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편집]
1947년 8월 3일,
여운형 장례식.
추모인파는 60여만명이 몰려와서 애도의 물결을 이루었다.
그의 죽음으로 좌우합작위원회는 구심점을 잃게 된다.
제2차 미소공위는 추진하던 중 이후 중재자가 없어지자
극좌,극우 양극단 세력의 갈등이 표출하였고,
끝내 미국-소련의 입장만 확인한 채
1947년 10월에 제2차 미소공위는 완전히 결렬되어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UN으로 이관함으로써 좌우합작위원회는
1947년 12월에 공식 해체된다.
결국,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합작운동은 좌절되어 실패로 끝났고
한반도는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안이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피습,절명하여 암살되었을 당시 갑작스런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1947년 8월 3일
광화문 인민당사 앞에서 발인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영결식은 인민장으로 치러졌다.[주 32]
영결식에 약 60여만명의 수많은 추모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이는 광복 이후 최다 인파가 모인 것인데, 민중들이 슬픔에 동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흰 옷을 입어서 서울시내가 하얗게 뒤덮였다고 한다.[126]
영구는 결식장인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으로 향해 서서히 갔고,
장례 행렬은 11시 40분에 서울운동장에 도착하여 영결식이 치러졌다.
서울 운동장에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역도선수 김성집등 체육인들이 그의 관을 운구하였다.[127]
그의 시신은 포르말린으로 방부처리되어 쇠로 만들어진 관에 안치되었다.
통일이 되는 날에 다시 장사를 지내기 위함이었다.
그가 죽자 미 군정장관 하지가 육각수은관을 미국에서 특별 주문해 가져왔다고 한다.[128]
여운형 묘소.
서울 우이동에 위치해 있다.
여운형의 묘소는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에 안치되었으며
강북구 수유동에서 멀지 않은 솔밭공원 근처에 있다.
한 때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우이동 묘소 땅이 채윤혁 개인에게 불하받게 되어
여운형 시신이 오갈 데 없는 딱한 처지에 놓인 적이 있었다. [129][130]
당시 국회의원이던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 법적으로 어떻게 해볼 길이 없으니
대통령 박정희한테 직접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그 분 사상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 하다."면서
좋게 해결해주었다고 한다.[131]
그리고, 1965년 7월 19일에 공식적인 추모식이 열렸다.[6]
199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2007년 항일독립운동가단체 협의회로부터 신간회창립80주년을 기념하는
민족공동체 상이 추서되었다.[132]
양평군에서는 생가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133][134]
암살 배후
여운형 암살 저격조 조직표.
암살 사건 당시 경찰은 범행 발생 나흘 후인
1947년 7월 23일 평북 출신의 19세 소년 한지근(이필형)이 범인이라고 발표했고,
체포 후 한지근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애국투사'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배후는 밝히지 않았다.
1974년 2월 공소시효가 지나자 유순필, 김흥성, 김훈, 김영성 이라는 사람들이
서울지검에 출두해 "자신들이 몽양 암살에 가담했다."고 자백한다.
이들은 "민족분열의 책임자는 여운형"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극우 테러단체인 혁신탐정사와 비밀결사 백의사로부터 입수한
권총 2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135]
한지근은 송진우 암살범인 한현우와 친분이 있는 사이이고,
사건 발생후 권총과 실탄 10발을 한현우 집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136]
그러나 이들 역시 배후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여운형의 암살 배경과 그 배후는 지금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주 33][주 34]
우익계열에 의한 암살설
《여운형 평전》을 저술한 이기형 시인과
재일 한국인출신 강덕상 명예교수는
'이승만의 하수인 장택상과 노덕술등 친일경찰세력들이 배후가 있다.'고 주장한다.[6][12]
이기형은 "여운형 위시한 지도자를 훼방하고 때리고 가두는 작업에
친일잔재세력들과 보수 수구세력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면서
"이들은 해방 이후 우익이라는 우산을 쓰고 애국자로 둔갑했고
건준을 망가뜨렸다"고 주장했다.[137]
여운형 암살공범들과 김영철(앉아 있는 인물이 김영철).
김영철은 임시정부 행동대원 겸 백의사 집행부장이라고 한다.
이 사건에는 군정경찰[138]과 백의사[139]가 깊숙하게 개입[140]되어 있는데
1947년 7월 19일,
암살 그날 경찰은 암살범을 쫓아가던 경호원을 '범인'이라고 지목하고
경호원을 체포하는 황당한 상황 연출을 보인 점과
수사 결과를 보도할 적에 '한지근 개인의 우발적인 범죄'라는 발표를 내었을 뿐
암살 배후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로 수사를 종결지었다.
평소 여운형이 수차례 테러를 당했을 때도 경찰은 이를 방조하여
사실상 테러 행위를 조장하였던 것들을 미루어 볼때,
이는 경찰의 후원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암살이었다.
여운형 암살공범 중 김흥성과 신동운에 의하면 권총을 건내준 인물은 김영철이라고 한다.[141][142]
김영철은 '임시정부 행동대원'으로 서북청년회 또는 그와 유사한 단체의 행동대장으로 있었던 사람으로
당시 반공을 모토로 한 테러리스트 단체 주요 간부들과 서로 통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김영철은 백의사와 서로 연이 닿는 사이로 여러 사건에 직간접으로 연관이 되었던 인물이었다.[143]
여운형 암살 공범들은 '임시정부 행동대원' 김영철하고 거래가 많이 있었다고 하며
김영철이 백의사 계통하고 얼마나 가까운지 그것까지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
1985년 8월 31일 백의사 부사령관 박경구의 녹취록을 보면
백의사와 김영철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김영철 씨는 원래 만주에 있을 때 우리 중대장이야.
그런데 여기 나와서는 내가 (백의사) 부사령관이고
그 양반(김영철)이 집행부장 했단 말이야.
본래 김영철 씨 권총 잘 쏩니다.
그래서 그 집행부장(김영철)이 하수자를 선정했을 것 아닙니까.(하략)
백의사가 여운형 암살 계획한 이유에 대해서 부사령관 박경구는
여운형이 암살되기 전 여운형의 노선에 대해 탐문하기 위해 여운형을 찾아갔다고 한다.
(여운형에게) 물었더니 이 양반 말이 뭐라고 하느냐하면
과거 임시정부 시절은 이미 쓰레기이다. 지나갔다.
이제부터 우리나라는 사회주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
이런 말을 했어.
"큰일 났구나"
그런데 청년들은 전부 이 사람을(따르고)
내 그래 그 이야기하던 것을 그냥 그대로 염 선생(염동진)에게 보고했어.
그러니까 염 선생이 탁 치면서
"그렇다니까 그 틀림없다" "
그렇다면 저 놈 없애 되지 않겠느냐"
"그럽시다, 없앱시다."
당시에 여운형은 제2차 미소공위 성사를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국사편찬위원회 정병준 박사는
'여운형이란 사람은 당시로서 기회주의자이고
정치적 회색분자로도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야기한다면 좌우가 협력해서 나라를 건설하자는 이념을 가진 인물로
여운형 암살 이후 남한에서 더이상 중도는 불가능한 문명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144]
당시 여운형 암살모의를 계획한 극우파의 행동대원들은
이승만-김구-한민당을 왔다갔다 했었으며,
백의사뿐만 아닌 극우테러 단체들은 여운형 암살의 거세를 원하고 있었고
실제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자신의 일처럼 범인들을 감싸고 돌았다.[71]
그리고, 암살 시점이 그가 소련과 결별하고 미군정과 협력한 시점이었으며,
여운형에게 새로운 통일 임시정부 총리직을 제의하기 위해
'여운형과 교섭해야겠다.'는 미군정 문서까지 발견된 것[주 35] 등 감안한다면
암살배후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노덕술등 군정경찰세력들이 극우 정치테러 단체들과 타협해서 사건을 축소, 무마하는데 일조한 암살배후로 보고있다.[주 36][6]
재일 한국인 원로 사학과 명예교수인 강덕상 역시 '이승만 일파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주장한다.[12]
그밖에 여운형의 외조카인 철학자 박찬기는 김구를 지목했다.[145]
박헌영 계열에 의한 암살설
암살당시 입었던 옷. 혈흔이 뚜렷히 남아있다.
