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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 3.근현대사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문화어: 려운형) - 한국의 쑨원 2

by 사마르칸트 2014. 3. 3.

 

해방후 정치활동

 

해방 직전,

 

조선총독부는 좌파 와 민중 세력을 대변할 수 있는 여운형과 접촉하였다.[주 12][주 13]

 

1945년 8월 14일,

 

여운형은 당시 총독부 경무국장이었던 니시히로에게서 일본의 패전소식과 함께

15일 아침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의 관저(서울 필동)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어서 총독부 정무총감은 여운형과 교섭하여

'자신들을 포함해 조선에 거류중인 일본인들이 안전하게 빠져나오도록 해달라'고 하자,

 

여운형은 5개항 보장 조건을 전제로 수락하였다.

여운형이 제시한 5개항 조건 전제내용은 다음과 같다.[75]

 

 

모든 정치범을 즉시 석방할 것.
당장에 경성 시민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을 확보해줄 것.
우리 조선이 주체적으로 치안을 맡는다.
치안 유지와 건설 공사에 총독부는 방해 하지 않는다.
학생들과 청년들 활동을 총독부가 방해하지 않는다.
 

 

 


서울 필동에 위치한 한국의 집.

 

이곳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저로

1945년 8월 15일,

아침에 여운형이 이곳에서 총독부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행정권,치안유지권을 인수하게 된 여운형은

8월 15일에 사람을 보내 송진우의 참여를 요청하였고,

직접 찾아가기도 했지만 송진우로부터

"경거망동을 삼가라. 중경 정부를 지지하여야 한다."는 말만 들었다. [76]

 

 

송진우가 집요하게 내세운 임정봉대론에 대해

운형은

"일제의 탄압 아래서 직접 싸워온 거대한 세력은 국외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국내에 있는 3천만 민중"이라고 반박하였다.

 

 

여운형은

"임정이 해외에 30년간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업적이 없고,

국내에 인민적 토대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로 군림할 수 없으며,

임정은 많은 해외독립단체가 만든 정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77]

 

 

 

그가 조선총독부와 교섭을 한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단 긍정적으로 보는 측은 패망한 일본군이 철수하기 전에

무고한 조선인들을 마구 학살하고 떠난다거나

해방 직후에 사상계 내에서 친일파를 처단한다는 이름으로

사적인 감정에 기인한 마구잡이식 보복성 살인으로 사회 분열과 혼란이 일어나

힘없는 사람들이 억울한 피해를 입을 것을 걱정해서라고 주장한다.[주 14]

 

 

 

반면, 비판하는 이들은 일본군 및 행정관료들이 동남아, 중국 등지에서 항복하여

포로 대우를 받았던 점을 지적하며, 부적절한 처신이었다고 지적한다.

 

훗날 한민당과 그들의 대표지 동아일보, 친일파 방응모의 조선일보는 여운형이

총독부와 교섭했다는 것을 구실로

 '여운형은 일본으로부터 돈 받아 먹은 친일파'라고 맹렬히 비난했지만,

정작 여운형 본인은 일제에 의해 인생 전반에 걸쳐 생사를 넘나든 최대 피해자였다.

 

 

 

해방직전 총독부로부터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았으며,

해방이후에도 역시 가난하게 살았다.

 

총독부 측에서도 여운형이 반일인사라는 것을 알아 교섭을 주저하기도 했다.

 

 

반면, 총독부는 이미 일제의 패망으로 항복한 상황이어서 여운형이 제시한

이 5가지 전제조건에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건국준비위원회 조직과 치안 유지 활동

 

 
1945년 8월 16일,

휘문고보의 군중 속 여운형.

여운형은 이곳에서 연설을 하였다.

몽양 여운형과 훗날 국민방위군 사령관으로 총살형이 된 김윤근.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정치범으로 수감중이던 독립운동가 조봉암의 출소 소식을 듣고,

 직접 마중나가기도 했다.[78]

 

 

8월 15일,

밤 자신이 이미 1년 전인 1944년 8월에 결성한 건국동맹을 모체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79]

 

 

1945년 8월 16일,

시민들은 전날 8월 15일 라디오 방송이 일본제국 천황의 항복 방송인 줄 알게 되자 환호하였다.

 

 

그대로 시민들은 서울 계동에 있는 여운형의 집에 몰려가 연설을 해달라 하였고,

여운형은 집 바로 뒤에 있는 서울 휘문중학 운동장에서 연설을 하였다. [80]

 

 

연설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운형 1945년 휘문중학교 연설

조선민족의 해방의 날이 왔습니다. (..중략..)

나는 다섯 가지 조건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총독부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민족은 새역사의 일보를 내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이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합니다.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일사분란한 단결로 나아갑시다. (..중략..)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들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6][30][주 15]

 

 

 


YMCA 건물에서 건국준비위원회 발족식때 강연하는 여운형.

이어 곧 여운형은 일제말기에 자신이 운영했던

기존 비밀결사 조직인 건국동맹을 모체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고

YMCA 건물에서 건준 강령을 발표하였다.

 

 

 

건준은 치안권과 행정권을 담당했다.

