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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611) 봄 2월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토벌하게 하였다.
여름 4월에 [황제의] 행차가 탁군의 임삭궁(臨朔宮)에 이르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으로 모였다.
23년(612) 봄 정월 임오(壬午)에 황제가 조서를 내렸다.
“고구려의 보잘 것 없는 무리들이 미욱스럽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海)와 갈석(喝石) 사이에 모이고,
요수(遼水)와 예수(濊水)의 경계를 거듭잠식하였다. [생략]
-이리하여 친히 6사(六師)를 거느리고 9벌(九伐)을 펴서,
위태함을 구제하여 하늘의 뜻에 따르며 이 달아난 무리를 멸하여 능히 선대의 교훈을 이으려 한다.
-왼쪽 12군(軍)은 누방(鏤方) · 장잠(長岑) · 명해(溟海) · 개마(蓋馬) ·건안(建安) · 남소(南蘇) · 요동(遼
東) · 현도 · 부여 · 조선 · 옥저 · 낙랑 등 길로 나아가고,
-오른쪽 12군은 염제(蟬) · 함자(含資) · 혼미(渾彌) · 임둔(臨屯) · 후성(候城) · 제해(堤奚) · 답돈(踏頓) ·
숙신 · 갈석 · 동이(東夷) · 대방(帶方) · 양평(襄平) 등 길로 나아가서,
연락이 끊어지지 않게 길을 이어 가서 평양에 모두 집결하라.”
-모두 1,133,800명이었는데 200만이라 일컬었으며, 군량을 나르는 자는 그 배가 되었다.
-앞과 뒤가 서로 이어지고 북과 나팔소리가 서로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뻗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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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사(六師)
2월에 황제가 군대를 지휘하여
요수(遼水)에 이르니 여러 군대가 모두 모여 물가에 다다라 큰 진을 이루었으나,
우리 군사가 강을 막고 지켰으므로 수나라 군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황제가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명하여 요수 서쪽 언덕에서
세 개의 부교(浮橋)를 만들게 하였는데, 완성되자 끌어다 동쪽 언덕으로 갔으나
짧아서 한 길 남짓하게 언덕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때 우리 군사들이 크게 닥치자 수나라 군사로서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다투어 물가로 나아와 접전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높은 곳에 올라 공격하니, 수나라 군사들은 언덕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맥철장(麥鐵杖)이 언덕으로 뛰어 올라갔으나 전사웅(錢士雄) ·맹차(孟叉)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니,
이에 군사를 거두어 다리를 끌고 서쪽 언덕으로 돌아갔다.
다시 소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명하여 다리를 잇게 하여 이틀만에 완성하였으므로,
여러 군대가 차례로 이어서 나아가 동쪽 언덕에서 크게 싸웠는데,
우리 군사들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만명을 헤아렸다.
여러 군대가 승세를 타고 나아와서 요동성을 포위하니 이 성은 곧 한나라의 양평성(襄平城)이었다.
황제가 요하에 이르자 조서를 내려 천하에 사면을 베풀고,
형부상서(刑部尙書) 위문승(衛文昇) 등에게 명하여
요하 동쪽의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고,
10년 동안 조세를 면제해주고 군현을 두어 서로 통섭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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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5월. 이전에 여러 장수가 동쪽으로 내려올 때 황제가 경계하여 말하였다. “
모든 군사 일의 나아가고 멈춤을 반드시 나에게 아뢰어 회답을 기다릴 것이며 제멋대로하지 말아라.”
요동에서 우리 군사는 자주 나가 싸우다가 불리하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황제가 여러 군대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고, 또 여러 장수에게
“고구려가 만약 항복하면 마땅히 어루만져서 받아들일 것이며 군사를 풀지 말라.”고 명하였다.
요동성이 함락되려 하자 성 안의 사람들은 문득 항복을 청한다고 하였다.
여러 장수가 황제의 명을 받았으므로 감히 때에 맞추어 바로 가지 못하고,
먼저 사람을 시켜 급히 아뢰었는데, 회답이 올 때는 성 안의 방어도 역시 갖추어져 적절히 나가 항거하여 싸웠다.
이렇게 하기를 두세 번 거듭하였으나 황제가 끝내 깨닫지 못하였으며, 그후 성은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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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기미(己未=11일)에,
황제가 요동성 남쪽으로 행차하여 성과 못의 형세를 살펴보고 여러 장수를 불러 힐책하였다.
“그대들은 스스로 관직이 높기 때문에 또 가문을 믿고 나를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으로 대접하려 하느냐?
수도에 있을 때 그대들은 모두 내가 오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 그것은 낭패를 볼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이곳에 온 것은 바로 그대들의 소행을 보고 그대들의 목을 베려는 것이다.
그대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힘을 다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내가 그대들을 죽이지 못할 것으로 여서이냐?”
여러 장수들이 모두 두려워 떨며 얼굴빛을 잃었다.
황제가 이에 요동성의 서쪽 수 리 떨어진 곳에 머물러 육합성(六合城)에 거하였는데,
우리의 여러 성들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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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을 거느리고 배를
수백 리에 뻗쳐서 바다를 건너 먼저 패수(浿水)로부터 들어와서,
평양에서 60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 군사와 서로 맞닥뜨리자 진격하여 이를 크게 깨뜨렸다.
내호아가 승세를 타고 성으로 달려오려고 하였으나, 부총관(副摠管) 주법상(周法尙)이 말리며,
여러 군대가 오기를 기다려 함께 나아갈 것을 청하였다.
내호아가 듣지 않고 정병 수만 명을 뽑아 곧바로 성 밑에 이르렀다.
우리 장수는 나성 안의 빈 절 속에 군사를 숨겨 두었다가,
군사를 내어 내호아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였다.
