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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체결 이후[편집]
관복 차림의 윤치호, 을사 조약 전후그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조선이 영세중립국을 선언하고
정치적 독립을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윤치호는 정치인들이 썩고 부패했다면 백성들이라도 정신을 바로 차려야 되는데,
백성들부터 요령과 잔머리와 사기와 기만, 허위와 술수와 험담에 찌들었다고 지적하였다.
윤치호는 훗날 1919년 11월 9일 기독교 평신도주간 기념 범기독교대회 강연에서도 이를 드러냈다.
“ 내가 신시대(新時代)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내 강연의 요지는 이렇다. ⑴
지금이 우리가 처음으로 맞이하는 신시대는 아니다.
사실은 조선이 일본과 처음으로 조약을 체결했던 1876년이 첫 번째 신시대가 열렸다.
김옥균 어른이 정부를 근대적으로 개혁하려고 시도했던
1884년에도 신시대가 열렸다.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조선을 해방시켰던 1894년에도 신시대가 열렸다.
일본이 러시아를 만주에서 몰아냈던 1905년에도 신시대가 열렸다.
우리는 이렇게 신시대가 찾아왔을 때마다 뭘 했나? ⑵ 신시대가 열리면 어느 민족이든 일본인들처럼 신시대에 발맞춰 전진하든가 아니면 미국의 인디언들처럼 빛 바랜 옛날 과거에 파묻혀 살다가 결국에는 제거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범적인 모델은 어느 쪽인가?[72] ”
그는 1919년의 연설에서도 조선이 일본과 처음으로 조약을 체결했던 1876년 새로운 기회가 나타났고, 김옥균이 정부를 근대적으로 개혁하려고 시도했던 1884년에도 새로운 기회가 나타났[72] 는데 그때마다 뭘 했느냐고 물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로 이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던 민중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은 더욱 강해졌다. 1919년의 한 강연에서 그는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조선을 해방시켰던 1894년에도 신시대가 열렸다. 일본이 러시아를 만주에서 몰아냈던 1905년에도 신시대가 열렸다.[72]' 그는 이 때를 조선이 자주독립할 수 있는 기회라고 봤다. 1894년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독립했을 때나 러일전쟁으로 러시아를 몰아냈을 때 왜 자주국 내지는 중립국 선언을 하지 못하고, 국력 배양은 하지 못하고 정부 관리들이 이권을 챙기고, 파벌싸움에만 눈이 멀었느냐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는 이렇게 신시대가 찾아왔을 때마다 뭘 했느냐[72]'고 질타하였다.
1906년 그는 황성기독교청년회 부회장으로 재선되었다. 1906년 5월 4일 대한제국 정부의 일본 유학생 감독(日本留學生監督)에 임명되었다. 10월 15일 그는 의정부 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 학부 대신(學部大臣) 이완용의 상소로 일본 유학생 감독직에서 해임되어 귀국했다. 후임자는 특별히 그의 사촌인 윤치오(尹致旿)가 되었다.
국권회복 운동[편집]
안창호.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활동 중 만났으며, 이후 안창호가 죽을 때까지 계속 서신과 연락을 주고 받았다. 대한자강회, 신민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후 그는 애국계몽운동을 하였으며 대한자강회를 지도하였다.[1] 1906년 3월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했고, 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13] 이후 교육 계몽 사업에 힘썼다. 대한자강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그는 교육의 확대와 산업개발로 자강독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표방하고 국민사상계몽에 노력했다.[13] 그러나 대한자강회는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이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자 이에 반대운동을 펴다 해산되어 그의 뜻은 무산되었다.
윤치호와 어머니 전주이씨(오른쪽), 삼취 부인 남포백씨 백매려(1907년)1906년 10월 그는 캔들러와 상의하여 개성에 한미서원(韓美書院)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어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12월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임명되었다. 1907년 3월 어머니 전주이씨의 권유로 남포 백씨[31] 백매려(白梅麗)와 중매로 재혼하였다. 당시 윤치호는 43세였고, 백매려는 18세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열리자 그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1907년 그는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동휘(李東輝)·전덕기·김구 등의 주도로 조직된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신민회는 1907년 2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배양' 필요성을 역설하는 강연회를 열고 동지를 모으면서 만든 조직이었다.[73] 윤치호는 안창호의 '실력배양'에 동의하였다. 이에 동의한 윤치호를 회장으로 하고 안창호가 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그 밖에 양기탁·전덕기·이동휘·이갑·이승훈 등 언론인·군인·산업인 등이 중심이 되었다.[73] 1907년(융희 1년) 7월 고종 퇴위 압력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한편 고종 양위를 주도한 이완용 등을 성토하였다. 7월 21일 순종이 즉위하면서 그에게 특별히 외무부협판직을 제수했으나 불민함을 이유로 고사하였다.
대성학교와 한영서원의 교장[편집]
한영서원의 제1회 졸업생1906년 5월 8일 이민설, 이능화, 장지연 등과 함께 경성의 불교 승려들이 세운 명진학교(明進學校, 동국대학교의 전신)의 교사로 초빙, 출강하였다.
신민회의 회원이자 회장으로 활동하며 명진학교의 교사로도 출강중이던 그는 1907년 9월 평양 시내에 안창호와 함께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1908년(융희 2년) 10월 3일 현재의 송도고등학교와 송도중학교의 전신인 한영서원을 설립하였다. 이때 그는 미국 유학시절에 그를 후원했던 캔들러 박사와 편지 서신을 주고받으며 자문을 구했다. 캔들러 박사는 학교 건립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해주었다. 편지에서 캔들러 박사는 기독교 신학 학교, 혹은 기독교 계열 학교 설립을 추천했지만 그는 답장에서 기술과 상업을 가르치는 실업학교의 건립이 먼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노동이 수치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게 하고, 자원이 빈약한 한국의 미래는 기술과 노동에 있다는 점과 기독교는 일을 하고 악습과 미신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상, 종교로서 필요한 것이라 했다. 윤치호는 조선인들이 배관열과 관존민비, 문존무비 사상에 빠져있고 땀흘려 일하는 것을 천시한다며 조선인에데 땀흘려 일하는 것의 소중함을 가르쳐야 된다고 하였다.
