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파, 계몽 활동[편집]귀국과 초기 개화파 시절[편집]
윤치호는 독립신문의 주필로 활동하다가 2대 사장에 취임했다.
1895년(고종 32년) 2월 그는 조선으로 귀국, 2월 13일 배편으로 입국하여 돌아왔다. 귀국 후 2월 15일 김홍집 내각에서 의정부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외무부협판을 지냈다. 그러나 박영효 내각에서는[13] 그에 대한 감시는 끊이지 않았고, 그는 김홍집 등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하여 경호원을 데리고 다녔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인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측에서 그에게 경호원을 보내겠다는 제의를 해왔으나 마음만 받겠다며 조용히 거절하였다.
그 뒤 총리 대신 비서관을 거쳐 1895년(고종 32년) 5월 10일 학부협판(學部協辦)이 되었으나, 춘생문(春生門)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음력 윤5월 27일 다시 외무부협판이 되었다. 6월초에는 조선을 방문한 이탈리아 국왕의 조카 아부리를 만나 면담하였다.
그 후 이상재(李商在), 서재필, 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독립협회 운동이 절정기에 달한 1898년 경에는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주필 그리고 만민공동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민권운동과 참정·개혁운동을 정력적으로 지도했고, 실력양성운동에 진력하였다.[37] 윤치호는 1895년 귀국한 이후 개화파 정권에서 김홍집-유길준 일파와 박영효 일파 사이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개혁 정책 추진에만 힘을 쏟았다.[38] 또한 강연 활동을 다니며 서구 세계를 알지 못하는 민초와 식자들에게 미국과 유럽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선진문명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렸다.
한편으로 독립신문사의 주필,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칼럼과 논설활동 및 신문 발행 제반에 직접 참여하였고, 황국협회(皇國協會)와 척족 정권의 압력과 맞서 자신의 재산을 비용으로 투자하여 신문과 독립협회의 자금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한성부의 사교모임인 정동구락부에도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했다.[39]
을미사변 전후[편집]
윤치호의 친구 유길준
그러나 윤치호는 그를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협력자 중 한사람이라고 기록해놓았다.
을미사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895년 8월 윤치호는 함경남도 북청에 주재하던 남감리교 선교사 감독 비숍 핸드릭스(Bishop E.R. Hendrix) 등에게 조선의 선교를 위한 방문을 부탁하는 서신을 보냈다.[23]
그가 보낸 편지에 자극을 받은 헨드릭스는 1895년 10월 13일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 리드(C. F. Reid) 등과 함께 한성에 와 남감리교의 시작이라 할 선교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40]
그해 9월 26일 사촌동생 윤치오와 함께 특파대사 수행원에 임명되었다.
을미사변 당시 침투한 일본인 낭인들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인 낭인들에게 암살당하자
그는 일본 및 일본인의 협력자들을 규탄했다.
조선땅을 처음 밟은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쉽게 찾아내서 살해하는 데는 조선인 협력자들이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명성황후의 암살에 국내에서 자발적으로 가담한 조선인 가담자와 내통한 조선인 고위 인사들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치호의 조선인 고위층의 민비 암살 협력설은 무시당하였다.
그의 주장은 그의 일기에도 나타나는데,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서 그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41]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츠카가 사건의 전말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을 그날의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했다는 것이다.[41]
한편 유길준은 그의 친한 친구이자 그와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몇안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억울한 피해자라는 시중의 여론에는 반대했다.
무능했으며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외세를 끌어들였고,
부패한 친정 일가들을 등용한 점과 무속인과 점술가들을 맹신해서
고위직을 내리는 등의 미신행위 등으로 국정의 문란을 초래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또한 조선인 협력자들이 왜 나타났겠느냐며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의 반론에 시중의 시선은 냉담하였다.
유길준은 자신이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한 것을 폭로한 윤치호에 대해 불쾌히 여겼으나 다시 그를 가까이한다.
을미사변 뒤로도 윤치호는 유길준과 친하게 지냈고,
유길준 사후에도 유길준의 아들 유만겸과 유억겸 형제, 동생 유성준 등과도 계속 가까이 지냈다.
은거 생활과 개혁활동 준비[편집]
1895년 12월 독립협회의 동지 서재필이 복권되어 귀국했다.
서재필이 처음 귀국했을 때 윤치호는 춘생문 사건에 가담했다가
체포대상이 되어 미국공사관에 피신해 있었다.
서재필은 두문불출하던 윤치호를 찾아 정세에 대해 자문했고,
윤치호는 선배 서재필의 공백기에 조선 정세를 친절하게 알려주면서 동시에 정동구락부 인사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주선, 다리를 놓아주기도 했다.[42] 귀국 직후 시도했던 신문 간행이 일본에 의해 좌절될 뻔했을 때 서재필의 상심을 들어주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윤치호였던 것이다.[42]
귀국 직후 서재필은 조선의 모든 것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갑신정변의 실패에 크게 낙심, 좌절했고 이를 역적시하는 고종 등의 태도, 일가족이 처참하게 희생된 것, 일본 망명생활 중 조선 조정에서 자신을 암살할 자객을 보낸 것, 미국생활 초반에 당했던 온갖 인종차별과 멸시는 서재필에게 무능하고 부패한 조선 조정과 무지한 민중들에 대한 원한과 경멸과 증오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귀국 직후부터 서재필은 거의 영어로 대화했고, 되도록 독립문 기공식 때에도 영어로 연설했다. 윤치호는 이를 자신의 일기에 일부 기록해두었다. 또한 윤치호 등과 살아남은 조카들이 그에게 자결로 죽은 전처의 묘소와 논산 연무대 근처에 있던 생모 성주이씨의 묘소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보라는 윤치호의 권고를 거절한다.
“ 서재필은 갑신정변 사건으로 천민(賤民)이 되어 자살한 전처의 무덤을 찾아보지 않아 비난을 받았다. 거지꼴이 된 양부(養父)가 찾아오자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냉혹하고 거만한 사람이다. ”
그는 갑신정변 직후의 쓰라린 기억을 생각하는 것을 고통스러워했고, 오히려 냉정해지려 했다. 그러나 서재필의 이런 태도는 오히려 윤치호를 비롯한 동지들과 다른 조선인들에게 반감을 주게 된다. 한편 서재필은 다른 조선인들에게도 상당히 냉담하게 대하였다.
