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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 운동과 문필 활동[편집]민족개조론 발표[편집]
도산 안창호. 안창호의 사상에 감화받은 그는 민족개조론과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였고, 후에는 흥사단과 수양동우회 등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22년 5월호, 개벽에 실린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민족개조론, 민족개량주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는 일찍이 나태하고 게으르며 무기력한 이 민족의 성격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으르고 무기력하며, 나약하며 공짜를 바라며, 허황되다, 요령과 술수에 능하다, 그리고 속임수와 눈가리기에 능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러한 습성으로는 서로간의 신뢰도 어렵지만,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는 것은 어렵다고 하였다. 일부 국민들의 의지만으로 독립이 달성되는 것은 아니며,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지 않고는 어느 나라도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922년 잡지 《개벽》 5월호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자치운동론'을 내세워 이때부터 차츰 총독부로부터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 허위되고 공상과 공론만 즐겨 나태하고 서로 신의와 충성이 없고, 일에 임하여 용기가 없고, 빈궁하고 ”
이 글을 통해서 이광수는 '삼일운동이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난 이후,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 할 방도는 일제에 대항하는 독립투쟁이 아니고 독립을 쟁취하고 유지할 만한 실력을 먼저 기르는 민족개조운동, 자치운동론'이라고 주장했다. 〈민족개조론〉의 타협적인 내용은 곧 민족진영 인사들의 감정을 자극, 논란을 일으키면서 문필권에서 소외당하였다. 그러나 이광수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그의 〈민족개조론〉은 실력 양성론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식민지통치를 인정하는 범위내에서 자치를 얻자는 자치운동의 이론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이광수가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했을 때 그 반응은 일파만파의 충격이었다.[42] 이광수의 집에 칼을 든 청년들이 난입했으며 개벽사의 기물들이 파괴되었고, 이광수를 강사로 초빙했던 사람까지 습격당했다.[42]
민족 개조론의 발표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의 사주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민족개조론 또한 총독부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를 유랑했던 젊은 시절 동포들의 비참한 삶과 지도자들의 이전투구를 보고 착상한 것이며, 정신적 대부인 도산의 「점진적 개혁」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반론도 있다.[43] 그는 조선 사회는 요령과 기만, 허위가 판치는 사회이며, 이런 사회, 이런 시민 의식으로는 백년이 지나도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에는 공감 보다는 감정적인 반론과 공격이 계속되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편집]1923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되었다. 작가가 기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었던 김동인은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에게 “비상한 노력 끝에 위선적 탈을 썼다”고, 또 동아일보 기자가 된 주요한에 대해서는 “요한이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파멸을 뜻한다”고 지면을 통해 독설을 퍼부었다.[44] 생계를 위해 기자가 된 일을 두고 김동인 등은 변절이라 했는데, 그는 작가는 순수하게 소설, 시 등의 작품에만 전념해야 된다는 지론을 펼쳤다. 그러나 김동인도 1932년에 기자가 된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 시절 (1923년)1923년 중반에는 도산 안창호를 모델로 한 장편 소설 《선도자 (先導者)》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다가 조선총독부의 간섭으로 송진우, 김성수 등이 소환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결국 111회 중편완(中篇完) 부분에서 연재중단되었다. 1923년 가을, 실의에 빠진 그는 금강산을 순례하면서 보광암의 주지인 월하노사(月河老師)라는 늙은 불교승려의 인도로 《법화경 法華經》을 접한다. 이후 그는 《법화경 法華經》을 한글로 해석하기도 하였으며 법화경에 널리 심취하게 되었다.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동아일보》에 사설 〈민족적 경륜〉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일본의 국법이)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라는 단서를 달았다. 이에 대해 일본의 국법이 허하지 않는 한국의 독립을 부정하는 논설이라는 비판이 있다.