여운형의 데드마스크.
이와 반대로 최근 2007년에 이정식교수는 '당의 주도권을 놓고 여운형과 다투던 남로당의 박헌영계열이 암살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146][147]
여운형이 암살당한뒤 2개월 뒤, 존 하지 사령관은 서울을 방문한 미국 육군차관 드레이퍼에게 보호하기를 6월 말까지 북한 공산당은 여운형을 '미군정과 연탁한 배반자'라고 맹공격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에는 그를 추도하겠다는 등 야단을 부렸다고 한다.[148]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좌파에 의한 테러를 지적하기도 했고[149],
여운형의 둘째딸 여연구는 부친을 암살한 것이 종파분자들이라고 증언하였다.
여기서 종파분자는 박헌영 계열을 가리킨다.[114]
이정식 교수는 이를 근거로 남로당 계열 등 박헌영계열이 암살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149]
김일성 계열에 의한 암살설[편집]
반면에 김일성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남로당의 '마지막 지하총책'이었다고 주장하는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여운형과 김일성은 공산당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공동의 적인 박헌영을 타도할 목적으로 손을 잡았는데,
기대와는 달리 여운형의 역량이 박헌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자
이에 실망한 김일성이 여운형에게 자금지원을 중단했다 한다.
이에 여운형이 김일성을 비난하자 모의내용이 탄로날 것을 우려한
김일성이 여운형을 제거했다 한다.[150]
박갑동에 의하면 신문 보도와는 달리,
미국의 자료에 의하면 여운형의 암살자는 김일성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151]이 있다고 한다.
또한 여운형이 좌익에서 몰락해 가자 김일성에게는 이용 가치가 없어졌다.[151]
여운형은 이에 대해 불만을 품고 '김일성이 싫다'는 발언을 했는데[151],
박갑동에 의하면 '이 말이 김일성의 귀에 들어[151]간 것'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박갑동에 의하면, '이러한 근거자료들은 미국측의 자료에 있으며,
미국측 자료에 여운형의 진짜 암살자는 김일성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152]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말한 "미국 자료"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며,
어떤 연구자도 이 자료를 찾아내지 못했다.
국사편찬위원회로 활동하고 있는 정병준 교수는
"어떤 자료에도 미군정이 여운형 암살에 조직적으로 개입했었다는 정후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반박했다.
동아일보 사장인 김학준 역시 '여운형과 김일성의 관계에 미뤄, 김일성이 여운형을 암살했다는 박갑동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반박했다.[153]
박갑동에 의하면 김일성은 월남한 반공청년으로 위장한 한지근을 남파시켜
자연스럽게 우익청년조직인 백의사에 접근토록 하여 여운형을 암살하였다는 것이다.
체포된 한지근은 개성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한국전쟁때 남하한 인민군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한다.[150]
실제로, 한지근(이필형)은 개성형무소에서 복역 중 행방불명되었다.
소문으로 '한지근이 일본에 살아있다.'는 증언이 있어 예전에 한겨레신문 기자가 취재한 적이 있는데, 알고보니 고하 송진우를 암살한 한현우였다고 한다.
암살배후[편집]
이러한 암살 배후가 불분명한 가운데, 좌익세력에 암살되었다는 설이 우익진영에서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암살 사건 현장에서 경찰이 암살범의 도피를 방조한 점이나
범행 직후 우파 소행으로 보이는 암살 성공을 알리는 벽보가 서울 곳곳에 나붙은 정황 증거 등을 감안하면 우익진영에 암살되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주 37]
암살 당시 여연구는 모스크바 유학 중이라 국내 사정을 잘 알지 못했으며,
당시 수사당국은 '좌파 한지근의 개인적인 범인'이라고 밝혔으나
당시 이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미군정기 시기 여운형은 대중의 인기가 가장 높은 인물로
우익세력의 최대 정적이었다.[154][155]
평가와 비판[편집]
1947년 6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는 이승만에게 이승만과 김구가 계획 중이라는
테러행위를 즉각 중지하도록 요구하는 서한을 은밀히 보내지 않고 공개적으로 보냈다.
이후 미군정의 태도를 보면 여운형의 암살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공개적으로 경고만 하고는 방관하였다는 인상을 준다는 견해가 있다.[156][157]
우사 김규식은 여운형의 암살 소식을 듣고 충격이 컸다고 한다.
김규식은 여운형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우리는 한 위대한 혁명투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유일목표인 신국가 건설을 위하여 전 민족이 합작으로부터
완전 통일에 나아감으로 최후 목적을 달하기를 제창하여 이에 최종까지 노력하던 지도자를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몽양 동지의 영별에 대하여 정실상의 감촉보다도
우리 민족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공동진영의 한 용장을 상실하였다고 본다. 곧 민족 전체의 손실이다.
”
? 여운형 서거 담화, 1947년 7월 22일,
우사 김규식[158]
군정청은 처음에 한민당세력들로부터
'여운형은 친일파이며, 공산주의자.'라는 소리를 듣고 여운형을 의심했으나[159],
나중에 가면서 그러한 오해가 풀리게 되어 여운형의 중도파 정치노선에 호감가게 되었다고 한다.[160]
“ 미 국무성은 여운형을 당시 해방이후 조선에서 인기있고 유능한 지도자로 봤다.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중략)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그는 최대한 공산주의를 이용했을 뿐이며, 그는 민중정치기구 결성을 도왔지만,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을 신봉하지 않았고, 소련편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한국편이었다.[30] ”
? 리처드 로빈슨[주 38]
“ 몽양은 개인적으로 소련보다 미국에 더 가까웠지만,
이들 양국에 대해 절대 중립이었으며,
그가 갖고 있던 유일한 목적은 미국, 소련 양국으로 하여금
가급적 빨리 한국으로부터 물러나게 하는 일이었다.[30] ”
? 윌리엄 랭던[161]
남동생 여운홍에 의하면 남들에게 후한 사람이라 하였고,
윤보선은 그가 세련된 인물이고 활기찬 사람이며 웅변에 능하고 겸손하며
사교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162]
김종필은 그가 명연설가이고, 잘생기고 똑똑한 사람이었다고 하였다.[163]
유병묵은 그가 천재적이었다고 보았고
강원용은 마음이 열렸으며 폭넓은 사고를 하였다고 평가하였다.[162]
언론인 송건호는
'그가 사망했을때 기회주의자라서 그의 죽음이 조롱당했다. 처음에는 그들의 의견에 따랐으나,
지금와서 나중에 다시 생각하니 여운형의 정치노선이 옳았다.
그를 재평가 해야한다.'고 평가하였다.[164]
김두한은 여운형은 중도이고 청년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하며 그도 존경했다고 말했다.[108]
강원룡 목사는
'여운형을 첫째로 자유주의자, 둘째로 민족주의자, 셋째로 사회민주주의자'로 평가한 적이 있는데,
강원룡 목사 스스로 '이것이 가장 정확한 평가.'라고 한 적이 있다.[165]
당대의 여론[편집]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33%가 여운형을 지목하였다.[166]
그 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78명이 여운형을 지목하였다.[166]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95표를 얻어 1위였다.[166]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 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689표로 전체의 10.3%를 확보했다 한다.[166]
1947년 1월, 이승만 지지단체인 '한국애국부인회'가 서울 주요 시내거리에서 이승만과 여운형 두 사람에 대한 지지 모의투표를 실시했는데, 결과는 1000표(이승만) 대 900표(여운형)로 근소한 차이를 나타냈다.[167]
1990년대 이후의 평가[편집]
2008년 건국훈장 수여증.사회주의 운동 이력으로 독립운동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2002년 7월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 사업회가 조직되어,
여운형에 대한 재평가와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하기 위한 운동을 하였다.