“ 그의 미국인 고우는 그와 함께 거리를 걷다가 그가 가까이 오는 거지를 발길로 차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
? 윤치호 일기 1898년 1월 15일자
서재필의 미국인 친구가 그에게 구걸하러 오는 어느 조선인 거지를 노상에서 발로 걷어차고 모욕을 해도, 서재필은는 이를 지켜보면서 방관하였고 윤치호는 이를 보고 불쾌히 여겼다. 영어를 주로 구사하는 그의 태도를 의문스럽게 여긴 윤치호는 왜 영어만 쓰느냐고 물었고, 그는 모국어를 거의 잊어버렸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이를 알던 윤치호는 '나는 서재필이 쓰거나 말하는 모든 것에 걸쳐 모국어를 거의 잊어 버렸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는 기록을 남겼다.
러시아 사절단 파견과 베트남 방문[편집]
러시아 황제 즉위식 축하사신 수원 임명장, 1897년 3월 19일 사회진화론, 적자 생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윤치호는 아관파천 직후 신문 간행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서재필을 돕고 싶었지만, 이미 민영환을 수행해 러시아에 다녀오라는 고종의 명을 받았기에 도울 수 없었다[42] 서재필, 이승만 등에게 양해를 구한뒤 러시아 파견 사절단에 임명되었다. 1896년 2월 징계명령이 내려졌으나 고종의 특사로 철회되었고, 2월 12일 학부협판에 임명되었다.
1896년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을 때,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영어담당 통역관인 윤치호, 세 번째는 대한제국 사절단장 민영환1896년 4월 1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대한제국의 사절단인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으로 파견되었다. 4월 11일 러시아로 가는 길에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임명되었다.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그는 러시아가 미국이나 유럽 국가에 비해서 영토는 넓으나 기술발전이 훨씬 느렸던 사실을 눈치챘으나, 러시아의 군사력만은 높이 평가했다. 동시에 차르와 제실에 대한 반감을 가진 인사들의 움직임을 보고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다. 또한 그는 장차 러시아가 군사 강국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치호와 수행원들은 열차편으로 러시아에 건너가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이때 윤치호의 귀국은 늦어졌는데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프랑스에 들렸다 오느라고 늦[42] 어졌다. 프랑스에 도착한 이후 그해 유럽을 순방하고 1896년 12월 윤치호는 유럽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베트남의 항구 사이공(西貢)에 들렀다.[43] 사이공을 체류할 때 윤치호는 프랑스인들이 베트남 농민들과 상인들에게서 빼앗은 세금으로 닦은 사이공의 '파리 수준 이상'의 깨끗한 도로들을 보고 감격했다.[43] 1896년 사이공에서 윤치호는 일본의 공식 사절단을 만났다.[43][44] 사이공을 떠난 뒤에 홍콩(香港)으로 가서 사람을 압도하는 웅장한 건물을 본 후 "유럽의 인종이 확실히 자연을 정복하는 기술을 잘 익혔다."는 결론을 내렸다. 윤치호는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서구 열강 세력에 대해 "신대륙의 초원과 밀림을 새로운 제국과 공화국으로 만들"만큼 세계 문명화의 큰 일을 완벽하게 실천하는 '우월한 인종'이라 평가했다.[43]
독립협회 활동과 사회 활동[편집]
독립협회와 계몽운동[편집]
이완용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였으나 위험한 단체로 여겨 탈퇴한다.
그는 이후 친러파와 친일파로 변신한 이완용을 경멸했다.)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독립신문, 경성신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귀국 후 1897년 중반 독립협회에 가입하였고,
윤치호는 열정적으로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했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45]
윤치호는 배재학당 졸업식 연설에 참석하였다.
영어 강독에서 신흥우가 영어 문장을 읽고 한글로 유창하게 번역하자 청중들이 크게 호응했다.
이어 이승만의 영어 연설이 시작되었는데,
발음도 유창하거니와 조선 독립을 역설하는 패기가 청중들을 사로잡았다.[45]
2부는 갈고 닦은 협성회 토론 시범을 보이는 차례였다.[45]
토론회의 호응도는 높았고 토론은 성공적이었고
서재필은 1년간 자신의 강연을 수강한 학생들 가운데 우등 1명, 이등 1명, 삼등 2명의 학생을 뽑아 각각 5원, 3원, 2원씩의 상금을 수여하였다.[46]
사촌동생 윤치소와 함께 발행한 경성신문이는 토론회에 내빈으로 참석, 참관하던 윤치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42] 협성회 공개 토론회의 성공은 그날 하객으로 참석했던 독립협회 회원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러시아에 다녀온 뒤 의기소침했던 윤치호에게 남다른 감격이었다.[42]
윤치호는 청년들의 역량을 믿고 신분제도 철폐, 적서 차별 철폐, 남녀 차별 철폐, 민중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설득, 홍보작업을 추진해야 된다고 확신한다.
1893년 에모리 대학교 졸업 직후 윤치호는 미국에서 서재필을 만났을때 혹시나 조선의 정국이 변한다고 해도 서재필이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 귀국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2년 후 한성 정동에서 재회하게 되자 윤치호는 놀라워했다.
그리고 윤치호와 서재필은 독립협회에서 의기투합하여 활동했다.[29]
1897년 8월 28일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제2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0월 원산항재판소 판사로 부임했으며, 10월 28일에는 만민공동회 회장에 선출됐다.
독립협회 참가 이후에는 서재필(徐載弼)·이승만·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이끌면서, 토론회 개최와 강연 활동을 계속하였다. 1898년 3월에 열린 만민공동회를 주관할 때는,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 등 반(反) 러시아 운동을 전개하여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898년 이종일, 남궁 억, 사촌 윤치소와 함께 경성신문(京城新問) 창간에 참여하였다.
학무 아문참의를 거쳐 1898년 7월 8일 다시 중추원 1등 의관에 임명되었고, 7월 22일 국왕에게 부패 관료들을 축출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소득이 없었다. 도리어 구 관료들을 탄핵한 상소가 구 관료, 척신 세력의 귀에 들어가면서 그는 배척과 동시에 황제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획책하려 한다는 모함, 음해를 당하기도 한다.
