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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 3.근현대사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문화어: 려운형) - 한국의 쑨원1

by 사마르칸트 2014. 3. 3.

 

 

경기도 양평 출신이며, 호는 몽양(夢陽)이다.

 

 

여운형(呂運亨, 문화어: 려운형,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

 

한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외교관·언론인·체육인이며 정치가이다.

 

1945년 8월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9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을 지내기도 했다.

 

 

구한 말 기독교의 평등 사상을 수용하여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교육·계몽 활동을 하다가

 

1907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안창호(安昌浩) 연설에 감화되어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

 

 

 

외교관으로는 중국에 건너가 신한청년당 당수로 활동하여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기획하는 일을 주도하였고[2][3]

 

김규식 등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했으며,

직접 일본을 찾아 담판을 짓기도 했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 정부 외무부 차장 등을 지냈으며

 

한국 노병회, 시사책진회, 중한호조사 결성에도 참여했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 때 안창호, 김동삼과 함께 개조파로 활동했으나

임정을 떠났다.

 

 

 

이후 북한과 러시아를 오가면서

쑨원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가담해

국공합작을 통한 중국 혁명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에 활동하였다.

 

 

 

1929년 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된 이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20년대 초중반 중국 상하이에서 동아일보의 상해 주재 촉탁 통신원과

타스 통신사 직원으로 지냈으며,

국내에서는 1933년~1936년까지 조선중앙일보사의 사장을 지냈다.

 

 

체육인으로는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회장과 미군정기 군정청 체육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4년부터는 비밀 지하 독립 운동 단체인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결성,

 

 해방 뒤 1945년 8월 안재홍, 박헌영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결성하여 혼란 수습과 치안 유지 등의 활동을 했다.

 

 

1946년부터는 김규식, 안재홍과 함께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를 반대하는 좌·우익 양측으로부터 테러를 십여 차례 당했으며,

좌파 단체의 주도권을 놓고 박헌영 등과 경합했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량으로 이동 도중,

백의사의 집행부장 김영철이 선정한 한지근(본명 이필형)외 다섯 명의 저격을 받고 암살되었다.

 

사후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

 

2008년 다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을 추서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여운홍의 친형이고, 철학자 박찬기의 외삼촌이다.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몽양 여운형은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妙谷)에서

여정현(呂正鉉)과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4],

세 형이 일찍 사망하여 [4] 가문의 9대 종손이 되었다.[5]

 

 

그를 수태했을 당시 조부 여규신이 꿈에 '태양이 떠오르는 꿈을 꾸고 낳았다.' 하여

여운형은 뒤에 아호를 몽양(夢陽)이라 했다고 한다.[6]

 

그가 태어나고 남동생 여운홍과 여동생 여씨, 여윤숙이 연이어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양반 가문 출신이었으나,

소론계열이었으므로 권력의 주류에서는 밀려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그의 조부는 동학에 입교하여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을 직접 만날 정도로 독실한 동학(천도교) 신도가 되었다 한다.[7]

 

 

 

 

 

유년기

 

어려서 부모가 격렬하게 다투는 것을 본 그는 화를 자제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하는데,

분노가 치밀어 오를때 입술을 스스로 깨물어 참았다 한다.[8]

 

한편, 그가 남의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먹다가 들켜서 도망쳐 나오다가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히게 되었는데,

이 사실을 안 여운형의 부친은 아들을 꾸짖는 대신

과수원에 달려가 나무들을 도끼로 찍어버렸다고 한다.[4]

 

분명히 자신이 잘못해서 생긴 일인데도,

양반의식이 깊은 부친이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상민의 과일나무를 잘라버려서

생존권을 즉,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짓밞아버린 횡포에

분노한 여운형은 신분에 따른 차별제도에 저항하는 태도를 갖게 하였고,

양반들에게 무시와 억압을 받는 평민과 천민들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게 하였다.[8]

 

 

그래서 말을 타고 서울로 왕래할 때

길가에서 농부들이 잠시 일을 쉬고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

항상 먼지를 날려서 그들의 소중한 식사시간을 방해하거나,

무례한 일이 될까 하여 항상 말에서 내려서 조심스럽게 지나다녔고[9],

 

동리에 상사가 났을때, 특히 노비와 상민의 장례일수록 더 보살펴서

양반과 동등하게 밤을 세우며 돌아가신 분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도 하고,

돌아가신 분이 말끔한 모습으로 저승에 갈 수 있도록 치장해드리는 염습도 하였으며,

 

 

한번은 상민 소년의 관을 직접 들고 장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9]

 

어린 시절의 여운형은 삼국지를 즐겨 읽었으며

그 중에서도 관우를 좋아했다고 한다.[8]

 

 

 

 

 

소년기, 기독교 입교

 

1900년 미국과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7촌 종숙 여병현(呂炳鉉)의 영향으로 감리교 학교인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10]

 

미국과 영국을 유학한 여병현은 영어교사로 활동하였고

그에게 새로운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이만규에 의하면 이 무렵 여운형은 감리교회선교사들이 세운

개신교 교회인 상동교회의 인사들을 만나 교제하면서 교회에 출석,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한다.[11]

 

 

배재학당에 입학한 뒤 그는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학당에서는 날마다 학생들을 예배당에 출석시키고,

이것을 어기는 학생들은 교실에 남아서 한 시간 동안 자습을 시켰으며,

몽양 자신도 반 아이들과 남산에 놀러가느라

주일 예배를 빠졌다가 예배에 불참하였다 하여 담임선생에게 체벌을 받았다.