[45] 이후 이광수 주도의 타협적인 자치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46] 이광수가‘민족적 경륜’이라는 논설을 발표한 것이 기폭제가 됐다. 이 논설의 요지는‘일본 법률의 범위 안에서 정치 산업 교육의 3대 정책을 수립하자’는 것이었다.[46] 사설 '민족적 경륜'이 물의를 일으켜 동아일보에서 스스로 퇴사했다. 그러나 김성수와 송진우의 배려로 1924년 2월 동아일보의 기자로 다시 복귀했고 동아일보에 〈허생전〉을 연재하다가, 같은 해 11월부터 장편소설 〈재생〉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여기자인 최은희를 발탁하였다. 최은희가 기자로 발탁되게 된 데는 춘원 이광수와의 인연, 그리고 기자 덕목으로서 차고 넘칠 무한한 배포가 작용했다.[47] 최은희가 동경 일본여대 3학년 재학 중인 1924년, 여름방학을 맞아 춘원의 집을 찾았을 때 일이다. 최은희는 춘원의 부인이자 산부의과 의사인 허영숙과 가까운 사이였다. 허영숙은 한 부호로부터 진료비 85원 10전을 떼어 먹힐 처지였고, 최은희는 청부사를 자임했다. 최은희는 채무자 집에 찾아갔으나 그가 외출하고 없자 마루에 돗자리를 펴 낮잠을 자거나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47]
최은희는“의료규정을 알아보시고 부당하거든 고소하세요.”라며 귀가한 부호에게 쏘아 부쳤고, 강짜를 부리다가 차츰 진료비를 깎는 쪽으로 타협하려던 이 악성 채무자에게 “내가 종일 이 집에서 치마에 묻힌 먼지는 털고 갈망정 단돈 10전도 못 깎아 드리겠소”라며 결국 돈을 온전히 다 받고 일어섰다.[47] 마침 그 때 조선일보가 ‘부인 기자’(여기자라는 의미)를 급구했고, 이광수는 이상협 편집고문에게 최은희의 진료비 추심 청부 일화를 들려주며 “그만한 배짱과 수완이면 넉넉하고 부인과 왕래 편지를 보니 문장도 신문기사보다 낫다”고 천거했다.[47]
이후 1933년 8월 29일까지 사설과 횡설수설, 소설(13편), 시, 시조, 동화, 수필, 평론, 서평, 기행문, 번역물 등 하루 원고지 70장 이상을 동아일보 지면에 발표했다.[48]
사회 변화론 설파[편집]안창호, 윤치호 등의 감화를 받은 그는 안창호를 찾아 가르침을 청했고, 이후 그를 도와 흥사단의 국내 조직과 1922년 수양동우회의 모태인 수양동맹회 등을 결성하였다. 그는 수양동맹회를 흥사단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조직이자, 국내외 흥사단의 연락 기관 겸 흥사단 국내조직의 측면 지원 단체로 운영하였다.
이광수는 흥사단의 국내조직으로 1922년 수양동맹회를 결성했는데, 그 전문(前文)에서 “정치[32] 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주의(主義)”라고 발표하였다.
1923년과 1924년 그는 계몽 활동과 강연을 통해 여자들도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며 기존의 조선 사회는 이러한 여자들의 권리와 권익을 심하게 무시하거나 착취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자들에게도 자유가 부여되어야 하며 여자의 자유는 결혼과 가정으로부터의 탈출이 선행되어야 하며, 자유 연애를 통해 여자의 해방,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또한 그는 1920년대 경성부에 확산된 전화기를 보고 멀지 않은 미래에 전화기 역시 전국 각지로 확산될 것이며, 쉽게 소지하고 다닐 수 있는 전화기도 등장하리라 보았다. 그는 라디오가 보급된 뒤 텔레비전 역시 널리 보급될 것이고, 미래에는 일방적으로 시청하는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아니라 기계를 매개로 하여 직접 대화가 가능한 시대도 올 것이라 예상하였다.
1924년 초부터 문학잡지 발간을 계획한 그는 여러 부호들을 찾아다니다가 방인근과 경주 최부잣집 등의 지원으로 《조선문단》의 창립발기인이 되어 창립을 주재했으며 주요 필진으로 활동하였다. 〈재생〉연재를 끝낸 1925년초 다시 동아일보에 〈춘향전〉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계몽론에 대한 비판[편집]이광수는 문학을 통해 사회를 계몽, 변화, 개조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학을 통한 사회 계몽, 변화 시도에 대해 김우진은 이를 비판하였다. 작가 김우진은 다이쇼 시대 개인의 자아실현을 목표로 삼았던 시라카바(白樺)파 문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희곡 〈정오〉 〈이영녀〉 〈두데기 시인의 환멸〉 등에서 사회적 억압과 통제의 현실을 폭로하고, 인습과 도덕을 극복한 초월적 개인을 형상화하면서 '자유로운 개인'이자 '공적 인격체'인 '시민'을 발견한다.[49]
김우진은 1926년 쓴 평론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에서 당대 최고의 문인 이광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우진은 "조선이 지금 요구하는 것은 형식이 아니오, 미문(美文)이 아니오, 재화(才華)가 아니오, 백과사전이 아니다"라면서 "거칠더라도 생명의 속을 파고드는 생명력, 한 곳 땅을 파면서 통곡하는 부르짖음이 필요하다"며 그의 계몽론을 비판했다.[49]
수양 동우회 조직[편집]
흥사단의 단기
잡지여명 지 흥사단, 신간회, 수양동우회, 수양동우회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동우구락부를 운영하면서 그는 미국에 있던 안창호,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등과 연락하고 국민회 회보를 입수하여 확산시켰다. 또한 동우구락부 회원의 자격에 여자도 가입할 수 있음을 천명하고, 남자 회원과 여자 회원간에 차별을 두지 아니하며 남녀 모두 같은 한 사람의 회원이자 동지로 대우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1925년 다시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으로 복귀했다. 1925년 7월 대구의 언론인 김승묵이 잡지 《여명 (黎明)》을 창간하자, 《여명 (黎明)》지의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여명》 지는 1927년 1월에 폐간되었다.
