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시기의 지역을 나타내는
전한서 지리지에 의거해서
지도를 그려봅니다.
지역의 이름과 인구수를 같이 나타내었다.
-한서지리지의 요서는
유수(渝水)와 대부분 연관된 지명이다.
유수(渝水)는 난하라고 한다.
->즉 요서는 난하와 관련된 지명이지,
요수와 관련된 지명이 아니다.
-요동군내에는
무려현(無慮縣)이 있다.
의무려산 근처의 지역이다.
대료수(大遼水)와도 연관되어 있다.
즉 의무려산과 요수사이의 지역이라고 생각된다.
낙랑의 치소는 오늘날의 요양으로 보인다.
->요동과 현도만이 대요수와 관련되어 있다.
대요수는 요하의 서쪽지류이다.
->전한 시기에...단군조선을 공격하여 얻은 땅이
요동, 낙랑, 현도 일것이다.
초기 한나라의 국경은 장성부근 일 것이다...
연나라 진개의 단군조선침략은
대릉하 부근까지 일 것이다.
-다음은 후한서 군국지에 의거한 지도이다.
-탁군, 어양, 우북평이 모두 가까이에 있다.
-전한서와 다르게... 우북평과 요서가 1000리 거리이다.
-요동,요서,현도가 근처에 있었다.
-현도는 고구려 태조왕의 공격으로 서쪽으로 물러나 있다.
-낙랑의 치소 또한 고구려의 공격으로 남쪽으로 옮겼을 것이다.
-요하를 중심으로 요동과 요서를 정했다는
선입견은 아주 후대에 생긴 것입니다.
-요서,요동은 중국 정권이 붙인 지명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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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비문
395년 기사 : 영락 5년, 때는 을미년이었다.
왕은 비려가 사람들을 [붙잡아가 돌려보내지] 않자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의 상류에 이르러
3개 부락, 6~700개 영(營)을 격파하고,
노획한 소와 말, 양떼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 북풍(北豊), 오비□(五備□)에 오면서
국경을 두루 살피며 사냥을 하고 돌아왔다.
원문: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 □城,力城,北豊,五備□ 遊觀土境 田獵而還.
->광개토왕이 흥안령산맥의 거란을 복속시키고,
고구려 서쪽 국경지대인 의무려산 부근의
양평에서 사냥을 하며 돌아온다...
즉...요동은 의무려산근처이며...
양평 또한 근처에 있다.
-양평이 요양이라고 하는 주장은 후대에 생긴 것임...
한서 지리지에 요양, 양평, 평양은 여러곳에 나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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