그 당시만 해도 건준은 민중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아 각 지역마다

100여개의 지부가 확대,개편되었다.

 

 

 

이어 건준은 전환하여 각 지역 지부인 '인민위원회'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해방의 기쁨은 잠시,

곧 이어 한반도의 분단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때는 8월 하순이었다.

 

 

 

북위38도선 이북을 소련군이,

이남은 미국군이 각각 점령한다는 연합국의 방침이 경성에도 알려지게 되었다.[16]

 

 

1945년 8·15광복을 맞아 안재홍등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그는 곧 건준을 공식적인 정부로 선포해 하나의 기정사실화하고

곧 경성에 진주할 미군으로부터 추인받는 길을 밟으려 했다.

 

 

 

한편, 건준에 가담한 박헌영이 '건국준비위원회 내에 민족주의자들이 많다.'며 개조를 요구하였다.

 

여운형은 부위원장 안재홍을 찾아가 협의하였는데,

안재홍은 박헌영을 멀리하라며 그에게 충고하였다고 한다. [81]

 

그러나, 건준은 곧 박헌영의 공산주의계 인사들의 좌경화로 본질적인 목적과 정치성향이 변질되었고,

우익계열 인사인 안재홍은 이에 반발하여 건준에서 탈퇴했다.

 

 

 

여운형은 송진우를 찾아 건국준비위원회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송진우는 임정 봉대론을 주장하며 제안을 거절했다.

 

일부 청년측에서는 여운형이 송진우를 너무 과대 평가한다고 불만을 표출하였다.[82][주 16]

 

 

 

 

 

 

조선인민공화국 활동

 

그리하여 9월 6일에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열고

박헌영이 건준을 「조선인민공화국」(약칭 인공)으로 변모시켰다.[16][주 17]

 

 

1945년 8월 하순,

여운형 등은 밀사 손치웅을 평양에 파견하여

조만식에게 남으로 내려올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조만식은 '여운형 등의 호의는 감사하나 북에 남겠다.'고 하였다.

 

조만식은 '여운형에게 뜻은 함께 하겠으나 몸은 여기 남겠다.'며 사양하였다.[83]

 

 

1945년 9월 7일 여운형은 미군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던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선출된 이승만과 함께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84]

 

 

9월 8일 미 24군단이 한반도 입성하고 군정을 선포하였을때,

 

미군정장관 아널드는 오긍선을 만나는데,

오긍선은 한민당의 송진우를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9월 11일

한민당을 대표한 조병옥, 윤보선 등은 미 군정장관 등을 만나

인공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집단"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부일협력 정치인"이라고 왜곡하여 주장하였다.

 

이묘묵도 명월관에서 미군정 관리들에게

 '여운형이 잘 알려진 친일파이며

인공은 공산주의적 경향이 있다.'고 왜곡하여 주장하였다.[85][30][주 18]

 

 

 

 


상하이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이었던 김원봉,

그는 여운형의 수려한 외모와 달변에 매료되어 좌파 진영에 본격 가담한다.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1945년 10월초,

여운형은 미 군정 사령관 존 하지와 첫 대면이 이루어졌는데,

첫 대화내용은 다음과 같다.

 

 

After shaking hands, the first question General Hodge put to me was,

 

'What connections have you with the Jap?'
Answer : 'None.'
Then he asked : 'How much money did you receive from the Jap?'
Answer: 'None.'


I was completely taken aback by his question and his unfriendly attitude.

 

 

악수를 마친 후, 그(존 하지)가 던진 첫 질문은

"왜놈과 무슨 관련이 있지?"였고,

내 대답은 "없소!"였소.

그러자, 그는 "왜놈으로부터 얼마나 돈을 받았지?"라고 묻더이다.

나는 그의 질문과 비우호적인 태도에 당황했소.

 

 

 

김용중에게 보낸 여운형의 유고편지 中

 

이러한, 존 하지의 왜곡된 선입견과 그 배경은 미군정 고문으로 위촉된

9명의 한국민주당들의 모함으로 밝혀지게 된다.[30]

 

 

 


1945년 12월 3일의 임시정부 요인 환국기념 사진

 

 

1945년 10월 20일, 미군정의 주관하에 대대적인 환영행사속에 이승만이 귀국하게 된다.

 

여운형은 이승만에게 찾아가 인공이 설립된 경로를 설명하고

인공 주석에 취임할 것을 요청하러 만났으나,

이승만은 침묵으로 답하고 이후 한국민주당과 함께 손을 잡고 독자적인 행보를 걷게 된다.

 

이어 1945년 11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환국때 그는 중경 임시정부 요인들을 맞아주었으나,

충칭 임시정부만을 추대하자는 내용인 '임정 정통론'추대에는 반대하였다.[86]

 

 

귀국한 임정 요인 중 김원봉과 장건상, 김성숙 등이 그를 찾아온다.

 

이들과의 면담에서 여운형은 호쾌한 성격과 달변으로 이들을 매료시켜,

김원봉 등을 좌파 진영으로 영입하게 된다.

 

 

 

 

 

 

조선인민당 창당

 

인공의 좌경화와 미군의 건준 불인정등으로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그 매개체 역할을 자임하는 정당을 결성하게 된다.