2005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하지만 그가 받은 건국훈장은 2급훈장이어서,
조선의 독립과 청년들을 위해서 헌신한 여운형의 업적에 비해 너무 인색하다는 비평도 있다.
그동안 여운형에 대한 건국헌장 추서는 '오랜시간 동안 제대로 사상문제로 대접받지 못하던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조명의 시작'이라는 평가도 있다.
또한, 오늘날 남북한 모두 존경받는 지도자로 평가받기도 한다.[168]
재일교포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로 지내는 강덕상 교수는
'독립운동의 중심은 김구도 아니고 이승만도 아니다.
해방 후 외세의 간여가 없었다면 여운형이 민족의 지도자가 됐을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169]
미국의 대학교수 이정식은
"힘든 과정을 통해서 몽양은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었고, 그들을 격려했고, 이끌었습니다.
몽양 자신은 때를 잘못 만났기에 꽃을 피우지 못했으나
그는 겨레의 스승의 한 사람으로 길이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으며,[114]
이어서 이정식 교수는
"여운형은 마르크스주의자같은 공산주의자가 될 수도 없는 사람이었어요.
국내에서 5년간 기독교 전도사를 했고,
중국 상하이 한인교회에서도 3년간 전도사를 했던 것을 보면 유물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저 제국주의에 반대했던 겁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연설한 것을 보면 미국의 제국주의에도 반대했고,
소련도 '스탈린 집권 후 제국주의로 변질했다.'는 점을 간파했죠."라고 평가하였다.[168]
외조카이며 여동생 여윤숙의 차남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박찬기에 의하면
"해방정국에서
영국과 소련은 한국의 대통령으로 여운형을 꼽았고
미국은 이승만을 꼽았지요. 김구는 없었어요.
김구는 여운형을 제거했고, 이승만은 김구를 쳤지요.
이것이 우리의 비극입니다.
단합과 화해보다 분열과 대립의 추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고,
이것이 우리 정치에 그대로 오염돼버렸다[145]"며 아쉬워했다.
국가 보훈처에서는 2005년 2급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으나,
2008년 2월 21일 퇴임 직전 노무현 대통령 정부로부터
최고 등급(1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다시 추서받았다.[170]
그 외에 '여운형은 박헌영과 같은 과격한 공산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계열이라기보다는 사회민주주의쪽에 가까운 인물로 사회민주주의의 오래된 미래'라는 재평가가 있다.[171][172] [173]
또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인민 본위의 정치를 옹호하였으나
권력을 잡지 못하였고, 좌우 양쪽에서 존경을 받는 정치인이자 지도자 였다는 점에서
쑨원과 비슷하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중국어 논문 중에 여운형과 손중산을 비교연구한 논문도 발표되었다.[2]
비판[편집]
박헌영이나 한국민주당 세력 등으로부터는 회색주의자, 기회주의 정치가의 전형이라는 혹평을 받았다.[174][주 39]
여운홍은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선인민공화국으로의 개편 과정을
'이것은 순전히 소아병적인 극렬 공산당원들이 꾸며낸 하나의 연극이었으며,
형님(여운형)에게는 박헌영등 극렬 공산주의자와 손을 끊지 못하고 연계하였던것이
정치생활 중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평하였다.[175]
한편 나용균은 그가 자기의 선전을 너무 많이 한다고 보았고[162],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은 '우유부단하고 생각이 모호하다, 남의 영향을 쉽게 받았다.'면서
'좌우합작운동 추진과정에 김일성과 손잡은 것은 실수'라고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 박진목은 그를 '이름 팔기를 좋아한 매명주의자'라고 평하였다.[176][162][177]
그밖에 실패한 정치인이라는 평가와 이편 저편도 아닌 우왕좌왕하다
좌익과 우익 양측에 의해 정략적으로 이용당해 희생양이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178]
의혹과 반론[편집]
친일 의혹설[편집]
1944년에 발행한 반도학보출진보 단행본 p95.
여운형이 '반도 2천 5백만 동포에게 호소한다'는 제목으로 단행본에 게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05년 건국훈장 추서 당시 친일 의혹이 처음으로 제기되었는데,
태평양 전쟁 이후로 부일협력의 길을 걸었다는 견해였다.[179]
근거로 든 것은 다음과 같다.
1941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했을 무렵, 여운형은 '일본이 머지않아 패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는 이를 '소련의 밀정','치안유지법 위반',유언비어 등 혐의로 그를 체포했다.
여운형은 옥중에 심한 고문으로
1943년 7월에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 경성요양원에 입원 중 전향서를 썼다고 한다.[179][2]
그 후 그의 이름으로 된 총독부기관지 경성일보에 1943년 11월 9일부터 11일까지 '학도병권유문'이 3차례 실리고, 1944년에 경성일보사가 발행한 '반도학도출진보(半島學徒出陣譜)'에 같은 내용의 글을 수기로 썼다고 발표한 내용이 발견되었다.[179]
1930년대 조선중앙일보 사장시절 친일 단체인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 역임,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찬조연사에 그의 이름이 실렸고,
1945년에 결성된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에 그의 이름으로 된 학도병 출정 권유문이 세 차례 실리기도 했다는 것이
그의 '친일 행위' 의혹설들이다.[180][181]
광복 후 친일 문학 소설가 김동인과
만주에서 일제 밀정으로 지낸 친일파 이종형, 변호사이자 한민당 간부로 지낸 이인은
여운형의 친일의혹을 제기하였다.
김동인은
'그가 일제 말 방공훈련 때 경찰 지휘를 받으며 완장을 두르고 고함지르며 싸대고 있었다.
저럴 때면 좀 피해서 숨어버리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
난 지나가면서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고 갔다.'
며 1949년 잡지 '신천지'에 발표하였다.[180][179]
이종형은 1946년 자신의 신문사 대동신문에다가
'여운형은 일본 검사에게 제출한 진술서에서 일본을 위해 대중국 공작을 할 수 있으니
기회를 달라며 한시까지 지어 충성을 맹세했다.'고 기사를 실어 놓았다.[71]
이인은 1945년 8.15 해방이 되자 여운형이 서울지검에 나타나
자신의 '전향서'와 '시문' 및 이에 관한 형사기록을 찾아달라 했으나
서기가 주지않고 있다가 이인이 검찰총장에 발령되자
이 서류를 건네 받았다는 것이며, 자료를 훑어본 뒤 금고에 보관해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182]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법명- 설산)은
자신의 저서 <뚜껑없는 조선 역사 책>에서
1943년 학도병에 끌려가게 돼 여운형을 찾아가자 자신에게
"학도병으로 나가라. 그리고 총 쏘고 칼 쓰는 법을 배우라."라고 말해
박설산은 '왜제를 위해서 총 쏘고 칼 쓰는 법을 배우라는 말씀인가?