기독교 선교 활동[편집]
1895년 귀국 직후부터 그는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조선을 방문한 선교사들의 통역을 하면서 기독교 선교를 도와주었다. 감리교 선교사 조세핀 애턴 캠밸이 교회, 학교 부지를 찾지 못할 때는 아버지 윤웅렬을 설득하여 적당한 토지를 내어 주기도 했다. 미국인과 영국인 선교사들의 전도 사업을 적극 돕고, 언어 소통의 장벽을 해소하는데 적극 나섰다. 그러나 세례 교인이었던 그와 가장 가까워야 할 미국 선교사에게마저도 그는 은근히 무시와 모욕을 당하곤 했다.[4] 그는 처음에는 미국인과 영국인,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이었지만 나중에는 내심 따르면서도 속으로는 경멸하거나 반감을 품게 된다.
“ 나에게 짐을 미리 배에다가 실으라고 강력하게 권고했던 휴제스(Hughes) 부인(한 선교사의 부인)이 끝내 내가 너무 지나치게 강요를 해서 대단히 미안한데, 우리 선교사 같으면 당신네들을 보통 작은 아이로 보는 습관이 있지 않습니까. 그 습관이 나에게도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강요를 합니다. 당신이 우리네 선교사들을 아시잖아요? 라고 이야기했다. 이 말이 내 마음을 질러버렸다. 그녀는, 우리 원주민들이 우리 일을 스스로 처리 못할 만큼 다 우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우리 원주민들을 그렇게 보는 그들이, 민감한 일본인들의 분노를 그토록 많이 유발하는 것이 과연 놀라운 일이 아니다. (…) 내가 선교사의 조수가 되고 싶지 않은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너무 많은 영적인 보스 밑에 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휴제스 부인에 대해서 하등의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 그녀는 충실하면서 선심이 많은 선교사인데, 이처럼 우리 원주민들을 무시하는 것이, 인종주의적인 오만과 편견이 강한 미국의 출신이기 때문이다. ”
? 윤치호 일기, 1897년 4월 23일자
“ 오늘 아침에 레르(Loehr) 목사가 중국 학생 신도들에게 교회에서 예수가 악마를 이겨서 천당을 쟁취하셨듯이 일본이 중국을 이겨 대만을 얻었다고 설교했다. (...) 중국인들에게 설교하는 자리에서 더 어리석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선교사들이 원주민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지 않느냐고 불평한다. 그러나 선교사 자신들이 그들의 주택의 접견실에서 원주민들을 절대 대접하지 않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않으면 원주민들도 마음을 열 리가 없다. ”
? 윤치호 일기, 1897년 6월 31일자
선교사들의 고압적이고 거만한 태도 내지는 원주민에 대한 멸시에 처음에는 의문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그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에게도 같은 태도를 보이자 반감을 갖게 된다.
“ 1899년에 언더우드(Underwood)박사와 그 부인이 (내가 지방관으로 있었던) 원산으로 잠깐 들렸다. 내 사랑하는 아내가 그 부인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들이 1주일 후에 원산을 떠날 때 우리 집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도 우리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들끼리 예의를 정확하게 지키는 데다 우리에게도 자신들에게 예의 지키기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그들이기에, 그러한 행실은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 우리에게 인류 평등의 원칙이 명백하게 적혀 있는 성경을 가르치면서, 이처럼 그 원칙을 자신들이 위반하는 것이다 (...) 그들의 오만한 태도 때문에 나는 손해를 보면서도 그들과 되도록이면 사교하지 않으려고 한다. ”
? 윤치호 일기, 1903년 1월 15일자
백인 선교사들의 이런 태도는 윤치호로 하여금 실망과 냉소를 가져다주었다. 백인들의 인종차별주의적인 태도를 조선에서도 목격하게 된 그는 기독교를 신봉하면서도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나 기독교 사상만이 곧 진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기독교 선교 사업을 도와주는 일에서 한발 물러서, 소극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노비 해방과 개혁안[편집]노비 해방 운동 추진[편집] 노예, 독립협회, 노예 해방 선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서재필의 귀국 직후부터 노비 해방문제를 상의하던 윤치호와 서재필은 1897년 10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노비 해방 문제를 상정시키기로 계획한다. 한편 윤치호와 서재필은 노비들을 해방시킬 것을 결의하고 1897년 11월 1일 독립협회의 토론에 노비제도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여론을 공론화시켰다.
1897년 11월 1일의 제8회 토론회의 광경을 보면, 약 500 명의 회중이 참석 한 가운데 먼저 회원의 호명이 있었고 다음 지난회의 토론회 기록의 확인이 있었으며, 내빈 소개와 신입 회원 소개가 있었다.[47]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회장에게 노비 해방에 대한 것을 건의하였고, 11월 1일 독립협회 회의의 주제로 채택된다. 회장이 토론회의 주제, 이날의 주제는 '동포 형제간에 남녀를 팔고 사고 하는 것이 의리상 에 대단히 불가하다' 를 선언 하였다. 이에 따라 전 주의 선정에 의거 하여, 주제 에 대한 찬성편은 힘껏 주제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주제에 대한 반대편 은 토론 이 잘못된 방향 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발언을 했으며, 토론회에 참석한 일반 회중은 토론 에 자유롭게 토론하였다.[47]
이 중 한 발언자가 용역은 '하나 의 필요한 제도 이며 노비 제도(奴婢制度)는 그러한 용역 의 하나라고 발언하자, 회중의 하나가 일어서서 토론자가 명제를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다고 의사 규칙 위반을 들어 항의 했으며 많은 회원들이 주제의 찬성편 에 서서 발언하였다. 1897년 11월 1일 윤치호는 노비제도의 폐해와 비 인간성을 구체적 사례를 들면서 설명하는 연설 을 하고, 서재필은 미국에서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 들의 참상 을 들어 설명하였다.[48] 다음으로 주제에 대한 회중의 의견 을 투표에 붙인 결과 만장일치로 주제에 대한 찬성이 의결 되었으며, 주제에 찬성한 사람은 자기가 실제로 소유한 노비를 모두 해방시키도록 하자는 동의가 가결됨으로써 토론회 를 끝내었다.[48] 독립협회의 결의에 따라 한성부의 양반 가에서는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석방시키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윤치호와 서재필은 각각 인간은 물건이 아니며 재산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생명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고 역설하고 다녔다. 시중에서는 이들의 사상을 위험한 사상이며 반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해괴한 요설, 궤변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97년 11월 1일의 노비해방에 대한 기습 토론 이후 노비 해방 풍조가 점차적으로 확산되었다.
