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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 -0~200; 동한

후한서 동이전 - 예

by 사마르칸트 2016. 2. 16.

6. 예(濊)


1) 예는 북쪽으로는 고구려(高句驪)· 옥저(沃沮)와, 남쪽으로는 진한(辰韓)과 접해 있고, 동쪽은
대해(大海)에 닿으며, 서쪽은 낙랑(樂浪)에 이른다.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옛] 조선
의 지역이다. 일찍이 [주]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기자는 [조선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짓는 법과 양잠하는 법을 가르쳤다. 또 팔조(八條)의 교(敎)를 제정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아 [밤에도] 문을 닫지 아니하고, 부인(婦人)들은 정절(貞節)을
지키며 음식은 변두(籩豆)를 사용하여 먹었다. 그 뒤 40여世를 지나 조선후(朝鮮侯) 준(準)에
이르러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한초의 대혼란기에 연(燕)·제(齊)·조(趙)나라 사람으로서 그 지
역으로 피난간 사람이 수만명이나 되었는데,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준(準)을 공격하여 깨
뜨리고, 스스로 조선의 왕이 되어 나라가 손자 우거(右渠)에게까지 전하여졌다.



2) 원삭(元朔) 원년(B.C.128)에 예군(濊君) 남여(南閭)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구(萬口)를
이끌고 요동에 귀속하였으므로,

무제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 하였다.


봉(元封) 3년(B.C.108)에 이르러서는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낙랑(樂浪)·임둔(臨屯)·현도(玄菟)·진번(眞番)의 사군(四郡)을 두었다.


소제(昭帝) 원시(始元) 5년(B.C.82)에는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현도는 다시 [고]구려로 옮겼으며

단단대령(單單大領)의 동쪽의 옥저와 예맥은 모두 낙랑에 예속되었다.


뒤에 그 지역이넓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시 [대(大)]령(領)의 동쪽 7현(縣)을 떼어 낙랑군에 속한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었다.


[예(濊)가 한에] 복속된 후부터 풍속이 점점 나빠짐에 따라, 법령도 점차늘어나 60여조(條)나 되었다.


[후한] 건무(建武) 6년(B.C.30; 高句麗 大武神王 13)에 [동부(東部)]도위(都尉)의 관직을 폐지하고,

[대(大)]령(領) 동쪽의 지역을 포기한 뒤,

그 지방의 우두머리(거수,渠帥)들을 봉해 현후(縣侯)로 삼으니, 세시(歲時)마다 모두 와서 조하(朝賀)하였다.



3) [예(濊)에는] 대군장(大君長)이 없고, 그들의 관직으로는 후(侯)와 읍군(邑君)과 삼로(三老)가
있다. [예(濊)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말하는데, 언어와 법령과 풍속
이 대체로 비슷하다. 그 사람들의 성품은 우직하고 건실하며 욕심이 적어 남에게 구걸하지 않
는다. 남녀 모두 곡령(曲領)을 입는다. 그 풍속은 산천(山川)을 중요시하여 산천마다 각 읍락
의 경계가 있어서 함부로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동성(同姓)간에는 혼인하지 않는다. 꺼리고
금하는 것이 많아서 병을 앓거나 사람이 죽으면 곧 옛 집을 버리고 다시 새 집을 지어 산다.
삼(마,麻)을 심고 누에를 기르며 길쌈을 할 줄 안다. 새벽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흉풍을 미리 안다.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며 노래 부
르고 춤추니,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지낸다. 부락을 함부
로 침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벌로 생구(生口)와 소· 말을 부과하는데 이를 ‘책화(責禍)’라고 한
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음으로 그 죄를 갚게 한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적다. 보전(步戰)에
능숙하며, 길이가 3장(丈)이나 되는 창을 만들어 때로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잡고서 사용하기도
한다. 낙랑(樂浪)의 단궁(檀弓)이 그 지방에서 산출(産出)된다. 또한 무늬있는 표범이 있고 과
하마(果下馬)가 있으며, 바다에는 반어(班魚)가 나는데 사절(使節)이 올 적에 빠짐없이 헌상(獻
上)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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