 200달러를 당신께 보내오니 이 돈을 기초로 삼아서 조선에도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여 내가 받은 교육과 같은 교육을 우리 동포도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만일 내가 상해로 가서 속히 조선으로 들어가면 내가 학교를 세우도록 할 것이요. 만일 나보다 먼저 조선에 가는 이가 있거든 그에게 부탁하여 학교를 세우게 하여 주되 5년이 지나도록 세우지 못하게 되거든 그 돈을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습니다.[30] ”

윤치호는 갑신정변의 혼란 속에서 중국 상하이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남감리회에서 운영하는 중서서원에 입학했다. 수구파의 승리로 개혁이 좌절되고 윤치호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됐다. 유학을 마친 윤치호는 학교를 떠나면서 원장 켄들러 박사에게 이같은 편지를 썼다.[30] 이 일을 계기로 남감리회는 동양 선교관리 담당 핸드릭스 감독에게 선교 방안을 모색하라고 지시했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리드 선교사가 답사차 1895년 10월 13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30] 그의 편지를 계기로 감리교회 선교사들은 인천과 경성을 비롯하여 조선에 공식 포교를 시작하였다.

1894년 3월 중국 여성 마애방(馬愛芳)과 재혼하였다. 마애방과의 결혼은 연애결혼이었다.[22] 마애방은 미국 남감리회에서 운영하는 맥티여학교를 졸업한 여성으로[22] 박노자는 마애방이 기독교 신도이자 매우 서구화된 중국 여성이라고 지목했다.[25] 마애방과의 사이에서는 봉희, 영선, 광선, 용희 등 2남 2녀가 태어났다.[31] 귀국 직후 그는 캔들러 박사가 보낸 남감리교 선교사들을 만나고 이들에게 조선의 풍속과 경성부, 인천에 거처와 예배당지를 마련하는데 동참, 이들의 통역을 하고 남감리교회 선교사들의 정착을 적극 도와주었다.

차별대우와 인종주의적 사고로 변화[편집]그러나 한편으로는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주의적, 흑인을 차별하는 태도를 목격하면서 백인들의 오만함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미국 체류 중 황인종을 멸시하는 백인 불량배들에게 끌려가 가끔 얻어맞기도 하고,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호텔 투숙을 거절당해 정거장에서 밤을 지샜는가 하면, 세례 교인이었던 그와 가장 가까워야 할 미국인 선교사에게마저 늘 은근히 - 그리고 가끔은 매우 노골적으로 - “왕따”당하는 처지였다.[4] 귀국 이후에 조선에서 만난 미국인 선교사들도 비슷하게 그를 대우했다.

당시의 그에 대해 후일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 박노자는 '백인 인종주의에 상처받아 만신창이가 되었을 그의 마음 상태[32]'를 지적하기도 했다.

“ 만약 내가 마음대로 내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일본을 선택할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 ”
  ? 1893년 11월 1일자 일기[33]

그는 평소 조선인들의 불결한 위생과 겉치레, 감정적 대응 등을 내심 경멸해왔다. 그리고 서구의 기독교사상과 일한 만큼만 댓가를 받는다는 청교도 정신, 합리주의의 수용을 통해 이를 개선하려 했다. 그러나 평소 기독교선교사들로부터도 자기 일 처리도 못하는 작은 아이, 원주민,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될 만한 사람의 대접을 늘 받아 온 윤치호는, 인종주의야말로 미국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4] 그 뒤 그는 조선에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기독교 정신의 도입이 시급하다고 봤다. 그러나 미국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기독교 사상과 개척정신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내심 백인종을 혐오하는 이중적인 태도와 인종주의적인 사고를 갖게 되었다.

어느 교회에서 남부 출신 남감리교회 목사들이 예배 시간에 흑인을 박멸해야 된다는 설교, 흑인들을 아프리카로 추방해야 된다는 설교를 듣고는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들이 목사인가 기독교인인가 자체를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흑인이 백인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는 것에는 분노하면서도 흑인에 대해서는 1893년 2월 17일자 일기에 '(아프리카인들이 미국에 끌려와) 영어를 배운 것만으로도 그들의 노예생활에 대해 충분히 보상받은 것이다.'[24] 라는 이중적인 시각을 갖게 된다. 귀국 이후 그는 국내 인사들이 미국을 무조건적으로 의존하거나 일제와는 다른 선량한 국가일 것이라는 생각을 비판, 경계하기도 했다.

 

 

 

 

 

 

 

 

청나라 체류, 중서서원 교사 생활[편집]
마애방(두 번째 부인)과 그의 여동생 마수진, 1893년1893년 11월 배를 타고 청나라의 상하이에 도착했다. 청나라로 건너간 윤치호는 이듬해 7월 25일 청일 전쟁이 터지자 8월 모교인 상하이 중서서원의 교사가 되었다. 1893년 8월부터 1895년 1월까지 그는 중서학원에서 영어, 영문학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에 이르러 그는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인이나 청나라인, 일본인들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칠 만큼의 영어 회화 실력을 갖추었다.

청나라에 체류 중 그는 남궁억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조선을 상징할 국화를 결정하기 위해 은신해 있는 윤치호를 찾아왔다. 1893년에는 남궁억과 의논해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정했으며 그로부터 애국가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가사를 넣었다고 전해진다.[34]

 

청나라 상하이에서 체류하면서 지냈을때인 1894년 3월 27일 오후, 윤치호는 김옥균과 홍종우등 일행을 맡아들였다. 김옥균은 윤치호에게 '리훙장의 양아들 리징황의 초청으로 오게되었다.[35][36] 경비는 홍종우라는 자가 대고 있다."고 말하자, 윤치호는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홍종우는 (조선에서 보낸) 스파이 같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옥균은 "그가 스파이일리가 없다."고 답했다 한다.[35][36]

 

3월 27일 김옥균은 인편으로 윤치호에게 오후 1시 반에 자신이 숙박하고 있는 동화양행(일본 호텔)로 와서 함께 갈 곳이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급히 보낸다.

그러나 윤치호는 학교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김옥균의 제안을 사양한다.

 

다음날 3월 28일 김옥균은 홍종우에 의해 저격, 암살당했다.[35][36]

 

미행의 그림자를 예상한 그는 김옥균의 암살 소식을 접하고 수시로 거처를 이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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