개혁안 제출과 탄압[편집]
독립협회에 모인 민중들1897년,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강연하며 윤치호는 백성들이 스스로 그 대표자를 선출하여 백성들의 의견이 국정에 반영되어야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정폐지론이나 황제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49] 군주의 존재는 별개로 국민이 선발한 대표자들을 통해 국민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되고, 관료임면권에 있어서는 군주나 인사임명권자만의 의견이 아닌 백성들의 의견도 반영되어야 된다고 봤다.
황국협회 측은 '윤치호 대통령설', '박영효 대통령설' 등을 흘려 독립협회를 곤경에 몰아넣고 정부에 압력을 가하였[50] 다. 그밖에도 '윤치호 부통령설', '박정양 대통령설' 등도 시중에 확산되었다. 개화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국을 구성하고 윤치호 자신은 대통령 내지는 부통령이 될 것이라는 루머가 시중에 유포되자 윤치호는 은신처를 물색했다.
이후 서재필의 암살이 불가능하다고 본 수구파에 의해 서재필이 국외 추방당하자[51] 조선 체류 중 서재필은 죽은 부인의 묘를 한번도 찾아 돌보지 않았는데 1898년 1월 15일, 갑신정변으로 고신을 박탈당하고 거지가 된 서재필의 전 부인 김씨의 친정아버지가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서재필은 그에게 2달러의 돈을 주고 쫓아냈다. 윤치호는 이를 보고 고상하지 못한 행동이라며 지탄했다.
1898년 3월 8일 김홍륙 등이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독살하려 하자, 정교(鄭喬)와 최정식(崔廷植) 등은 그에게 시골로의 피신을 권고하기도 했다. 이후 은신해있던 그는 서재필과 함께 3월 10일의 만민공동회를 주관한다. 3월 16일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가 수원부유수로 임명되면서 공직과 협회직을 겸할 수 없으므로 서재필이 회장이 되었다. 3월 21일부터는 독립협회 회장 대리로 활동했다. 그해 5월 14일 서재필이 추방령에 의해 용산을 출발, 미국으로 추방되면서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회장이 되었다.
독립협회 강제 해산[편집]
동지 서재필
(정치적, 사상적 동지인 그와는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1898년 5월 그는 이상재 등과 함께 서재필의 추방을 반대하는 동시에 서재필에게도 출국을 만류하였으나, 서재필은 귀국 정부에서 나를 해고하였으니 떠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여 경악하였다.
서재필이 추방된 뒤 그는 독립협회를 이끌어나가게 됐고 1898년 8월 제2대 독립협회회장에 선출 되었다. 10월의 만민공동회를 주최할 때는, 헌의6조를 결의하여 국정에 반영시켰다. 11월 그는 최인환(崔寅煥)의 피습을 당했으나 미수로 그쳤다. 최인환은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의 측근이었다. 현장에서 붙잡힌 최인환은 곧 경무청으로 넘겨졌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대한제국 조정의 견제를 받다가 1898년 12월 강제적인 정부의 해산조처로 해산당하였다. 후속 조치로 12월 헌의 육조에 서명한 대신들이 파면당하였다.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혁파와 헌의 6조에 서명한 대신들을 파면시킨 관보를 보고[52] 고종과 정부, 일본과 러시아를 비난하였다.
“ 이것이 국왕이라니! 어떠한 거짓말을 잘 하는 배신적인 겁쟁이라도 이 대한의 대황제보다 더 비열한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다. 정부는 친일노예 유기환(兪箕煥)과 친러악당 조병식(趙秉式)의 수중에 있다. 러시아인과 일본인들이 틀림없이 모종의 이권을 위하여 이 사건에 개입하여 그들의 노예들을 지원하고 있다. 저주받을 일본놈들!
나는 그들이 대한의 마지막 희망인 독립협회를 분쇄하는 데 러시아인들을 돕는 이유를 (민중들이) 알게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52] ”
독립협회의 해산에 외국 세력을 등에 업은 자들의 농간이 작용했고, 그는 일본의 앞잡이로 유기환, 이완용 등을, 러시아파 조병식 등을 비판, 성토했다. 한편 그는 조선이 살 길로 미국과의 수교가 필요하다고 내다봤다.
외세의 압력과 좌절[편집]
독립신문1898년 내내 황국협회는 독립협회가 황제를 제거하고 쿠데타를 기도한다고 무고하였다. 이처럼 그는 독립협회를 분쇄하는 데 고종과 수구파,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이 결탁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고종의 배신적인 비열한 행위를 매도하고, 일본의 탐욕적이고 간교한 행동을 저주했다.[52] 동시에 자신을 황제에 불충하는 역적으로 보는 민중들의 시선에도 크게 실망, 좌절하게 된다. 독립협회는 실패했고, 민중들은 그를 황제에게 불충하는 인물로 보게 되자 실망한 그는 그는 민중을 계몽의 대상에서 개조, 훈련의 대상으로 시각을 바꾸게 된다.
그는 당시 대한제국 조정을 휘젓던 친일파와 친러파 모두를 매국노로 봤다. 그는 국익보다 개인의 이익과 정파의 이권과 이익을 위해 돈과 폭력배, 심지어는 외세까지 끌어들이는 기성 정치인들의 행각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다 친일파로 변절한 이완용에 대해서 시종일관 적개심과 냉담한 태도로 일관하게 된다.
그해 양력 11월 23일, 12월 15일~22일, 한성 판윤을 역임하였다.[53] 한성 판윤에 임명되었으나 뜻이 없던 그는 사직할 의사를 내비쳤고, 12월 17일과 12월 18일 한성 판윤직을 사임하는 상소를 올렸고, 12월 22일 면직되었다. 1898년(광무 1년) 12월 22일 윤치호는 의회인 중추원 부의장(中樞院副議長) 칙임관 2등(勅任官二等)에 임명되었다. 이 기간 중 윤치호는 여러 번 탄핵과 제거 음모에 시달려야 했다. 1898년 12월 24일 그를 제거하려는 대신들의 탄핵 상소가 있었다. 1899년(광무 2년) 1월 2일 심상희(沈相禧) 등이 왕에게 상소를 올려 윤치호와 고영근(高永根) 등에게 역률(역적률)로 다스릴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윤치호는 생명의 위험을 피하여 수시로 은신, 숨어 다녀야 했다.