선생의 깊은 뜻을 모르는 우리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며
아연실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83]
2009년 12월,
정진석 한국외국어대학교 언론학부 명예교수는 신동아 2010년 1월호에
'여운형의 친일과 조선중앙일보 폐간 속사정-좌우 가리지 말고 똑같은 잣대 들이대야'라는 글에서
친일파 이종형이 세운 신문사 대동신문의
1946년 2월 17일, 18일자 신문에 나온 '여운형이 1943년 2월, 옥중에서 한시(漢詩)까지 써서 친일을 맹세했다.'는 자료를 들어 친일의혹을 제기하였다.[118][71]
'한국인들 사이에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정치가'라는 내용으로
1945년 9월 12일에 기록된 광복 직후 미국사령부 정보 보고서와
1950년 11월, 한국전쟁 중, 유엔군이 노획한 조선공산당 문서에
'여운형을 변명할 이유가 없는 친일분자'라 기록된 것을 근거로 제기하고 있다.[118]
2009년 11월 8일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대회를 열었을 때,
'뉴데일리'와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세력들은
'여운형과 안재홍,허헌,이극로는 친일경력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인물인데,
왜 이들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지 않느냐?'고 비판한 바 있다.[184]
친일의혹설에 대한 반론[편집]
학병 권유문이 실린 배경과 이에 대한 반론[편집]
1946년 2월 13일자 민주중보에 실린 전직 경성일보 기자 출신 조반상의 증언.
'여운형의 학병권유문 게재의혹설은 조작되었다.'고 증언한 내용이다.
1943년, 일제 강점기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에 실렸던 '일제학도병 권유문'을 근거로
여운형의 친일의혹에 제기되었으나, 이는 처음부터 기사 자체가 조작되었다.[주 40]
먼저, 여운형이 옥중 전향서를 쓰고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 이후
각종 친일 단체에 협력했다는 것에 여러가지 반론이 있다.[2]
그는 일제의 패망을 주장하다가 1942년 12월 21일 '유언비어 죄'로 치안유지법에 적용되었다.
그리고 옥중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아 1943년 7월 2일에 출옥하게 된다.
출옥 후 여운형은 극도로 쇠약해진 데다 신병을 앓아 경성요양원에 입원한다.
7월 5일 일제 담당검사 도자와가 여운형을 찾아가 전향문과 신사참배를 요구했다.[2]
도자와 담당검사로에게 세 차례나 사상전향서를 쓸 것을 강제 협박당했지만,
여운형은 이러한 사상전향서뿐만 아닌 신사참배도 끝까지 거부했다.
그 다음으로 사상검사 스기모토가 자신이 직접 전향문을 기초하고
여운형에게 '도장을 찍으라'고 요구하였으나, 2차례 모두 거절당한다.[2]
그러자, 경성지방법원 백윤화 판사가 직접 찾아와 '이것은 여 선생 신념과는 아무 관계없는 단순한 형식에 불과하니 날인해달라.'면서 '만일 응하지 않으면, 다시 구속하여 형을 집행할 방침'이라며 여운형을 협박한다.[2]
사태가 이렇게 되면서 숱한 고문으로 몸과 마음이 지친 여운형의 건강을 이루 말할 수 없이
근심하는 가족과 친척들은 그를 간절히 권유하기도 했지만, 그는 묵묵히 병상에만 누워 있었다고 한다.[6]
결국, 근심하는 가족과 친척들의 손에 의해 전향문 서명이 날인되었다.[2]
이어서 1943년 10월 경, 경성일보 기자가 와서 5분간 여운형과 면담하였다.
당시 경성일보 사회부 기자로 근무한 부산출신 조반상은 여운형과 일본인 기자가 만나는 자리에
자신도 있었으며, 여운형의 뜻과 상관없이 기사가 조작됐다고
1946년 2월 13일자 민주중보(부산 지역신문) 신문에 직접 증언을 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185]
“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학병 권장 유세를 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건강문제를 핑계로 거절한 뒤, 총독과 면담 6∼7분만에 밖으로 나왔다.
경성일보 사회부 차장이던 일본인 기자가 이 모습을 보고
여운형 집에 쫓아가 여운형의 총독회견 기사를 냈다.
그 다음날 다시 여운형을 찾아가 학병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이때 나는 통역으로 동석했다.
여운형은 '학도병은 지원제도이므로 나가고 안 나가고는 본인들의 의사에 달려있고,
나로서는 의견을 말할 바가 못 된다.'며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일본인 차장이 '여운형의 서명을 받고 싶다'고 하자, 여운형이 서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사실무근의 기사가 나갔다.[185]
”
이 명의가 날인 된 이후,
'여운형은 성전완수에 적극 협력하고 나섰다.
특히, 청년학생들은 전쟁터로 나아가 목숨을 바쳐 황은에 보답하라고 소리높이 권고한다.'
는 주 내용의 장문 기사를 연 3일간에 걸쳐서 경성일보 신문에 연재되었고,
그 내용이 이듬해 1944년 경성일보 발행 단행본 '반도학보출진보'에 '여운형 수기'로 써있게 된 것이다.[6][185][주 41]
1943년 7월 요양원에서 퇴원한 이후,
여운형은 일제 경찰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가택연금되고 감시당했다.
이를 피하려 1943년 11월 말,
경기도 양주군의 봉안 이상촌으로 내려가 훗날 건국준비위원회 모태가 되는
건국동맹(1944년 8월)과 농민동맹(1944년 10월)을 조직해 독립을 준비했다.
당시 비밀결사던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은
일제 말기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활동한 지하 독립운동 조직이자 군사조직이다.
'건국동맹' 등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면서 일제 학병유세를 권했다는 것은 논리상 앞뒤가 맞지가 않다.[주 42]
이런 행보는 친일활동으로 돌아섰거나
'침묵'으로 일관한 다른 유력 인사와 명백히 구분된다.[주 43]
이를 생각하면 일찍이 일제의 패전을 예측하고 구체적으로 독립 준비를 펼치던
여운형이 뜬금없이 '학도병 지원을 권유하는 글'을 신문에 게재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않다.[186]
여운형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이기형 시인이 저술한 <여운형 평전>에 따르면
'여운형 본인도 경성일보 기사가 사실이 아니라고 밝힌 것'으로 자세히 나와 있다.
1943년 겨울,
여운형이 머물던 경기 양평군 봉안에 "여운형을 평상시 숭배했다."는
낯선 중년신사가 경성일보를 들고 찾아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졌다.
이에 여운형은
"내 사람됨에 대한 것을 참으로 알고자 한다면
나를 평하는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라는 말이 있다"고 말한 뒤
"나 자신의 정당성 여부가 문제이지 참새들의 입방아는 그리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라고 답했다는 것.
이기형은 "경성일보를 만드는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니
그들의 여운형에 대한 기사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답변이었다"고 전했다.[186][6]
측근인 이기형 시인, 독립운동가 이란에 따르면
학도병 징집 거부를 위해 여운형에게 찾아가 상의하러 갔더니,
여운형은 '학도병에는 나아가지 않는 것이 원칙인데,
(강요받을 경우에는) 부득이해서 나아갈 경우라면,
나아가서 전쟁 연습을 잘배워서 우리 독립운동에 잘 써먹어라.'고 말했다 한다.[주 44]
여운형은 일제말기 일제로부터 철저한 감시를 받아가면서 생활이 어려워지자,
그의 측근인 이임수와 배석환이 그의 생활비를 지원했다고 한다.[주 45][2]
1943년 12월 2일자 일본 극우 지식인 오가와 슈메이의 일기에 따르면
'여운형이 경성일보에서 자신의 이름을 도용한 학병권유문을 제멋대로 실은 데 대해 몹시 분개했다'고 적혀 있다.[2]
친일단체 관여설에 대한 반론[편집]
여운형이 조선중앙일보 사장직으로 재임했을때인 1934년 3월에 발회한 '조선대아세아협회'에 상담역으로 관계한 점과 1935년 조선교화단체연합회의 발회식에 내빈으로 참여한것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제기에 대해서는 역사문제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균관대학교 교수인 윤해동이 1991년 논문에 해명한 바가 있었다.