 

 

 당시 몽양은 담임교사가 정직한 학생은 벌주고,

오히려 속인 자들을 봐 주었다고 보아,

부당한 체벌에 자퇴로 반발하였다. [12][13]

 

 

배재학당을 그만둔 여운형은 민영환이 설립한 흥화학교로 전학했다가

다시 그만두게 되었다.[14]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살려면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충고에 따라,

나라에서 운영하던[12]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 입학하였다.[14]

 

 

우무학당 재학 중, 우무학당이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자, 그는 우무학당 학생 20여 명을 모아

 학교인수 반대운동을 일으켰다.[14]

 

 

졸업 후, 우무학당은 '여운형을 우무국 기술관으로 채용하겠다.'는 채용통지서를 보냈으나,

그는 '일본인들이 통신원을 가로챈 것.'이라며 반대하고 취임하지 않았다.[14]

 

당시 첫 월급은 27원으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액수였다고 한다.[14]

 

 

아버지 여정현과 아버지의 친구 이 진사가 여운형을 찾아와 우무국 기술관에 취임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여운형은 '이 진사를 가리켜 역적이다.'이라고 통박하여

소동이 발생하기까지 하였다.[14]

 

아버지는 사과하라며 꾸짖었지만

여운형은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청년기

 

교회 활동과 계몽운동


안창호, 그의 강연에 감화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기독교 입문

 

여운형은 1906년 양평군 양평읍 묘골에 개신교 교회를 세웠는데,

그 후 그의 문중 일족들에게 전도하여 잇달아 기독교인이 되게 하였다.

 

 

친구이자 사돈이던 이만규 등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노력으로 이후 양평군 묘곡에 예배당과 학교가 서고,

힘써 전도활동을 하였다고 한다.[15]

 

 

 

1928년에 장로교회에서 발행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는 묘골에 살던

탁인한(卓仁漢)이 여운형 일가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15]

 

평양신학교(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하다가,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를 만난다.

 

뒷날,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추천으로

1914년 중국 난징의 금릉대학교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공부한다.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에 접하면서 사회개혁 사상을 품은

그는 집안의 노비들을 스스로 풀어 주기도 하였다.[16]

 

 

 

 

 

신앙, 교육 활동과 노비 해방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초기 민중교회였던 승동교회[주 1](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위치)에서 조사(전도사)로 일한 적이 있다.[17][15]

 

 

1910년에는 강원도 강릉에 있는 초당의숙의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1911년에 일본식 연호 사용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학교가 폐교되었다.

 

 

그리고 1911년부터 평양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하였다. [18]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다시 승동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였다.[15],[17]

 

그 뒤 공산주의를 접하고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유물론을 거부한데다 기독교 신자였기에

공산주의 사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주 2]

 

 

즉, 여운형은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기독교인으로 보는 것이 정확한 이해일 것으로 생각된다.

 

 

 

1908년 부친의 3년상을 마친후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노비문서들을 불살라 집안의 모든 노비를 해방시켰다.[5]

 

 

노비들이 해방되고 나서 나중에 여운형한테 반말을 하였는데,

그는 도리어 웃으며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들이 받았구나."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동생 여운홍은

'이는 링컨의 노예해방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19]

 

집안에 모시고 있던 신주를 모두 땅에 매장하고,

집안에 있는 터주, 성주, 군웅 등의 단어가 적힌 서적들을 꺼내 모두 불살랐다.

이 일로 동네 양반,선비들로부터 백안시 즉, 무시를 당하기도 하였다.[15]

 

 

 

독립운동 투신

 

1907년 여운형은 동생 여운홍과 대한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안창호의 연설을 듣게 됐다.

 

여운형과 여운홍은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격하였다 한다.[12]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된 형제는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한다.

 

 

1914년 여운형은 집안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20]

 

동시에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집안에 남아있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그리고, 중국 난징 금릉대학교 영문학에 입학하여 학업에 열중한다.

하지만 3년이 지났으나 소정의 모든 학과를 마치지 못했으므로 졸업 증서를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졸업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문학 과정을 마치고 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상하이에 정착하여 미국사람이 경영하는 협화서국(協和書局)에서

출국수속 관련 업무를 교섭해주는 일을 했다.[21]

 

 

1917년 중국 국민당의 원수 쑨원을 만나 교제하였다.[22]

그 해 여름에 은밀히 귀국하여 한강에서 이범석을 만나 그와 함께 상하이로 떠났다.[23]

 

 

 

 

 

독립운동과 정치 활동

 

 

상하이 활동

 

신한청년당 당수와 3.1운동 활동

 

1918년에는 상하이에서 서병호·조동호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당수를 맡았다. [24]

이어 김규식을 상하이로 초청하기도 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후처리 문제로 파리강화회의가 열릴 무렵,

미국 대통령 윌슨의 특사 찰스 크레인이

1918년 11월 중국 상하이의 '칼튼 카페'에 와서 '파리평화회의에서는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다.'는 요지의 강연을 한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여운형이 초청받아 그것을 듣고는 윌슨의 특사 찰스 크레인과 개인면담을 가진 뒤

'파리강화회의가 한민족 독립운동의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 판단했다.[25]

 

 

여운형의 주도로 만들어진 신한청년당은

중국 톈진에 있던 김규식을 초청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다.[26]

 

또한 장덕수와 이광수에게 해외 소식을 비밀리에 전달하는 임무를 주어

장덕수는 국내로 파견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게 하고,

이광수를 일본 동경에 파견하여 2·8 독립 선언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26]

 

 

그리고 여운형 자신은 중국 길림 성으로 가서 활동하여 무오독립선언의 촉매역할을 했다.