“ 이 수치스러운 조선역사에 대하여 더 알면 알수록 현 왕조하에서는 개혁의 희망이 없음을 확신하게 된다. 정부는 500여년간 국가의 향상을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54] ”
그는 조선의 군주들 중에서도 세종대왕이나 정조 같은 인물들은 예외로 보았다. 그러나 세습체제 하에서의 군주와 정치인들은 수준이 저질적인 인물들도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음을 보고 세습화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대를 이어서 정치를 하더라도 자기 실력으로 정계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면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독립협회 해산 이후[편집]
배재학당 앞에 세워진 독립신문사터 표지석 독립신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독립신문의 주필과 발행인을 하던 그는 신문사를 떠맡게 되어 1898년 독립신문사 제2대 사장이 되었으나, 관직에 임용되면서 사퇴하였고, 1899년 이후 독립협회에 대한 탄압은 가중되었다.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탄압·해산 시 외국인의 집에 은신하고 있다가 1899년 1월 7일자로 덕원감리사 겸 덕원부윤에 임명되었고, 윤치호는 1899년 2월 2일 이를 수락하였다.[55] 그는 1898년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배재학당에 나가 학생들에게 토론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는 토론회의 소모임을 1899년 2월까지 맡아보았는데, 학생들이 토론에서 패했을 때 감정적으로 발언하는 것을 통제하고 억제하면서, 감정을 조절하고 대화, 토론하는 방법을 훈련시켰다.
후에 숭실대학교 사학과 교수 유영렬은 '민중운동의 최고 지도자였던 윤치호에 대한 이같은 조처는 당시 법부대신 윤웅렬의 노력과 윤치호에 대한 고종의 친애감, 그리고 평소 대인관계가 원만했던 윤치호와 일부 관료들과의 친분관계가 트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았다.[55] 한편 윤치호 자신이 개혁 운동을 포기하고 타협한 것에 대하여 훗날 숭실대학교 사학과 교 수 유영렬은 '윤치호에 대한 감리사직의 임명은 (중앙 정계로부터의) 일종의 회유적 추방이었으며, 윤치호의 감리사직 수락은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한 일종의 자구책이었던 것[55]'이라고 보았다. 반(反)정부 민권 운동의 최고지도자가, 그것도.[55] 민중 지도자들이 대거 체포 구금되는 상황에서, 극복의 대상인 수구반동하의 지방관직을 수락한 사실은 일종의 변절적 자세로 보지 않을 수 없으며, 전통적 통치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의 불철저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56] 고 해석하였다.
1899년 1월 그에게 함경남도 원산부윤으로 임명되리라는 설이 돌았다. 1월 16일 오후 7시경 은밀히 일본인 집에 피신한 고영근(高永根)의 행방을 알고 그를 찾아갔다. 윤치호를 만났던 고영근은 그에게 원산부윤직에 나갈 것이냐고 물었고, 윤치호가 대답을 주저하자 그의 아버지 윤웅렬이 법부대신으로 승진한 것은 만민공동회 덕택이며, 윤웅렬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해산에 가담했던 척신파 대신 민영기와의 친분관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고영근의 언급에 불쾌했으나 논쟁을 하면 감정싸움으로 발전할 것이라 보고 언급을 회피하고 헤어졌다. 1899년 1월 그는 중추원 부의장을 사퇴하였고[57], 1월초 그는 함경남도 원산으로 떠났다.[56] 그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소극적으로 활동하며, 개화파와 수구파 양쪽과 친분관계를 형성한 아버지 윤웅렬의 중립적인 태도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고 이를 기록에 남기기도 했다.
그는 독립협회 운동의 좌절을 민중의 어리석음의 탓으로 보고, 민중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증폭시켰다.[56] 이후 민족패배주의적 사고방식에 함몰되어 타협적 개량주의를 지향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한일 합방 이후 1915년 무렵부터 일제의 통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하였고, 독립불능론 내지 독립무용론으로 변모하는 결과를 낳았다. 원산에 도착했던 윤치호는 '원산 사람들은 공공정신(에티켓)이 없고 구습과 미신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다. 다른 지방의 사람들과 같이 무지하고 게으르다.'라고 하고, '이 인종의 피는 새로운 교육과 새로운 정부 그리고 새로운 종교를 갖고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확신했다.[56] 민중을 계몽의 대상에서 철저한 갱생의 대상으로 시각을 바꾸게 되었다. 민중을 철저한 갱생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된 윤치호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의 망국과 식민지화를 당연한 벌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원산감리 시절 비서로 먼 일가인 윤직선(尹稷善)을 채용했는데, 윤직선은 후일 동화작가 윤극영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58]
외직 발령과 애민태과[편집]
원산 윤치호 선정비이후 윤치호는 계몽운동에 진력하며 실력 양성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실력 양성론은 후일 독립운동 세력 내부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독립운동 세력은 김좌진, 홍범도 같은 무력 투쟁파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외교활동이 큰 축을 이루고 있었고, 양자 사이에서 민족의 실력을 키워야 뭐든 해도 된다는 집단이 존재했다. 이들 제3그룹은 주로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경제 자립 기반 확보와, 교육 활동 및 신흥무관학교와 같은 무관 양성에 힘썼다.