윤해동에 따르면 '조선대아세아협회는 "아세아의 대세와 시국의 진상을 규명하여 황국대일본과 아세아제국과의 친선을 도모하고 전아세아제국의 평화를 확보하고 공존공영의 실을 거(擧)하여 그 복지를 증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단체로 12명의 친일파 거두(한상룡등 필두)와 방응모, 송진우, 여운형 등 15명의 조선인이 상담역으로 추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후의 활동이 없고 3인의 신문사 사장이 관여된 것으로 보아 자의가 아닌, 피할 수 없었던 일로 추측해도 좋을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이어 윤해동 교수는 1935년 '조선교화단체연합회'의 발회식에 내빈으로 참여한 부일협력 제기에 대해 "여운형의 이 시기 부일혐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친일파연구가 전문인 임종국에 의해 1985년에 제기되었으나 너무나 과도한 지적이 아닌가 한다.'라면서 '1936년에 여운형은 조선의 농촌문제에 대하여 월간잡지 '중앙'지에 논문을 기고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반봉건적인 유제가 잔존하고 있는 비참한 농촌현실을 지적하고 일제의 농촌진흥운동과 친일파의 개량화 노선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이시기의 '조선중앙일보'의 논조도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만으로도 이 시기 여운형의 활동 배면을 파악할 수 있으며 위와 같은 과도한 추리는 무리한 것임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라고 해명했다.[187]
일제강점기 말기의 여운형은 대중국 화평공작, 학도병 지원을 권장하는 유세, 신사참배 요구등에 참여하라는 총독부 요구를 수 차례 거절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말기 어용단체인 조선언론보국회,대화숙등을 비롯한 친일 전향단체 관여설은 이름이 도용된 데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로 알려진 바 있다.[186][주 46] 그리고, 이 시기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에 대비하여 조동호등과 함께 지하독립운동 단체인 1944년 8월에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고 활동했기 때문에 이러한 의혹설은 무의미하다.
미군정 G-2 정보참모부 보고서와 & 금전수수설 의혹에 대한 반론[편집]
광복 이후, 미24군단은 1945년 9월 8일에 인천항에 들어와, 9월 9일 서울에 입성한 뒤 군정을 선포한다.
미군정은 친일파 오긍선의 소개로 9월 11일 한민당 세력과 접촉하게 된다.
그리고 한민당 세력은 미군정에게 '여운형은 친일파이며,
건준은 총독부와 연탁한 단체'라고 주장하여
미군정은 9월 12일자로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188]
일제 패망 후 서울에 진주한 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는
1945년 9월 12일자로 작성한 비밀문서 〈G-2 Periodic Report〉(미군 제24군단의 보고서)에서 여운형은
"한국인들 사이에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정치가"이며
"조선총독으로부터 거금 (아마 2000만엔)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G-2란, 미 24군단 정보참모부를 말한다.
미군정이 한반도 입성한 지 3일만에 보고서에 '여운형이 친일파'였다는 결론을 낼 수 있던 것은 미군정이 고문으로 위촉한 9명의 한국민주당원들이 '여운형은 친일파이며, 건준은 조선총독부에게 2천만엔을 받았다'는 소리만 듣고 미군정의 독자적인 조사없이 결정지은 것이었다.[189] 또한, 당시 2천만엔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라도 내놓기 쉽지 않을 만큼 매우 큰 돈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당시 조선은행의 통화량은 48억 7천만엔에 지나지 않았다. 미군정에 보고한 한국민주당 측이 주장하는 당시 2천만엔의 가치를 지금의 화폐발행고 30조원에 투영·환산해보면 대략 1천 2백억원에 달하는 거금이다. 이런 엄청난 자금이 여운형에게 진짜로 있었다면 어째서 건국준비위원회는 본부 사무실이 없어 서울 계동 입구의 임용상 집을 빌려 쓰다가 다시 안국동의 풍문고녀 교사로 옮기는 등 구차한 행동을 계속했는지, 어째서 여운형이 전용 자가용 차도 마련하지 못하였는지 의문이 든다. 실제 여운형이 1947년 7월 암살되어 죽을 때까지 재산이라곤 그의 집인 서울 계동의 38평짜리 한옥 한 채 밖에 없었을 뿐더러 해방무렵까지 돈이 없어 자기 차도 없었다. [주 47]그가 총독부와 연탁해서 '2천만엔을 먹었다.'는 주장은 위에 언급한 바 있듯이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185]
뒤에 미군정은 여운형의 활동에 의심을 품고 그의 친일활동을 조사하였다.
1946년 8월, 미 국무부가 파견한 미군장교 레나드 버치 중위가 사령관 존 하지에게 '여운형의 일본인 접촉과 관련한 조사를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존 하지 사령관은 '일리있는 말이군. 나는 그(여운형)의 약점을 잡고싶다.' 면서 군정청 외무부 소속의 찰스 오리오단이라는 소령을 일본으로 보내 조선총독부에서 일한 사람들을 찾아가 조사하곤 했다.[2] 미 군정은 일본에까지 사람을 보내 역대 조선 총독부와 일본 패전 당시 총독부 정무총감을 역임한 엔도 류사쿠를 비롯해, 우가키 조선총독부 총독등 과거 조선총독부에서 일한 고위 관계자들의 증언들을 들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여운형이 친일 인물임을 입증할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으며,
그와 반대로 '여운형은 반일 인사였다.'는 증언들을 수차례 들었다.
그 근거로 1947년 3월 7일자 미군정에서 작성된 '여운형의 친일 관여설'에 대한 조사 보고서가 발표되었는데,
미군정 문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운형의 일본 관련설(친일의혹설)에 대해 찰스 오라이오단이 일본에서 조사한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었다.
오라이오단이 인터뷰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의문이 생겨났느냐.'면서 놀란 모습들이었다.
그들은 '여운형을 조선의 훌륭한 애국자의 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The result of the investigation of Lyuh's Japanese connections in Japan by Charles 0'Riordan was negative. Not a scrap of supporting evidence. Most of the people 0'Riordan interviewed seemed amazed that any question had come up. They considered him one of the outstanding Korean patriots. Robinson.)[2]
? 존 N. 로빈슨. 1947년 미 제24군단 G-2(정보참모부) 책임자)
미군정 기록에 의하면
"여운형은 '강한 민족주의자', '순수한 민족주의자'이며
일본 관리 중에서 송진우나 김성수를 좋아하던 이들은
여운형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했다.[186][190]
미군정이 여운형을 의심하게 된 것은
1940년과 1941년 두 차례에 걸친 일본행과 관련돼 있다.
여운형은 당시 일본에서 우익정객인 오카와 슈메이, 고노에 후미마로, 이 두 사람과 다나카 육군성 소장, 우가키 전 조선총독 등을 만났다.
"여운형은 전쟁기간을 통해 일본의 최고급 관헌들과 극비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미 군정의 인식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와 관련 송재헌씨는 1985년 연세대학교 석사논문('몽양 여운형에 대한 사회사상적 연구')에서
"여운형이 친일에의 유혹이나 압력 및 협박을 피하는 방법은 독특한 데가 있었다"며 "
그것은 일본의 고관들을 사귀어둠으로써 일제의 경찰이 감히 손을 못대도록 만드는 방법이었다"고 분석했다.[185]
실제로 해방 이후, 송진우,김성수를 비롯한 한민당 극우계열과 친일파 세력들은 오히려
'여운형을 친일파'라고 비판하였는데,
그 중 여운형에게 친일파라고 올가미를 씌운 것은 친일파 이종형이었다.
이종형은 일제 강점기 당시, 만주에서 관동군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일제 앞잡이로 부역행위와 밀정행위를 해온 자였다.
해방 이후에 이종형은 극우 반공주의자로 변신해 자신의 신문사 대동신문에다가
'여운형은 친일파'라고 맹렬히 몰아붙인다.[185]
게다가 1946년 5월, 여운형 암살 음모 기도를 그 누구보다도 가장 찬양할 정도로 극우적인 활동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주 48]
진술서와 친일 한시(漢詩)에 대한 반론[편집]
1946년 2월 17일자 대동신문에 보도된 기사.
