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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 2.중세사

고려 용장 양규장군 이야기....

by 사마르칸트 2013. 11. 23.

 

 

고려사 절요에서 양규 장군에 관한 글을 보면..

 

○ 신묘일에 거란주가 친히 보병과 기병 40만 명을 거느리고

의군 천병(義軍天兵)이라 칭하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흥화진(興化鎭 평북 의주군(義州郡))을 포위하니,

순검사(巡檢使) 형부낭중 양규(楊規)가

진사(鎭使) 호부낭중 정성(鄭成)ㆍ부사(副使) 장작주부(將作注簿) 이수화(李守和)ㆍ판관(判官) 늠희령(廩犧令) 장호(張顥)와 함께 농성하여 굳게 지켰다.

 

 

○ 거란이 강조의 서신을 거짓 꾸며서 흥화진으로 보내어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양규(楊規)가 말하기를, “나는 왕명을 받고 왔다.

강조의 명령을 받을 것이 아니다." 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또 노진(盧戩)과 그 합문사(閤門使) 마수(馬壽)를 시켜 격서를 가지고 통주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성 안의 사람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중랑장(中郞將) 최질(崔質)과 홍숙(洪淑)이 소매를 떨치며 일어나서 노진과 마수를 체포하고

이어 방어사(防禦使) 이원귀(李元龜)ㆍ부사(副使) 최탁(崔卓)ㆍ대장군(大將軍) 채온겸(蔡溫謙)ㆍ판관(判官) 시거운(柴巨雲)과 더불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그제야 통일이 되었다.

 

 

○ 경신일에 양규(楊規)가 흥화진(興化鎭)에서 군사 7백여 명을 거느리고

통주에 이르러 군사 1천 명을 수합하여,

신유일에 곽주에 들어가서 거란의 주둔 군사를 쳐서 모두 베어 죽이고

 성 안의 남녀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

이날에 거란주가 서경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포위를 풀고 동쪽으로 갔다.

 

 

○ 임진일에 양규(楊規)가 거란 군사를 무로대(無老代 평북의 주ㆍ군)에서 습격하여

머리 2천여 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남녀 3천여명을 빼앗았다.


계사일에 양규가 또 이수(梨樹)에서 싸워 석령(石嶺)까지 추격하여

 머리 2천 5백여 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남녀 1천여명을 빼앗았다.

 


○ 을미일에 왕이 행차를 돌려서 복룡현(伏龍縣)에서 머물렀다.

 


○ 병신일에 양규가 또 여리참(餘里站)에서 싸워 머리 1천여 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남녀 1천여 명을 빼앗았다.

이날 세 번 싸워서 모두 이겼다.


○ 경자일에 왕이 전주에 머물러 7일을 지냈다.


 

○ 임인일에 양규가 다시 거란 군사의 전봉을 애전(艾田)에서 맞받아 쳐서 머리 1천여 급을 베었다.

조금 후에 거란주의 대군이 불시에 이르자,

양규와 김숙흥이 종일토록 힘껏 싸웠으나

군사가 모두 죽고 화살이 다하여 모두 적의 진중에 뛰어들어 죽었다.

 

양규는 후원도 없는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한 달만에 모두 일곱 번 싸워 거란 군사를 매우 많이 죽이고

사로잡혀 있던 사람 3만여 명을 빼앗았고,

낙타ㆍ말ㆍ무기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얻었다.

 

거란 군사는 여러 장수들에게 초격(鈔擊)되었고,

또 큰 비로 인하여 말과 낙타가 지쳤으며 무기를 모두 잃어버렸다.


계묘일에야 압록강을 건너 군사를 이끌고 물러가는데,

진사(鎭使) 정성(鄭成)이 이를 추격하여 그들이 반쯤 건너갔을 때에 뒤에서 치니

거란 군사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항복했던 여러 성이 모두 수복되었다.

 

양규에게 공부상서를, 김숙흥에게 장군(將軍)을 증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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