대성학교 졸업식, 가운데 x표가 윤치호그의 의견에 공감한 캔들러 박사는 미국인 건축, 기계, 농학 교수와 일본의 간섭에 대비해 기독교 선교사들을 파견해주었다. 한영서원은 처음 14명의 원생으로 출발했으나 1910년에는 원생 수가 400여 명으로 증가했다. 한영서원은 한자와 유교, 영어 외에도 농업, 목공 기술, 측량, 축산법, 직물 등을 가르쳤다. 10월 3일 그는 한영서원의 초대 원장 겸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나, 이사장직은 공성학에게 넘기고, 원장직도 곧 윌라드 크램(Willard G. Cram, 한국명 기의남)에게 넘겼다. 송도고보는 그 뒤 6·25전쟁 이후에는 인천으로 피난 와서 송도고등학교로 다시 태어났다.
주요한에 의하면 그가 한영서원을 설립한 것은 안창호의 영향이라 한다.[74] 윤치호가 개성에 설립한 한영서원(韓英書院)은 안창호가 신민회 조직 2년 후인 1908년도에 평양의 유지인 김진후의 지원으로 설립한 대성학교에서 윤치호가 안창호의 인도로 교장직을 맡아 일하면서 얻은 경험이 동기가 되어 세운 것이라고 주요한은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 에서 서술하고 있다.[74]
교육, 계몽단체 활동[편집]1909년 안태국(安泰國)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해 청년운동을 적극 지도하였으며, 계몽강연 연사로도 활약하며 신사상과 신문물 수용, 개발 등 실력양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조선인 학생들에게 일본이 되었든 미국이 되었든 유학하여 선진국의 사상과 문물, 과학 기술을 배워와야 된다고 호소하였다. 유학을 떠나는 학생들의 자세와 소양을 살펴본 후 그는 여비와 식비를 제공하고, 장학금을 송금해준다.
이상재
(윤치호는 그를 도와 YMCA를 사수하고 기독교 선교활동을 지도하였다.)
1908년 11월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이 같은 조선인들의 밀고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처음에는 일제의 조작이라며 의심하였으나,
사실로 드러나자 한국 독립의 가망성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됐다.
1909년 한국의 유머 모음집 《우순소리》를 출간하였으나,
일본이 제정한 내부고시 제27호에 의해 '치안과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금서(禁書) 처분을 받았다.
그는 언론의 자유를 탄압한다며 한국통감부에 항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자신이 후원하던 캐롤라이나 학당의 새로운 교명을 고민할 때 학교명을 '배화'라고 지어주었다.
1909년 박제순이 총리대신서리가 되자 그에게 외무대신직 제의가 들어왔지만 이를 거절했다.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의 조직에 가담한 후
안창호의 제의로 대성학교 교장으로 다시 초빙되었다.
한영서원과 송도학원, 대성학교 외에도 신앙 활동에도 전념했는데,
신앙 활동으로는 기독교청년회(YMCA)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청년회 이사와 부회장, 세계주일학교 한국지회 회장 등으로 일했다. 이후 이상재와 함께 기독교청년회를 지도하고 기독교 선교사업과 개척교회 활동을 지원하는데 주력하였다. 1910년 4월 캐롤라이나 학당이 배화학당으로 개편되자 여성에게도 교육 계몽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배화학당의 공식 후원자의 한사람이 되었다.
또 그는 조선이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술은 멀리하고 공리공담과 관념론적 성리학 사상에 몰입된 사회라며 희망이 없다고 보았다. 윤치호는 미국의 흑인 자립 운동을 추진하는 부커 T. 워싱턴과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부커 T. 워싱턴의 공업학교 운영 정책에 대해 수시로 자문하였다.
일제 강점기 활동[편집]
한일 병합 직후[편집]
40대 초반 무렵의 윤치호 한일 병합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0년(융희 4년) 8월 27일 종2품에서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했다.
그러나 1910년 10월 한일병합으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그는 공직을 사퇴했다.[75]
아버지의 사망에 관계 없이 그는 정2품 이상의 고관이었으므로 남작(男爵) 작위가 내려졌다.
그러나 윤치호는 남작 작위를 거절했다.
일본 제국 정부는 윤치호에게 외무대신 직을 제안했지만, 그는 이것도 역시 거부했다.
조선의 왕족과 고관들이 일제에 협력하여 귀족이 되는 것을 보고 실망,
낙심한 그는 이후 조선총독부의 협력 요청을 거절하고 경기도 개성부로 은퇴하였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이 한일병합을 재촉했다[76] 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조선의 패망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부도덕한 민중과 고관들의 탐욕, 무지, 인맥와 담합행위 등 내부적 부패 때문에 발생한 당연한 징벌로 여겼다.
그는 석호필 등과도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석호필이
"하나님은 조선사람에게 나라와 긴 손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주셨는데
조선사람은 긴 손톱을 택하고 나라를 버렸다."고 한 것을 두고 조선인들의 게으름이
스스로 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라며 감탄하기도 했다.
엄낙만 환영회장에 참석
(앞줄 왼쪽이 윤치호, 앞줄 가운데는 신흥우, 뒷줄 왼쪽은 이상재한일병합 조약 직후 도산 안창호가 거국가를 남기고 출국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는 갈등, 방황하였다. 그는 병환중인 아버지와 노모와 아내, 2남 2녀가 있고 서모에게서 어린 이복동생 둘이 있어서 이들을 책임져야 된다는 압박감 때문에 출국을 주저했다. 이상재는 그에게 여러 번 이승만, 안창호의 사례를 들며 미국으로의 망명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후일 그는 이를 두고두고 통탄해하게 된다. 그해 10월 YMCA 기독교 청년회 부회장의 한사람으로 피선되었고, 1910년 12월 4일 미국에서 열리는 선교회 공회에 참석차 출국하여 1911년 1월 귀국하였다. 이후 교육 활동 외에 토지 매입에 힘써 선산군 해평면 금산동(金山東) 산 72번지, 고양군 부암리(付岩里), 경성부 견지동,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일대의 대 농지를 소유하였다.
