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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 108년
한나라의 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한서 漢書>에
“낙랑군은 서기후 108년에 열었고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
반고 《한서》<설선(薛宣)열전>: “낙랑은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
<후한서 後漢書>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
《후한서(後漢書)》
<광무제 본기>: “낙랑군은 옛 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
《후한서》
<최인 열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요동에 있다”
<요사 遼史>
장잠현은 지금의 요녕성 요양(遼陽)의 북쪽 150리 지역에 있었다.
<사기집해 史記集解>에
“장안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 열수, 선수가 있는데,
세 강이 합쳐져서 열수가 된다.
낙랑과 조선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취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서>에 “열수가 나와서 서쪽으로 점제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후한서>에 “열(列)은 강 이름이다. 열수는 요동에 있다”
<회남자 淮南子>
“동방의 끝 갈석산을 지나면 조선이 있다”
<한서>에 “동으로 갈석산을 지남으로써 현도 낙랑을 군으로 삼았다”
<사기>에 인용된 <태강지리지 太康地理志>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
<삼국사기>
서기후 243년
위나라의 관구검은 현도에서 나와 고구려의 국내성을 공격하고 낙랑으로 물러났다.
관구검은 고구려 동천왕 때 고구려를 침략한 유주자사이다.
유주는 지금의 북경 부근의 중심에 있었다.
고구려 미천왕이 재위 14년(313) 낙랑군을 공격해 남녀 2,000여 명을 사로잡으면서 낙랑군이 멸망했다.
위서(魏書) ‘세조 태무제(世祖太武帝) 본기’에는
그 119년 후인 “연화(延和) 원년(432) 9월 을묘에 거가(車駕)가 서쪽으로 귀환하면서
영주(營丘) 성주(成周) 요동(遼東) 낙랑(樂浪) 대방(帶方) 현도(玄?) 6군 사람
3만 가(家)를 유주(幽州)로 이주시키고
창고를 열어 진휼하게 했다”
《수서(隋書)》<지리지>
수성현은 11개 속현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신창(新昌)현이다.
신창현은 후제(後齊) 때 조선현을 편입한 곳입니다.
신창현은 수나라 문제 십팔년(598) 때 노룡현으로 개칭되는데
《신당서》<지리지> 하북도(河北道)조는
창려현이 노룡현에 속한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서기후 612년 수(隋) 양제(陽帝)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112만 대군을
좌군 12군, 우군 12군으로 나누어 진격로를 정해주고
평양성으로 모이게 하였다.
<수서 隋書>에 의하면
좌군 제7군은 요동도,
제8군은 현도도,
제9군은 부여도,
제10군은 조선도,
제12군은 낙랑도
우군 제4군은 임둔도,
제11군은 대방도
청나라 때 고대 역사서 및 지리지를 토대로 작성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는
지금의 하북성 노룡(蘆龍)현 북쪽 40리에
“조선성(朝鮮城)이 있는데,
한나라 낙랑군의 속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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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년에 평양의 낙랑군이 멸망한 후 낙랑군 유민들은 모용외에게로 갔다.
모용외는 이 유민들을 위하여 요서에 낙랑군을 새로 뒀다.
그후 432년에는 북위 세조가 낙랑군 백성을 유주로 옮겨버렸고
이때쯤 새로운 낙랑군은 쇠락해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520년대에 다시 북위에서
영주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없어졌고
537년에 또다시 요서의 남영주에 낙랑군이 설치됐다.
어쨌든 몇차례의 변화는 있었지만
313년 이후의 새로운 낙랑군은 요서에 있던 것이다.
"북경시 대흥(大興)구 황춘진(黃村鎭) 삼합장촌(三合莊村) 일대의 고대 무덤군에서
또 하나의 한사군 유물이 출토되었다.
중국신문망 등에 따르면 이 일대에는 후한(後漢), 북조(北朝), 당(唐), 요(遼)나라의 묘 등
129기의 고분이 있는데,
이중 북조(北朝) 무덤에서 동위(東魏) 원상(元象) 2년(539) 사망한
‘한현도(韓顯度)’가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 출신이라는 벽돌 묘비가 발견된 것이다.
평양 방면의 왕광묘에서 출토된 낙랑태수 인장,
낙랑군 인구 조사 목간, 2
000여 기가 넘는 낙랑고분 등
낙랑의 대표적인 유물
평남 용강군의 점제현 신사비,
영광 3년명 동종(銅鍾)
- '永光 3年銘 銅鍾'으로 검색하면 관련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악기 종(鐘, 오른 쪽이 아이 동 童)이 아니라 술잔 종(鍾, 오른쪽이 무거울 중 重)을 쓴다.
기원전 41년의 유물로 효문제의 군국묘에 쓰인 것이기 때문에
'효문제묘동종', '효문묘동종'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기원전 40년 군국묘 제사는 중단되었다.
낙랑군 봉니
- 죽간 혹은 목간을 묶고 봉할 때 썼던 흙에 도장이 찍혀 굳은 것으로,
현재 약 200여 개 가량이 발굴되었다.
일부 조작된 유물이 있으나 많은 수는 진품으로 확인되었다.
봉니는 단순한 문서 보관용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낙랑이 평양에 있어 백제와 400년간 붙어 있었다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왜 4, 5번밖에 등장하지 않나”
“44년 고구려가 낙랑을 취해 살수 이남을 얻었고,
304년 백제가 낙랑의 서쪽 현을 빼앗고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왕이 죽었다는 내용 등 많은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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