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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은 지혜/ -도학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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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마르칸트 2014. 7. 26.

◇둘. 은애관(恩愛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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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悟眞)에 이르되 사람의 인생이 100년의 기한이 있다고 하지만 수명을 누려 오래 살기도 하고 혹 요사(夭死)해서 일찍 죽기도 하니 궁하고 통달하는 것은 미리 알 수가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어제 길거리에서 차를 몰고 달려가던 사람이 오늘 아침에는 관속에서 이미 잠자는 시체가 되었더라. 처와 재산을 내팽겨 버려 두었으니 이것들을 미루어 보건대 그대가 소유함이 아니오, 죄와 얼(, 서자 얼)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니 스스로 속이기가 어려운 일이다.

또한 대약(大藥)은 구하지 않고 만나서 얻기만 다투고 있으나 대약이 무엇인줄 알면서도 잦아 구하려 하지 않으니 이것이 어리석은 사람인 것이다. 또 이르기를 도()를 하는 데에 모름지기 주요한 일은 용맹스럽고 맹렬하게 무정(無情)으로 할 것이며 마음을 강경하게 하는 것은 쇠와 같이할 것이다. 배부르게 먹는 남자는 여자와 처와 첩을 다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다를 바가 어디 있으리요. 이것은 세상사람이 담연(淡然)한 세상일의 은애를 보고서 급히 심성과 생명을 수련하라는 것을 가르침이라.

사람이 살아나가는 인생의 모든 일이 다 거짓된 일이지만 오직 심성과 생명을 잘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 이것이 참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온 세상 사람들은 거짓을 가지고 참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심성과 생명 이 두 글자를 가지고 자신의 법도로 삼아야 할 터인데 중요한 것은 바깥으로 내팽개치고 방치하며, 은애에 끌리고 얽혀듦을 자기 의복과 같이하고 음식 먹는 것처럼 하니 백가지 근심이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일이 자기 형체를 수고롭게 하나 낮과 밤으로 분주하고 분망하게 바쁘게 하되 일천가지 꾀한 것과 백가지 계획은 남을 손해를 보여서라도 자기는 이익을 보고자 힘을 쓴다. 모든 계획하고 도모하기를 탐하니,마치 수해지구나 가뭄의 불기운이 심해서 애 타는 것 같고, 도벽에 군사의 난리가 일어난 것처럼 수라장이 된다.

이런 난장판 속을 들어가니 호랑이가 있고, 매운 연기가 있고, 산장에는 전염병의 기운이 있다. 이런 곳에서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과, 생존과 멸망을 돌보지 아니하니, 그것을 싫어하지도 않고 녹녹한 인생살이를 하나도 관계하지 아니하여 자기 일평생동안 쉴 틈조차 없다. 자손을 위해서 계획하고 일하는 데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니 오랫동안 계획한 일과 정신이 소모되고 흩어지는 곳에 이르르게 된다. 결국에는 기혈이 쇠약하고 쇠퇴하게 되어서 큰 병이 자기 몸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다가 평상에 누워서 일어날수가 없게 되면 비록 효자와 어진 자손이 있다한들 환란은 어찌할 수 없고,자식들이 교대를 해 가며 병상에서 간호를 한다 한들 어찌할 것인가.

아름다운 처와 애첩도 고초 당하는 것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기 살아나온 평생의 은애도 이런 경지에 이르러서는 소용이 없다. 한가지도 자기 성품에 대한 것에는 보탬이 없었으며, 결국에는 세치의 기운이 끊어져 버리게 되니 한 신령스러움이 돌아오지를 아니한다. 저 사람이 누구며 나라는 것이 누구인가 하는 것과 생각하는 경지가 이러한 정도에까지 미쳐 가면 평생에 은애가 무슨 참 구제함이 있으리요.

이미 참으로 구제할 수 없는 것은 은애 사랑이니 이들이 나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은애라 하는 것은 인생에 큰 고초가 된다는 것을 어찌 알 것인가.

반드시 긴요한 일은 일찍이 이 원리를 깨닫아서 먼저 이 은애 이해라는 것을 가지고 어두움 속에서 일찍이 한번은 탐색을 해 오기도 하고, 탐색해서 떠나가기도 하며 일찍이 또 더듬어서 나가니 단맛 속에는 쓴맛도 있고, 은애 속에는 해로움도 있다. 이것이 참된 알 수 있는 은애인 것이며 이것이 거짓의 일을 깨달을 수 있는 은애인 것이다.