 

간도에 있는 독립운동가 김약연,정재면등과 만나서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 원칙등 상황을 설명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는 당시 그곳에 체류하고 있던 박은식,이동녕,조완구등을 만나서

여러가지 상의를 하는등 그러한 활동이 뒷날 연해주 지역에 대한국민의회를 탄생시키는 계기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여운형의 주도로 결성된 신한청년당 활동은 직간접적으로 3.1 운동의 불씨를 제공하였다.[3]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1919년 4월 임시의정원에서 맨뒷쪽 2번째가 여운형

 

1919년 3·1 운동 후, 독립운동을 계속 확대해 나가기 위해

국내외에서 정부수립계획이 진행되었다.

 

여운형은 '정부를 조직하기에는 시기가 이르다.'고 보았고,

 '당 조직을 제대로 갖추고 난 뒤에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이것은 '먼저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27]

 

 

1919년 3월,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구성을 위해 임시의정원이 창설되자,

동생 여운홍과 함께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4월 10일 의정원 회의가 열렸을 때 신석우가 국호명칭을 '대한민국'을 발안하자

여운형은 “대한이란 말은 조선왕조 말엽에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고 반대했다.

 

 이에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고 주장하였고

의정회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여운형은 외무부 차장에 선출되었다.[6]

 

 

 

한편 대한제국의 황실을 우대하는가의 여부를 놓고 임정에서 논의가 나오자

그는 이승만 등과 함께 황족 우대론을 극력 반대하였다.

 

임시정부 내에서 구 황실 예우문제가 불거지자

조완구(趙琬九) 등 비교적 연로한 그래서 황실을 존경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들은 구 황실 우대를 주장하였다.[28]

 

 

그러나 안창호, 여운형을 비롯한 청장년측은 반대하였다.[28]

 

표결 결과 황실 우대론이 다수였다.

 

그리하여 4월 11일에 발표된 대한민국 임시천장 제8조에

"대한민국은 대한제국 구황실을 우대함"이라는 구절이 들어갔다.[29]

 

 

그 뒤 이 부분은 1919년 9월 11일에 발표된 통합 임시정부로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 제7조가 되었다.

 

여운형은 '황실우대론'이 임시정부 헌법으로 통과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어떤 자리에도 앉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나,

임시의정원 외무부차장직으로 잠깐 활동하게 된다.[29][주 3]

 

 

 

 

 

일제의 회유공작과 제국호텔에서의 연설


1919년 일본 도쿄 기자회견 당시

 

1919년 여름부터 여운형은 한국과 만주, 연해주, 미주에서 몰려드는 지사를 맞이하기에 바빴다. [24]

 

그 해 11월, 임시정부 공직에서 사퇴하고 개인자격 신분으로

일본의 초청을 받아 장덕수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간다.[주 4]

 

일본의 초청을 받은 여운형은 장덕수의 석방 없이는 일본에 가지 않겠다고 거절하여

장덕수를 석방시킨 뒤 일본행에 동행하였다.

장덕수는 여운형의 일본 방문기간 중 호텔에 유숙하며 그의 시중을 들었다.

 

 

일본 제국은 그를 국빈으로 대접해 '대한민국 임시정부'탈퇴가 조건인 회유책을 보냈다.

 

일본 정부가 여운형을 국빈으로 일본에 초청한 의도는

임정 중심 세력인 여운형을 일본 편으로 만들어 임정을 분열시키기위한 술책이었다.

 

 

한편, 이무렵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여운형의 도쿄행에 대해서 찬반이 크게 엇갈렸다.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는 '국무총리 포고 1호'를 발표해

 '여운형의 도쿄행은 개인행동'을 천명하면서 반대했다.

 

이와 반대로 임시정부 내무총리 겸 노동국 총판 안창호는

 '몽양의 국가를 위하는 열렬한 충성에 대해서 나는 절대로 신임합니다.'하며

여비까지 지원해주는 등 찬성했다.[25]

 

 

도쿄에 도착한 여운형 일행은 제국호텔에 머물렀다.

 

거기서 일본의 국방대신, 내무대신, 체신성 대신, 척식국장관 등을 차례로 면담하고

설전하여 조선의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30]

 

 

여운형은 일본 장관들이 주장하는 회유와 협박과 설득에 넘어가지 않았다.

 

도리어 "일본이 만용을 부리고 3.1운동을 진압한 것은

흡사 타이타닉이 작은 빙산을 무시하고 지나가다가 가라앉는 것과 같은 것"

이라며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일본 장관들을 설득한다.

 

 

그 중에 고가 렌조(古賀廉造)척식국 장관은 대화를 하면서 여운형의 기개와 인품에 감탄하여

여운형이 떠날 때 "여운형 만세!"를 외쳐 여운형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31]

 

 

제국호텔을 방문한 내외신의 주요 인사들과의 면담에서

그는 '조선 독립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주장하여 일본의 회유공작에 결코 넘어가지 않았다.[32]

 

1919년 도쿄 제국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했는데,그가 주장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위키문헌에 이 글과 관련된 자료가 있습니다.