1899년 이후 윤치호는 외직에 임명되었다. 1899년 1월 7일 함경남도 덕원감리사 겸 덕원부윤(德源府尹) 주임관 1등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원산감리로 부임한 뒤, 1900년 6월 25일 삼화감리사 겸 삼화부윤, 1901년 7월 24일에는 다시 함경남도 덕원감리사 겸 덕원부윤으로 재임명되었다. 이어 원산항재판소 판사에 재임명되었다. 좌옹이 처음 덕원 감리가 된 것은 조병식 내각이 그를 중앙 정계에서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으나, 의외로 치적이 훌륭하여 좌옹이 명성이 날로 높아가는 것을 보자, 그들은 다시 불안해져서 독립협회 시대의 정적이던 보부상들을 비밀히 파송시켜 좌옹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59] 나중에는 암행어사까지 출동시켜 '애민태과 손실정체(愛民太過 損失政體)'라는 죄명으로 봉고파직을 시켰다.[59]
그는 원산부윤 겸 덕원감리에 재직중 애민태과 손실정체라는 특이한 죄명으로 파직되었다. 1897년 덕원 감리의 관할지인 안변(安邊) 근방 김피(金皮)라는 산골에 서울에서 피난온 천주교도들이 한데 모여서 교당을 짓고, 파리에서 나신부(羅神父:Thomas Bouladoux)라는 프랑스인이 와 있었다. 나신부는 자기가 지나갈 때 담배를 피우든가 또는 절을 하지 않으면 양반인 양대인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크게 노하여 호령을 하였다.[60] 그리고 자기가 부리는 불량배의 말만 곧이 듣고 무고한 백성들을 잡아다가 무실한 죄명을 씌워서 자기 집 감방에 감금하였다. 관찰사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는 나신부에 대해서는 안변 군수도 어찌하는 수가 없었으며 어쩌다가 어쩌다가 有審問事 卽爲捉來(물어 볼 일이 있으니 곧 잡아오라[60])는 묵패가 나신부로부터 떨어지면 사람들은 마치 사형 선고나 당한 듯 벌벌 떨었던 것이다.[61]
그는 프랑스 말로 항의문을 써서 나 신부의 행장을 서울에 있는 프랑스 공사에게 상세히 알렸다. 문체는 부드러웠지만 내용은 상당히 격렬한 것이었다. 그 항의문이 간 지 얼마 안되어 나신부가 서울로 불려 올라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본국으로 송환되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61] 그에 따라 '감리사가 편지 몇 줄 쓰더니' 라는 말이 점점 확대되어서 나중에는 '양인놈 볼기를 쳤다'로 변하여 좌옹은 호랑이 감리로 갑자기 유명해지게 되었다.[61]
좌옹은 외국인이라고 하더라도 세금을 내고 법률을 지켜야 한다는 특별 명령을 내리어 범법자가 있으면 비록 서양인이라고 해도 가차없이 처벌하니, 외국인들도 자진해서 세금을 지참하게 되었으며[61], 원산항에 들어온 군함에서 도주하여 상륙한 독일 해병을 즉각 체포하[61] 기도 했다. 원산 해관 세무사로 와 있던 영국인 오이센이 봉화대 근처의 국유지를 매수하려[61] 하자, 외무부(外務部)의 허락이 있어야 된다고 완강히 거절하였다.[62]
1902년에는 장차 있을 러일 전쟁에 대비함인지 십수 명의 러시아 사관(士官)과 군인들이 원산항으로 들어와서 측량을 할 목적으로 여관에 투숙한 후 러시아의 국기를 높이 달았었다.[62] 이 소식을 들은 좌옹은 즉각 항의하고, 러시아 사관을 불러다가 외부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통과시킬 수 없다고 강경히 말하였다.[62]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여관 지붕에 달린 러시아 국기를 내리고, 일단 국경 밖으로 나가서 외부의 허가를 받은 연후에 다시 들어오라고 꾸짖었다. 그들도 하는 수 없이 위협을 하고 간청도 하다가, 나중에는 러시아 군함을 오게 해서 국경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62]
덕원감리로 재직 중 제정 러시아의 포경선 한 척이 고래를 쫓아서 원산 근해에까지 들어와 인심이 극도로 소란하던 때에 새로 부임해 온 감리가 외국 유학에서 얻은 신지식을 발휘하여 영해 침범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단호한 태도로써 포경선을 즉시 나포한 일까지 있었다.[63] 사대주의에 눈이 어두워서 외국인이라고 하면 그저 무서워만 하던 그때의 민중들은 덕원 감리 영감만은 무슨 신비한 힘을 가진 보기드문 명관으로 믿고 최대의 경의를 표하였다.[63]
그리하여 덕원에는 이임도 하지 않은 윤 감리의 송덕비까지 서게 되었는데, 중앙 정계에서는 세력 다툼과 파벌 싸움의 여파로 덕원 감리에게 상을 주기는커녕 무슨 히집이라도 잡아서 쫓아내려 했다. 암행어사 모씨가 덕원에 와서 비밀리에 감리의 잘못을 조사했다.[63] 그러나 백성들의 원성보다는 도리어 칭송하는 소리가 많았으므로 무슨 트집을 잡을래야 잡을 수가 없었다. 암행어사 모 씨는 생각다 못하여 한학자답게 새로운 죄명을 발견하였으니, 그것이 즉 '애민태과 손실정체(愛民太過 損失正體)'였던 것이다.[64]
덕원 감리 윤치호는 애민태과하여 정부의 체통을 잃었으니 봉고 파직한다.[64]
이리하여 좌옹은 죄 아닌 죄명으로 덕원 감영에서 쫓겨났다.[64] 비록 드러내놓고 떠들지는 못했으나 '애민태과'라는 전무후무한 죄명으로 덕원 감리를 파면당한 윤치호에 대한 동정이 점차 크나큰 여론으로 변하게 되니, 조정에서도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그 사유를 고종에게 아뢰니, 좌옹은 얼마 안 가서 삼화 감리로 복직되었다.[64] 이때부터 '애민태과'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게 됐다.
1902년 7월 삼화감리 겸 삼화부윤, 7월 12일 겸 삼화항재판소 판사(三和港裁判所判事)[57] 로 발령되었다. 1902년부터 그는 기독교 남감리회 선교사 조세핀 필 캠벨(Josephine Eaton Peel Campbell)이 경성부 종로방 고간동에 세운 캐롤라이나 학당의 후견인의 한사람이 되었다. 1903년(광무 6년) 1월 24일에는 안핵사로 임명되어 함경남도, 함경북도, 간도 일대의 민생을 시찰하였다.