이러한 은애는 여러 가지 복잡한 것이로되 자연은 아닌 것이니 진흙탕 여울 위에(마음의 흔들림, 인정)있지 아니하면 불구덩이 속에 발이 빠져서 붙게 되니 자기 몸을 편안히 해서 별도로 자기 개개의 숙연을 두어서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보아서 은애에 끌려가고 은애에 찢기우게는 되지 말자.

과연 능히 은애 속에서 나와서 고초스러운 쓴맛을 당할 때에 세상을 출세를 하고자 한즉 크게 모든 것을 풀어버리고 모든 것을 벗어버려야만 자기의 심성과 생명을 잘 수련해서 이것을 가지고 어디에 거리낄 것도 없고 어디에 구속될 것도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 기거함에는 또한 아주 명랑하게 밝고 밝아서 모든 만물이 오게 되면 순하게 대응하게 되니 상하지도 아니하고 손상도 없을 것이라.

대개 깨달아 본즉 은애라 하는 것은 쓰라린 고초인 것이다. 곧 만나는 장소에서 희롱하기를 자유자제하면 자기 스스로 자유스럽게 하고 스스로 오로지 그렇게 하게 되면 은애의 해로움은 받지 아니할 것이다.

부자 형제 부부라는 것도 같은 한 뿌리에 있게 되니 이 세상의 희롱하는 가운데 부모가 되는 것이어서, 부모가 된 즉 반드시 부모로서의 도리를 하여야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녀가 된 사람들도 또한 반드시 자녀가 된 도리를 하여야 한다. 남의 형님이 되는 사람들도 반드시 형님이 하여야 할 도리를 추출해서 나타나야 될 것이다. 아우가 되는 사람도 또한 반드시 동생이 되는 도리를 하여야 하고 남편이 되는 사람도 반드시 남편이 되는 도리를 하여야 하며 부인이 된 사람도 반드시 부인이 되는 도리를 하며 나아가야 한다. 마땅히 각각 도리를 극진히 다할 줄 알아서 자기 본분 중에 응당히 이와 같이하지만 다만 마음속에는 명백하게 이것은 어떤 장소를 만나서 희롱을 짓는데 불과한 것이라.

큰집(큰 마음)들이 서로 많이 합해서 장차 질서 있게 서서히 한 개의 완전한 결속을 지으면 피차간에 문득 모든 일은 통달할 수 있을 것이라. 이와 같이 세상을 살아가면 이미 천륜의 도리도 쌓이지 아니할 것이고 본성의 근본적인 심성도 어둡지 아니하니 학인(學人)이 자기 집에 있어서 공부한 것과 자기 집을 뛰쳐나가서 공부하는 것과 티끌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과 티끌세상을 초월해서 나가는 것과 다소간에 편의와 쾌활함의 차이일 것이다.

예전에 방거사(龐居士)라는 분과 부대사(傅大士) 라는 분과 갈선옹(葛仙翁) 이라는 신선과 허진군(許眞君) 이라는 신선과 장천사(張天師) 라는 도인과 삼모진군(三茅眞君)과 같은 분들은 모두 집에 있거나 집 밖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능히 대도를 이끈 사람이다.

이처럼 자기 가정에서 거주하는 사람일지라도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할 것이다. 출가를 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부모를 섬기고 양생(養生) 송사(送死)하는 것을 제외한 그 외의 것들에 대하여서는 무엇이 안타까우리요, 은애를 가차없이 한칼로 두 토막을 내어서 이 세상을 묶고 있는 노끈과 새끼줄 등속으로 매어있는 것을 벗어버려야 한다.

이처럼 짐을 부리듯이 벗어버려야 하니 터럭만큼이라도 적은 것에 물들인다 든지 무엇에 끌려가고 무엇에 걸려있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한 터럭만큼이라도 비에 젖는다든지 물들리게 되면 일과 걸려있게 되니 이런 일은 옳지 못하다. 그러니 대사의 큰일을 망치게 되어 다만 능히 도를 닦기는 닦지만 능히 무엇인지 밝히지 못하니 마음속에 은애라 하는 두 글자가 있어서 흔들게 되어 문득 이 은애를 보아도 열지를 아니하니 은애를 입히게 되어서 은애의 관문의 출입구가 막히고 혼미하게 되니 어찌해서 앞의 일을 분석해서 달릴 수 있으리요.

내가 권유하나니 참 진실로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속히 은애의 이 관문의 출입구를 깨뜨려서 소통되게 하고 끌리지도 말고 걸리지도 말아서 벗어버리고 깨끗하게 해서 한마음으로 도를 배우면 자연히 앞으로 전진이 되고 진익(進益)할 수가 있는 것이며 그렇지 아니한즉 은애라 하는 것은 버리더라도 정확하지 못해서 항상 마음에 망령된 생각에 걸리게 되니 도를 밝힌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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