'반성한 여운형의 고백, 결국은 대지공작의 전쟁범?'이라는 제목하에 붙여진 기사인데,
이 기사는 대동신문 사주 이종형이 전향서와 친일한시를 직접 지어서 여운형이 썼다고 소개한 기사글로 2틀 연달아서 기사를 실었다.[71][185]1946년 2월 17일,18일자 게재된 대동신문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대동신문〉의 여운형 진술서는 1943년 2월 6일 일본인 검사 스기모토(杉本寬一)에게 제출된 것으로 "나는 조선민족의 관념을 완전히 청산하고 적신(赤身)으로 되여서 총독의 명령에 복종하야 당국에 협력하야서 국가를 위하야 활동하랴고 생각함으로써 좌(左)에 맹세합니다"라고 썼다.
진술서 말미에 적힌 한시:대지(對支)공작(대중국 공작)은 소지이며, 준비도 자신도 유하야 실행기회를 득코저 소회를 술하오니 용서하십시오. (이하중략.)
대동신문은 친일파 이종형의 사주로 1945년 11월 창간되어 여운형을 '친일파'라고 맹렬히 몰아 붙였으며,
여운형 암살 음모를 찬양할 정도로 반인권적인 보도를 하다가 미군정에 의해 정간 처분을 받은 신문이다.
거기다 대동신문이 1946년 2월 17일, 2월 18일자에 기사에 게재한 것은 실제와는 달리 왜곡해서 게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종형은 해방후 자신이 운영하던 '대동신문'에 여운형의 전향문을 그대로 실었을 뿐 아니라
이종형 자신이 친일시 한편을 짓고, 그것이 여운형이 직접 지은 것이라고 소개까지 했다.
그 한시의 내용이 '砲煙彈雨又經筆'(포연탄우 속에 문필도 보답하고..)라고 시작되는 내용이다.[71][191][주 49]
실제 여운형은 한문은 배웠지만 한시를 많이 썼다는 기록은 없으며
그가 남긴 것으로 알려진 한시는 평생에 서너 편밖에 전해지지 않는다.
더구나 1943년 감옥에서 '건국동맹'등 지하단체를 결성하려고 마음먹은 그가 친일행각의 흔적이 남는 한시를 지었다는 것은 논리 자체가 맞지 않는다.
즉, <대동신문>의 사주인 이종형이 여운형을 폄훼하기 위해 그런 시를 지어 발표해버린 것이다.[71]
이종형은 그런 식의 공작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해치울 수 있는
일제의 밀정 출신이었기 때문이다.[185][주 50]
변호사 이인의 회고록에 대한 반론[편집]
1967년자 신동아 8월호에 이인의 '해방전후 회고록'에는 검사국 서기로부터
8.15 해방이 되자 여운형이 서울지검에 나타나 자신의 '전향서'와 '시문'과 이에 관한 형사기록을 찾아달라고 했으나 서기가 주지 않고 있다가, 이인이 검찰총장에 발령되자
이 서류를 건네 받고 자료를 훑어본 뒤 금고에 보관해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182]
그러나 해방 당일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에게 치안권을 넘겨받은 여운형은 몹시 바빴다.
그 날 그는 계동 자택에서 찾아온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감시당했으며,
많은 사람들 만나는 와중에도 여운형은 감옥에 갇혀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하기 위해
측근들과 함께 오전에 서울 필동에 있는 조선헌병사령부, 오후에 서대문 형무소를 각각 방문했다.
그런 여운형이 언제 서울지검에 혼자 찾아갔는지 알 수 없다.[189]
혼자 갔다 하더라도 당시에 사실상 대권을 잡은 것 같은 위치에 선 여운형이
일개 서기에게 자신의 서류를 몰래 꺼내달라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다만 이인이 서기에게 '그렇게 들었다.'는 얘기를 적은 것일 뿐이며
해방 당일 이인이 직접 목격했다는 일도 아니다.
변호사 이인이 이런 글을 쓴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해방 당시 여운형이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송진우와 김성수 그룹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여러 사람보내고
본인이 직접 송진우를 찾아가 만나기도 했으나 송진우의 반대로 협상은 무산되었다.
이에 이인은 송진우의 건준 참여 비토를 비난하면서 백관수,김병로등과 함께 건준 부위원장이던 안재홍과 협상을 적극적으로 벌이면서 중재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당시 여운형이 8월 18일 테러를 당해 몸져누운 사이에 건준 중앙위원회를 우파 중심으로 바꾸려 했다.
그러나 좌우형평을 중시했던 여운형이 안재홍과 이인의 협상결과를 허락하지 않았다.[2]
여기서 이인은 여운형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된 것이다.[189]
이인의 회고록 글에는 <전향서> 등을 금고에 넣어두었다고 하지만,
정작 이 <전향서>는 단 한번도 세간에 공개되지 않았다.
만일 존재했었다면, 여운형의 최대 정적이던 한민당이 공개하지 않았을리가 없다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매번 제기되는 자료는 이종형이 창간한 대동신문의 자료일 뿐이다.[189]
친일 소설가 김동인의 수필에 대한 반론[편집]
1949년 <신천지> 1949년 7월호 자에 소설가 김동인은 문단회고록을 썼다.
그 회고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날 거리에 나가보니 거리는 방공 연습을 하노라고 야단이고,
소위 민간유지들이 경찰의 지휘로 팔에 누런 완장을 두르고 고함지르며 싸매고 있었다.
몽양 려운형은 그런 일에 나서서 삥삥 돌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날도 누런 완장을 두르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대체 몽양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쓰고 싶은 말도 많지만
다 싹여버리고 말고 방공훈련 같은 때는 좀 피해서 숨어버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
나는 한심스러이 그의 활보하는 뒷모양을 바라보았다.[192]
여기서 '방공연습을 하던 어떤 날'이라는 표현은 이 시기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일으킨 뒤인
1941년 12월 이후의 일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1942년 여름부터 여운형은 경성헌병대의 추적을 받고 있을 때였고
1942년 12월에 구속되었다가 1943년 7월 2일에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여운형은 한동안 경성요양원에 입원했고 거기서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했다.
퇴원 후에는 향리인 경기도 봉안에 거주하면서 만주군 장교 박승환을 비롯해
염윤구,이혁기등 학병,징병 거부자들을 모아 군사훈련과 무장투쟁을 준비하였고,
1944년 8월에는 국내에서 유일의 독립운동 단체였던 건국동맹을 결성했다.
이런 여운형이 언제 완장을 차고 총독부 경찰에 협력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소설가 김동인의 말대로 그랬다 하더라도 여운형의 친일행각은
그저 방공훈련을 하는 곳에서 완장 차고 왔다 갔다 했다는 것이 전부다.[189]
이 글을 쓴 김동인은 중일전쟁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여
조선문인보국회등 각종 어용단체에 들어가
중국 전선에 일본군 위문을 다녀오는 등 각종 친일행각을 일삼았고
수많은 친일 작품을 남겼다.[193]
이런 그가 여운형의 친일을 매도했다.
여기에 광복 이후 김동인은
1948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신천지'에 산문 '문단 30년의 자취'등을 발표하면서
김동인 자신의 일제강점기 수많은 친일활동을 변명하는 논조를 썼는데,
그 주요 내용은 "일제말기의 친일행위는 민족 해방을 위한 결단이자
고육책, '조선어와 조선소설'을 지키기 위한 체제내적 저항 행위"라고 미화했다.
1949년은 좌파와 중도파가 모두 세를 잃고 극우세력이 득세한 시기다.