 

 

그는 11월 12일 건국동맹이 모체가 되고 몇 개의 군소단체가 합류하여

조선인민당을 서울 종로구 경운동의 천도교 중앙 대교당에서 창당했다.

 

 

인민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전환한 이후 건국준비위원회가

또다른 분열의 축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출발을 선언한 것이다.

 

 

조선인민당은 평화적 방법으로 광범위한 대중과 정치세력속에 독립을 완성하자는 것이 목표였다.[30]

 

 

여운형은 창당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 해방된 오늘,지주와 자본가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손을 들어보시오. 지식인, 사무원, 소시민만으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역시 손을 들어 보시오.

농민, 노동자들 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우기는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손을 들어보시오. 손을 드는 사람이 없군요. 그렇습니다.

일제 통치기간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반역적 죄악을 저지른

극소수 친일파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다같이 손을 잡고 건국사업에 매진해야 됩니다.
(..중략..)

 

독립을 완성하려면 땅의 남북과 사상의 좌우를 가릴 필요가 어디 있는가?

과거 지하운동시대 어두컴컴한 감방을 걷다 만나 껴안고 감격하던

혁명투사 간에 민족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없었던 것 아닌가?
 ” 

 

 

조선인민당 창당 연설,

1945년 11월

 

조선인민당 창당엔 미군정이 어느 정도 작용을 하였고,

조선인민당은 지주,보수층에 호감을 보이기 위해 당기에 태극을 넣었다.

 

그러나 인민당에는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들이 많이 참여하였고,

박헌영계의 프락치들이 많아 훗날 분란을 일으키게 되었다.[87]

 

 

 

이어 1945년 11월, 조선인민당의 당수가 되었다.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사를 발표했다.[88]

 

인민당 당수 자격으로 보낸 축사에서 그는 '과거의 빛나던 그 민족문화 사상(史上)에 남긴 공적과 역할을 다시 살려서 바야흐로 닥쳐오는 신국가 건설 도정(途程)의 훌륭한 반석이 되어주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라 하였다.[88]

 

 

 

 

1945년 12월 23일

그는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5]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5]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조선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라는 기사가 동아일보에 게재되었다.

신탁통치 결정되었다는 기사가 실리자,

반탁 시위가 격렬히 벌어졌다.[주 19]

 

 

시간이 흐를수록 국내 상황은 혼란을 더욱 크게 흘러갔다.

 

 

우익 정치인 김구와 이승만은 신탁통치 결정 보도를 접하고 격노하여

신탁통치 결사 반대를 외치며 반탁운동을 하기 시작했고,

 

 

소련에서 돌아온 극좌 정치인 박헌영은 '모스크바3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한다.'

는 선언을 하여 각자 독선적인 노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주 20]

 

 

이 때부터 미군정기 조선은 '우익반탁 좌익찬탁'으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하게 되었으며,

이는 남한의 좌우갈등의 근본이 되었다.

시위는 '반소-반공'성향으로 변질되어가게 된다.[30][89]

 

 

 

 

이러한 상황 속에 여운형은 즉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정확한 상황파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30]

 

 

 

그 뒤 1946년 1월 8일,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을 중심으로

4당(한국민주당,국민당,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지도자와 임정세력들을 만난다.

 

 

여기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는데 전적으로 지지하며,

신탁은 장래 수립 될 우리 정부로 하여금 해결하게 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는 해방 정국 각 정치세력이 이루어낸 단 한 번의 합의안이었다.

그러나, 약속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사태는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주 21]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통탄하였다.

 

“ 참담한 심정이다.

나를 비롯해 지도층을 자칭하는 이들이 총퇴각을 할 때라 생각한다.

우리같은 지도층이 없었던들 통일은 벌써 성공하였을 것이다.

조선 지도자들은 제1차 시험에서 전부 낙제다. ” 

 

1946년 4당 코뮤니케 무산 뒤, 1월 14일 기자회견

 

 

 

 

 

 

임시정부와 김구간의 관계

 

1919년 여운형은 신한청년당 당수로 활약하여

동생 여운홍과 함께 임시정부 창설에 참여하였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외무부차장 등으로 활동하며 일본에 왕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3년 국민대표회의로 인해 임시정부가

창조파, 개조파세력으로 나뉠 때 여운형은 개조파 세력(안창호 중심)으로 따랐으나

임시정부의 파벌다툼에 실망하여 임시정부를 떠났다.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으로 지냈을때와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지내던 시절에 여운형은 김구와 처음에 인연이 있었다.

 

 

여운형이 일제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1935년, 여운형이 황해도에 살던 김구의 가족들을 상하이로 피신시켜

김구와 상봉하게 해주는데에 지대한 공헌을 해서

한때 일본경찰의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심문을 받은 적 있었을만큼 인연이 두터웠다.

 

 

 

 

또한,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김구의 충칭 임시정부는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국내에 있던 지하 비밀 독립단체였던 건국동맹과 비밀연락망을 두고 연락을 시도했었다.[90]

 

 

임시정부 설립 초기에는 참여하였으나,

후에 탈퇴하여 임시정부와도 인연이 있었다.