천안, 직산, 무안군수 재직[편집]1903년 1월 함경도 안핵사로 임명되어 함경남도 함흥에 파견되었고, 7월 천안군수로 부임하였다. 천안군수로 재직 중에는 광산 채굴을 하며 조선인을 함부로 잡아서 구타하던 백인 사업가를 유창한 영어로 호통쳐서 횡포를 막았다. 1904년(광무 7년) 2월 15일 전라남도 무안감리(務安監理) 겸 무안군수로 발령받았다가 3월 12일 다시 외무부협판 겸 칙임관 3등(勅任官三等)에 임명되었다. 지방관으로 있으며 동안 러·일 양국의 각축을 보면서 인종적 차원에서 일본인들의 '동양평화론'과 일맥상통한 '극동 3국]제휴론'을 주장했으며, 일본을 비판하였으나 러일전쟁은 동양과 서양인의 전쟁으로 간주하여 일본의 승리를 축하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한국의 장래를 비판적,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윤치호는 중앙 정계에서 좌절된 민중을 위한 개혁정치의 이상을 제한된 지방에서나마 실현시키고자 진력하였다.[65] 그러나 실효성은 없었고, 윤치호의 이와 같은 치적도 결과적으로는 독립협회 해체 후에 강화된 보수 반동정치에 협조하는 것이었음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65] 윤치호 역시 민권사상과 참정권과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황제에 대항하려는 역적 집단으로 보는 민중들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1904년 3월 윤치호는 내각의 외무부협판에 임명되어 다시 중앙 정계로 불림을 받게 되었다.[56] 그러나 윤치호는 여전히 보수적 정치체제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며 그 이념적 지주라 할 수 있는 유교(성리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65] 윤치호는 1904년 잠시 군부대신서리를 지내기도 했다.
1904년 3월 15일 일본의 특파대사 영접단의 단장인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이 되어 그해 4월까지 일본측의 특파대사를 면담하였다. 그해 8월 20일에는 외무부대신이 공석이 되면서 그는 외무부대신 서리사무에 겸임되었다.
미국에 대한 실망[편집] 황성기독교청년회, 가쓰라-태프트 밀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김규식1904년(광무 7년) 김규식, 이상재 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그해 8월 20일 외무부대신 서리를 겸임하였다. 9월 주러시아 특파대사 이범진(李範晉)에게 귀국하라는 전보를 보냈으나, 귀국하지 않자 그를 탄핵하여 면직시켰다. 12월 15일 정부의 관제 개정소 의정관(官制改正所議政官)의 1인에 임명되었다.
1905년(광무 8년) 2월 14일 재혼한 아내 마애방(馬愛芳·1871~1905)이 아이를 낳다가 자궁외 임신으로 아이와 함께 사망했다. 평소에 중국과 중국인들을 경멸, 야만시하는 윤치호였지만, 부인 마애방만큼은 거의 끔찍하다 할 정도로 사랑했다고 한다.[66] 마애방이 요절한 뒤에 ‘하늘에 가 계시는 사랑하는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쓰인 윤치호의 영문 일기를 썼다.[66] 그해 5월 5일 외무협판이던 그는 외무부대신 박제순의 사퇴로 외무부대신 서리를 겸임하였다.
1905년 9월 26일 서울 전동에 있던 시종무관장 민영환 집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엘리스 루스벨트를 환영하는 이색 만찬이 개최되었다.[67] 윤치호는 이 만찬에 큰 기대를 걸고 참석했다. 주빈은 당시 미국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이고 배빈이 앨리스양을 수행한 해군대장 트레인과 앨리스 양의 약혼자 커빈 해군 중장이었다.[67] 한국 조정에서는 민영환 이외 이준, 이상재, 이용익, 윤치호, 그리고 미국인으로 서울에 와 항일 필봉을 휘두르고 있던 '코리안 리뷰'사 주간 헐버트(흘법) 여사 등 반일 친미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67] 그리고 앨리스양에게 아버지인 대통령에게 다리놓아줄 것을 부탁했고, 앨리스양은 황제의 국서를 지닌 특사를 파견한다는 조건으로 쾌히 응낙했다.[67]
을사조약 직전[편집]미국을 정의와 자유의 국가라고 생각한 윤치호는 이번 일로 미국이 일본을 견제하고 한국을 도와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7월에 있었던 가쓰라-태프트 밀약 소식을 알게 되면서 윤치호는 미국에 대한 기대감 만큼 큰 실망감을 품게 된다. 이후 그는 세계의 정세는 이상이나 정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반드시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다.
1905년(광무 8년) 9월 그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할 것을 예상한다. 그는 '일본의 괴로운 노예제하에서 한국인들은 동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이 이민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의 디딤돌이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68]'라며 일본에 의한 압제를 예상했다. 그의 예상대로 을사조약 이후의 일본의 지배는 한국인을 노예상태로 몰아넣는 폭정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68] 그는 '부패한 그리고 부패하고 있는 소수독재정치로부터 조선 인민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현 정부와 낡은 체제를 완전히 철폐하는 것이다. 철저히 썩은 정부를 약간의 개혁으로 미봉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봤다.
강대국의 비밀 거래에 실망한 그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민중들, 지식인들에게는 알리지 않았고, 민족의 미래는 스스로 찾아야 된다고 역설했다. 그는 민족의 미래는 부패한 유교 사상이나 무속신앙이 아니라 기독교의 합리주의 정신과 노력한만큼 받는다는 청교도 정신에서 찾아야 된다고 역설했다.
1905년(광무 8년) 황성 YMCA 기독교청년회 부회장에 취임[69] 하였다.
을사조약 체결과 체념[편집]
중명전에 전시된 을사조약 체결 문서 을사 보호 조약, 기독교청년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윤치호는 관직을 사퇴했으며, 정부로부터 외부대신 서리에 임명되었으나 수락하지 않고, 취임을 거부했다.[13] 정부를 장악한 이완용을 그는 심히 경멸하였다.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서재필은 한국 정부에 조약은 부당하며 조선이 국가로서의 능력을 상실함을 의미한다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조약을 파기하라며,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편지는 황제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그는 윤치호에게 편지를 보내 을사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윤치호는 이미 정부의 고관들이 나라를 팔아치우기로 작심한 것 같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윤치호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당일에 외무부협판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외무부대신 서리에 임명되었으나, 자신에게 굴욕감과 동포들에게 증오감을 줄 것 외에 외무부 본연의 임무는 사라졌다고 하여 그 수락을 거부했다.[68] 을사조약이 체결된 다음날 그는 "한국의 독립은 오늘 오전 1시 또는 2시경에 조용히 사라졌다[68]"라고 하였다. 그는 을사조약의 체결을 곧 독립권의 상실로 인식했다.[68]
11월 17일 일본에 의해 을사 보호 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12월 1일 그는 한성부 저잣거리에서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고, 그날 을사 보호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 지난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로 자주권과 독립의 기초를 남에게 의지한 적 없이 여유 있게 지켜온 지 이제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정이 잘 다스려지지 않아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들이 모두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졌고 외교를 잘못하여 조약을 체결한 나라와 동등한 지위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폐하께서 하찮은 소인들에게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입니다.