여운형 도쿄 제국호텔 기자회견 연설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권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이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데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수 있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는 것을 한국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국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일본 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세계는 약소민족해방, 부인해방, 노동자해방 등 세계 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 

 

 

 


 1919년11월 28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실린 여운형의 연설

 
일본 제국호텔. 이곳에서 여운형은 1919년 일본 장관들하고 담판을 짓고,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이 연설로 만좌에서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태평양'잡지사 사장은 "조선독립에 대한 이론이 명쾌해졌다."고 말했다.

 

요시노 도쿄제국대학교 법학 교수는

'중국, 조선, 대만 등의 많은 사람들과 회담 하였지만, 교양있고 존경할 만한 인격으로서

여운형씨 같은 사람은 드물게 보는 뛰어난 사람이다.'

라고 극찬하기도 하였다.[25]

 

 

이 때문에 여운형을 초대한 일본 의원들로 구성된 하라 내각은

"'불령선인 1호 인물'을 일본땅에 불러들이고 독립을 외치게 만들었다."

는 책임을 지라는 압력에 밀려 붕괴하고 일본정국이 들끓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내각을 일컬어 '여운형 국회', 혹은 '여운형 내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31]

 

 

 

1920년1월 17일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 논설에서

여운형의 이러한 활약을 '독립운동사에 있어,

유래없는 성과'라고 대서특필하면서 여운형은 독립운동의 주요인물로 자리잡는다.[33]

 

 

한편, 여운형의 일본행을 결연히 반대하던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는

'국무총리 포고 2호'를 발표해 여운형의 항일 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이동휘가 소련에서 상해로 오자

여운형은 그와 함께 1920년 고려공산당을 창립하였다.[34]

 

 

 

 

 

임시정부 가입과 탈퇴

 

임시정부 개조파 활동과 고려공산당 활동

 


1922년 5월는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기 위한

국민대표대회준비위원회 준비위원의 1인에 피선되었다.[35]

 

 

1921년 말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32]

 

1922년 1월, '극동근로자대회'에 참석하여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레닌의 조선민족주의 운동 지지 노선에 대한 견해를 직접 들었다.[32]

 

 

1918년 7월에 발표된 소련 러시아국 외무위원장 치체린의 중국지원 성명,

 

1919년 7월 발표된 러시아 외무위 부위원장 카라한의 성명을 접한 후,

이에 감동한 여운형은 볼세비키 당에 참여하고,

임시정부와 볼세비키 당과 제휴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32]

 

치체린과 카라한이 발표한 성명서는 러시아가 중국에게 빼앗은 각종 이권을

중국에 되돌려준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 중에는 러시아가 강제로 빼앗은 동청철도(東淸鐵道)에 대한 각종 이권 포기 내용도 있었다.[32]

 

이를 본 여운형은 볼세비키들이 평등과 균형을 추구한다고 신뢰하게 되었다.

 

 

 

 

1922년 김구, 이유필 등과 한국노병회의 창립에 참여하였고,

 

1922년 7월 김구, 신익희, 안창호, 조소앙, 이시영(李始榮)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었을 때

여운형은 안창호의 개조파 세력을 따랐으나

임시정부의 파벌다툼에 실망하여 임시정부를 떠났다.

 

 

이 무렵, 국제공산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200만루블을 원조하기로 했는데[36],

이동휘, 김립 등은 그중의 60만루블만 받아가지고 와서 자의로 쓰는 바람에 140만루블은 구경도 못하게 되었다.[36]

 

 

그러나 국제공산당이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조선민족을 도우려고 한 것이 확실해지자

여운형은 고려공산당에 가입을 결심하게 된다.[36]

 

 

그가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목적은 '독립운동을 위한 수단으로서 코뮌테른(국제 공산당)의 원조를 기대한것'이어서다.[36]

 

 

그런데, 1921년 김립(金立)의 '노농정부 자금횡령사건'으로 그는 이동휘(李東輝)와 결별하고,

김만겸(金萬謙)이 주도한 이르쿠츠크파와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참가했다.

 

 

 

 

 

 

외교 활동과 소련 방문

1921년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결성에 참가하여

한·중 양민족의 공동 투쟁과 이해증진을 모색하였다.

 

한·중연대를 통한 독립운동의 방도를 강조했던 그는

국제정세의 흐름에서 한국독립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찾고자 했다.[37]

 


1921년 모스크바 극동피압박인민대회에서.

 

1921년 말 김규식등과 함께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12월 이르쿠츠크에 체류 중, 러시아군에게 체포된 독립군들의 재판정에 김규식과 배심원으로 참석했다.

이때 여운형은 '이 재판은 말할 수 없이 안타까운 애석한 정과

암담한 우울로 나의 마음을 몹시 누른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르쿠츠크에서 열리기로 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리니 모스크바로 가라는 소식이 통지되었다.

 

 

 

그 후 그는 1922년 1월,

고비사막에서 야영을 하면서 모스크바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릴 때

조선민족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여 조선독립을 역설하였는데,

소비에트 연방의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가타야마 센과 취추바이등과 함께

서기장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난다.[36]

 

 

면담에서 레닌은 "한국에서는 공산주의혁명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운동에 주력해야 한다"고 하였고,

이 의견에 공감한 여운형은 볼셰비키와 연대하여 활동하게 되었다.[36]

 

그 후에 중국에서 스탈린의 대리인격인 보로딘의 중국 반제국주의운동에도 참가하게 된다.[36]

 

 

 

1922년 10월부터 이듬해 1923년 5월까지 동아일보의 상하이주재 촉탁 통신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38]

 

1924년 쑨원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는 한편,

제1차 국공합작에도 참여해 중국 공산당을 돕기도 했다.