그러나, 여운형은 임시정부의 법통성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해방직후에 김구는 여운형을 매우 싫어했고,

이와 마찬가지로 충칭 임시정부 역시 여운형과 협력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충칭 임시정부만이 정통성'이라는

'임정법통론'노선에 여운형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즉, 여운형의 노선 생각은 '임시정부라는 조직이 중국 충칭에 있는 것뿐만이 아닌

해외 여러곳(여운형은 미주, 연해주, 시베리아, 만주 등지에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에 독립운동세력들이 있었고,

그러한 해외 독립운동가 세력들이 국내에 들어와서 함께 새로운 임시정부를 건설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김구를 비롯한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눈으로는

 '여운형은 임시정부의 권위를 부정하고 중대한 월권,도전 행위다.'

라 여겨 여운형과 협력하지 않게 되었다.

 

 

 

 

1945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1진이 망명길에서 돌아오자 여운형은 김구를 상대로

 '임정뿐만이 아니라 국내외 다른 독립운동 세력,

사회주의세력과 함께 협력하여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자.'

고 설득하러 서대문 경교장을 방문했다.

 

 

 

여운형은 경교장에 들어가 옛 동지들과 인사를 나누던 중에

김구는 그와의 대화를 거절했고,

수위에게 몸수색을 지시하여 여운형은 끌려나가 몸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그 이후로 다시는 김구를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91][주 22]

 

 

 

 

 

임시정부 법통성 논란

 

 

1945년 12월 환국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법통성을 주장하였다.

 

여운형은 허헌과 함께 임시정부의 법통성 주장은 옳지 않다는 시각을 피력하였다.

 

임시정부의 공헌은 어느 정도 인정하는 조선공산당과 달리

여운형은 좀 다른 각도에서 중경 임정 추대에 반대하였다.

 

 

장덕수와의 대화에서 그는 임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임시정부는 30년간 해외에서 지리멸렬하게 유야무야 중에 있던 조직이니

국내에 기초가 없어 군림이 불가하다는 점
연합국한테 승인되지도 될 수도 없다는 점


미주(美洲), 연안, 시베리아, 만주 등지의 혁명단체 중에는 임시정부보다

 몇 배가 크고 실력 있고 맹활동한 혁명단체가 있으며

그네들 안중에는 임시정부가 없다는 점

 

 

국내에서 투옥되었던 혁명지사가 다수인데 ,

안전지대에 있었고 객지고생만 한 해외 혁명가 정권만을 환영하는 것은 잘못된 점이라는 점


중경 임정을 환영하는 자들은 아무런 혁명 공적이 없는 자들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려는 것이고

건준의 정권수립권(權)을 방해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


중경 임정만을 환영하는 것은 해내해외의 혁명단체의 합동을 방해하고

혁명세력을 분열시키는 과오라는 점 [92][93]

 

 


그는 임시정부가 해외에서 존재한 하나의 독립운동 단체에 불과하다는 점을 들어

임시정부의 법통 주장을 반박하였다.

임정 법통을 부정한 점 역시 극우단체로부터 공격대상으로 찍히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민주의원 참가 거부, 민전 참여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비상정치회의 주비회 통합체)에서

최고정무위원직(총 28명)에 선출되었다.[94]

 

 

이후 비상국민회의는 민주의원으로 바뀌었는데,

 2월 14일 민주의원결성대회가 열렸으나

여운형은 김창숙, 함태영, 정인보, 조소앙 등과 함께 민주의원 의원직을 거부하였다.[95]

 

 

1946년 2월 15일,

서울 종로 YMCA에서 열린 민족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식에 참여하였다.

 

 

15일, 임시정부의 성주식, 김성숙, 장건상, 김원봉 등이 민전에 참가하였는데,

 

여운형은 허헌, 박헌영, 백남운, 김원봉과 함께

민족주의민족전선의 5인 공동의장에 추대되었다.[96][97]

 

 

이를 두고 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 중장은 여운형과 조선인민당이 민전에 참여한 것을

 "인민당이 소련 지령하의 조선공산당에 완전히 팔려간 증거로 해석하며,

이것은 여운형이 완전한 공산주의자라는 최초의 확증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98][99]

 

 

 

 그러나 존 하지의 주장과는 달리,

여운형은 '극소수의 반동을 제외하곤 손을 잡아야 한다'는 좌우합작 입장을 견지했으며,

조선공산당을 극소수 반동으로 보지 않은 것일 뿐이었다.

 

군정청은 처음에 여운형의 정치노선 행보에 많은 의심을 품었지만,

점차 한반도의 정치 상황등 알게 되면서

 

여운형을 비롯한 김규식등 중도파 노선에 호감을 가지게 된다.[6][주 23]

한편, 민전은 여운형의 '좌우합작'노선 뜻대로 돌아가지 못했다.[98]

 

 

 

 

3월 7일 소련 군정청 사령관 스티코프가 짠 초안에서 그는 향후 수립될

정부의 수상 후보감으로 지목되기도 했다.[100]

 

 

 

 

 

 

좌우합작운동 전개

 

이 부분의 본문은 미소공위, 좌우합작운동입니다.
 