당시 '좌익'으로 몰린 여운형을 매도한다고 해서 누구 하나 문제 삼을 수 없던 때였다.
즉,앞의 인용문은 김동인의 주관적인 글이다.[189]
조선공산당 노획문서에 대한 반론[편집]
1950년 한국전쟁때 11월에 유엔군이 북진했을때 평양근교에서 노획한 조선공산당 문서 자료이다.
이 문서는 언제 작성되었는지 불명이며[194],
원문은 다음과 같다.
여운형이 1937년 7월(중일전쟁) 이후로 일제와의 투쟁의식이 연약했고,
그의 태도가 명확하지 못했다고 평하고, 여섯 조목의 예를 들었다.
그 가운데는 “소·독 전쟁이 개시되고 태평양전쟁이 개시된 후, 여씨는 공개적으로 일본 동경 대화숙(大和塾·1938년 7월에 결성된 조선사상범 보호관찰소의 외곽단체)에 가 있었고, 학도병 지원 권고문을 발표했다”.[주 51]
이 '노획문서'기사를 통해서 보수성향의 학자인 정진석 한국외대 언론학부 명예교수는
"공산당이 여운형을 친일로 보았으니 틀림없는 친일파"라고 주장하지만,
위에 인용문은 '노획문서'다.
'노획문서'란, 한국전쟁때 북진하면서 유엔군(미군)이 압수한 문서를 말한다.
미국 제8군이 1950년 10월 16일,
한국전쟁때 북진하면서 북한지역 문서수집 임무를 수행하게 될
'인디언헤드(Indian Head) 특별임무부대(부대장 포스터 중령)'를 편성했다.
동 부대의 임무는 평양의 정보기관과 평양주재 외국기관을 점령해 군사,정치적으로 중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평양에 들어간 '인디언헤드부대'는 평양의 공공건물을 샅샅이 뒤져
각종 문서를 노획해서 일본의 극동군사령부로 후송했고,
이 문서가 다시 워싱턴으로 공수되었는데,
당시 인디언헤드부대가 평양에서 노획한 문서는 총 160만 쪽에 달한다.[195]
1977년에 정보공개법에 따라 일반에게 공개된 이 '노획문서'는 일반적인 책 약 5천 4백권 정도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렇게 도서관 같이 방대한 문서에 언제 작성되었는지 시기도 불분명한
조선공산당의 비판문 하나를 달랑 건져내어 마치 '조선공산당 문서가 여운형을 친일파'라고 보았다는 식으로 호도하는 기사로 게재했다.[189]
박헌영은 초기 여운형을 지지하고 따랐었으나,
1946년 여름부터 좌우합작문제와 3당합당 문제를 둘러싸고 여운형과 조선공산당의 박헌영 사이는 적대관계로 바뀌었기 때문에 조선공산당의 문서 가운데는 여운형을 비판하는 문서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189]
진상규명의에서의 해명[편집]
2009년 11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뉴라이트 등 보수 언론 세력에서 대한민국 친일진상규명위에 여운형이 친일파 명단에 실리지 않았음을 '정치 사상의 형평성' 문제를 근거로 이의제기하였다.
보수 언론들은 "민간단체(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은 그렇다 치더라도
국가 기관(친일진상규명위)의 '친일파' 평가에 대해서 후손들은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 한다.
또 공정하게 평가했다고 하더라도 여운형 등 좌익 사회주의계열은 어디에도 없다.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고 친일진상규명위에 항의했다.
이에 친일진상규명위에서 여운형의 친일행위를 조사하였다.
원로 사학자인 성대경 친일진상규명위위원장은
"여운형의 친일 자료는 단 1건 있었지만,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동맹[주 52]을 만들어 활동을 했고,
이를 11명의 위원들이 논의해 (보고서에 명단을 넣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 밝혀 '여운형은 친일행위자가 아니다'라고 해명하였다.[196]
신념[편집]
혈농어수(血濃於水): 피는 물보다 진하다.[197]
분즉도합필립(分卽倒合必立): 나뉘면 곧 쓰러지고 합하면 반드시 일어난다.[198]
상훈[편집]
199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상
2005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
2008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
가족 관계[편집]
서울 계동에 위치한 여운형의 자택 터.
오늘날은 음식점으로 변했다.
여운형 슬하에 둘째딸 여연구, 셋째딸 여원구, 막내 딸 여순구, 막내 아들 여붕구(1991년 사망)가 월북했다.
둘째딸 여연구와 셋째딸 여원구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향력 있는 정치가로 활동하였다.
이중 둘째 딸인 여원구는
2002년 8월 14일 대한민국을 8·15공동행사 민족통일대회에 북한측 대표단 단원으로 참여, 방문한 바 있다.
북한에는 약 30여명의 유족들이 있다고 한다.
여운형의 자녀 이름은 모두 구(九)자 돌림에 새 조(鳥)가 들어간다는 특색이 있다.
사촌동생 여운일은 3.1운동이나 배일사상에 관련되어
1919년 총독부에 의해 인천 덕적도에 1년간 감금되었다.[199]
동생 여운홍은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을 지냈다.
외조카 류기원은 한의사이고,
외조카 박찬웅은 법철학자, 박찬기는 철학자이다.
할아버지 : 여규신(呂圭信, ? ~ 1903년 10월)
할머니 : ?
숙부 : 여승현(呂升鉉, ? ~ ?)
아버지 : 여정현(呂鼎鉉, ? ~ 1906년)
어머니 : 경주이씨(慶州李氏, 이항복의 11대손녀, ? ~ 1905년 9월)
처 : 유씨(柳氏, 유세영(柳世永)의 장녀, ? ~ 1903년 8월)
처 : 진상하(陳相夏, 1885년 ~ ?)
장녀 : 여난구(呂鸞九, 1923년 ~ ? 이화여전 재학 중 심장병으로 중퇴)
차녀 : 여연구(呂?九, 1927년 ~ 1996년 9월 28일)
삼녀 : 여원구(呂鴛九, 1928년 ~ 2009년)
사위 : ? (1982년 사망)
사녀 : 여형구(呂?九)
장남 : 여봉구(呂鳳九, 1914년 ~ 1932년 11월 14일 중국 상하이에서 장티푸스로 사망[200][201])
차남 : 여홍구(呂鴻九, 1918년 ~ 1939년 말에 일본 도쿄에서 호세이 대학 예과 2년 재학 중 파상풍으로 사망)
삼남 : 여영구(呂?九1930년~?)[5]
일본 여인[150]
사남 : 여붕구(呂鵬九, 1936년 ~ 1991년), 1991년 심근경색으로 사망[5]
진옥출(陳玉出)[122]
오녀 : 여순구(呂?九, 1942년 ~ , 3남)
사촌동생 : 여운일(呂運一, 1890년 ~ ?)
제수 : 이릉년(李凌年)
조카 : 장남 여준언(呂俊彦)
조카 : 차녀 여효영(呂孝榮)
조카 : 3남 여동구(呂?九)
동생 : 여운홍(呂運弘, 1891년 9월 1일 ~ 1973년 2월 3일), 호는 근농,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
제수 : 변씨(邊氏)[202]
제수 : 김창희(1898~?)