 

 

1924년 9월 15일 김규식, 최창식이 설립한 상해고등보수학원의 전임교사로 초빙되었다.[39]

 

중국혁명 활동[편집]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하자 그의 추도식에 참석하였다.[40]

 

 

그 해 5월 말경에 조봉암이 여운형의 집에 찾아와서

조선공산당이 제 3 인터내셔널의 승인을 받아야 하니

모스크바로 가는 여권을 받게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여운형은 이를 도와주었다.

 

이는 후에 신의주 사건(제1차 조선공산당검거사건)과 맞물려서 물의를 빚게 되었다.[41]

 

 

 

5월 30일 영국 경찰이

불평등 조약에 반대하는 중국인 젊은이 20여 명을 살해한

'5.30 사건' 이후 중국 혁명에도 참가하게 되었다.[32]

 

 

반영 시위는 1926년 10월까지 지속되었다.[32]

 

 

이 기간 중 그는 중국국민당 대표 사오리쯔와 공산당 대표 취추바이 등과 함께 운동의 방향에 대해 일주일에 두세 번 이상 만나 토의하기도 하였다.[40]

 

1925년부터 1927년까지는 상하이에서 소련이 새로 시작한 타스 통신사에 취직,근무한다.[36]

 

 

 

1926년 1월에 의열단 단장으로 무장 항일투쟁한 김원봉을

황포 군관학교로 입학시키는데 도왔다.[42]

 

이와 동시에 1926년 1월,

국민당 2차 대표대회에 국민당 정부 주석 왕징웨이의 초대로 참석하여 연설을 하였으며[40]

보로딘과 함께 왕징웨이의 자문활동도 하였다.[40]

 

 1927년 장제스가 대대적인 공산당 숙청을 하면서

그의 중국 혁명 활동도 중단되었다.[40]

 

 

 

중국 혁명 활동과 조선독립운동의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중국 복단 대학교 체육교사로 취직하였고,

수학여행차 학생들을 데리고 동남아시아로 건너가

싱가포르, 필리핀 일대에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 민족해방을 촉구'하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이 때문에 필리핀 지역에서 경찰에 의해 강제로 억류되기도 했고,[43]

싱가포르 지역의 영국 경찰들과 마찰이 생겨 여권을 빼앗기거나 쫓겨나기도 했다.[6]

 

 

 

 

 

 

 

국내 활동[편집]

 

체포와 감옥 생활[편집]

 

1929년 체포되어 용산역에 내리는 여운형.동남아시아 지역 순회를 마친 뒤

 

1929년 7월에 여운형은 중국 상하이 대마로(大碼路) 야구장에서 야구경기 관람중

영국경찰의 협력을 받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된다. [44][45] [46] [47][48]

 

 

여운형은 일본경찰이 공동조계에서 자신을 체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야구 경기를 관람한 것인데, 일본 경찰들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첩첩이 포위했다.

 

그 과정에서 심한 몸싸움이 벌어져서

여운형의 한쪽 귀 고막이 상해 한쪽 귀가 안 들리게 되었다.[6]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이 소식의 진위를 의심했다.

 

이는 이 전에도 여운형 체포설이 심심할 때 마다 신문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체포가 사실로 확인되자 그의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여운형의 이름이 조선에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조선에 도착할 무렵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서울역으로 몰려들었는데,

사실 서울역에서 내릴 예정이었으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리자 경찰이 만일의 사태를 우려하여

용산역에서 미리 내리게 했다.

 

 

당시 신문사들은 이를 "여운형 사건"이라 하여 관련 보도들을 지속적으로 보도하였고,

공판 과정을 관람하기 위해 새벽부터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6]

 

 

한편 여운형은 본국에 송환되던 날 오랜 여정의 피로로 신경이 약해졌고

유난히 더워서 찬물을 많이 마셔서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의 형량은 1930년 4월 26일 일제 법정에 의해 3년 징역으로 최종 확정되었고[49]

 

1930년 6월 9일 상고심에서도 3년형을 받아[50]옥고를 치러야 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여 독방생활을 하게 되자

평소 세계구급으로 활발하게 돌아다녔던 몸이 적응을 못하여 신경통에 시달리더니

그 결과 털이 허옇게 드문드문 쉬어버렸고

이전에 몸무게가 80kg대에서 60kg대로 줄었다.[6]

 

특히 수감생활 중 치질 때문에 엄청 고생했다고 한다.[6]

 

 

 

 

 

 

조선중앙일보 사장

 

1934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시절. 백두산 탐방했을때.

 

1932년 7월 26일, 만기 4개월을 앞두고 대전형무소에서 가석방되었다[51].

 

그리고 동생 여운홍등 지인들의 도움으로 1933년에 〈조선중앙일보〉사장에 취임하였다.[주 5]

 

 

 

윤치호 일기에 1933년 10월 4일자 내용에 따르면,

"안창호는 윤치호에게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간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했다.[52] [53]

 

그러자 여운형,신흥우 등도 독립지사들과 함께 윤치호를 찾아가

서북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기호파 비밀결사를 제안하였다고 한다.[53]

 

 

윤치호는 이를 자신의 일기에 기록으로 남겼고,

 

윤치호는 '안창호와 신흥우,여운형등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지역감정을 놓고,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52][53]

 

 

그러나, 안창호는 1932년 5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징역 4년형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상태였기 때문에

안창호나 여운형등이 이 시기에 윤치호에게 찾아가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앞뒤 정황이 맞지않다.