한편 1925년 동아일보는 춘향전의 개작을 신춘문예의 공모작으로 걸었는데 당선작이 없자 이광수의 '일설 춘향전'을 1925년 9월 30일부터 1926년 1월 3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됐다.[50] 수십 편의 춘향전 개작 공모작 중에서 뚜렷한 작품이 없자 동아일보는 다음해 9월 24일 당선작이 없어 춘원 이광수에게 집필을 의뢰했음을 사고로 밝혔다.[50]
1925년 봄부터 안창호의 지시에 따라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를 통합하여 통합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 수양동우회로 발족시키는데 힘을 쏟은 끝에 1926년 1월 8일 수양동우회를 탄생시켰다. 수양동우회는 '인격수양과 민족문화 건설'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실질적인 모든 사업과 실천 내용은 흥사단의 국내 조직 역할 단체였다.
수양동맹회를 동우구락부와 합하여 동우회로 확대 개편한 직후인 2월에는 수양동우회의 기관지 《동광》을 창간하여 주요한과 함께 잡지를 주재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수양동우회의 조직을 의심하고 안창호의 국내 대리인으로 의심하자 그는 동우회는 사회 계몽 단체임을 들어 독립운동 단체가 아니라고 변명하여 의심의 눈초리를 벗어났다.
1926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였다.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서 수학하고 중퇴한 학력을 인정받아 무시험 전형으로 입학했다. 1927년 작품 《마의태자》를 발표하고 이어 1928년 《단종애사》를 발표하였다. 1929년에 YMCA 근처에 생긴 멕시코 다방은 이광수와 복혜숙이 자주 다니던 곳이었다.[51] 이후 해방때까지 그는 멕시코 다방의 단골 손님이었다. 그는 다방에서, 혹은 산사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곤 했다.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편집]1920년대에 와서 그는 조선총독부가 조선역사 교육을 금지시키는 것에 반발, 단재 신채호의 저서와 문건을 입수하여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역사 관련 칼럼과 소설, 시, 희곡 등을 짓기로 결심한다. 1926년부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야간반 학생으로 다녔지만 폐병이 심해지자 작업도 힘들어졌고, 1926년 9월 경성제대 1학년 2학기 초에 휴학을 하게 되었다. 이후 집에서 요양하며 집필활동에 전념하였다.
1926년 1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1928년 장편소설 〈마의태자〉를 발간했다. 바로 단종애사를 지었는데 이듬해 1929년 단종애사는 대중의 인기를 크게 얻었다.[52] 이광수는 장편 '단종애사'에서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집권한 역사를 다뤘다. 그는 사육신(死六臣)이 처형당한 날 신숙주의 아내 윤씨가 목숨을 끊었다고 썼다.[53] 변절한 남편이 부끄럽다며 다락방에 올라가 목을 맸다고 묘사했다. 이광수는 18세기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실린 야사(野史)를 바탕으로 삼았다.[53]
그러나 실제는 세조실록 2년 1월 23일자엔 신숙주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떴다는 기록이 나온다.[53] '대제학 신숙주의 처 윤씨의 상(喪)에 조효문을 보내 호상하게 하다.' 윤씨가 숨진 것은 사육신 사태가 일어나기 다섯 달 전이었다. 그때 신숙주는 세조의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 있었다. 신숙주 아내를 둘러싼 야사는 정사(正史)와 전혀 다른 허구였던 셈이다.[53]
1928년 3월 다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복학하였다, 그러나 폐병과 과로 등으로 몸이 약해지면서 3학년 2학기를 마치고 1930년 1월 경성제국대학을 중퇴하고 만다. 1930년 봄, 주요한, 정지용, 주요섭 등과 함께 방정환의 잡지 《어린이》지의 필진으로 참여한다.
1930년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의 생활상을 묘사한 소설 《혁명가의 아내》를 발표하였다. 1931년 6월 26일부터 조선일보에 소설 《이순신》의 연재를 시작하였다.[54] 독립운동가들의 생활상을 묘사하는 한편 이순신의 일대기를 발표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조선총독부는 그의 작품을 검열하고 그의 집 주변을 내사하기 시작한다. 1932년 동아일보에 소설 《흙》을 연재하였다.
