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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 -0~200; 동한

11.[~AD37년] 낙랑국 - 신라 -백제...의문의 기록 해석...

by 사마르칸트 2016. 2. 16.


중국애들은 희안합니다.

 

낙랑국 근처에 낙랑군을 만들고...

 

고구려 근처에 고구려현을 만듭니다..

 

아마도 그 쪽을 담당하라고 만든 것 같은데...

 

 

웃기게도

 

후대에는

 

반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고구려가 고구려현에서 나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엄연한 우리역사서에

 

주몽이

 

졸본부여국에서 고구려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우리 기록은 쓰레기고...

 

중국인들의 기록만 맞다는 것인지...

 

 

cf) 한서지리지 현도군에 고구려현 이름이 나오는

 

옥저땅에 현도군을 지을려고

 

하다가 미수에 그치고...

 

요동북쪽에 옮기면서

 

대충 몇개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현이 3개밖에 없죠...

 

교치[옮겨서 설치]를 했다고 하는데...

 

그냥 난민 캠프 수준입니다.

 

 

cf)고구려는 칸우리의 뜻으로

 

왕의 나라입니다..

 

중국애들이 이 뜻을 알았다면..그런 이름을 지을 리 없죠..

 

그냥 지방이름인 줄 알고

 

이름을 지었겠죠...

 


 



이전 기록을 보면


낙랑국은


단군시대의 주요한 제후국이었다.


한나라의 조선침략 때 같이 약화 되었을 것이다..


이후 고구려 건국전까지...


힘의 공백이 생긴 시기...


낙랑국이 또 다시 전성기를 누린다...


초기의 신라와 백제는


낙랑국과 많은 접촉이 있었다...


AD37년에 갑자기 나타난 고구려에 멸망할때 까지


낙랑국은 반도 북부의 패자였다.


-신라가 낙랑땅에 건국한 걸로 봐서...


전성기때는 더 넓은 강역을 가졌다는 것...



-고구려의 낙랑국 정벌은


고구려의 배후지인...


옥저 정벌의 일환이었을 듯...


-옥저 정벌은 정말 중요한 일이었을 듯...


그렇듯


 치졸한 방법까지 동원한 것을 보면...




-신라와의 접촉기록-


-신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


-혁거세거서간 30년(B.C.28)


 "낙랑 사람들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침입했는데,

변방 백성들이 밤에 대문을 잠그지 않고 노적가리가 들에 있는 것을 보고

서로가 말하기를 '이 지방의 백성들이 서로 도둑질하지 않으니 가히 도덕이 있는 나라라 할 수 있다. 우

리가 몰래 군사로서 습격한다는 것은 도둑이나 다름없다. 부끄럽지 않은가?

하고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남해왕 원년(A.D.4) 조에는,

 "가을 7월 낙랑병사가 와서 금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


-11년(A.D.14) 조에는,

 "왜인이 병선 1백 척을 보내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므로 6부의 병사로서 이를 방어했는데,

낙랑이 우리의 내부 방어가 허술할 것이라 하여 금성을 심히 급하게 공격해 왔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니 적병들이 두려워 퇴각하다가 알천가에 머물면서 돌무더기 20개를 쌓아 놓고 갔다.

6부 군사 1천명이 이를 추격하여

토함산 동쪽으로부터 알천에 이르러 돌무더기를 보고 적병이 많은 것을 알고 추격을 중지했다" 


   
-3대 유리이사금 13년(A.D.36)

"가을 8월에 낙랑이 북쪽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함락시켰다" 라는 기록이 나타나고,


-14년(A.D.37)

"고구려왕 무휼(대무신왕)이 낙랑을 쳐서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 5천명이 투항하여 와서

 6부에 나누어 살도록 했다.



- 삼국유사 낙랑국

"3대 노례왕 4년(14년의 오기)에 고구려 제3대 무휼왕이 낙랑을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이 대방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신라 5대 파사왕은 서기 87년에 이르러

"(신라가)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와 접했다"


-15대 기림이사금 3년(A.D.300)조에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귀순하여 왔다(樂浪帶方兩國歸服)"



- <북부여기 상>


북부여 시조 해모수 단군 조에


 “45년 병오년(B.C195) 겨울 낙랑의 왕 최숭이 낙랑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해(海)를 건너 마한의 도읍인 왕검성에 이르렀다”


3세 고해사 단군 조에

“원년 임신년(B.C169) 정월 낙랑의 왕 최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海城)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와의 접촉 기록-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재위 4년(B.C.15) 조를 보면,
"가을 8월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재위 8년(B.C.11)조에는, 온조왕이 낙랑과의 접경지역에 마수성을 쌓고 병산에 목책을 세우자

낙랑태수가 사람을 보내 낙랑을 침공하려 하는 것이냐고 항의하면서

의심하지 않게 하려면 성과 목책을 헐어버릴 것을 요구하게 된다. 


재위 11년(B.C.8) 여름4월에 이르자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 책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1백여 명을 죽이고 납치


-재위 13년(B.C.6) 2월에 이르러 왕의 어머니인

태후 소서노가 죽고 민심이 동요하자 온

조왕은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변경을 침공하기 때문에 편안한 날이 적다"

 

-말갈은 무소속 부족들을 뜻합니다.


고 하면서 한수의 남쪽으로 도읍을 옮길 생각을 하게 되고,

다음해 정월에 한수의 남쪽(남한성)으로 도읍을 옮게 되는데,


이때 백제는 마한과의 협상을 거쳐 강역을

"북쪽으로는 패하(패수)까지, 남쪽으로는 웅천까지,

서쪽으로는 대해, 동쪽으로는 주양까지"로 획정하게 된다. 
 

 - 재위17년(B.C.2) 봄에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우자

온조왕은 그를 보복하기 위하여 재위 18년(B.C.1)에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려고 구곡까지 갔으나

큰 눈을 만나 돌아오고 마는데, 이후 백제와 낙랑의 접촉기록은 한 동안 사라지게 된다.


여기까지 낙랑국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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