 

 

 
사회사업가 최송설당 자택을 방문한

여운형과 송진우 (1935년)1935년에 조선체육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한편,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지내면서

망하기 직전이던 조선중앙일보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겨루는 3대 일간지가 되었다.

 

 

당시 언론사에서 나돈 유행어로

"3증 경쟁"의 대열에 합류한 조선중앙일보는 사옥을 더 넓은 곳으로 옮기고 지면을 계속 늘려갔으며,

월간 잡지 《중앙》을 창간하는 등 무섭게 성장하였다.

 

 

여운형은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자본을 늘리고[54]

사옥을 증축, 윤전기를 늘렸다.

 

1935년 9월 말에는 회사 전용 경비행기를 사서 백두산을 탐방하기도 했다.[55] [56]

 

 

 

한때, 김구의 가족들을 피신시켜 김구와 상봉하게 해주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해서

총독부로부터 감시를 받기도 하였다.

 

조선중앙일보는 '일제의 조선인 탄압 정책'을 비판하는 논조를 지닌

 사민주의성향의 중도적인 정치노선 신문이었다.

 

 

특히, 그는 '식민지 조선을 구해낼 수 있는 것은 청년들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1905년 광동(光東)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던

그는 '청년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스포츠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조선체육회 회장을 맡았으며, 체육을 좋아하던 그는 각종 구기종목 대회에 신문사가 주관하도록 적극 장려하였다. 또한 여운형은 조선인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손기정과 가까이 지냈다.

 

1934년 11월에는 충청남도 아산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를 처음 찾아가고는

황폐해진 묘소를 보고서 이후 그것을 정돈하는 사업을 추진했다.[57]

 

 

이러한 신문사 사장의 행적으로 조선중앙일보는

다른 유력 신문사들(동아일보,조선일보)에 비해 수익구조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한다.

 

그래서 사장인데도 걸어서 출근해 세간에는 이런 말장난이 나돌았다.[6]

조선일보 광산왕은 자가용으로 납시고

 

 

 

 

 

 

 

 


동아일보 송진우는 인력거로 꺼떡꺼떡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걸어서 뚜벅뚜벅

 

 

조선중앙일보 사장직을 지냈을 때,

조선중앙일보는 대범한 기사를 냈을 뿐만 아니라

파격적인 문학작품의 게재를 허락하여 온갖 비난 여론과 협박이 들어와도 신경쓰지 않고

그냥 싣게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이상의 '오감도'를 게재하자

당시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주 6]

 

 

1932년 11월 중국에 있던 김단야는 정태희를 시켜 여운형에게 연락하여

신의주 감옥에 있는 박헌영에게 원조금을 전하고

조동호를 상해로 내보내라는 말을 전하였다.[58]

 

여운형은 조동호에게 부탁하여 정태희를 영도사 승방(僧房)에 숨겨주었다.

 

여운형은 조동호와 양하석을 일선에서 활동하게 하면서

조동호와 양하석을 국외로 내보낼 생각이었다.[58]

 

 

 

그러나 정태희가 국외로 출국하려다가 조선총독부 이동경찰에 검거되어 신의주감옥에 갇힌다.

 

여운형은 사원 박돈서(朴敦緖)와 함께 순회하다

전북 남원군 연회석상에서 이 소식을 접하였다.

 

박헌영도 체포, 압송되었으며 조동호·홍증식 등은 함께 연행되었다.[58]

 

여운형의 체포장도 날아왔지만 총독부 경무국은 신의주 경찰서에 자진출두하라 하였다.[58]

 

경찰관은 취조로 조동호 등과 상의한 내용을 진술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여운형은 '조동호는 나의 친우다. 매일 상종하는데 그 많은 이야기들을 어찌 다 일일이 기억할 수 있느냐.

조동호의 진술이 옳다고 하고 나도 감방으로 가면 그만이 아니냐?'[59]

 

취조하던 형사는 밤 8시에 다시 오라며 여운형을 풀어주었고,

 

여운형은 평안북도 도지사에게 일이 없으니

다시 상경하라는 전갈을 받고 되돌아가게 되었다.[6]

 

 

 

 

1930년대 후반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년에 함께 찍은 사진.[주 7]

 

 

1936년, 베를린에서 올림픽 개최가 정해지고 손기정이 일본측 대표 후보가 되자

손기정은 '굳이 이 대회를 나가야 되느냐.'고 여운형에게 물었다.

 

여운형은 "일장기를 달고가지만, 등에 한반도를 짊어지고 달린다는 것을 잊지 말라."며 출전을 권하였고,

 

손기정은 마라톤 대회에서 1등을 하여 금메달을 딴다.

 

 

이 일은 각계 언론사들에 의해 보도되었는데, 그 중 조선중앙일보는

누구보다 먼저 손기정 선수의 활약을 극찬하였고,

 

 

1936년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에 손기정의 일장기를 쓱싹 지운 사진을 실었다.