소설 《흙》은 계몽운동가 이종준(李鍾駿)의 맏딸을 모델[55] 로 한 실화소설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 《흙》 역시 청년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신문에 연재됐던 이광수의 소설 '흙'의 주인공 허숭을 보면서 정주영은 한때 변호사의 꿈을 키웠다.[56] 하지만 정주영은 두 번 연속 변호사 시험에 낙방하고 결국 열아홉이 되던 해 서울로 상경한다.[56] 이광수의 작품들이 당대 청년층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본 조선총독부 당국은 그의 작품 내용을 검열하기 시작하였다.
단종애사 발표[편집]1928년 발표한 단종애사는 무정 이후 작품들 중 무정, 흙 등과 함께 전국적인 인기를 얻은 작품 중의 하나이다. 같은 무렵 친구이자 경쟁자인 홍명희는 소설 임꺽정을 발표하여 경쟁하게 된다. 조선일보는 1928년 11월 17일 실린 '임꺽정' 연재 예고 기사에서 "세계적 명작 알렉산더(알렉상드르) 뒤마의 '암굴왕'보다도 더욱 그 구도가 크거니와 홍명희 선생의 필치는 오히려 뒤마류의 것보다도 훨씬 장대할 것을 미리 말씀합니다"라고 광고했다.[57]
'임꺽정'은 동아일보를 긴장시켰다. 동아일보는 '임꺽정' 연재 예고가 나간 직후 이광수의 '단종애사(端宗哀史)' 연재를 예고하면서 맞불을 놓았다. 양대 민간지에서 문단의 양 거두가 승부를 겨루게 된 것이었다.[57] 두 소설 중 어느 쪽이 더 인기를 끌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김을한은 "임꺽정이 연재되는 동안 조선일보는 처음으로 동아일보의 연재소설을 능가할 수 있었다"('한국언론인물지')고 회고했다.
단종애사를 통해 사람들은 단종을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를 받는 백성으로, 사육신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조선총독부에 협력한 중추원 고관들을 한명회, 신숙주로, 조선총독부와 일본 천황을 찬탈자 수양대군으로 해석하였다. 작품은 크게 공감대를 형성하여 많은 남녀노소가 애독하였다.
“ 만천하가 열광적으로 환영 애독하든 ‘단종애사’는 끗을 막게 되엇습니다. 우리 춘원 리광수씨는 얼마 동안 휴양하야 다시 장편소설 ‘군상’을 쓰게 되엇습니다. 씨의 찬란한 필치와 웅대한 구상과 심각한 인생관이 다시 군상을 동하야 우리로하야금 생각케하고 웃게 하고 울게할 것입니다. 지면에 나타나는 그날을 기다립시다,[20] ”
? 동아일보 1929년 12월 17일자
동아일보에 연재된 단종애사가 막을 내린 다음날은 특별히 동아일보 신문 기사에 단종애사가 끝난 것을 보도하기도 했다.
한편 김동인은 수양대군의 관점에서 쓴 소설 대수양을 짓기도 했다. 후일 이광수 역시 세조의 입장에서 쓴 장편소설 세조대왕을 쓰기도 했다.
언론 활동과 브나로드 운동[편집]
1930년대의 이광수 문맹퇴치 운동, 브나로드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0년초 경성부 홍지동에 별장 춘원헌을 구입하여 별장으로 활용하며 집과 별장을 오갔다. 홍지동의 별장 춘원헌은 후대에 세워진 영인미술관 근처에 있으며, 현진건의 집터와 박종화가 살던 가옥이 주변에 있다. 이곳에 체류하며 박종화 등을 만나 문학과 시사, 정치에 대한 담론을 하기도 했다. 박종화와의 오랜 대화 틈틈이 얻은 공통된 결론은 교육을 통한 계몽이었다.
1930년부터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농촌 계몽 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주도하였다. 경기도 양주의 어느 농촌을 방문했다가 농촌의 문맹자가 많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그는 농촌 계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문인들을 찾아다니며 농촌 계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대학생들에게 농촌 계몽운동에 나서줄 것을 권고하도록 부탁하였다. 그는 문인으로서 브나로드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였다.
