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변화는 없다.
북부여는 이름만 있는 속국이었으나, 비로소 대가 끊어졌다.
광개토왕때 부터..백제와 신라는 속국이 되었다가...
장수왕때...두나라가 손잡고 모반의 움직임이 있어,
친히 왕이 정벌하여 그 왕을 잡아죽여
두 왕때는 감히 상국에 대항하지 못했다.
문자왕때부터 두 나라가 본격적으로 저항한다.
-문자명왕(文咨明王, ?~519년, 재위: 491년~519년)은
고구려의 제21대 군주이다.
장수왕의 손자이자 일찍 죽은 고추대가 고조다(高助多)의 아들이다.
그는 문자왕 또는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한다.
그의 휘는 나운(羅雲)이다. 그는 고구려에서 최대 영토를 이룩한 왕이다.[1]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이루어놓은 고구려의 전성기를 잘 구가하고 유지해 나갔다.
491년 그는 장수왕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재위 3년인 494년에 부여가 항복하여 부여 지역이 고구려에 완전 복속되었고,
같은 해 7월에 신라군과 살수(薩水)에서 전투가 벌어져
신라가 패하여 견아성(犬牙城)으로 들어가 농성하자 이를 포위하였으나,
백제가 3천 명의 구원군을 보내 공격해서 후퇴하였다.
495년에 군사를 보내 백제의 치양성(雉壤城)을 포위하였으나,
이번에는 신라가 장군 덕지(德智)를 보내서 백제를 구원하므로 물러났다.
496년 군사를 보내 신라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이하(泥河)에서 패하였다.
이듬해인 497년에 다시 우산성을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498년 정월에 왕자 흥안(興安)을 태자로 삼았다.
503년에 백제의 달솔(達率) 우영(優永)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수곡성(水谷城)으로 쳐들어 왔으나 막아내었다.
506년 겨울에 백제를 쳤으나 큰 눈이 내려 동상에 걸린 병사가 많아 돌아왔다.
507년에 장수 고로(高老)를 시켜서 말갈군과 함께 백제의 한성(漢城)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횡악(橫岳)과 싸우다가 물러났다.
512년 9월에 백제를 침략하여 가불(加弗)·원산(圓山) 두 성을 함락시키고,
포로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재위 28년인 519년에 왕이 죽어서 시호를 문자명왕이라고 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문자명왕은 광개토왕 및 장수왕의 위업을 이어받아 고구려의 전성기를 지속시킨 인물이다.
시호가 문자명의 끝자와 또 다른 시호인 명치호의 앞자가 겹치는 것을 보면
원래 시호는 문자명치호왕(文咨明治好王)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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