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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BC~0년; 진,한

김일제(金日磾, 기원전 134년 ~ 기원전 86년 음력 8월)

by 사마르칸트 2016. 3. 30.


김일제(金日磾, 기원전 134년 ~ 기원전 86년 음력 8월)는

전한의 정치가로,

자는 옹숙(翁叔)이다.


본래 흉노 출신으로 흉노의 번왕인 휴도왕(休屠王)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열네 살 때 부왕이 무제(武帝)와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전한에 포로로 끌려왔다.


이후 무제의 신임을 받아 전한의 관료로 일하면서 김씨(金氏) 성을 받았으며,

말년에 투후(秺侯)에 봉해졌다.


신라의 왕족 김씨 역시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있으나,[1]

당시 신라인들이 스스로 김일제의 후손임을 자처했다는 증거는 될 수 있어도,

실제로 그의 후손일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보고 있다.



초기 삶[편집]
김일제는 흉노의 번왕인 휴도왕(休屠王)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기원전 150년 경 이치사 선우의 번왕이었던

휴도왕(休屠王)과 곤야왕(昆邪王)이 계속하여 한나라에 패배하자,

그들을 송환하여 사형으로 그 죄를 물으려고 하였다.


곤야왕은 이치사 선우에게 끌려가면 목숨에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휴도왕을 설득하여 한나라에 투항하려고 하였다.


곤야왕은 휴도왕이 한나라 투항에 반대하자,

그를 살해하고 한나라에 투항하였으며,

휴도왕의 부인과 두 아들을 한나라 장수인 곽거병에게 포로로 넘겨주었다.



중국 포로 생활[편집]
한나라의 곽거병(霍去病) 장군은 휴도왕을 토벌하고

그 부인 연지(閼氏)와 장남 일제 및 어린 동생 윤(胤)을 사로잡아

한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돌아왔다.


이 때 한나라에 포로로 잡혀온 일제의 나이는 14세였다.

말 기르는 노예가 된 일제는 우연히 무제의 눈에 띄어 노예에서 해방되고

마감(馬監)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시중(侍中), 부마도위(附馬都衛),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올랐다.



김씨성 사성[편집]
일제는 망하라(莽何羅) 등의 무제 암살 시도를 막아 그 공으로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었고,

 김(金)씨 성을 하사받았다.

김(金)이란 금(金) 즉 황금(黃金)을 뜻하는데,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가지고

천주(天主)에 제사 지냈던 일에서 비롯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였다.


김일제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 성장하여 공주를 유혹하였다.


김일제는 그 행동이 매우 불순하다고 생각하여 자식을 죽이고 무제에게 보고하였다.

무제는 상심하였지만 김일제의 충성심에 더욱 감명되었다.

무제가 죽으면서 김일제와 곽광(霍光), 상관걸(上官桀) 등을

어린 아들 유불릉의 후견인으로 지목하여 소제를 보필하기도 했다.



최후[편집]
김일제가 병이 들어 죽기 직전

소제는 곽광과 의논하여 김일제를 투후에 봉하였고,

김일제는 조서를 받은 지 하루 만에 죽었다.


작위는 아들 김상(金賞)이 이었으나

김상이 죽은 후 아들이 없어 봉국이 몰수되었고,

이후 김일제의 증손 김당(金當)이 다시 투후에 봉해졌다.


김일제의 무덤은 한무제 무릉의 배장묘 가운데 하나로서

곽거병의 묘 오른쪽에 있는데,

오늘날 감숙성 흥평현(兴平县) 남귀향 도상촌에 있다.[2]

감숙성 무위시에 김일제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마신(馬神)이라 전해져 내려온다.



사후[편집]
김일제의 자손들은 신나라 때

왕망(王莽)의 외가로서 주요 관직에 올랐는데,

후한 광무제가 왕망을 토벌할 때 역사에서 사라지고, 봉국도 몰수되었다.


중국 산둥성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촌은 김일제가 봉지로 받은 투현으로

현재 입구에 이 사실을 알리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


투후 유적지에는 김일제를 기리던 사당(祠堂)인 투후사(秺侯祠)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일제는 중국 김씨의 시조이다.

김일제의 자손들은 작은 벼슬을 습직하면서 한나라에서 살았고,

삼국지에도 김일제의 후손인 김선(金旋)과 김위(金褘)가 등장한다.



김일제와 신라 김씨의 관계[편집]


신라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에는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3]'(5행),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신라로 내려왔고'(6행)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당나라에 살았던 신라인 김씨부인의 업적을 기리는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도

신라 김씨의 뿌리가 투후 김일제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신라 김씨 왕족은 자신의 조상을

중국 한나라 때 투후를 지낸 김일제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에 대해서 역사학자들은 7세기 후반 들어 형성된 신라 김씨의 관념적인 시조의식의 소산이지

실제로 김일제가 김씨의 시조인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4][5]


전근대에는 가계를 신성시하기 위해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 또는 유명한 위인들을 시조로 간주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김일제 후손설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1]

대한민국의 일부 역사 다큐멘터리나 재야사학자들은 김일제가 신라 김씨의 선조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문헌 기록 외에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및 부장품이 일부 북방민족 계통과 유사하다는 사실도 증거로 거론된다.[6] [7]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고고학 발굴 성과의 누적을 통해


돌무지덧널무덤과 부장품의 발전 단계가 모두 밝혀지면서


 4세기 신라 묘제의 북방민족 유래설도 역사학계 및 고고학계에서 인정되지 않고 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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