1931년 춘원 이광수가 잡지 '동광' 대담에서 구한말 개화파 주역이던 박영효에게 개화사상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물었다.[58] 이에 박영효는 "신사상은 박규수의 집 사랑방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이때 비로소 박규수의 사랑방 모임이 온 천하에 널리 알려진 순간이었다.[58]
1931년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의 겸임 국어국문학 강사로도 초빙되었으며, 각 학교의 문학 강연에도 출강하였고 방송과 개인 교습 등으로 문인을 길러내기도 했다. 우연히 그를 찾아온 소년 피천득에게도 문학인의 길을 가도록 이끌어주기도 했다. 후에 피천득은 "나를 문학의 길로 이끈 이광수 선생은 재주가 많고 착하셨지만, 바보같은 분이기도 했다.[59] 고 회상하였다. 또한 1924년 작가 채만식을 추천하여 「세 길로」라는 작품으로 조선문단을 통해 등단시키기도 했다.[60] 한편 10세에 모친을 여읜 뒤 삼촌 집을 전전하던 피천득을 잠시 받아주어 자신의 집에 기거하게 하기도 했다.[61]
브나로드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 확산되면서 그는 자신의 작품인 <흙>에 이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1932년 4월부터 다음 해 7월까지 춘원 이광수는 장편소설 '흙'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주인공 허숭의 입을 통해 젊은 지식인들의 참여를 호소했다.[62]
“ 농민의 속으로 가자.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가자. 가서 가장 가난한 농민이 먹는 것을 먹고, 가장 가난한 농민이 입는 것을 입고 … 그러면서 글을 가르쳐주고, 소비조합도 만들어주고, 뒷간 부엌 소재도 해주고, 이렇게 내 일생을 바치자.[62] ”
그는 직접 자신의 작품 흙과 칼럼, 강연을 통해서 의식있는 젊은이들이 열정을 갖고 농촌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민중의 틈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브나로드 운동은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고 젊은이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계속되었다. 1930년부터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브나로드 운동과 농촌 계몽을 주제로 한 장편·단편 소설과 시를 모집하였는데, 이중 대표작은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심훈(沈熏)의 《상록수 (常綠樹)》였다.
언론, 사회 활동[편집]미스코리아 심사 위원[편집]그는 1931년 5월에 개최된 한국의 최초의 미스코리아 대회의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1931년 『삼천리』라는 잡지에서 주최한 ‘반도의 대표적 려인(麗人) 미쓰 코레아 삼천리 일색(一色)’을 뽑는 사진공모전에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 참여, 최정원(崔貞嫄) 등을 선발하였다.[63]
당시 삼천리사(社)는 “구라파에 전 구라파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미인이 있고 각국에도 그러한 모양으로, 우리 반도에도 전 조선을 대표할 려인 한 분을 찾아” 보자며 “고상전아(高尙典雅)하고 아름다운 미모에다가 균제된 체격, 만신(滿身)이 예지와 총명에 찬 듯한 근대적 려인”을 뽑겠다고 광고를 냈다(『삼천리』, 1931.5).[63] 삼천리 지의 고정필진인 이광수 역시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 위촉되었다.
당시 삼천리지는“18세 이상의 조선 여성, 3년 이내의 사진일 것”을 응모자격 조건으로 걸고, 심사는 '심미계(審美界)의 권위'를 지닌 이광수, 염상섭, 김억, 안석주, 이승만(李承萬), 허영숙, 나혜석, 김원주, 최승희 등을 선정했다.[63] 1931년 10월 그는 삼천리사 주최 미스코리아 선발 대회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 총 326명의 응모 사진 중 특선 1명 포함해 14명의 입상자를 선정해 발표하였다.[63]
이순신전 집필과 대중화[편집]1931년 1월초 이광수는 우연히 이순신 가문의 후손에게 엄청난 양의 빚이 있다는 소문을 접하게 된다. 이광수는 이순신 유적지 보존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1931년 아산 이순신 장군 묘역이 경매 처분될 위기에 이르자 동아일보는 사설과 기획기사를 연속 보도해 이순신을 재조명하고 유적을 영구보존하자는 운동을 주도했다.[64] 윤치호는 거금을 들여 이순신 묘역과 사당, 위토가 일본인 손에 매각되는 것을 막으려 노력하였다.
이광수는 경성과 평양, 대구, 부산을 돌아다니며 강연과 연설을 통해 이순신 유적지를 지켜줄 것을 호소하였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는 동아일보 기사에도 이를 반영, 충무공 유적지를 탐방하는 연재 기사를 직접 썼고, 소설 '이순신'을 집필하였다.[64] 또한 1931년 5월초, 이광수는 동아일보 기사와 사설 등을 통해 아산 이순신 묘소의 위토가 경매에 부쳐질 위기에 처한 것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순신 유적지 보존기금 마련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자 그는 이순신의 일대기를 직접 소설로 쓰기로 하고 집필에 들어갔다.