윤치호는 다양한 책을 두루 독서하며 시름을 달랬는데, 삼국지, 삼국지연의, 손자병법, 서유기, 수호전, 춘추, 한비자 등의 중국 고전에서부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니체의 신은 죽었다 등의 서적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1911년 9월 22일 아버지 윤웅렬이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 윤웅렬을 내심 존경하면서도 적극적인 애국심을 갖지 않은 것에 실망, 부정적으로 평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형식적이나마 남작 작위를 다시 수여받게 된다.
일제 강점기 초반[편집]
전향선언과 출옥[편집]
105인 사건 관련자들 체포 장면
105인 사건 관련자들 체포 장면 이 부분의 본문은 안악 사건, 신민회, 105인 사건입니다.
1911년 105인 사건 때 다른 기독교인 및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민족주의자로서 일제에 의해 체포, 재판을 받았다. 105인 사건의 최고 주모자로 지목된 윤치호는 가혹한 고문과 함께 3년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56]
1912년 2월 5일 그는 최종재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초기에 윤치호는 전향을 거절하였고,
1913년 10월에는 아버지 윤웅렬로부터 승계한 자작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1914년 1월 22일에는 일본 천황의 명의로 하사된 목배(木杯)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그러나 1915년에 윤치호는 전향을 선언했다.
윤치호가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1915년 2월 13일 특사로 출감한 후 매일신보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친일 의사를 내비쳤다.(인터뷰 내용은 위키인용집참조)
그러나 친일파로 전향한 것인지, 단지 독립운동을 포기한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운현은 그가 변절한 직접적인 요인은 '가혹한 고문과 일제의 강요였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그의 오랜 사상적 기반이 모태가 됐다고 볼 수 있다[18]'고 분석했다.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의 저자 유영렬(柳永烈. 숭실대·사학과)교수는
“개화기 이후 그의 의식 속에 잠재돼 있던 ‘민족패배주의’와 현실적으로 일본의 조선통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대세순응주의’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18]
곧 조선총독부는 기독교계의 지도자였던 그를 소환하여 총독부의 시책에 협력하고 애국심을 고취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자발적이지 않은 애국심, 강요된 애국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거절한다.
윤치호의 아버지인 윤웅렬은 1880년경부터 근대화를 위해 친일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이 성향은 특히 그가 1882년에 발생한 임오군란 후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윤웅렬은 한일병합 직후 곧 사망했고,
1910년 8월 일제의 한국 강점 이후 일본으로부터 남작 작위와 공채 2만 5000원을 받기도 했다.
1910년 한일병합이 되면서 그는 이완용, 송병준, 윤덕영 등의 변절자들을 경멸 증오하였다.
이완용과 송병준 등이 나라를 판 댓가로 부귀를 누린다며 늘 한탄하였고,
먼 친척이었던 윤덕영과 윤택영에 대해서도 그들의 인격을 의심하며 멀리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는 주저하였다.
사회 활동[편집]
경성부 YMCA에 지원, 파송되어 온 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가운데 오른쪽이 윤치호, 가운데 왼쪽이 이상재)
출소 직후, 어머니 및 세 딸과 함께출감 후 경성 YMCA기독교청년회의 총무와 회장에 선출되었고,
연희전문학교 재단이사, 기독연합재단법인 이사로 선임되었다. 1
916년 4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연희전문학교와 통합하여 연세대학교가 되고,
세브란스 의전은 연세대 의과대학 및 세브란스병원이 되었다.)가 개교하자
세브란스 의전 재단이사로도 취임했다.
그러나 독립운동에의 참여는 소홀하게 되었다.
이후 여러 학교를 전전하다가 개성의 한영서원((뒤에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온 의사이자 의학자인 이만규를 받아들였는데, 그는 한영서원에서 생물과 수학 과목을 담당하는 한편, 은밀히 한글과 한국사를 가르쳤다.[77]
삼일운동 때에는 독립선언문을 인쇄, 배포하는 등의 활동으로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77]
윤치호는 그의 한글과 국사 교육을 묵인했고,
3.1 운동 이후 이만규와 관련되어
윤치호 역시 총독부 경무국에 소환되었지만
그는이만규의 일을 모른다며 일체 증언을 하지 않았다.
1918년 11월 양기탁이 중국 천진(天津)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양기탁에게 벽돌을 발로 걷어찰 필요가 없으며
담벼락을 머리로 들이받을 필요는 없다.
대화도 통할 인간하고 대화를 하는 법이라며
그를 얼마나 바보스러우냐며 조롱하였다.
1918년 12월 양기탁이 상하이에서 한반도로 압송,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居金島)에 2년간 유배형에 처해졌다.
양기탁이 거금도에 유폐되자 바로 그를 찾아 면회를 다녀왔다.
1차 대전 종전에 대한 회의론[편집]
파리강화회의, 민족자결주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6년 조선총독부는 여러 번 사람을 보내 그에게 당국 시책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윤치호는 대답을 회피하거나 거절한다.
1916년 YMCA 기독교 청년회 제4대 총무로 취임한다.[78]
1918년 겨울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1919년 1월에 열리는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의 대표자를 선발하여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회의적이었다.
1919년 1월 하순에 윤치호와 박희도(朴熙道)는 연희전문학교의 학생인 김원벽(金元璧)을 중간에 두고 강기덕(康基德)·주익(朱翼)·한위건(韓偉鍵)·김형기(金炯璣)·이공후(李公厚)·주종선(朱鍾宣) 등 학생들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협의하였다.
1919년 1월 17일에 신흥우가 그에게 파리강화회의에 갈 의향을 타전해 왔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 신흥우 군이 찾아와 내게 유럽 파리에 갈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계속해서 약소국에 소요가 일어나는 것과 조선에서 소요가 발생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세계대전과 관련 있는 약소국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틀림없이 안건으로 상정될 걸세.