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1945년 9월,

박헌영계열의 공산주의자 세력들이 건준내를 득세함으로써

건준의 본질적인 중도적 성향은 변질되어

박헌영을 주축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게 되었다.

 

 

송진우, 김성수 등은 '충칭 임시정부를 지지한다.'고 주장하여 국내의 우익세력들은 불참하였고,

 

9월 16일 박헌영 축출을 요구했으나 들어지지 않자 반발한

안재홍계 세력의 중도우파들의 비판과 탈당[101],

 

 

11월 인공의 지도자로 지명되었던 이승만, 김구의 취임 거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론'을 주장하는 한민당과

우익 진영의 반대,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인공은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 1945년 12월 말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안 문제로,

 '찬탁 반탁'시위로 좌우 대립 갈등이 더욱 심화된다.

 

 

1946년 1월 초, 4당 코뮤니케를 열어 합의안을 만들었으나,

이내 곧바로 결렬되어 사태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1946년 2월 9일에

여운형은 비밀리에 농부로 변장하고 3.8선을 넘어 이북으로 건너갔다.

 

 

1946년 2월 9일부터 2월 11일까지

북한의 인사들은 북한을 방문한 여운형은

'조만식의 석방 안건'에 관해 협의했다.[16]

 

북한의 저명 인사들도 조만식에게 월남할 것을 권하였지만

조만식은 '이북 동포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나 혼자만 월남할 수 없다'며 듣지않았다.[102]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가 28명의 최고정무위원직을 선출할 때

이승만, 김구,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103]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전원이 민주의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비상국민회의에 최고정무위원직에는

거의 대부분이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인사들이 대부분이었고,

 

이승만의 독단적 행보에 여운형은 반대하여

민주의원에 불참을 선언하였다.[104][105]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위때. 소련대표들과 함께.

 

그러던 중 1946년3월 20일,

제1차 미국-소련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지지세력만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주자.'고 주장하였고,

 미국은 '모든 정치세력을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주자' 고 하였다.

 

 결국 양측의 입장이 크게 엇갈려 주장을 좁히지 못하고

 제1차 미소공위는 실패로 결렬되었다.

 

 

 

여운형은 제1차 미소공위 당시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다.

 

“ 지정학상으로도 남방세력이자, 해양세력인 민주주의의 맹주인 미국,

북방세력이자, 대륙세력인 사령탑 소련이 접합하고 있다.

때문에 자주국가건설과 유지 발전은 조선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좌우협력에서만 가능하다. ”

 

 

 

 


여운형, 엄항섭, 장면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에서


(앞줄 왼쪽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엄항섭,

바로 옆은 여운형, 엄항섭의 뒷쪽 왼편에 흰 양복에 흰 중절모를 쓴 이는 장면?

 

 

 

 

제1차 미소공위가 실패로 결렬된 직후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삼남지방 유세하러 가던 중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정읍발언이 나온다.[주 24]

 

 

 

이때, 여운형과 김규식은 단독정부 수립운동에 결연히 반대했다.

여운형은 단독정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발했다.

 

 

“ 결코 반대다. 그 결과는 민족분열로 오고,

10년이 지나도 고칠 수 없는 분열의 원인이 된다.

현재, 통일의 암은 신탁이 아니라 결국, 각 진영의 이해관계다.[106] ”

 

 

 

이에 여운형을 비롯한 김규식, 안재홍 등 중도파 인사들이

7월,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 좌측 대표에 선출되었다.[61]

 

 

좌우합작운동은 미국 국무성의 요구로 실시되어

군정청에서 추진하도록 지원했지만,

본질적인 목표는 사상, 이념을 뛰어넘어 좌,우익이 단결하고

 남북연합으로 이어져서 미국, 소련등 열강세력을 설득하여 무기한

휴회된 미소공위를 다시 재개, 중도적 사상의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이었 취지였다.

 

여운형은 당시 한반도에 조성된 국제정세 속에서

미소공위 협상과 좌우합작의 길만이 평화적으로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미 국무부 또한 분단정부 수립으로 소련이나 중국을 자극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원하지 않아

여운형과 김규식으로 하여금 좌우대립 해소를 위한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도록 도와주었다.[61]

 

 

 

 

 

 

 

박헌영과의 갈등


1946년 2월,

박헌영과 여운형.

일생의 동지였다가 좌우합작 문제와 3당합당 문제등으로 서로 앙숙관계가 되어버렸다.

 

 

 

1946년 4월 12일

국내 좌파세력들이 주도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1주기 추모식에 참가하였다.

 

여기서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도 참가하였다.

 

이는 공산당이 남한에서 엄연한 현실 권력인 미군정을 인정하고 협조하겠다는 자세이자,

여운형이 노력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추진될 좌우합작과정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여운형의 생각이었다.

 

 

박헌영은 여운형 환갑잔치에도 참석해

'당신은 조선민족해방운동의 과정에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당신은 일본제국주의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조선독립을 위해 싸워왔고

선 노동계급을 위해 용감히 투쟁해 왔습니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107]

 

 

그러나 한달 뒤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져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탄압하자, 조선공산당은 급진화되었다.