그는 1931년 5월 25일에 결성된 충무공 유적보존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광수는 1931년 5월 21일∼6월 10일 현지 사정을 기행문 형식으로 실었고, 6월 26일부터는 장편소설 ‘이순신’을 연재했다.[65] 소설 이순신전에서 이광수는 이순신을 자기희생적이며 충성스러운 애국자로 묘사했다.[64] 이를 두고 훗날 대한민국 국방대학 국가안전보장문제연구소 연구기획실장 노영구는 “영웅은 영웅이되 충의(忠義)를 강조하며, 인격의 힘으로 열등한 민족을 개조하는 영웅으로 그려졌다”고 설명했다.[64] 그러나 이순신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비판과, 의도적으로 이순신과 조선 대신들의 대립구도로 엮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문학 활동 및 사회 활동[편집]
망중한을 달래는 이광수(1931년 무렵)1931년부터 장편 소설 이순신을 집필하였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소설인데도 군관에서 말단 수병에 이르기까지 작품 속 등장인물이 모두 실존인물이라는 점이다.[66] 그러나 “임진왜란은 당연히 조선과 왜국의 대결이었는데, 이광수가 이를 ’이순신 대 원균 등 이순신을 모함한 장수와 대신들’의 대립구도로 바꾸어 놓았다”는 김탁환 교수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66]
1932년 1월의 이봉창의 투탄 사건을 애석히 실패했다 하고, 그해 4월의 윤봉길의 투탄 사건을 쾌거라고 주장했다가 헌병의 귀에 들어가 총독부 경무국으로 소환당했다. 6월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인천항에 도착하자, 자동차로 인천항에 가서 안창호의 호송 차량을 경성까지 따라갔다.
안창호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자 크게 낙심, 서대문형무소에 가서 안창호를 자주 면회하였다. 안창호의 재판비용과 석방, 구명운동에 나서는 한편 윤치호, 김성수 등을 찾아가 안창호의 출옥을 도와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는 안창호가 심장과 간장 등이 좋지 않음을 들어 병보석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고, 안창호는 징역 4년의 언도를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주요한, 주요섭, 김동원, 조병옥 등과 연락하며 수양동우회를 운영해 나갔다.
또한 당대의 화려한 자유 연애관으로 비판받던 나혜석, 박인덕과도 자주 만나 교류하였고, 만년에 나혜석이 병으로 고생할 때도 자주 문병을 가기도 했다. 그는 시중에서 나혜석과 박인덕을 비난, 비판하는 것을 위선이라며 조롱하였다. 자신은 불륜과 외도를 하면서 자기 남편과 부인에게, 자신의 여동생과 누이에게는 정결과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며, 자신들은 혼전, 혼후의 문란한 행위를 하면서도 가족들에게만 순결함과 지조를 요구한다며 위선과 기만이 만연한 사회라며 조소하였다. 기존의 유림과 기독교 등의 종교계에서는 그가 탈선과 타락을 부추긴다며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의 수많은 작품은 민족주의와 평등주의, 인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갱생의 이상을 담고 있어, 당시의 개화된 청년층에 큰 감명을 주었다.
조선일보 부사장[편집]1932년 7월 30일 문인 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및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3년 열차로 시베리아 여행을 다녀왔다. 1933년 8월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을 그만두고 같은 달 28일 조선일보 부사장에 취임해 1934년 5월까지 활동했다. 9대 사장에 취임한 방응모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와 경제부장 서춘 등 유능한 언론인을 스카우트해 조선일보 혁신에 나섰다.[67] 보다 좋은 조건이라 생각한 그는 방응모의 제의에 응한다.
1933년 7월 19일 조선일보의 제9대 사장에 취임한 방응모(方應謨)는 한 달 후 동아일보에서 이광수와 서춘(徐椿)을 스카우트해 각각 부사장과 주필(主筆)에 임명하였다.[68] 9월 27일 이광수는 조선일보에 소설 '유정 (有情)'을 연재하였다.[68]
이광수는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 겸 취체역(이사), 조선일보의 편집국장, 학예부장, 정리부장 등 5개 직책을 동시에 맡아 '조선 신문계의 무솔리니'라는 별명을 얻었다.[69] 1934년 5월에 조선일보 부사장직에서 물러났으나 조선일보의 이사직은 1950년까지 유지하였다.
1934년 이광수는 조선일보에 실은 글에서 "아랫목에 '뜻뜻이' 등을 굽고 있는 생활은 암만 해도 투쟁보다도 은둔을 의미한다.[70]"는 견해를 펼쳤다.