그러나 조선은 거론될 기회조차 없을 거야.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암거래는 제쳐놓고,
직간접적으로 세계대전과 관련 있는 약소국들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력할 걸세.[79]" ”
? 윤치호 일기, 1919년 1월 17일자
송진우
그날 송진우(宋鎭禹)가 찾아와 '국제연맹이 창설될 것이며, 약소국에 자결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 기구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것[80]'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이상적인 방안이 거부된다면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할 수도 있을 것[80]'이라 주장했다. 송진우가 3·1 운동에 동참해달라고 했을 때 그는 “조선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을 것이며, 열강중 어느 나라도 바보처럼 조선문제를 거론해서 일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독립만세 운동참여를 거절했다.[81]
신익희 (1952년)
윤치호는 파리강화회의에 기대를 거는 송진우를 설득시키려 하였다.
윤치호에 다음 이유등을 들어 강화회의에 기대를 접을 것을 권고했다.
1.거창한 이상이 모두 그렇듯, 국제연맹이 창설되어 실제 활동에 들어가려면 앞으로도 몇 년은 걸릴 것이다.
2.조선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지도 않을 것이다.
3.열강 중 누구도 바보처럼 조선 문제를 거론해 일본의 비위를 거스르지는 않을 것이다.
4.미국이 단지 조선에 독립을 안겨줄 요량으로 일본과 전쟁을 불사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80]
그러나 송진우는 윤치호가 일본인들의 힘을 과대평가한다고 생각했다.[80]
파리강화회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3.1 만세운동에 서명하지 않았으며 외교독립론 조차 부질없는 것으로 평가절하하는 그의 태도에 대한 청년층의 비난이 빗발쳤다. 1919년 1월에 프랑스 파리에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내세운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호찌민이 베트남의 독립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들고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순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82] 베트남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호찌민의 활동을 보고 그는 소용없는 행동으로 봤다.
윤치호에게 만세 운동에 적극 나서줄 것을 호소하려는 젊은이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그는 정의롭거나 도덕적으로 우월한 국가나 이념이 세계를 지배한 것은 아니라고 봤다. 외관 상 평화와 정의를 표방하지만, 현실은 국력과 무력이 세계를 실제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도덕적 이상은 보편타당한 진리라고 했지만, 윤치호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국가는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한다고 해도 도덕적으로 우월한 국가나 개인이 반드시 세상을 주도하거나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며 반박하여 되돌려보냈다.
이어 종로청년회관으로 신익희가 윤치호를 찾아가 세계 대세와 국내 정형을 설명하며 독립운동에 동참을 권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기회가 아니라며 사절하였다.[83] 무참하게 거절당한 신익희는 그를 소인배라며 질타하고 일어섰다.
윤치호는 호찌민과 같은 청년들의 좌절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82]
미국이나 다른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왜 약소국이나 후진국을 도와주겠느냐는 것이었다.
1월 21일 고종이 갑자기 사망했다.
당시 고종 독살설과 자살설이 시중에 확산되고 있었으나 그는 시위를 이끌어내기 위해 지식인들이 유포한 루머 정도로 치부했다.
그러나 그는 궁궐에 이미 일본에게 매수당한 내관이나 의원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1년 뒤, 사돈인 한진창에게서 고종 독살설의 전말과 고종 시신의 상태에 대한 것을 전해들은 뒤 윤치호는 고종 독살설을 확신하게 된다.
3·1 만세 운동[편집]
무오독립선언서 석판 인쇄본
1919년 3월 1일자 윤치호 일기 3·1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9년 3월 3·1 운동 당시,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국민대표로 서명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고,
이는 실망한 일부 학생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
그는 이 민족적인 거사를 순진한 애국심에 기초한 민족주의자들의 무모한 행동으로 파악했다.[84]
그는 한일병합 이후에도 신문과 방송매체를 통해 선전, 선동을 하는 지식인들을 혐오하고 경멸했다.
윤치호에 의하면 그들은
'자신들은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다른 순진한 사람들을 죽음의 골짜기로 몰고 가는 저주받을 악마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 이번 운동에 반대하는 세 가지 이유는 이렇다. 조선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 상정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나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우는모험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약자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강자의 호감을 사는 것이다.[84] ”
1919년 3월 6일
그는 젊은이들을 무책임하게 죽음으로 몰고간다며 일부 민족대표와 독립운동가를 무책임한 인사라고 비판했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선동이 독립을 불러오기는 커녕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한국인들을 더욱 가혹하고
엄하게 다룰 구실만 제공할 뿐이라고 내다봤다.
종로구 보신각앞 만세를 외치고 있는 민중들3.1 만세 운동의 실패를 예견한 그는
만세 운동이 한참 진행 중이던 3월 2일자의 일기에서 학생들을 앞세운 뒤,
만세 대열에서 슬그머니 발을 뺀 기독교, 천도교계 인사들을 음모꾼들이라며 규탄했다.[84]
3ㆍ1운동 후 구치소에 수감되는 여학생들의 모습에서는 일제 경찰에 대한증오와 분노로 밤새워 괴로워했다.[84]
이후 3월 5일~3월 7일 그는 시내를 다니며 만세 시위 직후의 동태를 파악했다.
3월 7일 기자 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 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마는,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조선은 내지에 대해서 그저 덮어 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됩니다. ”
? 윤치호, 경성일보 1919년 3월 7일
이 상황에 대해서, 일부 학자는 그 당시에, 윤치호가 '(조선의) 독립은 불가능하며 일제에 저항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일기에도 “나는 국경일에 일장기를 게양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본의 통치하에 있는 한 우리는 그 통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윤치호 일기, 1919년 10월 1일자)라고 썼다.
이때문에 일부 독립운동 지도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85]
한편 3·1 만세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의 1인인 권동진을 만났는데,
윤치호는 그로부터 처음에는 평화적인 선언서 낭독으로 이를 통해 신문 뉴스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알리기로 결정했으나 학생들이 갑자기 감정이 격해져서 감정적인 시위로 변질됐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권동진이 처음 찾아왔을 때 그는 경멸적인 태도로 대하였으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다소 감정적인 태도에서 한발 누그러졌다.
호찌민의 실패를 예견한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기대를 거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기대 역시 좌절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문제는 상정되지 않았고, 이후 김규식, 여운형 등은 소련 등 사회주의세력에, 송진우 등은 실력양성론으로 노선을 전환한다.
3·1 운동 직후[편집]
붓글씨
1919년 3월 서대문에 설립된 경성보육원의 원장에 취임했다.