 

 

문제는 미군정의 태도였다.

 

좌우합작세력을 밀어 대중들의 지지를 확보하되,

공산당이 대열에 이탈하면 곧바로 파괴한다는 것이 미군정의 목표였고,

그 열쇠를 쥔 것이 여운형이었다.

 

 

 

미군정 비밀보고서에는 노골적으로 여운형을 회유와 압박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미군정이 원하던 것은 여운형과 공산당의 단절이었다.

 

조선공산당 또한 여운형의 좌우합작노선을 어렵게 만들었다.

 

 

박헌영이

1946년 6월 23일에

합작 5원칙을 발표했는데,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와 정부기능을

미군정에서 인민위원회로 즉각 이양할 것 등을 주장했다.

 

사실상 좌우합작원칙을 전면 거부한 내용들이었다.[89]

 

 

 

이는 여운형도 받아들일 수 없는 원칙이었다.

여운형은 명백한 반대의사를 밝히고, 박헌영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가 공산당과 손을 놓는 순간이 공산당과 미군정의 전면전을 의미했다.

 

 

여운형과 미군정은 서로 다른 속셈이었다.

 

여운형에게 미군정은 좌우합작을 위해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미군정에 여운형은 상황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30]

 

 

 

 

1946년 7월 17일 버취 중위 집에서 좌우합작 요인들과 회담을 하였는데,

그 날 밤에 김두한의 대한민청에 의해 야산으로 납치되어

협박을 당하던 중 벼랑에서 낙하 했다.[108][109]

 

 

 

 

1946년 8월 27일,

여운형은 조선인민당 당수직에서 사임하기에 이른다.

 

인민당 내부에는 조선공산당 프락치들로 박헌영의 지시로 공산당으로의 흡수통합을 결의해 버린 것이다.

 

이에 여운형은 미군정청에 '박헌영을 제거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하였다.[110].[111]

 

 

 

한편, 박헌영도 김일성에게 서신을 보내 여운형을 비판하였는데

'김일성 동지는 여운형을 잘 모른다.

여운형은 대중선동을 좋아하는 야심가이고

철저한 친미주의자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다.

여운형이 좌우합작운동을 끄집어내면서

3대 원칙을 제시했는데

첫 번째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운다고 하지 않았느냐.

또 그는 출신 자체가 양반지주 출신이다.'라며 비판하였다.[110]

 

 

 

 

한편, 여운형은 '북의 김일성·김두봉이 민족주의자로서 박헌영의 반미적 노선에는 반대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111]

 

 

 

그러나, 1946년 5월에 김일성이 남한을 '미제국주의와 총독정치'라고 평가하며,

8월에는 '남한을 완전히 해방시켜야 한다.'

는 연설을 했던 것을 여운형은 모르고 있었다.[111]

 

 

 

 

1946년 8월초,

조선인민당 당수 여운형은 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 앞으로 3당합당을 제안하는 서한을 보내왔다.[16]

 

발송하기 이틀 전에 평양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편지 형식의 보고서를 먼저 올렸다.[112]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서 3당합당 요청을 수락하였다.[16]

 

 

9월 4일 3당합당 결과 남조선노동당창당중앙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시기 미군정은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조선공산당은 더욱 과격 성향을 보이며

9월 총파업으로 맞서며 미군정과 전면충돌하게 되었다.[30]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 3당이 통합하여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자,

초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박헌영과 당내 주도권을 놓고 갈등하다가 암투를 벌이게 되었다.

여운형은 좌익정당 합당보다는 우익세력과 연대해서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고,

박헌영은 이를 반대했다.

 

 

 

 

 

좌우합작 7원칙 제정

 

46년 10월 7일에는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좌익세력이 제시한 5원칙과

우익세력이 제시한 8원칙을 절충하여 '좌우합작 7원칙'이 합의되고

10일 양측대표가 참석하여 결정짓기로 하였다.

 

 

그러나, 10일 아침 여운형은 김규식의 자택인 삼청장을 갈려는 찰나,

극좌세력에 의해 정치테러 당해 납치되어 이날 회의에 참석 못했다.

 

 

그러나, 이 날 양측대표가 합의하고 결정하여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되었다.

 

1.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2.미국-소련 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3.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여

시가지의 기지와 대건물을 적정처리하며 주요산업을 국유화 하여

사회 노동법령과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및 민생문제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완수에 매진할 것.

 

4.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의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5.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서 검거된 정치 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익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방법, 운영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전국적으로 언론,집회,출판, 교통,투표등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남로당과의 갈등과 근로인민당 창당

 

1946년 10월 16일 3당 합당 교섭위원들의 토의를 거쳐 합동의정서와 강령 초안을 발표함으로써

여운형은 사회노동당을 결성했으나 사회노동당은 3당 합당문제를 둘러싸고

여전히 내부갈등을 노출한 채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1946년 12월에 여운형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불참 선언과 정계은퇴를 선언하면서 남로당을 곧바로 탈당했다.

 

 

1946년 12월 28일부터

1947년 1월 8일 사이에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다.