수양동우회 사건 전후[편집]사회 계몽론[편집]
이광수 가족사진 (1937년)
(왼쪽부터 장남 이진근, 이광수, 차남 이봉근(이광수 팡에 선 이), 부인 허영숙, 삼남 이영근(허영숙이 안은 아기))1930년대에 이르러 자유 연애 등이 유행하였다. 이광수는 "일반 민중이 도덕적 이상이 퇴폐해서 인생의 의무라든가 사업이라든가 하는 높은 희구를 버리고 오직 성욕과 호기심만 따르게 되니, 에로란 성욕적 흥미를 만족시키는 관념군이요 그로란 호기벽을 만족시킬 만한 관념군"이라고 해석했다('동광' 1931년 1월 1일자).[71] 에로와 그로의 관념론도 좋지만 큰 뜻을 품는 대의지사가 점차 줄어들어감을 애석해하며 한탄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려와 조선 왕조시대 1천년의 지나친 엄숙주의는 민중들의 진취적인 기상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박탈하고 삭막한 사회를 만들었다며 억지로 엄숙한 사회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1930년대에는 유성기(축음기)와 라디오가 각지로 보급되었고, 유행가가 확산되었다. 이 무렵부터 인기있는 곡은 유행가라 하여 시중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유행가는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노래들 뿐이었다. '장백산인(이광수)'은 이 범람하는 '유행가'를 '전염병'이라며, "근년에 조선에 유행되는 가요는…'부어라 먹자 두들겨라'식이 아니면 주색의 방종한 향락을, 검열관이 허하는 한에서 고취하는가 십흔 것들…"이라고 비판했다.(1934년 4월 19일자)[72] 그는 유행가라는 노래들이 전부 남녀간의 사랑만을 노래한 곡들이 많지 다른 내용은 없다며 식상한 점 역시 비판하였다. 그럼에도 대중가요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72]
1934년 그가 참여하던 어린이잡지인 《어린이》지가 경영난과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결국 123호를 끝으로 폐간하고 만다. 1935년 안창호가 가출옥하자 두부를 사들고 서대문형무소로 가서 영접하였다. 그해 조선일보에 <이차돈의 사>를 연재하였다.
그는 시와 작품들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총독부를 가해자로, 한국인을 피해자로 역할을 상정하였다.
“ 보리밭 가에 찌그러진 무덤/ 그는 저 찌그러진 집에/
살던 이의 무덤인가/ 할미꽃 한송이 고개숙였구나.[73] ”
전설에 의하면 손녀 둘을 데리고 살던 할머니는 곱상의 손녀는 부잣집으로, 밉상의 손녀는 가난한 집으로 예웠다. 가까히 사는 곱상의 손녀가 할머니를 모셨는데 구박이 심하고 굶기다시피하여 밉상의 손녀를 찾아가다 고개 마루에서 기진하여 숨진다. 맘씨 고운 밉상의 손녀가 찾아와 보리밭가에 묻어드렸고 이듬해 그 무덤에서 피어났다는것이 할미꽃의 기원 설화였다.[73] 춘원은 가난하고 무력한 이 피해 이미지를 보리밭가 찌그러진 무덤에 핀 할미꽃에 투영하였다.[73]
역사란 가해·피해의 대결구도로 꾸려져 내렸는데 할미꽃은 한국인에게 있어 피해편을 대변하고 상징하는 꽃이다.[73] 그는 조선의 역사와 신화, 민담을 시와 소설로 풀어냈고, 이순신은 조선의 독립운동가, 이순신을 모함하는 대신은 일제와 총독부에, 사육신을 조선의 독립운동가에 신숙주와 한명회를 일제와 총독부에 비유하였다. 1930년대 초, 그의 작품의 뜻을 해석하기 시작한 조선총독부는 그를 위험한 반체제 문인으로 규정하고 감시하게 된다.
체포와 수감 생활[편집] 수양동우회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6년 6월 1일 경성일보사 초대사장이자 조선 언론정책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아베 미쓰이에의 흉상 건설을 위한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신사 참배에 협조를 부탁받았으나 거절하였다.
1937년 일본을 방문, 이때 일본의 유명한 기생집인 명월관을 방문했다. 춘원 이광수도 도쿄 명월관을 방문한 기록을 조광 1937년3월호의 ‘동경문인회견기’에 남겼다. 와세다대 은사였던 요시다 교수와 야마모토 개조사 사장 등 문인들과 일본식 고급요정에서 저녁을 함께한 춘원은 조선 요정에 가보고 싶다는 주위 권유에 따라 2차로 명월관을 찾는다.[74]
“ 명월관은 상당히 고급건물이었다. 집도 좋거니와 정원도 밤에 보아 자세히는 알수없어도 상당한 모양이었다. 어린 기생도 4~5인 있었다.” 춘원은 그러나 음식은 그다지 맛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74] ”
일제 강점기의 서대문 형무소그는 종종 명월관을 찾아 술과 노래를 즐기곤 했다. 황태자 이은 부부와 이광수는 도쿄 명월관을 자주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75] 또한 그는 커피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귀국 직후,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흥사단 사건)으로 안창호와 함께 경성부에서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조직원을 불라는 고문을 당했지만 그는 조직원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건강했던 그는 독방에 수감되었고, 안창호와 함께 병 보석으로 출감할 때까지 형무소에서 6개월간 수감, 영어생활을 하였다. 1938년 초 6개월 만에 병으로 보석되었으며, 이 무렵에 《사랑》, 《세조대왕》 등을 집필하였다.