조카 : 장남 여성구(呂聲九, 1921년 ~), 호는 송원, 대우중공업 사장 역임
조카 : 차남 여명구(呂明九, 1925년 ~), 한의학 박사
여동생 : 여씨
외조카 : 류기원(柳基元), 한의학 박사
여동생 : 여윤숙(呂允淑)
매제 : 박정서(朴定緖, 1903년 ~ 1969년)
외조카 : 박찬웅(朴贊雄, 전 연세대 교수, 법철학자, 정치인)
외조카 : 박찬기(朴贊機[203], 철학자, 본관은 반남, 1928년 10월 18일 ~ )
기타 : 박승빈(朴勝彬, 호는 학범(學凡), 매제 박정서의 아버지, 사돈 1884년 ~ 1941년)
기타 : 여경구(呂慶九, 여운형의 5촌 조카, 3남 2녀, 1913년 ~ 197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과학자
기타 : 여운혁(呂運赫, 여운형의 6촌 동생, 여운형과 함께 건준 활동, 1920년 ~ ), 목사
기타 : 여운각(여운형의 6촌 동생, 여운형의 비서)
기타 : 여병현(呂炳鉉, 여운형의 7촌 숙부), 유학자이자 양명학 신봉자
기타 : 여준(呂準, 여운형의 족숙, 숙부뻘)
여운형이 등장하는 대중문화 작품[편집]드라마[편집]김길호 《제1공화국》(1981년 MBC 드라마
박병호 《새벽》(1985년) KBS1 드라마
박병호 《여명의 그날》(1991년) KBS1 드라마
김윤형 《야인시대》(2003년) SBS 드라마
신구 《서울 1945》(2006년) KBS 드라마
영화[편집]남궁원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1973년) 영화
기타[편집]
윤보선은 상하이에서 돌아온 여운형을 만난 걸 계기로 여운형을 따라 따라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204]
한편 이범석(李範奭)도 그의 주선으로 상하이로 건너가기도 했다.
외간여자와의 바람난 적이 있는데,
일단 공식적으로 여운형이 데려온 자녀들만 따져서 두 번이라고 말한다.
첫 번째는 해방될 때 까지 주변 사람들끼리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유부남의 몸으로 일본여자[주 53]를 만나 1936년에 막내아들(붕구)을 낳은 것이다.
그 때문에 해방 이후 좌우 갈등으로 여운형이 좌우익 양쪽에서 비난받았을때
'저명한 독립운동가가 처자식을 놔두고 일본여자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다.'
는 얘기가 커다란 화제가 되어 반대편 언론에 두고두고 비난받게 되었다.
두 번째는 1940년대 초 일본 도쿄를 들락날락 했을 적에 일본에서 조선미인이라고
소문난 재일여대생 진옥출과 연애를 한 사건인데,
너무 열애를 한 나머지 임신시켜버려서 옥출이 딸(효기)을 낳자
자신이 책임지고 맡아 키우겠다며 조선에 데리고 가서 애를 아내한테 맡겨버렸다.
진옥출은 아이를 여운형에게 맡기고 뒤에
무정의 연안 독립동맹으로 갔으며
거기서 결혼했는데,
그 남편 허갑이 일본 밀정이라 총으로 남편을 살해했다고 한다.[205]
박헌영 등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것이 아닌 온건한 사회민주주의 사상을 지닌
융화주의자라는 재평가를 받고 있다.[주 54][206]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출범을 놓고도 이견이 존재한다.
인공의 출범은 여운형이 완전히 소외된 가운데 박헌영과 허헌이 저지른 일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여운형은 인공 내각 명단에 자신이 부주석으로 오른 것에 대해서도 기뻐하기는커녕
박헌영과 허헌의 돌이킬 수 없는 경거망동을 한탄했다는 것이다.[207]
밖으로는 인공이 여운형 주도하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것 만큼
여운형은 한민당세력들을 비롯한 우익진영의 타도 대상이 되었다.[208]
여운형과 여운홍은 국어학자 박승빈을 사표로 받들었는데[145],
후일 박승빈의 아들 박정서(朴定緖)는 그의 여동생 여윤숙(呂允淑)과 결혼했다.
일화[편집]
여운형은 20대부터 수염을 길렀고, 금릉대학 재학 중에 카이젤 수염을 기른 것이 독특해보였는지
교수와 학생이 그를 머스타쉬(moustache:콧수염)라고 불렀다고 한다.
운동선수 활동으로 다른 대학에서 그에게 시합 관련해서 통지서를 보냈는데,
이름을 몰라 "미스터 머시타쉬"라고 학교로 편지가 오기도 했다고 한다.[209]
옷을 잘 차려입는 멋쟁이었다고 한다.[210][211]
여운형은 강원룡에게 이승만, 김구 등 지도자들과 관련된 얘기를 해주었다.
해방 직후 조선체육회를 이끌던 여운형은 이승만이 귀국한 후 서울운동장에서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그때 몽양은 비록 노선은 다르지만
이승만이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수십년을 일하다 돌아왔으므로
일장기[212]가 아닌 태극기를 가슴에 단 우리 청년들이 대회장에 위풍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감격할까 하는 생각에서 이승만을 개회식에 초대했다고 한다.[213]
여운형에 의하면 이승만은 윤치영과 함께 와서 내빈석에 자리를 잡았는데
식이 시작되어도 각도 청년들이 줄을 지어 씩씩하게 입장하자
몽양은 이박사가 얼마나 흐뭇해할까 하고 감격을 나누기 위해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청년들을 보지도 않고 수행한 윤치영과 귓속말로 정치 이야기만 하더니
"일이 있어 그만 가봐야겠다"며 곧 퇴장해버리고 말더라는 것이다.[213]
정치적 노선은 다르지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를 초청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여운형은 인간적으로 섭섭했다면서
자기가 이박사에게 가장 실망을 느낀 때가 바로 그때였다고 했다.[213]
윤치영은 해방 이전까지는 사적인 일로 여운형과 자주 만나는 사이였으나
해방 이후에 그는 여운형을 적대적으로 대하였다.
이 밖에도 송진우, 장덕수, 김성수 등과도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해방직후 건준 참여를 거절하고
한민당에 가담하면서 그와 적대적 관계로 변하였다.
건강과 운동[편집]
1925년 체육교사 시절, 코치로 활약했던 야구팀과 (상하이 공설운동장)
1934년 서울 방문한 영국축구팀과 친선경기.(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
일찍부터 술과 담배를 배워서 주량이 근동에 소문이 날 정도였으나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하면서 조선이 독립하기 전에는 술, 담배를 않겠다며 끊었다고 한다.
독립이후 친지들이 이젠 마시라며 권했지만 나라가 통일된 다음에 마시고 피우겠다며 사양하였다고 한다.[214]
연설하면서 자신은 술 담배는 냄새만 맡아도 골치아프다고 한 적 있다.[215]
그는 반찬을 가리지 않았으며 밥을 많이 먹었다.[216] [217]
며칠간 이만규의 집에서 묵은 일이 있었는데,
이만규 집에서는 그에게 '밥 많이 먹는 손님'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218]
당시에 개방적이었고 청년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이러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체육활동이다.
YMCA 야구단 활동에서부터 시작하여 복단대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취직하는 등 나이를 먹어서도 스포츠를 매우 좋아했고, 다방면의 운동경기에 능하였다.
본국에 압송되어 옥중생활을 하면서 소화불량과 치질에 시달리게 되었지만,[219][220]
출옥 후에도 각종 체육 활동에 참여하여 건강을 유지했다.
이때 체육활동으로 다져진 체력과 민첩함으로 해방후 수차례 테러로 인한 위기에서 비껴갈 수 있었다고 한다.[221]
서상천을 비롯한 체육계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고,
서상천과 이규현이 1934년에 출간한 《현대철봉운동법》이라는 책에서 상반신을 벗고 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222][223]
스포츠를 적극 장려하는 연설을 하였고 기고문을 내기도 했다.[224][225]
각종 체육 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여 조선 체육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덴마크식 체조를 국내에 처음으로 보급했고, 청년들과 투포환 던지는 경기를 했는데 1등을 했는가 하면,
수영을 잘해서 물놀이하다 물에 빠진 세 사람을 모두 구출한 적도 있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경기를 나갈까 망설인 손기정 선수의 출전을 적극 장려하였고,
각종 스포츠 경기의 심판을 맡기도 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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