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대, 유리명왕(瑠璃明王)(재위기간: BC19~서기 18년) 瑠璃明王,
---2년(기원전 18)
이 해에 백제(百濟) 시조 온조(溫祚)가 왕위에 올랐다.
---11년(기원전 9)
여름 4월에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선비(鮮卑)는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
리와 화친하지 않으면서,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근심거리가
된다. 만약 이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장차 그에게 후한 상을 줄 것이다.” 부분노
(扶芬奴)가 나와서 아뢰었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굳은 나라이고 사람들이 용감하나 어리석으므
로,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왕은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고 물었
다. 부분노가 대답하였다. “사람을 시켜 배반한 것처럼 해서 저들에게 들어가 거짓으로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고 겁이 많아서 움직이기 어렵다.’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선비는 필시 우리를
업신여기고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그 틈이 생기는 것을 기다렸다가 정예 군사를 이끌고 사
잇길로 가서 수풀에서 그 성을 엿보겠습니다. 왕께서 약한 군사를 시켜 그 성 남쪽으로 나가게 하면
그들이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그때 신이 정예 군사로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친히 용맹스런 기병을 거느리고 협공을 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왕은 그 말에 따랐다. 선비
(鮮卑)가 과연 문을 열고 군대를 내어 뒤쫓았다. 부분노는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들어가니 선비
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 달려왔다. 부분노는 관문을 지키며 막아 싸워 매우 많은 적을 목베
어 죽였다. 왕은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자 계
책이 다하고 힘이 꺾였으므로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은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식읍(食邑)을
상으로 주었으나, 부분노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왕의 덕입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습니
까?”라고 하고는 결국 받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겨울 11월에 대소가 군사 5만으로 침략하여 왔으나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많이 얼어 죽었으므로 돌아갔다.
---22년(서기 3) 겨울 10월에 왕은 국내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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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서기 12)
한(漢)나라의 왕망(王莽)이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왕망이] 강제로 보내었더니
모두 새외(塞外)로 도망쳤다.
그래서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였으나 죽임을 당하자 [한나라]
주군(州郡)에서는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아뢰었다.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에 명해서 위안해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부여의 무리 중에 반드시 따라 응하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흉노(匈奴)를 아직 누르지 못한 터에 부여와 예맥(貊)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것은 큰 걱정거리입니다.”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하여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서 수도로 보냈다.
<양한서(兩漢書)와 남북사(南北史)에서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베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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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중국 기록을 베낀 것 같은데...말도 안되는 기록이다...
뜬금없이 고구려에 징집령을 내린다는 설정....
굳이 안면일식도 없는 고구려에 무슨 징집령...
그런데...이 엉터리 기록을 가지고 작난치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
아마도 이 기록은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운 왕망에 대해...
한사군의 병력이 반란을 일으켰던
사실을 이런 식을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즉... 왕망이 흉노를 동쪽에서 습격하기 위해
요동과 한사군의 병력을 출동 시킬려는데...
신나라에 동조 하지 않는 한사군의 병력들이 요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
무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켜
요서대윤을 죽인다음...
고구려군이 쳐들어와 죽였다고 이야기 하고...
모두 국경밖으로 도망갔다는 것...
이에 엄우가 추격하여 주동자중
한명인 현도군의 관리를 죽인 것임...
->글 가지고 작난 치지는 말아야...
아무리 자기가 챙피하다고
남한테 피해 끼치면 안되지...
---32년(서기 13) 겨울 11월에 부여인이 쳐들어오자, 왕은 아들
무휼을 시켜 군대가 적어서 대적할수 없으므로,
학반령에서 복병으로 기습하여 승리하였다.
---33년(서기 14)
가을 8월에 왕은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진군시켜[進兵]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한다.)
을 공격해서 차지하였다.
->한사군 이름은 당시 기록에 없다...
왜냐하면 낙랑군외는 실패하였으므로...
현도군도 원래는 옥저땅에 설치하여 하다가
낙랑국에 의해 쫓겨난다.
그리고 옮겨 설치했다는 것은 그냥 이름뿐인 경우가 많고..
난민캠프수준이다.
그래서 고구려의 전진에 별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
반면 유일하게 설치된 낙랑군은
비교적 오래 동안 요동반도에 있었을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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