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 대, 영양왕 (유아 양 왕) (재위 기간 : 서기 590 ~ 618 년) 양 왕,
영양왕 을평양왕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원인데 또는 대원이라고도 하며, 평원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풍채가 준수하고 쾌활하였으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였다.
평원왕 재위 7년에 태자가 되었다.
32년에 왕이 별세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수나라 문제가 사신을 보내 왕을 상개부의동삼사로 임명하고,
전왕의 요동군공의 관직을 계승케 하고, 옷 한 벌을 주었다.
2년(서기 591) 봄 정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표문(表文)를 올려 사은하고 왕을 봉해 주기를 청하니,
황제가 이것을 허락하였다.
3월에
수나라 황제가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수레와 의복을 주었다.
여름 5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사은하였다.
3년(592) 봄 정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8년(597) 여름 5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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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1차 침입
9년(598) 봄 2월에 왕은 말갈의 무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략하였는데,
영주(營州) 총관(摠管) 위충(韋)이 이를 격퇴시켰다.
수나라 문제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노하여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積)을
모두 원수(元帥)로 삼아서, 수군과 육군 30만을 거느리고 와서 고구려를 쳤다.
여름 6월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빼앗았다.
한왕 양의 군사가 임유관(臨渝關)으로 나와서 홍수를 만나 군량의 운반이 이어지지 못하자,
군사들은 식량이 떨어지고 또 전염병에 걸렸다.
주나후(周羅睺)가 동래(東萊)로부터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쳐들어오다가,
역시 바람을 만나 배가 많이 표류하고 가라앉았다.
가을 9월에 수나라의 군대가 돌아갔으나 죽은 자가 열 명 중 여덟, 아홉이었다.
왕도역시 두려워하여서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표를 올려
‘요동 더러운 땅의 신하 모(某)’라고 스스로 칭하였다.
황제가 이리하여 군진을 풀고 고구려를 처음과 같이 대하였다.
백제왕 창(昌=위덕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서 군대의 길잡이가 되겠다고 청하였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고구려가 죄를 자복하여 짐이 이미 용서하였으므로 벌할 수 없다.”
라고 하고, 그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왕은 그 사실을 알고 백제의 변경을 침략하였다.
11년(600) 봄 정월에 사신을 수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옛 역사책을 요약하여 신
집(新集) 5권을 만들었다.
국초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할 때 어떤 사람이 사실을 100권으로 기록하여 이름을
유기 (마음에 체류)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깎고 고친 것이다.
14년(603) 가을 8월에 왕은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쳤다.
신라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건너오니, 성안에서는 북치고 소리지르며 서로호응하였다.
고승(高勝)은 저들이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므로,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물러났다.
18년(607).
이전에 양제(煬帝)가 계민(啓民)의 장막에 행차하였을 때 우리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었는데,
계민이 감히 숨기지 못하고 함께 황제를 알현하였다.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裵矩)가 황제에게 말하였다.
“고구려는 본래 기자(箕子)에게 봉해진 땅으로, 한(漢)나라와 진(晉)나라가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신하노릇을 하지 않고 따로 이역(異域)이 되었으므로 선제께서 정벌하려고 한지 오래됩니다.
다만 양량(楊諒)이 불초하여 군대가 출동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폐하의 때를 당하여 어찌 취하지 않음으로써 예의가 바른 지경을 오랑캐의 고을로 만들겠습니까?
지금 그 사신은 계민이 온 나라를 들어 복종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해서 위협하여 입조하게 하십시오.”
황제가 그 말에 따라 우홍(牛弘)에게 명하여 칙명을 내리게 하였다.
“짐은 계민이 성심껏 나라를 받들기 때문에 친히 그 장막으로 왔다.
내년에는 마땅히 탁군(郡)으로 갈 것이다.
네가 돌아가는 날, 너의 왕에게, 마땅히 빨리 와서 조회하고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아뢰어라.
위문하고 양육하는 예는 마땅히 계민의 경우와 같이 할 것이다.
만약 조회하지 않으면 장차 계민을 거느리고 너희 땅으로 순행할 것이다.”
왕은 번신(藩臣)의 예를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황제가 쳐들어 올 것을 두려워하였다.
계민은 돌궐의 가한(可汗)이다.
여름 5월에 군대를 보내 백제 송산성(松山城)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석두성(石頭城)으로 옮겨 습격하여 남녀 3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19년(608) 봄 2월에
장수에게 명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을 습격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았다.
여름 4월에 신라 우명산성(牛鳴山城)을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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