경성보육원은 1936년 9월 안양으로 옮겨 현재의 안양보육원이 되었다.
그는 독립에 대한 의지는 당연하지만 단순한 만세운동 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봤다.
기마경찰 앞에서 맨손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천만한 짓이었을 게다.
윤치호는 3월 2일자 일기에서 학생들의 소요는 무단통치를 연장시킬 뿐이라고 했다.[86]
그들의 행동처럼 “만약에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86]
만세 운동이 계속되자 4월말 조선총독부 형사 세키야가 그에게 학생들에게 복귀를 촉구하는
성명서 한장 낭독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그는 형사의 요청을 거절했다.
“ 조선인의 특징은 한 사람이 멍석말이를 당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려고는 하지 않고
다 함께 달려들어 무조건 몰매를 때리고 보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그런 성명서를 발표하면 시위가 진정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 자극을 받아 역효과를 낼 것이오. ”
그는 만세 운동으로 조선이 독립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면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독립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용기에 경탄했다.
7월 20일에는 교풍회 경성지회 회장에 선출된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내가 회장에 뽑혀 기분이 찜찜했다. 최강, 예종석, 민원식 같은 인간들이 당국의 사주를 받아 주도하는 단체가 희망적이거나 대중에게 인기가 있을 리 만무하다.[87]"고 지적했다.
그는 교풍회 모임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다가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임시정부 수립 전후[편집]
1919년 4월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설치되자 그에게도 임시정부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
그러나 그는 임정 참여를 거절하였다.
이후 윤치호는 개인적으로 미국과 상하이를 오가는 김규식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서신과 유선을 통해 그는 국내외의 정세와 임시정부의 활동 등의 정보를 수시로 교류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초기 재정을 담당했던 이시영과도 연락이 닿았다.
그는 김규식, 이시영, 안창호, 여운형, 이승만 등을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도 상세히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는 조선총독부나 일본 제국 당국에 임시정부에 대한 것은 일체 발설하지 않았다.
“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종로 광장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눈에 들어왔다.
소년들은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었다.
이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86] ”
1929년 4월 2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 명의의 서한이 조선에 살포되었다.
이승만의 명의로 된 훈령 중에는 조선인들은 절대 조선총독부에 세금을 납부하지 말고,
소송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일본인의 법정에 가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서한을 본 윤치호는 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는 1940년대까지 일본 정부나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행사에는 불참했다.
그런데 3.1 운동 이후 학생들이 천장절 등 천황 일가의 생일 기념일에 교사나 동사무소 직원에게 떡을 받고는, 그 떡을 하수구에 던지는 것을 보고 호통치기도 했다.
“ 천장절 당일에 고등보통학교 여학생들이 교직원들에게서
받은 떡을 (하교길에 또는 교직원들 몰래) 학교 밖 도랑에 던져버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럴 것이라면 여학생들은 왜 그 떡을 받았는가?
일단 받은 것을 내동댕이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72] ”
일본 천황이 싫다면 떡이나 음식을 받지 말지, 왜 아까운 음식을 버리느냐는 것이었다.
시골에서는 가난해서 굶어죽거나 아파도 진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아까운 음식을 받아서 하수구에 던져버리느냐고 반문하였다.
그해 5월 31일 7,8명의 젊은이가 종각역 근처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는 것을 목격했다.
일본 헌병이 들이닥치자 그 중 한명이 주머니칼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이를 지켜본 윤치호는 그 젊은이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눈을 뜨고 지옥으로 뛰어들수 있는 그 용기에 감격[88]'하였다.
그러나 이런 행동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자치론과 경제적
실력양성론[편집]
지방자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윤치호는 1919년부터 1920년대 전반기에 걸쳐 전국의 각 지방 농촌을 무대로 '문화정치'라는 주제로 강연활동을 다녔다.
3·1운동 이후 전개된 독립운동에 대해 윤치호는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했다.
그는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쉽게 승인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일본의 '독립불용인론'을 주장했으며
'독립불용인론'을 전제로 한국인들의 '자치능력결여론'도 주장했다.[13]
기술과 자본과 시장이 없는 조선물산 장려 바자회가 무슨 수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지 안타까워 했다.[84]
윤치호는 한국이 독립하려면 실력을 양성해야 하고, 실력 양성을 위한 바탕으로는 경제력과 국민성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국민성을 개조하고 경제력을 향상시키기 전까지는 독립은 고사하고 자치능력 조차도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 외국인을 초청해서 한식을 대접할 때면 창피해서 낯을 붉히게 된다.
버젓한 음식점 하나 운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독립국가를 경영하길 원하니,나 원 참 기가 막혀서. ”
1920년 1월 13일[84]
이후 조선의 당면문제는 백성들에게 유해한, 맹목적인 독립운동이 아니라 실력을 키워 지적·경제적인 부분의 향상을 하고, 지적·경제적 측면의 향상을 통하여 일본인들에게 받는 민족적 차별을 철폐[13] 하는 것이 우선임을 강조했다.
그는 땅을 팔아서 독립운동자금을 대주는 것보다 농경지를 매입해 그 땅이 일본인들 손에 넘어가는 걸 막는 사람을 더 현명한 애국자[89] 라고 평가했다.
토지는 생산력의 근본이었고 토지에서 생산되는 식량과 곡물, 자원, 그 밖에 목축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토지를 매각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것을 예찬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식량의 자급자족도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독립을 할 수 있느냐며 반문을 제기하였다. 그가 봤을 때,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토지를 팔아 자금을 대주는 것은, 곧 그 토지에서 생산되는 식량과 곡물, 가축의 식량, 석탄과 광물 자원등을 모두 포기하는 매국 행위로 인식되었다.
사회단체, 언론 활동[편집]
민립대학설립운동 홍보 광고(1923년 3월 20일자 동아일보) 민립대학설립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20년 윤치호는 다시 YMCA 회장에 재선출되었다.
그해 8월 미국 의원단의 동양 3국 순방 소식을 접하고 양기탁과 함께 '미국의원시찰단환영준비위원회'(美國議員視察團歡迎準備委員會)를 조직하였다.