궁실을 꾸미는 데 힘쓰게 되니 토목 공사가 그치지 않았고, 기도하는 일에 미혹되니 무당의 술수가 번성하였습니다.[70] 충실하고 어진 사람들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니 아첨하는 무리들이 염치없이 조정에 가득 찼고, 상하가 잇속만을 추구하니 가렴주구 하는 무리들이 만족할 줄을 모른 채 고을에 널렸습니다. 개인 창고는 차고 넘치는데 국고(國庫)는 고갈되었으며 악화(惡貨)가 함부로 주조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그리하여 두 이웃 나라가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나라에 물자를 자뢰하니 온 나라가 입은 피해는 실로 우리의 탓이었습니다. 심지어 최근 새 조약을 강제로 청한 데 대하여 벼슬자리를 잃을까 걱정하는 무리들이 끝끝내 거절하지 않고 머리를 굽실거리며 따랐기 때문에 조정과 재야에 울분이 끓고 상소들을 올려 누누이 호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로 일치된 충성심과 애국심은 어두운 거리에 빛나는 해나 별과 같고 홍수에 버티는 돌기둥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지난날의 조약을 도로 회수해 없애버릴 방도가 있다면 누가 죽기를 맹세하고 다투어 나아가지 않겠습니까마는, 지금의 내정과 지금의 외교를 보면 어찌 상심해서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지금이라도 든든히 가다듬고 실심으로 개혁하지 않는다면 종묘사직과 백성들은 필경 오늘날의 위태로운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독립의 길은 자강(自强)에 있고 자강의 길은 내정을 닦고 외교를 미덥게 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일을 그르친 무리들을 내쫓음으로써 민심을 위로하고 공명정대한 사람들을 조정에 불러들여 빨리 치안을 도모하며, 토목 공사를 정지하고 간사한 무당들을 내쫓으며 궁방(宮房)의 사재 축적을 엄하게 징계하고 궁인(宮人)들의 청탁으로 벼슬길에 나서게 되는 일이 없게 할 것입니다. 자강의 방도와 독립의 기초가 여기에 연유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
”
?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대한 광무 9년 양력 12월 1일자 5번째기사
이어 윤치호는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등을 파면하고 재산을 몰수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윤치호의 상소에 내심 동의하면서도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결국 어쩌지도 못하는 황제를 보고 그는 꼭두각시라고 보고 경멸하게 된다.
미국에 대한 불신과 민중에 대한 반감[편집]
1906년 성경 연구자 표창식에서 성경 내용 해석자를 표창하는 윤치호
사촌 윤치오(尹致旿)1905년(광무 8년) 12월 내내 윤치호는 한성부를 왕래하며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 전단지를 배포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역으로 그가 갑신정변 관련자인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과 친밀했던 점을 들어 윤치호를 비난했다. 윤치호가 을사조약 반대를 핑계로 다른 마음을 먹고 공화제를 획책한다는 것이었다.
윤치호는 민주주의와 참정권의 나라인 미국에 기대를 하였지만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전인 1905년 7월 29일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것을 접하고 미국에게도 실망하게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그는 체념하고 교육과 YMCA 청년회 활동에 매진했다. 그는 을사 보호 조약까지 이르게 된 것을 외부의 침략 이전에 지배층의 안일한 대응과 타락, 사회 내부의 부정, 부패, 온갖 비리행위와 차별 대우, 서자와 중인, 하층민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 등이 복합된 결과물로 보았다.
“ 그 조약은 ...(이하 중략)... 지난 수년 동안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의 불가피한 결과였다. 나는 한국의 모든 고난을 만든 운명의 여신(the Author and Finisher) 외에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68] ”
그는 을사 보호 조약을 돌발적인 사건으로가 아니고 과거 사건들의 결과로 또는 불가항력적인 현실로 받아들였다.[68] 결국 그는 미구에 닥칠 일본 혹은 제3세력의 침략은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보게 된다. 체념한 윤치호는 이후 어떠한 공직 제의도 사양하고, YMCA 청년회 활동과 교육, 강연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윤치호는 독립의 상실과 일본의 폭정을 수반하게 될 을사 조약을 열강의 침탈경쟁인 러일전쟁의 불가피한 귀결이며, 개혁과 개선을 무조건 외면해온 한국인들에 대한 역사의 심판 또는 신의 심판으로 인식되었다.[68]
도서관 설립 운동[편집]1905년부터 그는 경성부에 설립 예정이던 대한도서관 설립을 위한 자금 모금과 부지 마련에도 참여하였다. 발대 모임부터 시작해서 대한도서관 설립을 위해 각 준비과정에 관여해 온 인물들을 당시 황성신문 기사에서 찾아보면 윤치호, 이봉래, 민형식, 이범구, 백상규, 이근상, 이용화, 민대식, 이병정, 이용문, 김동완, 오한영, 민영기, 이재극, 이완용, 민상호 등 최소 16명이었고, 이 중 오한영이 그 중심적 역할을 맡았다.[71] 그는 대한도서관 개관 기념식 축사 낭독에서 그는 경성은 물론 각 산골과 촌락까지도 도서관이 보급되고 책읽는 문화가 전파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1906년 3월 26일 도서관 평의회에 참여하고, 도서관 운영위원 겸 도서관평의회 평의원이 되었다.[71] 3월 26일 도서관 평의회가 소집되어 도서관 운영위원들을 결정하게 되었다. 도서관장에는 탁지부대신 민영기, 평의회 의장은 궁내부대신 이재극, 서적위원장에는 학부대신 이완용, 그리고 평의원에는 민상호, 윤치호 등 25인을 두고 있다.[71]
1906년 1월 윤치호가 외무협판 직과 외무대신 사무서리직을 사퇴하자 서재필은 윤치호에게 전보를 보내, 현직에 있으면서 정세를 바꿔보도록 노력하라고 충고하였다. 윤치호는 최소한의 양심마저 상실한 매국노들의 소굴에 더이상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며 답장을 보냈다. 답장에서 윤치호는 당시 고위 관리들은 최소한의 양심조차 상실한 매국노들, 중간급 관리들은 세금만 축내는 무책임한 기생충들이라며 질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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