 

여기서 좌익진영의 단결과 자신의 정계복귀문제,

좌우합작운동과 미소공위 재개운동등에 관해 논의하면서

김일성에게 '북조선 방식 토지개혁'을 만류했다고 한다.

 

 

38선 이북만의 토지개혁이 분단의 길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89][113]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1947년 1월 27일에는 반탁운동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의 편협성을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1947년 5월 미소공위가 재개될 조짐을 보이자,

좌우합작운동을 보다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1947년 5월에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다.

 

 

 

1947년 4월 26일 근로인민당 준비위원회를 열었고

5월 24일과 5월 25일에 열린 근로인민당 창당대회에서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백남운, 장건상을 각각 선출하였다.[114]

 

 

그런데 한 증언에 의하면 여운형은 근로인민당과 남로당과의 차이점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였는데,

이것이 소련측에 들어가 소련군정의 5월 4일자 보고서에 올라가게 됐다.

 

 

문제의 발언은

 "남로당은 미군정청과 투쟁하는 정당이다.

 나는 미군정청과 협력하는 당을 만들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114][주 25]

 

 

다른 연설에서 여운형은

"남로당은 극단적으로 좌익이며, 오직 우리 당만이 올바른 노선을 견지하고 있습니다."고 발표했다고 하는데,

 

이 발언을 보고한 남로당의 한 간부는

 "그러한 식으로 여운형은 반동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남로당과 투쟁하고 있다.

그는 남로당에 가입해 있는 구 인민당 구성원들과

사회노동당 구성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그는 문화학생 조직들 속으로도 침투하려고 시도한다"고 보고하였다.[115]

 

 

 

 

 

 


1947년 7월,

서재필 박사 모시는 김규식과 여운형.

 

 

1947년 3월 17일 새벽 1시에 여운형의 계동 집이 폭파하면서 가옥이 파괴되었다.[116]

 

군정경찰은 조사대신 여운형에게 '서울을 떠나라'라고 충고하였다.[117]

 

계동 집이 반파된 직후 여운형은 여원구와 여연구를 북으로 보낸다.

 

이로 인해 극우, 극좌세력으로부터 계속 정치테러 표적이 되고 말지만,

여운형 자신은 끝내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30]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폭탄테러가 좌파에 의해 일어났다"고 증언하여

남로당의 개입을 시사하였으며,

 

이정구, 이상백 등은 이 음모가 남로당의 지시에 따라 일어났다고 지적하였다.

 

 

여운형과 남로당의 관계가 폭력을 사용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자,

 여운형의 측근들은 1947년 당시까지도 삼가하던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표현하기 시작하였다.[118]

 

 

그러나 폭파를 한 인물은 백민태로 백민태는 김두한과 친분관계로[119]

훗날 1949년 노덕술 등의 친일파들이 계획한 반민특위 및 정부 요인 암살 사건을 폭로하면서

자수했던 인물이었다.

 

 

1947년 4월 3일

혜화동로터리에서 괴한 청년들로부터 권총 저격을 받았다.[120]

그러나 위기는 모면하였다.

 

 

 

1947년 7월 1일,

서재필이 귀국하자 그는 김규식과 함께 친히 공항에 나가 서재필을 환영했다.

 

 

 

 

 

 

 

 

좌우합작운동의 결


1947년 초의 여운형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당시 사진.

오른쪽부터 여운형,김규식,이묘묵,말리크, 테렌티 스티코프(소련군정 사령관), 허헌

 

 

 

1947년 이 무렵에는 미국 정가에서는 소련과의 협력무드가 깨졌고,

뒤이어 매카시즘 열풍이 불면서

 

미 국무성 안에 있던 진보적 관리들이 '빨갱이'로 몰려 투옥되는 사태를 빚으면서

미국의 대한정책도 반공노선으로 급선회하게 되고,

여기서 미군정기 조선의 상황도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중도파 정치세력은 수차례 테러를 당하게된다.[2]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7년 5월 21일에 제2차 미소공위가 재개되었다.

 

미소공위 개최 이전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던 우익진영 정당,단체들은 미소공위에 협력할것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우익진영 내부에서 한민당 일부세력은 미소공위에 무조건 참가할 것을 주장하여

다수의 당 중진들이 탈당하는 사태를 빚게 되었다.[6]

 

 

한편, 중간 진영인 좌우합작위원회는

5월 23일 김규식 명의로 '합작 7원칙'에 명시된 바와 같이

우리의 최대목표인 공위가 재개 되었으므로

"최속기간 내에 통일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성취하자"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좌익과 중간진영은 물론 대부분의 우익진영도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서 미소공위 참가는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신탁통치안 문제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 후에 민족총의로 반대해야 한다.'

는 조건부 입장하에 미소공위참가를 결정하게 된다.[6]

좌우합작위원회는 미소공위의 성공적 추진에 의하여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중간파 세력의 보다 광범위하게 결집하게 된다.[6]

 

 

 

 

 

 

테러 일지

 

여운형은 1945년 광복 이후부터 정치 테러를 수 차례 겪었다.

 

1929년 중국에 있을때 정치테러 2차례,

1945년 8월 광복 이후부터 1947년 7월 암살되기까지

2년간 총 10차례 테러를 당했는데

이는 정치테러사에서 전무후무할 정도로 최다 기록 수준이다.