이때 양기탁은 윤치호에게 미국 의원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는 것이 어떻냐고 권고했지만
윤치호는 미국에서 아무런 이익도 없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자국 젊은이들의 피를 흘리겠느냐며 회의적으로 답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초기의 윤치호는 친일파 로 규정짓기에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1921년 1월 이상재, 이승훈, 김성수, 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90]
그러나 이 운동은 1924년 중반을 기점으로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불온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기성회 임원을 미행하고 강연을 막았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1923년∼1924년 잇따른 가뭄과 홍수로 이재민 구호가 시급해지자 민립대학 모금은 지지부진해졌다.[90]
그는 자신의 사재를 투자하는 한편, 홍보활동을 전개하자고 호소하였다.
1921년 6월 조선인산업대회 연사, 범태평양협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1922년 이상재, 이승훈, 김병로, 김성수 등과 함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다.[91]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하고 말았다.
1920년대 초 미국 의원 시찰단 환영회의 일원으로 선발되었으며[92],
YMCA 회관에서 미국 의원 헐스맨의 통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스로 그러한 노력들이 모두 "부질없는 짓"이라 여겼다.[92]
미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동정하더라도 동아일보 등지에서 언급하는 미·일 전쟁과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92]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편집]
이승만과 임시정부 인사들은 1919년의 파리 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1922년의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다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할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윤치호는 워싱턴 회의에 또 다시 한국의 독립 청원을 계획하며 독립의 가능성을 점치는 이승만 등 한국인 민족 지도자들의 기대를 "터무늬 없는 생각"이라 여겼다.[92]
그가 외교독립론 마저도 터무늬 없는 생각이라 여긴 것은, 미국이 자국의 이익이 되지 않을 미일전쟁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미국보다 일본이 힘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단순히 힘의 관계인 것만이 아니라,
전후의 국제사회 질서를 재편할 주도권과 부담을 갖고 있는 미국이 자국민과 자원의 손실을 입으면서까지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고, 국제관계가 감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국이 미국의 이익에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92]
미국이 자국의 국익이 되지 않는다면 왜 한국의 독립을 도와주거나, 후원하겠는가 라는 것이었다.
1921년 10월에는 이상재, 이승훈, 박봉승 등 기독교인 유지들과 함께 기독교창문사(基督敎彰文社)를 설립하고, 잡지 『신생명』을 통하여 문서로 한글 보급에 나섰다.[93]
1920년 8월 14일 미국의 의원단이 방한하자 양기탁은 미국 의원 일행이 서울역에 내릴 때에 독립공고서(獨立控告書)를 제출하고 이들에게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시위를 계획했다가 또다시 체포되었고,
양기탁의 재투옥 소식에 충격을 받은 그의 어머니는 8월 29일 사망했다.
8월 29일 윤치호는 조선총독부에 보석금을 제출, 인도적 차원의 석방을 탄원했고,
양기탁 역시 장례식을 이유로 보석금을 내고 일시 석방되었다. 그
러나 양기탁은 바로 열차편을 이용하여 만주로 탈출했고,
양기탁의 일시 석방을 주도한 그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1921년에는 교풍회가 조직되자 이름만 등록하고 참여하지 않았다.
그해 워싱턴 회의 직전에 그는 한국인 대표의 한사람으로 추천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대표가 될 것을 권하는데 대해서 "한국 대표들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뭘 얻었냐?"고 반문하였다.[92]
그가 참여를 거절하자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사람을 보내 워싱턴에 다녀오라고 여러번 권고하였으나 모두 거절했다. 또한 "대중목욕탕 하나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우리가 현대 국가를 다스리겠다고" 하느냐며 독립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하기도 했다.[89]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도 윤치호에게 사람을 보내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일본은 조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워싱턴에서도 파리강화회의 때처럼 어느나라도 한국의 문제에 무관심할 것이라며 일축했다.
그는 토지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땅을 지키는 것이 일제에게 구속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땅을 팔아 독립자금으로 주고 자신과 자손들은 굶어 죽는 자 보다 조상 대대로 물려 온 자기 땅을 일본인들로부터 지키고 젊은이들의 교육에 헌신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것이다. 또한 과거 조선왕조의 사농공상을 비판,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며 인문 교육 외에 실생활에 필요한 실업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실업 교육[편집]
윤치호, 1910년대 후반 무렵
1923년 송도고등학교 졸업생과 함께
윤치호가 설치한 송도고등학교 부설 송도목장(우측, 중앙 상단), 송도농장(좌측 상단), 고등학교 실습동(중앙, 하단)
일제는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후 한국을 근대화·문명화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을 위한 것이며, 철거하거나 없앴을 경우 일본이 조선보다 100배 이상은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육성한 조선인 엘리트들의 존재 역시 그들이 사라졌을 때, 조선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손해를 본다며 응수했다.
윤치호는 1922년 11월 1일 송도고등보통학교 제4대 교장(敎長)에 취임하였다.
송도고보를 맡게 되면서 그는 영어 교육과 신앙 교육 외에 국내에서 사용하는 물품은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어야 된다고 봤다.
미국의 흑인교육자 부커 T. 워싱턴의 터스키기 기술학교를 모방하여 실업계 과목 교육에도 역점을 두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장남 윤영선에게 목장과 낙농, 양잠업을 가르쳐서 이를 경영하게 하였다.
이어 송도고등보통학교 농과에서 운영하는 목장과 실을 생산하는 공장을 두었는데,
학교 부설 공장에서 생산된 송고직(松高織)은 질기고 물이 빠지지 않는 옷감으로 중국과 유럽에까지 수출되었다.
실업계 학생들 중 낮에는 목장과 방직공장에서 근무하며 밤에 야간반으로 활동하는 학생들은 반공생(半工生)이라 하였는데 이는 훗날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전공생을 두는 제도의 효시가 된다.
이어 윤치호는 졸업한 학생들 중 숙련된 학생들 중 일부는 학교 부설 공장과 목장에 두어 후배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을 돕게 했다.
그해 가을 만주의 한국인교민학교인 간도 영신학교가 경영난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11월 21일에는 재정난에 처한 간도의 영신학교에 현금 삼만원을 기부하였다.
