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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 -600-800; 수,당

고-당전쟁; 사수대전1 [647- 661년] 당나라의 고구려 공격...

by 사마르칸트 2016. 3. 16.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644-645년;

당태종이 수십만 병력으로 고구려를 정벌하지만...

참혹한 패배를 당하고 자신은 부상을 입는다.


이후 당태종은 죽을때 까지 매년 고구려를 공격한다.


-아마도 자신의 후계자인 당고종이 너무 유약하여,

당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주변의 강국을 없앨려는 시도였는데...


-하지만..이것은 진시황같이 부질없는 짓...

-당태종 사후에 고종은 첩실인 측천무후에게 휘둘려 권력을 뺏기고..

이윽고 당나라가 망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측천이 주나라를 세우고...무씨의 나라가 되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외적의 침입보다...

내부부터 망가지는게 우선이다...


-이 와중에 천년왕국인 고구려와 백제가 망하지만...

이 또한 역사의 흐름이니 어쩌겠는가...


-그런대 이들이 남겨놓은 기록에는

당나라는 항상 이긴다...그런데 물러간다...

역사기록을 입맛대로 해놓았으니..중국의 뻥은 점점 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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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7년


좌무위대장군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靑丘道)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만여 명을 파견하여

누선(樓船)을 타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오게 하였다.


또 태자 첨사(詹事) 이세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손이랑(孫貳朗) 등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도독부의 군사를 앞세우고
신성도로부터 들어오게 했는데, 두 군대는 모두 물에 익어서 잘 싸우는자들을 골라 배치하였다.


여름 5월에 이세적의 군사가 이미 요수를 건너 남소 등 몇 성을 지나가자
우리 군대는 모두 성을 등지고 막아 싸웠으나, 이세적이 이를 격파하고 그 나성(羅城)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가을 7월에 우진달과 이해안이 우리 국경에 들어와 무릇 백여 차례나 싸워 석성(石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나아와 적리성(積利城) 밑에 이르렀다.
우리 군사 만여 명이 나가 싸웠으나 이해안이 이를 쳐서 이기니, 우리 군사의 죽은자가 3천 명이었다.



8월에 태종이 송주(宋州) 자사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명령하여 강남 12주의 공인(工人)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게 하고 우리를 치려하였다.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을 뚫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고,

변칙적으로 수군을 동원한 상륙작전을 펼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음...


->성과가 있다면....대규모 원정군을 상륙시키는 노하우가 생겨...

바다 건너..백제를 정벌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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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648)

당나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우무위대장군 설만철(薛萬徹)을 청구도 행군대총관으로,
우위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裴行方)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3만여 명과 누선 전함을 이끌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공격하였다.


여름 4월에 오호진(烏胡鎭) 장수 고신감(古神感)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침공해 와서 우리 보병과 기병 5천명을 만나 역산(易山)에서 싸워 이들을 깨뜨렸다.

그날 밤에 우리 군사 만여 명은 고신감의 배를 습격하였으나 고신감의 복병이 나와 [우리가] 패하였다.


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을 보내 와서 침공하게 하였는데,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泊灼城) 남쪽 40리 되는 곳에 이르러 군영을 쳤다.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은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막았으나,

설만철이 우위장군 배행방을 보내 보병과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쳐서이기니,

우리 군사들이 무너졌다. 배행방 등이 군사를 내보내어 포위하였으나, 박

작성은 산에 의지하여 요해처를 세우고 압록수로 굳게 막혔으므로,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문(高文)은 오골(烏骨), 안지(安地)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였는데,

두 진으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설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니, 우리 군사는 패하여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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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년 당태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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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654)

울 10월에 왕은 장수 안고(安固)를 보내 고구려 군대와 말갈 군사를 출동시켜 함께

거란을 쳤는데,
송막도독(松漠都督) 이굴가(李窟哥)가 막아서 신성에서 우리 군사를 크게 패퇴시켰다.


->거란은 대대로 고구려의 인민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당의 정벌을 당하고...당의 회유책에  당쪽으로 붙었다.

