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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3차 침입
24년(613) 봄 정월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탁군에 모으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驍果)로 삼고, 요동 옛성을 수리하여 군량을 저장하였다.
2월에 황제가 가까이 모시는 신하에게
“고구려 같은 보잘 것 없는 오랑캐가 상국을 업신여긴다.
지금 바다를 뽑고 산을 옮길 일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라는데 하물며 이 오랑캐쯤이야?”라고 말하고,
다시 정벌할 것을 의론하였다.
여름4월에 황제가 요하를 건너서,
우문술과 양의신(楊義臣)을 보내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왕인공이 부여도로 나와서 진군하여 신성(新城)에 이르자,
우리 군사 수만 명은 막아 싸웠다.
왕인공이 굳센 기병1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쳐서 깨뜨렸으므로,
우리 군사는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황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요동을 공격하였는데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게 하였으므로,
비루(飛樓)·동차(車)·운제(雲梯)·지도(地道)로 사면에서 함께 진격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우리는 임기응변으로 막았으므로 20여일 동안 함락되지 않고,
적과 아군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충제(衝梯)의 장대의 길이가 15길이었는데,
효과 심광(沈光)이 그 꼭대기에 올라가 성을 내려다보면서
우리 군사와 싸우는데 칼을 가지고 맞붙어 십수 명을 죽였다.
우리 군사는 다투어 그를 공격하여 그가 떨어지게 되었는데,
미처 땅에 떨어지기 전에 마침 장대에 줄이 늘어져 있어, 심광이 거기에 매달려 다시 올라갔다.
황제가 그것을 보고 장하게 여겨 즉시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임명하였다.
요동성이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자,
황제가 베 주머니 백여만 개를 만들어 보내 그 속에 흙을 가득 넣어 쌓아서 어량대도(魚梁大道)를 만
들었는데, 넓이가 30보나 되고 높이가 성과 가지런하게 하여 전사들이 올라가 공격하게 하였다.
또 바퀴 여덟 달린 누거(樓車)를 만들었는데, 성보다 높게 하여 어량도를 끼고 성 안을 내려다보고
쏘면서 기일을 정해 장차 공격하려고 하였으므로, 성 안은 매우 위급하였다.
마침 양현감(楊玄感)이 반역하였다는 글이 오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으며,
또 고관의 자손들이 모두 양현감이 거처하는 곳에 있다는 것을 듣고 더욱 염려하였다.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이 본래 양현감과 친하였으므로 속으로 불안하여
우리에게 도망하여 왔다.
황제가 밤에 여러 장수를 몰래 불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군수품과 기계와 공격용 도구가 산처럼 쌓였고, 보루와 장막이 그대로여서 움직이지 않았으나,
무리의 마음이 떨며 두려워져 다시 부서를 나눌 새도 없이 여러 길로 흩어졌다.
우리 군사는 즉시 이것을 깨달았으나 감히 나가지 못하고 다만 성안에서 북치고 고함을 지를 뿐이었다.
다음날 오시(午時)가 되어 그제야 점차 밖으로 나갔으나,
수나라 군사가 속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였다.
이틀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수천 명의 군사를 내어 뒤를 밟아 쫓았으나,
수나라 군사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압박하지 못하고, 항상 8, 90리의 거리를 두었다.
요수에 거의 이르러서 황제의 병영이 다 건넌 것을 알고는 그제야 감히 후군을 압박하였다.
이때 후군도 수만 명이나 되었는데 우리 군사는 좇아가 습격하여 수천 명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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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4차 침입
25년(614) 봄 2월에
황제가 모든 신하들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정벌할 일을 의론하게 하였는데,
여러 날 동안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다시 징발하여 여러 길로 함께 진군하게 하였다.
가을 7월에 황제의 수레가 회원진(懷遠鎭)에 행차하였다.
이때 천하가 이미 어지러워져서 징발된 군사들이 기일을 어기고 도달하지 못한 자가 많았으며,
우리나라도 역시 지쳐 있었다.
내호아가 비사성(卑奢城)에 이르자 우리 군사가 맞아 싸웠으나,
내호아가 쳐서 이기고 평양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수나라군이나, 당나라군이나,
평양성을 가기위해 계속 비사성을 공격한다.
평양성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지금의 평양을 가기위해 천리 떨어진 곳에 상륙한단 말인가..
봉황성이 평양성이라는 증거이다...]
왕은 두려워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그에 따라 곡사정을 돌려 보내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고 절부를 가진 사신을 보내 내호아를 소환하였다.
8월에 황제가 회원진으로부터 군대를 돌이켰다.
겨울 10월에 황제가 서경(西京)으로 돌아가서 우리 사신과 곡사정을 데리고 대묘(大廟)에 고하고,
이내 왕을 불러 입조하게 하였으나, 왕은 끝내 따르지 않았다.
황제가 장수에게 명하여 무장을 엄하게 하고 다시 후일의 거사를 꾀하였으나
마침내 실행하지 못하였다
29년(618)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영양왕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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