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세계-역사/ -0~200; 동한

후한서 동이 열전 - 옥저

by 사마르칸트 2016. 2. 16.

5. 동옥저(東沃沮)


1)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다에 연접하였으며, 북쪽
은 읍루(挹婁)· 부여(夫餘)와, 남쪽은 예맥(濊貊)과 접하여 있다.


그 지형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면적은] 사방 천리의 절반 쯤 된다.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이 잘 자라고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읍과 촌락에는 우두머리(장수,長帥)가 있다. 사람
들의 성질은 질박하고 정직하며 굳세고 용감하다. 창을 잘 다루며 보전(步戰)을 잘한다. 언어
(言語)·음식(飮食)·거처(居處)·의복(衣服)은 [고]구려와 비슷하다. 그들은 장사지낼 적에는 큰 나
무 곽(椁)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 장(丈)이나 되며 한쪽끝 부분을 열어 놓아 문을 닫는다. 사
람이 죽게 되면 시체는 우선 임시로 매장하여 가죽과 살을 모두 썩게 하고, 뒤에 뼈만 추려
곽(椁)속에 안치한다. 온 집식구의 유골을 모두 하나의 곽 속에 넣어 두며, 살아 있을 때와 같
은 모습으로 목상(木像)을 새기는데 죽은 사람의 숫자대로 한다.


2)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서 옥저(沃沮) 땅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沃沮)를 현(縣)으로 고쳐 낙랑(樂
浪)[군]의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속하게 하였다.


[후한] 광무제 때에 이르러서는 도위(都尉)의 관직을 없앴다.

이후부터는 그들의 우두머리(거수,渠帥)를 봉(封)하여 옥저후(沃沮侯)로 삼았다.
그 나라는 지역이 좁고 작은데다가 큰 나라의 사이에 끼어 있어서 마침내 [고]구려에 신속(臣屬)케 되었다.


[고]구려는 그 지역의 대인(大人)을 뽑아 사자(使者)로 삼아서

읍락을 [토착 거수渠帥와] 함께 다스리게 하였으며,

조세로서 초포(貂布)· 어염(魚鹽) 및 여타 해산물을 징수하고, 미녀를 뽑아 그 종이나 첩으로 삼았다.



3) 또 북옥저(北沃沮)가 있으니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하는데, 남옥저(南沃沮)와는 8백여리 떨
어져 있다. 그 풍속은 모두 남옥저와 같으며, 읍루(挹婁)의 남쪽 경계와 접해 있다.


읍루 사람들이 배를 타고서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해마다 여름철에는 바위 굴 속에 숨어 살다가

겨울에 [얼음이 얼어서] 뱃길이 통하지 않을 때가 되어야 산을 내려와 읍락에서 산다.


그 나라의 노인이 이야기하기를, “일찍이 바다 가운데에서 베옷을 한 벌
주웠는데, 그 모양은 마치 중[국]인의 옷과 같고 두 소매의 길이는 3장(丈)이나 되었다.” 하며,
또 이르기를, “바닷가에서 한 사람이 부서진 배를 타고 오는 것을 보았는데, 이마 가운데에
또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말을 해 보았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
다.” 한다.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바다 가운데에 여인국(女人國)이 있는데 남자는
하나도 없다. 어떤 사람이 전하는 말로는 ‘그 나라에는 신정(神井)이 있는데 여자들이 그 신정
을 엿보면 곧 자식을 낳는다’고 하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