거란족의 지리적 위치는 정말 중요하다.

요동과 요서의 내륙에 있는 그들이

당군의 보급부대를 공격하거나.

후퇴하는 당군을 급습한다면...

당나라로서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거란을 우리쪽으로 끌어들여야

당의 요동침입을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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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655) 봄 정월.

이에 앞서 우리가 백제·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33성을 빼앗았으므로,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조를 구하였다.


2월에 고종(高宗)이 영주도독 정명진(程名振)과

좌위중랑장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다.

여름5월에 정명진 등이 요수를 건너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문을 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 마주 싸웠다.

정명진 등이 분발하여 우리 군사를 공격해서 크게 이기고 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그 외곽과 촌락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요동으로 출격하지만...또 다시 놀래서 도망간다.

고작 촌마을에 불지러르 왔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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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658)

여름 6월에

당나라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東夷都護) 정명진과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薛仁貴)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으나 우리에게 이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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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659)

겨울 11월에

당나라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 등이

우리 장수 온사문(溫沙門)과 횡산(橫山)에서 싸워서 이를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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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660)

가을 7월에 평양의 강물이 무릇 3일 동안이나 핏빛이었다.

->고구려에 내전이 일어났을 것이다.


겨울 11월에 당나라가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을 패강도(浿江道) 행군대총관으로,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좌효위장군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행군총관

포주 자사 정 명진을 누방도총관으로 삼아

각각 다른 길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우리를 공격했다


->요동으로 2군, 바다로 2군을 보내 공격함..

->결과는 없음...아마도 패하였거나, 성과 없이 물러갔을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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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년 음7월 백제 패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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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661)


봄 정월에 당

나라가 하남·하북·회남의 67주의 군사를 모집하여

4만 4천여 명을 얻어서 평양·누방 군영으로 나아가고,

->중국남쪽의 수군을 징발한 것임


 또 홍려경(鴻卿)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회흘(回紇) 등

여러 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임아상(任雅相)을 패강도행군총관으로,
계필하력을 요동도 행군총관으로,

소정방을 평양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소사업 및 여러 오랑캐 군사와 함께

무릇 35군이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일제히 전진하게 하였다.


->35군이면 200만대군에 가깝다..



-여름 5월에 왕은 장군 뇌음신(惱音信)을 보내 말갈의 무리를 이끌고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여 열흘이 되도록 풀어주지 않았으므로,

라는 식량길이 끊겨 성 안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갑자기 큰 별이 우리 진영에 떨어지고 또 비가 오고 천둥이 쳤으므로,

뇌음신 등은 의심하고 놀라서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가을 8월에 소정방이우리 군사를 패강에서 깨뜨려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 9월에

연개소문은 그 아들 남생(男生)을 보내 정예군 수만 명으로써 압록수를 지키게 하였으므로

여러 군대가 건너 올 수 없었다.


계필하력이 이르렀을 때 얼음이 크게 얼었으므로,

계필하력이 무리를 이끌고 어름을 타고 물을 건너

북을 치고 소리 지르며 진격하니, 우리 군사가 무너져 달아났다.

계필하력이 수십리를 뒤쫓아 우리 군사 3만 명을 죽였으며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항복하고 남생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마침 군사를 돌리라는 조서가 내려져 이리하여 그들은 돌아갔다.


->참 웃기는 기록이다. 대승을 얻고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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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년(662) 사수전투


봄 정월에

좌효위장군 백주(白州) 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龐孝泰)가

사수(蛇水)가에서 연개소문과 싸웠는데,

전군이 몰락하고 그 아들 13명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소정방이 평양을 포위하였으나 마침 큰 눈이 와서 포위를 풀고 물러 갔다.


무릇 전후에 걸친 행군에서 모두 큰 성과없이 물러 갔다.




->늘상 당나라가 이기는 기록만 있다.


또는 출정은 했는데 다음 기록이 없다????


-이긴 기록은 다음에 패하여 물러간 것이고..


출정 기록만 있는 것은


한번도 못이기고 패하여 돌아온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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