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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갑자기
병자호란에 대한 영화 한편으로...
이 당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왕이 될수 없었던 자인
능양군이 반란으로 왕이 된
인조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도 않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청군이나,
전쟁을 불러온 것은
당시 조선의 멍청한,
쿠데타를 성공한 능양군과 서인들 이었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기도 전에 승패가 결정나 있었다.
청군은 무수한 전투로
단련된 전쟁에 최적화 된 부대였고...
조선은 임진왜란 때와 별다름 없는
멍청한 오합지졸들이었다.
-더우기 기본적인 전술조차
말로만 배운 똥별들....
->서양의 왕은 전쟁이 나면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가고,
조선의 왕은 전쟁이 나면 도망다니기에 바쁘다.
공자가 가르쳤나...
-청군의 침입 당시...수많은 전투에서 조선군이 패한다.
-하지만...광교산전투,동선령 전투, 탑동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한다.
-전쟁은 위험하고, 힘들다.
승리하 기는 더욱 힘들다.
-하지만....당시 조선군의 실상과 무기수준을 이해하고
모범적인 작전으로 승리를 이끈
유림장군의 탑동전투가 있음이 다행이다.
-쌍령 전투, 험천 전투 등에서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를 구하러 오는 군사들이 청군에게 격파되자,
순안 현령 허노와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 평안도 병마사 유림은
남한산성으로 가서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모아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이들이 강원도 김화에 이르렀을 때 약탈을 벌이는 청군을 발견,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1637년 2월 20일 조선군은 약탈을 벌이는 청군을 보고 기병들을 보내 청군을 공격하였다.
청군은 갑작스러운 조선군의 공격으로 군사 태반을 잃고 패퇴하였다.
하지만 다음날인 2월 21일,
용골대와 마부대는 다시 수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김화 10리 밖에서 진지를 구축하며 조선군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홍명구는 평지에서 진을 치고 청군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으나,
유림은 산에 진을 치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의견을 맞추지 못하였고,
결국 허노와 홍명구는 평지인 탑동에서 정규군 2000명과 의병 300명을 이끌고 진을 치고,
유림은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산지인 백동에서 진을 치게 되었다.
->관찰사,현령은 문관이다.
병마사는 무관이다.
문관들이 무관의 지휘를 받지도 않고...맘대로 병력을 나눈 장면이다.
승패가 이미 결정되었다.
1637년 2월 22일, 조선군이 내분으로 분열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청군은 탑동에 있는 홍명구의 진지를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청군은 먼저 대포를 발사하여 조선군 진지의 목책을 파괴하고,
조선군의 진지에 진입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청군과 조선군은 서로 백병전을 벌였으나,
조선군은 평야전과 백병전에 능한 청군의 군세에 밀리기 시작하였고,
패전의 조짐이 보이자 홍명구는 `능히 죽을 힘을 다해 싸우면 살 것이오,
죽더라도 이름은 죽지 않을것이다.'라고 말하며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세한 청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홍명구는 늙은 어머니에게 남기는 글을 하인에게 준 뒤 수많은 청군을 살상한 끝에 전사하였고,
순안현령 허노도 필사적으로 청군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10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배하고 말았다.
결국 탑동 전투는 조선의 패배로 끝났고,
백동에 주둔하고 있던 유림의 군대는 홍명구의 군대를 구원하지 않았다.
홍명구의 조선군을 궤멸한 청군은 그 기세를 몰아 유림이 주둔한 백동으로 달려들었다.
->유림장군이 탑동의 평지에 진을 친 조선군을 구원하지 않은 것은
냉정한 판단이었다. 만일 구원하러 갓다면 같이 전멸했을 것이다.
오합지졸을 이끌고...기병과 평지에서 전투를 하겠다는 자체가...
->전투에 패하고 장황하게 죽음을 포장하는 것은
별 의미없는 짓이다. 전투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해야 하고...생존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청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장수 구현준이 전사하여 병사들이 동요하자,
유림은 `내가 여기에 있으니 동요하지 말라'고 외쳤다.
유림이 독려하자, 병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청군에 맞서 싸웠다.
유림은 1선에 배치한 창검병들로 하여금 청군을 공격하게 하였고,
청군은 조선군의 거센 반격에 당황하여 군사를 돌렸다.
그리고 청군은 다시 군사를 정비하고 병력을 나누어 번갈아가면서 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하여 조선군을 공격하였다.
이에 2선에 배치된 조선군 궁병과 어영 출신의 조총병들은 일제사격으로 위력적으로 대응하였다.
특히 조총병들이 발포하는 탄환은 청군 2~3명을 단숨에 관통하였다.
해질 무렵까지 청군은 계속해서 조선군을 공격하였으나,
사상자와 손실만 늘어날 뿐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1선에 창검병을 배치하고...2선에 궁병과 조총병을 배치한 것은
아주 정상적인 전술이다.
당시 조총의 수준은 총기무기로써,
보조부대로서 의미가 있다.
-이때 백마를 타고 병사들을 지휘하던 청군 장수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자 청군은 퇴각하였다.
청군은 다시 야간에 조선군을 재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유림은 군사를 이끌고 본래 목적지였던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미 조선 조정과 청 사이에 강화가 체결된 뒤였고,
유림은 군사를 거두어 평양으로 회군하였다.
cf)광해군 때...
이미 강홍립이 요동에 출병하여
청군과 일전을 치렀다....
사르후 대전에서 기병 중심인 청군과 어떻게 싸워야 되는지
교훈을 얻었어야 하는데..
역사의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패배의 역사만 되풀이 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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