이상주의에서 현실주의로 변화[편집]
이광수, 1937년이광수의 사상, 세계관은 작품으로도 투영되었는데 1910년 데뷔 이후 초기에는 기독교적 경건함과 애국 계몽주의적인 경향을 띄었다. 이광수의 초기작품들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계몽하기 위하여 자유 연애를 고취하고, 성인이 된 자녀의 결혼에 부모가 개입하는 것의 부당함을 주장하였으며, 조혼의 폐습을 거부하였는가 하면, 족보를 없애고 위선적인 문벌 사회와, 유교의 학통과 학풍 등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으로 그는 인륜을 어지럽히고 금수화를 획책하는 인간이라는 비방에 시달려야 했다. 무정에서는 서양의 교육을 불신하는 국내 사람들을 조롱하며 신 교육을 받아야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고,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에 대한 불신을 버릴 것을 역설하였으며, 흙에서는 농민계몽 사상을 고취하면서 민족주의사상을 계몽하였다.
처음에는 기독교적 시민윤리와 사회 계몽을 역설하였지만 인간의 이중적인 본질에 갈등, 번뇌, 환멸감을 느끼면서 점차 현실지향적으로 변해갔다. 그 자신도 1930년대의 한 작품을 발표할 때 "동시대 최선의 세계관을 선택하고 동시대와 인물의 중심계급을 전형화하였다."고 하기도 하였는데, 1930년대에 갈 수록 퇴폐적인 문학이나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지는 극단적 문학관을 지양하였다.
그는 처음 사회 계몽과 개혁을 설파하였으나 사람들은 호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낭만주의자나 공상주의자라고 비판하거나, 단지 소설과 역사 소설에만 관심을 갖는 민중들을 보고 점차 실망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는 종종 남녀간의 애정, 정사 관계 등의 단편작과 시를 발표했는데 1919년의 베이징 애정도피와 연관시켜서 그를 비방하곤 하였다.
재판과 좌절, 전향[편집]
수감 무렵의 안창호
서대문 형무소 옥사 내부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전국에서 총 181명이 체포돼 이중 42명이 재판에 회부됐고 이광수, 조병옥 등 11명에게 징역이 선고됐다.[76]
1938년 3월 10일 자신의 스승격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도산 안창호가 병사하자, 이광수는 커다란 충격과 실의에 빠졌다. 홍난파와 현제명의 이탈을 비판하면서 인간 사회의 신뢰와 의리라는 구호에 대한 회의와 환멸감을 느끼게 된다. 1910년 문단 등단 초반부터 이미 유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도덕, 정의 등의 존재를 의심하던 그는 정의와 가족간의 의리, 애정에 대해서도 심히 의심, 회의하게 되었다.
그는 죽은 안창호의 곁을 떠난 홍난파와 현제명 등을 비판하였지만 자신도 심적인 고통으로 방황하며 재판을 받던 중 불면증과 신경증이 심해지자 병보석을 신청한다. 그 해 11월 3일 병보석 상태에서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전향을 선언했다. 그리고 바로 병보석이 받아들여져 보석신청 후, 집행유예로 출감하였다. 출감 직후 그는 한동안 방황하다가 1939년 1월 이후 조선신궁을 참배하였다.
안창호와 유길준을 절세의 애국자라고 확신하던 그는 윤치호와 자주 교류하며 실력 양성론에 대한 확신을 다져나갔다. 훗날 이광수는 윤치호에 대해 “8개 국어를 하는 어학의 천재로서 영어는 서양인보다 더 잘 한다”고 술회했다.[77]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그는 사고방식과 의식의 계몽이 없이는 절대로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크게 상심한 이광수는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당시 대처승이었던 청담(靑潭) 순호(淳浩)를 만났다가 그와 불교의 교리를 두고 논쟁을 벌이게 된다. 순호를 만나서는 일주일간 불교사상에 관한 격론을 펼친 끝에 순호는 춘원이 불교에 귀의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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