 

중앙일보는 인쇄기 품질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장기가 지워진건지 안 지워진건지

총독부가 알아차리지 못해서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인쇄기의 품질이 좋았던 동아일보는 이걸 따라하여

 8월 25일자 신문에 실었다가 총독부의 검열에 걸리게 되었고,

 

중앙일보가 이를 먼저 시도했음이 밝혀져 두 신문 모두 정간되었다.[60]

 

이 일로 조선중앙일보는 자진휴간된 뒤 한동안 복간되지 않았다.

 

 

 

 

사장직에서 물러난 여운형은 인기 많은 공인으로 각종 행사의 연사를 맡으면서

 학교 졸업식에서부터 결혼식 주례까지 없는 곳이 없어

 '감초사장'이라고 불렸다 한다.

 

 

한동안 그는 결혼 주례와 스포츠행사 참석 등으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61]

 

이어 안창호가 일제에 의해 국내에 압송된 뒤 수감되자,

조만식·이광수 등과 함께 수시로 면회를 다녀오기도 했다.

 

 

1935년 2월 10일, 대전형무소에서 안창호가 가석방되자 마중을 나가기도 했다. [62]

 

또한, 도산 안창호의 말년에는 끝까지 조만식과 함께 곁에 있었다.[6]

 

1937년에는 권투구락부 회장에 취임하였다.[63]

 

 

 

 

 

 

 

조선중앙일보 폐간 직후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되고 이렇다 할 직업이 없어진 여운형은 결혼식 주례사로,

각종 행사의 초빙 연사로 소일하다가

 

1937년 4월 초순에 갑자기 일본으로 떠났으며 수시로 도쿄를 오갔다.[64][65]

 

이에 대해 자신의 아들이 일본 호세이 대학에 입학하는 관계로 일본행을 결정했다고 하였으나 [66]

 

사실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터진 뒤 일본이 조선에서 독립운동 활동에 탄압을 강화하여

활동이 여의치 않아서였고, 중일전쟁과 관련해 일본 고위급 관료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주 8]

 

 

 

일본으로 건너간 여운형은 일본유학 중인 조선인 유학생들을 만나

 '조국독립의 필연성'을 역설하여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으면서

그들의 유학생활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 사이에서 여운형은 매우 인기있는 지도자로,

 

조선인 유학생이 많이 모여드는 때는 여운형씨가 올 때와

긴자 무대에서 한국인 가수가 공연할 때였다고 한다.[67]

 

 

한편, 일본 고위급 관료들과도 만나 중국에서 일본군은 서둘러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고,

일본의 우파 지식인이자 정치인인 오카와 슈메이와 시국을 논하기도 하였다.[주 9]

 

 

하지만, 군부 인사들은 '이미 시작한 일이니 물러설 수 없다.'면서 듣지 않아 성과를 볼 수 없었다.[6]

 

1939년 12월 18일 경성부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68]

 

여운형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68]

 

 

 

 

 

 

 

일제 강점기 후반

 

태평양 전쟁 직후


태평양 전쟁1941년, 일본 정부는 다시 여운형을 초청했다.

당시 일제는 중일전쟁이 한창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를 이용해 '왕징웨이와 함께 활동해서

중화민국과 화해를 위해 힘써 달라.'고 하려던 것이 본래 목적이었다.

 

일본 군부쪽 고위 관료들의 요청으로 회담을 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전직 수상을 지낸 고노에 후미마로는 중일전쟁 초기에 여운형의 제안을 거절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국공합작이 전개되고 일본 전황이 패망으로 치닫게 되자,

여운형에게 '중국측 인사들을 설득하여 휴전협상을 도와달라.'

고 요청하지만 여운형은 '이미 늦었다.'며 거절하였다.

 

 

일본정부는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여운형을 동경으로 불러들였다.

 

여운형은 화평공작에 임할듯 말듯한 위장전술을 취하면서

오히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1942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이정구에게

'장차 조선이 해방될 때를 대비하여 국민이 먹어야 할 식량조사와 그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하고,

 

장권에게는 '해방시의 혼란을 막기 위해 치안대를 조직할 상세한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69]

 

 1942년에는 송진우,김성수 등과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청취하기도 했다.

 

 

이후 여운형은 공공연히 송진우, 안재홍, 장택상과 함께 일본의 패망을 주장하였다.

 

 

1942년 4월 18일, 일본제국의 수도 도쿄에 미군 폭격기의 공습(둘리틀 공습)을 목격한 그는

일본에 다녀온뒤 귀국하면서 여름무렵

경성부 계동 자택에 머물러 있을때 평양신학교 동창생으로 왕십리 교회에 시무하던

오랜친구격인 오건영,이재형이라는 목사를 만나 이야기 하던 중

 '일본제국의 패배'를 공개적으로 발언했다가

주변인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일본 헌병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여운형이 일본에 체류 중이던

1942년 12월 21일, 고이소 쿠니아키 총독과의 회견을 마치고

일본 도쿄에서 귀국하던 중 시모노세키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헌병대로 연행되고 수감되었다.[61]

 

 

이 때의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 육해군형법 위반, 조선임시보안법 위반, 소련의 밀정혐의, 안녕질서에 대한 죄목 등이었다.[61]

 

그는 옥중에서 수차례 고문에 시달렸고,

사상전향서를 쓸 것과 신사참배 등 학도병 강연회에 앞장서라는 일제의 위협에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6]

 

 

당시 여운형의 회상에 의하면

'일본 헌병들이 자신을 때리고 매달지 못하는 대신,

여러 일본경찰들이 번갈아가며 달라붙어서 자신을 90여 시간 동안

의자에 묶어놓은 채 흔들고 잡아당기며 잠을 못자게 하는 건고문을 했다고 하였다.[61][70]

 

 

이 뒤로 감옥에 이감된 뒤에도 신경쇠약에 걸려 잠을 못 이루었다고 한다.[61][주 10]

1943년 7월 2일 석방되었다.

