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한(後漢)의] 환제(桓帝)ㆍ영제(靈帝) 말기(末期)에는
한(韓)과 예(濊)[註@018]가 강성하여
[한(漢)의] 군(郡)ㆍ현(縣)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군현(郡縣)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유입되었다.[註@019]
->후한 말기...이미 4군은 거의 망한다...
->후한시기에 영토가 절반정도 줄었는데...
->후한말에는 거의 망한듯...
->이 상태를 공손씨가 복구한 듯...
건안(建安) 연간
(A.D.196~220; 백제 초고왕-百濟 肖古王 31~구수왕-仇首王 7)
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고,
[원래 낙랑군 대방현이 아니고...새로운 대방군을 만들었다.]
[고구려 태조왕이 서안평을 치자...대방태수와 낙랑마누라가 튀어 나왔다.
->대방이 어디인지 짐작이 간다.]
공손모(公孫模)ㆍ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한(漢)의 유민(遺民)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
[한(韓)ㆍ예(濊)에 있던]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帶方)에 복속되었다.
->그기가 서안평 근처의 대방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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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영 전투-
이후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은
낙랑(樂浪)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辰韓) 팔국(八國)을 분할하여 낙랑(樂浪)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신지(臣智)[註@021]와 한인(韓人)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帶方郡)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대방(帶方)]태수(太守) 궁준(弓遵)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겨우 두개의 군만 남았다.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준(遵)은 전사하였으나
이군(二郡)은 마침내 한(韓)을 멸(滅)하였다.
->낙랑군 태수가 죽었지만,
대방군의 분전으로
그냥 이겼다는 뜻이다.
그래서 겨우 대방군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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