1923년 1월 장남 윤영선이 개성의 일본 경찰서에 목장사업을 인가해달라는 신청서를 냈다.[94]
그러나 일본 경찰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94]
윤치호는 그들은 일본인 목장을 보호해 주고 싶었던 것[94] 이라 봤다.
1924년 송도고등보통학교의 부교장인 임두화(林斗華), 일본인 교사인 이노우에(井上)와 사토(佐藤)에 대한 불만이 폭발, 그해 6월부터 교감과 두 일본인 교사를 축출해달라는 학생들의 동맹휴학 시위가 있었다.
학교측에서는 학생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 없다며,
기숙사에 재학 중인 시위참여학생들을 기숙사에서 내쫓았고,
동맹휴학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쫓겨난 학생들의 생활비를 댄다고 모금운동을 하다가 시위에 동참했다.
일본인 교사들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시위는 송도고보 2학년생들이 시작하였으나
5학년 생들도 동참하고 이어 전교생으로 확대되었다.
시위가 확대되자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반일시위로 의심했고,
24년 9월 윤치호는 학생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는 없되
기숙사에서 추방당한 학생들은 모두 복귀시키고 학생들에게
일체 징계를 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학생들의 시위를 진정시켰다.
9월말 총독부 학무국에 불려가 교사의 훈육에 대한 학생들의 반항심리라며
총독부 당국을 설득하여 사태를 진정시켰다.
윤치호는 일본이 식민지 한국을 통치하면서 공정하고 관대하게 처리한다는 주장에 회의적이었다. '서울에서 조선인이 집을 지으려면 먼저 인가를 받아야 한다.[95]
그러나 일본인들은 먼저 집을 짓고 나서 인가를 신청한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자기들의 공평무사함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는 까닭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95]'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중반[편집]
소극적 저항과 일선동조론 부정[편집]
일제는 1890년대부터 일선동조론을 주장했다.
일본이 단군 조선과 삼국 시대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이 이룩한 사회라고 보면서도,
일선 동조론을 근거로 일본에 대한 애국심을 호소하는 주장에도 회의적이었다.
1923년 1월 9일의 메이지 천황과 노기 마레스케를 추모하는 환등회에 참석하였으나
그는 이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칙어실천회는 감수성이 예민한 조선 청년들에게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한다는 취지로 조선 각지에서 이 환등회를 거행하고 있다.[95]
'이 프로그램은 일본인들에게는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95]'고 봤다.
그는 억지로 강요하는 애국심은 무의미하다는 논지를 내세우며 일본과 조선총독부 측에서 개최하는 어떠한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그 해 7월 조선부업품공진회(朝鮮副業品共進會) 평의원에 추대되었다.
1924년 1월 이상재가 그에게 미국으로 건너가 조선의 독립을 탄원해보는 것이 어떻냐고 권고하였다. 그는 미국인들이 과연 한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들의 피를 흘리겠느냐며 대답하였다.[96]
한국내 미국인 선교사들의 한국인을 무시하는 행동을 눈여겨보던 이상재도 더이상 미국으로 가라는 말을 그에게 권하지 않았다.
1923년 6월 이후 산사에서 벌인 박중양의 휴양, 유흥행위를 비난하던 동아일보를 적극 비호, 감싸주었다.
1923년부터 충청북도도지사 박중양이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에 휴양을 다녀온 뒤 계속 자신의 휴양지, 유흥지로 사적으로 남용하였다.
동아일보가 이를 꾸준히 비난하고 기사화하여 비난하면서 박중양이 압력을 행사했는데,
이때 윤치호는 조선총독부 당국에 설득하여 사실대로 보도한 민족의 정론인 동아일보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며 동아일보를 적극 비호하였다.
교육, 사회 활동[편집]
1928년 5월의 야구 대회에서 시구하는 윤치호1925년 봄 그는 송도고등보통학교의 업무를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며 사퇴하려 하였다.
그러나 학교 학생들과 동문들이 윤교장 유임운동을 벌이자 마지못해 승낙하고 동년 가을까지만 교장직에 있겠다 하였다.
그는 1913년부터 송도고보의 국어 교사로 근무하던 한글학자 이만규(李萬珪)를 교장대리로 임명하여 교장직을 대신 수행하게 하였다.
야자 이만규는 한영서원 시절부터 생물과 수학 과목을 담당하는 한편, 은밀히 한글과 한국사를 가르쳤다.
삼일운동 때에는 독립선언문을 인쇄, 배포하는 등의 활동으로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97]
그러나 이만규의 사람됨됨이를 신뢰했던 윤치호는 이만규에게 학교 교장대리 직을 맡겼다.
그해 4월 30일 배화학당이 배화여자전문학교로 변경되자 재단이사의 한사람이 되었다. 그 뒤 차미리사의 근화학당(근화여학교)를 후원하였고, 감리교회 선교사 메리 플래처 스크랜튼(Mary Fletcher Scranton)이 서울 황화방(皇華坊)에 세운 이화학당의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 그는 처음에 여성에게도 평등한 교육의 기회가 부여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그러나 나중에 자신의 딸이 말대꾸를 했고, 재혼한 아내 백매려와 갈등했으며, 이복 동생 윤치창의 처 손진실과 갈등하게 되면서 여성에게 교육이 필요한가에 대한 회의감을 품게 되었고 이후 총체적인 회의론자가 된다.
1925년 8월 강원도 철원군의 서석공립보통학교(瑞石公立補通學敎)의 신축 공사에 돈 1천원을 기부하였다. 그밖에 송도고등보통학교와 오산학교에도 1천원의 기부금을 기탁했다.
1925년 9월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장직을 사퇴하였다. 1925년에는 조선인 산업대회에도 참여했다. 각도인민대표자대회, 조선인대회와 조선양성운동소 등 일제의 통치정책에 이용된 각종 친일 어용 단체와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했다. 1925년 11월 태평양문제연구회의 조선지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1928년 계명구락부의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그해 2월 2일의 계명구락부 회의에 참석,
1.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실행할 것,
2. 족보를 폐지할 것을 의결하였으며,
이날 회의에서 그는 계명구락부 이사로 선출되었다.[98]
민족단체 단결 운동[편집]
1927년 월남 이상재의 사회장
1929년 도쿄에서 열린 제3회 범태평양회의에 참가한 한민족 대표단. 좌로부터 백관수, 송진우, 윤치호, 유억겸, 김활란 광주학생항일운동, 대한체육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26년 7월 광주에서 벌어진 6.10 만세 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가, 총독부에서 그가 시위를 주도한 학생 대표자들과 연결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그는 바로 풀려났다.