 

 

여운형이 출옥한 다음 날 자택으로 그를 방문했던

안재홍은 그날의 여운형의 모습을 너무나 처참하고 쓰라렸다고 묘사했다.[61]

 

 

석방 직후에 그는 극히 신경쇠약에 시달려 경성요양원에 입원했는데,

7월 5일 일본인 검사 두명이 전향서 쓸것을 협박,

여운형은 재차 거절했지만 경성지방법원 판사 백윤화가

'전향하지 않으면 집행유예를 취소하고 다시 형을 집행한다.'고 협박한다.

 

 

그러자 극도로 몸이 쇠약해진 여운형은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던 가족들이

자기 대신 전향문에 도장 찍는 것을 그대로 묵인하고 말았고,

결국 협박 분위기 속에서 가족들에 의해 전향문이 날인 당하게 된다.

 

 

이 강제 전향문으로 인해 여운형은 훗날 해방 후 수 많은 정적들로부터

비판의 명분을 받게되어 명예적으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71]

 

 

전향문 날인 이후에도 일제 경찰들로부터 가택연금을 당하고 총독부로부터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다.

 

게다가 일본 고위급 정치인들은 자기들과 협력하라는 공갈협박을 수차례 하였다.

 

그러자 여운형은 요양을 핑계로 경기도 양주군 봉안마을로 내려가 거처를 옮긴다.

 

석방된 이후에도 여전히 일제의 보호, 관찰대상 1호로 지목되어 일제의 감시를 받았지만,

수많은 청년들이 그를 찾아가 도와주곤 했다.[2][주 11]

 

 

 

 

 

건국동맹과 농민동맹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에 위치해 있는 건물.

 

이 건물은 1944년 8월 10일,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지하 비밀 결사 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이 결성되었던 곳이었다.

 

1943년 7월 2일 석방 된 이후 여운형은 한동안 경성요양원에 입원해 있었고,

거기 있으면서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했다.[72]

 

 

그래서 퇴원후 요양을 핑계로 향리인 경기도 봉안촌으로 거주하면서

만주군에 소속된 박승환 대위를 만나 군사조직 문제를 논의했다.[6]

 

이와 함께 염윤구,이혁기등 학병,징병 거부자들을 집결시켜

군사훈련과 무장투쟁을 준비시켰다.

 

 

 

1944년 8월, 경성부 종로구 운니동에서는 여운형이 주도하여

'건국동맹'을 비밀리에 결성하였다.

 

 

건국동맹은 민족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들까지 좌우익세력들을 망라한

애국세력들이 뭉친 조직으로 여운형은 이 건국동맹으로 해외 각지에 흩어진

독립운동단체들과 연대를 추진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 옌안에 있는 '연안독립동맹'과 연대를 추진한 것이다.

 

 

'연안독립동맹'의 수장이던 무정의 기록에는,

'조선의 한성에서 연락을 취하던 대규모 독립단체가 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조선의 한성'은 '건국동맹'을 의미한다.

건국동맹은 뒷날 해방직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한다.[30]

 

 

 

1944년 10월,

 인근 용문산에서 13명의 청년들이 여운형을 찾아 만난다.

 

경기북부지역을 대표하는 청년들이 모여 비밀결사단체인 '농민동맹'을 결성한다.

 

당시 농민동맹은 용문산을 거점으로 일제의 강제징병을 피해 도피한 청년들을 보호하였고,

일제(日帝)의 공출로 인한 농민들의 피해를 막으려 노력했다.[61][30]

 

 

이후에는 보광당, 조선민족해방협동단, 산악대 등 여러조직과 직간접 접촉을통해

 건국동맹의 기반을 다져나아가게 된다.

 

 

1945년 3월에는 건국동맹의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군의 후방교란과 노농군 편성을 계획하면서

경기도 주안 조병창의 채병덕 중좌와 접촉하고자

 

당시 은행원으로 지내던 손기정을 보내 채병덕 중좌에게 전갈을 보냈고[73],

채병덕 중좌와 두차례 접촉해 유사시에 무기공급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1945년 4월에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회담과 관련해 연안 독립동맹과

구체적인 연계를 위해 이영선을 파견하고,

 

 

5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접촉하기 위해 최근우를 베이징에 파견하여 연락을 시도했다.

 

 

그리고 8월초에는 총독부 경찰에 그 존재가 드러나게 되어

건국동맹의 간부 이걸소,황운,이석구,조동호등이 검거되었고,

 

이에 따라 최근우,김세용,이여성,이상백,김기용,이만규등을 중앙위원으로 선출했다.[6]

 

 

건국동맹은 1만여명의 맹원을 확보해서 외곽 단체 농민동맹도 조직하고

해외 연락 사업을 벌였으며

 

심지어 국외에서 편성한 병력을

1945년 8월 29일 국치 35주년의 날에 국내로 진공시킬 계획까지 추진했다고 한다.

건국동맹의 인력과 자원이 건준 활동의 발판이 되었다고 한다.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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