내호아가 쫓아 성으로 들어와서 군사를 놓아 약탈하느라고 다시 대오를 갖추지 못하였다.
이때 숨은 군사들이 나가니 내호아가 크게 패하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으며,
병졸이 돌아간 자가 불과 수천 명이었다.
우리 군대는 뒤쫓아 배 있는 곳까지 이르렀으나,
주법상이 진영을 정비하고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우리 군대는 이에 후퇴하였다.
내호아가 군사를 이끌고 바닷가 포구로 돌아가 주둔하였으나,
다시는 감히, 머무르면서 여러 군대에 호응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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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벌(九伐)
좌익위대장군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로 나오고,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荊元恒)은 요동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로 나오고,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은 현도도로 나오고,
우어위장군(右禦衛將軍) 장근(張瑾)은 양평도(襄平道)로 나오고,
우무후장군(右武候將軍)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로 나오고,
탁군태수 검교좌무위장군(檢校左武衛將軍)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遂城道)로 나오고,
검교우어위호분랑장(檢校右禦衛虎賁郎將) 위문승(衛文昇)은 증지도(增地道)로 나와서
모두 압록수 서쪽에 모였다.
우문술 등의 군사는 노하(瀘河)·회원(懷遠) 두 진에서부터
사람과 말에게 모두 100일 동안의 군량을 주고,
또 방패, 갑옷, 창과 옷감, 무기, 화막(火幕)을 나주어 주니,
사람마다 3섬이상이 되어 무거워 능히 운반할 수 없었다.
군중에 명령을 내려 “군량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하였으므로,
사졸들이 모두 군막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행군이 겨우 중도에 미쳤을 때 군량이 이미 떨어지려 하였다.
왕은 대신(大臣)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보내 그 진영에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였는데,
실은 그 허실을 보려 한 것이었다.
우중문이 앞서
“만약 왕이나 을지문덕이 오면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황제의 비밀 명령을 받았다.
우중문이 그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위무사(慰撫使)로서
굳이 말리므로, 우중문이 마침내 그 말에 따라 을지문덕을 돌아가게 하였다.
얼마 후에 그것을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 을지문덕을 속여
“다시 이야기하고 싶으니 다시 오시요.”라고 하였으나,
을지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수를 건너 가버렸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을지문덕을 놓치고 속으로 불안하였다.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졌으므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우중문이 정예군으로 을지문덕을 쫓으면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문술이 이것을 굳이 말리니 우중문이 성내며 말하였다.
“장군은 10만 군사에 의지하고도 작은 도적을 깨뜨리지 못하였으니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뵈올 것이요?
또한 나 우중문은 이번 걸음에 본래 공로가 없을 것을 알고 있었소.
왜냐하면 예전의 훌륭한 장수가 능히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중의 일을 결정하는 것이
한 사람에게 있었는데, 지금 사람마다 각각 다른 마음을 가졌으니,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소?”
이때 황제는 우중문이 계획이 있을 것으로 여겨,
여러 군대로 하여금 그에게 지휘를 묻고 품의하게 하였으므로, 이 말을 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문술 등이 부득이 그의 말에 따라,
여러 장수와 함께 물을 건너 을지문덕을 쫓았다.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들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짐짓 그들을 피곤하게 만들려고 매번 싸울 때마다 도망가니,
우문술이 하루 동안에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우문술이 이미 여러번 승리한 것을 믿고 또 여러 사람의 의논에 강제되어,
이리하여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서 산을 의지하여 진을 쳤다.
을지문덕은 다시 사자를 보내 거짓 항복하며 우문술에게 청하였다.
“만약 군대를 돌리시면 왕을 모시고 황제의 행재소로 알현하겠습니다.”
우문술은 사졸들이 피로하고 쇠약해져 다시 싸울 수 없는 것을 보고,
또 평양성이 험하고 튼튼하여서 갑자기 함락시키기 어려운 것을 헤아리고,
마침내 그 속임수에 따라 되돌아갔다.
우문술 등이 방형의 진을 이루고 행군하였는데,
우리 군대가 사방에서 습격하니 우문술 등이 한편 싸우며 한편 행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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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7월에
수나라 군대가 살수에 이르러 군대의 반이 건넜을 때
우리 군사가 뒤에서 후군을 쳤으므로,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여러 군대가 모두 무너져서 걷잡을 수 없게 되어 장수와 사졸들이 달아나 돌아가는데,
하루낮 하룻밤 사이에 압록수에 이르러 450리를 행군하였다.
장군인 천수(天水) 사람 왕인공(王仁恭)이 후군이 되어 우리 군대를 쳐서 물리쳤다.
내호아는 우문술 등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으며,
오직 위문승의 1군만이 홀로 온전하였다.
처음 9군이 요하를 건넜을때는 무릇 30만5천명 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가 다달았을 때는 겨우 2천7백 명이었으며,
쌓아둔 기계가 억만을 헤아렸으나 모두 잃어버려 없어졌다.
황제가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고 계묘일(25일)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전에 백제 왕 장(璋=무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칠 것을 청하니,
황제가 백제를 시켜 우리 나라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으나,
장은 안으로 우리나라와 몰래 통하였다.
수나라 군대가 장차 출동하려 하자,
장은 그 신하 국지모(國智牟)를 수나라에 들여보내 출병할 시기를 알려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후하게 상을 주고,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郞) 석률(席律)을 백제에 보내 모일 시기를 알렸다.
수나라 군대가 요하를 건너자, 백제도 역시 국경에 군사를 엄히 배치하고 말로는 수나라를 돕는다고
하면서, 실은 양다리를 걸치었다.
이 정벌에서 수나라는 다만 요수 서쪽에서 우리 무려라(武厲邏)를 함락시키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두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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