1927년 월남 이상재의 사회장 장의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이상재의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그해에 이상재와 최병헌이 병으로 고통받다가 세상을 떠나자 윤치호는 이를 애도했고,
그의 몇안되는 지인이 사라지면서 고독과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1928년 5월 제2회 야구구락부 리그의 대회회장에 선출되었다.
1928년 11월부터 1937년까지는 제9대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회장을 지냈다.
1927년 신간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송진우를 신간회 회장으로 추대하는데 실패한 김성수는 윤치호를 신간회 회장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기도한다.
김성수는 신간회의 조병옥, 허헌, 김병로, 이인 등을 통해
윤치호를 회장으로 추대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김성수측은 신간회의 세력확대에 수수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27년 12월 신간회 평양지회 창립에 작용하였고,
박영효와 함께 1927년 12월 민족개량주의의 대부인 윤치호를 신간회 회장으로 옹립하려고 노력하였으며,
1928년 초에는 송진우가 경성지회에 입회하였다.[99]
한편 윤치호는 신간회에 가입하였으면서도 별도의 조직을 결성한다. 윤치호는 박희도와 함께 별도로 신우회(信友會)를 조직하였다. 윤치호, 박희도 등은 신우회를 표현단체로 하여 각파 합동전선을 전개하였다.[100] 윤치호와 박희도는 신우회를 중심으로 내분에 휩싸인 신간회를 흡수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의 흡수 노력은 사회주의자들의 반발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사회단체 활동[편집]
1929년초 출국, 일본 도쿄(東京)에서 열린 제3회 범태평양회의에 참석차 둘째 아들 윤광선을 대동하고 출국, 백관수(白寬洙), 송진우, 유억겸(兪億兼), 김활란 등과 함께 한민족 대표의 한사람으로 참가하고 귀국하였다.
그해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의 자신의 사유지를 오룡리·봉암리·방각리(현 황금리) 세 마을의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주었다. 소작인들은 1929년에 그의 영세불망비 1기를 세웠다.[101]
윤치호,
1931년초그는 조선총독부를 향해 참정권을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1929년 1월 16일의 일기에서 그런 조선총독부가 영화 벤허의 상영을 허락한 것을 놀라워하기도 했다. '오후 3시, 아들 장선과 기선을 데리고 단성사(團成社)에 가서 벤허라는 영화를 보았다.
변사는 팔레스타인의 로마인 총독을 가리켜 감사(監司)라고 지칭했다.
내용을 알 텐데도 경찰이 조선에서 이 영화를 온전히 상영하도록 허가한 게 신기하기만 하다.[102] 는 것이다.
1930년 모교인 미국 에모리 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가 윤치호 박사로 불리게 된 것은 이때 수여받은 명예박사 학위 때문이었다.
1931년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사람을 보내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원직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31년 재만주한인동포위문사절단의 한사람으로 만주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한 이후,
윤치호는 친일단체를 한층 강화해 총독부 관료와 친일한국인 간의 친목단체인 토요회에 참여했으며[13]
이후 조선인교풍원, 조선대회, 조선칙선귀족원경에도 참여하는 등 부일 협력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31년 그는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를 부귀초등학교 건립 부지로 기증했다.[101]
그 기념으로 마을 주민들이 감사의 의미로 1931년 영세불망비를 세웠다.[101]
그리고 윤치호는 부귀소학교 건립 기금으로 2000원을 내놓았고[103]
업적을 기려 부귀면장이 1931년 그의 영세불망비를 건립했다.[103]
진안군 부귀면에 세워진 영세불망비 중 2기는 2009년 7월 민족문제연구소 전라북도지부에 의해 발견된 뒤 강제 철거되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101]
한편 당시 조선에서 출애굽기에 관련된 작품들의 번안본과 벤허 등이 조선에 소개되는 것을 놀라워하기도 했다.
1930년대 초 그는 경성 종로의 한 영화관에 벤허가 상영되자,
아들 윤장선, 윤정선 등을 데리고 이를 관람하기도 했다.
충무공 유적지 보존과 이순신 후손의 빚 청산[편집]
1930년초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가문의 개인적인 빚으로 이순신 사당의 위토가 일본인 투기꾼에게 넘어가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즉각 이순신 사당 위토 매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선언한다.
이순신 후손의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나서자 남궁 억, 한용운, 김성수, 정인보, 김병로, 조만식, 송진우, 안재홍, 홍명희, 허헌 등이 즉각 동참을 선언했다.
충무공 종손가의 살림이 점점 영세해지면서 돈을 빌려 쓰다가 1300원의 빚을 지게 됐고
그 이자까지 총 2100원에 이르게 됐다.
1930년 9월 채권자였던 동일은행은 여러 번 빚 갚을 것을 독촉하고
그 해 5월 말일까지 갚지 않으면 위토 60두락(斗落)을 경매에 처분하겠다고 나선 것[104] 이다.
일본인 경매자가 가장 비싼 돈을 제기했고,
이순신 유적지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그는 송진우, 정인보, 김성수, 최남선 등에게 연락하여 이 일만큼은 막아야 된다고 호소하였다.
이같은 사실이 언론에 의해 국민에 알려지면서 1931년 5월 26일 충무공유적보존회가 결성됐고[104]
윤치호는 충무공유적보존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2만 여명이 모금운동에 참여해 1만6021원의 성금이 모아졌다.
윤치호 위원장을 포함해 남궁 억, 한용운, 정인보 등 1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충무공유적보존회는 성금으로 종손가의 채무 청산과 함께 현충사를 중건하고 위토를 추가 매입했다.[104]
이순신 유적지와 현충사의 위토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 유족의 빚을 대신 갚는 일을 주도한 혐의로 그는 불령선인의 거두로 지목되어 내사를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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