 

직접적인 테러뿐만 아니라 협박전화와 편지, 비방 벽보,

심지어 살인을 교사하는 신문 기사(대표적인 예가 이종형의 대동신문)까지 존재했다.

 

 

'신탁통치는 식민통치의 한 방식이며, 이를 찬성하는 자는 반역자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

고 믿은 광신자들은 찬탁으로 전환한 박헌영을 비롯해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주 26]을 암살 표적으로 삼았다.[121]

 

 

여운형의 비서로 지낸 여운각은 '일상적으로 위협을 느끼는 것이었다.

 

게다가 집(계동)도 폭파되고, 여운형이 여러 번 테러를 당했었고..

그리고, 자녀들도 미행이 붙는 등 수상한 것도 여러 번 있었고,

하루도 정말 안심할 그런 게 아니었다.'고 회상했다.[30]

 

 

 

 

여운형은 5번째 테러를 당했을 적에 "나는 죽어도 이 길을 가겠다."라고 말하였고,

아버지를 걱정하는 자식들에게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앞날을 예견하는 듯한 말을 했다고 한다.

 

1947년 5월무렵, 극우파는 미군정하의 한국인 경찰세력과 연계하여 여운형을 암살하기로 계획했는데,

 

이러한 극우파의 움직임을 파악한 존 하지는

그해 6월 28일자이 무렵 미 군정에서는 잦은 테러를 당해온 여운형을 보호하기 위해

 미군 헌병을 경호원으로 붙여주겠다고 했으나,

여운형은 “대중과 함께 살아온 내가 어찌 대중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되겠는가?”하고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122]

 

여운형이 1945년 8월 광복 이후부터 정치테러 당한 일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8일 오전 1시경, 서울 계동 자택 앞에서 괴한들에 의해 곤봉으로 피습.[주 27]
1945년 9월 7일 저녁 무렵, 서울 원서동에서 계동으로 넘어오다가 괴한들에게 밧줄로 묶임. 행인이 구제.
1945년 12월 초순, 백천온천 여관에서 괴한에게 피습. 피습당하기 이전에 여관을 옮겨 무사.
1946년 1월, 서울 창신동 친구 집을 괴한 5명이 습격, 다른곳에 있었으므로 중으로 위기 모면.
1946년 4월 18일 오후 9시, 서울 관수교에서 괴한들에 포위. 행인이 구출
1946년 5월 하순, 서울 종로에서 괴한들에 포위. 격투 끝에 행인이 구출.
1946년 7월 17일 서울 신당동 산에서 협박, 벼랑에서 낙하.[108]
1946년 10월 7일 저녁무렵, 자택 문전에서 납치. 나무에서 결박을 풀고 도피.
1947년 3월 17일 밤, 서울 계동 자택에 침실 폭파. 외출상태였으므로 무사.
1947년 4월 3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승용차 피습.[6]

 

 

 

 

 

암살

 

미군정은 정치적인 필요성 때문에 여운형을 중시하고 가까이 하였지만,

그를 신뢰하지는 않았다.[123]

 

1947년 7월 19일 아침, 여운형은 김용중[주 28]에게 영문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엔 죽음을 예견하는 내용이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김용중에게 보내는 편지


북조선에서 소련이 극좌파분자만을 선호한다고 하면

여기 남조선에서 미국은 반대로 가려하고 있소.

(..중략..)


극우파가 아닌 모든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그 활동을 방해받고 있소.

(..중략..)

 

친애하는 김선생.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소.

나는 아직도 미군정 하에서 국립경찰로 채용된

친일파의 손아귀에 고통 받고 있소이다.[30] [124]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격절명한 곳.

 

곧 이어 IOC가입 축하기념[주 29]으로

서울 운동장에서 한국과 영국의 친선축구경기가 열린 날,

 

당시 체육부장관이던 여운형은 경기 참관 다음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민정장관 수락을 논의하는 약속예정을 잡았다.

 

 

그 전에 여운형은 '옷을 갈아입겠다.'고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오후 1시,

서울 혜화동 로터리 근방에서 트럭 1대가 갑자기 들이닥쳐

여운형이 탄 자동차를 가로막았다.

 

 

이어 한지근(韓智根)[주 30]이 나타나 여운형이 탄 자동차로 달려가 2발의 총탄을 쏘았다.

 

2발은 여운형의 복부와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고,

병원으로 호송 중에 그는 절명하였다.

 

 

당시 여운형의 옆에 있던 고경흠은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조국..." 그리고 "조선..."이었으며, 미소를 띤 얼굴로 죽었다.'고 한다.[6][주 31]

 

한편 여운형이 죽은 후 미군정은 그의 소지품 중에서 북한으로 보내는 편지들을 수거하였다고 한다.[125]

 

이 편지들에 대한 해설은 'G-2 보고서 4, 1947. 08. 05'의 450페이지에 수록되었다.[125]

 

그밖에 여운형은 언론사로 중외일보를 운영하고 있었다.

 

1947년 당시의 한 편지에서 그는 '내가 하고 있는 중외일보[125]' 라고 언급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6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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