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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 -0~200; 동한

낙랑국

by 사마르칸트 2016. 1. 18.

 

 

최숭은 낙랑산에서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에 이르러 왕검성에 도읍하였다.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BC 195)년 겨울이었다.(북부여기)

 

임신 원년(BCE 169) 정월 낙랑왕 최숭崔崇이 해성에서 곡식 300석을 바쳤다.

 

 

『 회남자淮南子』의 주석;  갈석산碣石山이 있는 곳에 조선·낙랑현이 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4년~44년)에서,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은 옥저지방을 유람하고 있었는데,
 낙랑왕 최리崔理가 그 곳에 출행하여 그를 보고 묻기를,
‘ 그대의 안색을 보니 보통사람은 아닌 듯한데
혹시 북쪽의 나라 신왕神王(대무신열제)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는 드디어 그를 데리고 돌아와 딸로써 그의 처를 삼도록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 남해 차차웅 (AD4, 즉위 1년)에

낙랑의 군사가 신라 도성인 금성金城을 포위,

 

AD 14년(즉위 11년)에

왜가 민가를 노략하여 6부의 병사들을 내보내 격퇴하는 사이

낙랑 군사들이 다시 쳐들어 왔다가,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두려워해 물러났다.

 


대무신열제 20년(37) 열제께서 낙랑국을 기습하여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동압록(압록강) 이남이 우리에게 속하였으나,
다만 해성 이남의 바다 가까이 있는
여러 성은 아직 항복시키지 못했다


[大武神列帝二十年, 帝襲樂浪國, 滅之. 東鴨綠以南, 屬我, 獨海城以南近海諸城, 未下『]

(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고구려 대무신왕 27년(44) 가을 9월에

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

살수 이남은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二十七年秋九月 漢光武帝, 遣兵渡海伐樂浪, 取其之爲郡縣, 薩水已南屬漢]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

 

 

삼국유사; 신라 기림이사금(재위; 298년~310년) 3년에 낙랑과 대방 양국兩國이 귀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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