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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 2.중세사

고려사절요 제29권 - 공민왕 4(恭愍王四)

by 사마르칸트 2013. 12. 17.

 

이성계 장군의 1차 요동정벌입니다.

 

 

고려사절요 제29  

 

공민왕 4(恭愍王四

 

경술 19(1370), 대명 홍무 3 

 

 

○ 봄 정월 갑오일에 혜성(彗星)이 동북방에 나타났다.

 

 

 ○ 우리 태조(이성계(李成桂)) 기병 5천 명과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에서 황초령(黃草嶺 함남 함흥(咸興))을 넘어 6백여 리를 가서 

설한령(雪寒嶺 평북 강계(江界))에 이르고,

  7백여 리를 가서 갑진일에 압록강을 건넜다

 

이날 저녁에 서북방에서 자줏빛의 서기가 공중에 가득히 차고 그 그림자가 모두 남쪽으로 향하니

서운관(書雲觀)에서 말하기를, “맹장의 기운입니다." 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성계(李成桂)를 보냈으니, 반드시 그 징험일 것이다." 했다

 

 

이때 동녕부 동지(東寧府同知)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 이원경(李原景))

태조가 온다는 말을 듣고

 

우라산성(亏羅山城 봉천성(奉天省) 회인현(懷仁縣) 동가강(佟佳江) 오른쪽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옮겨 험한 곳에 웅거하여 막으려 하였다

 

태조가 야돈촌(也頓村)에 이르자 오로첩목아가 와서 싸움을 걸었으나

조금 후에 무기를 버리고 두 번 절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대는 본래 고려 사람이니, 신복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며,

3백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했으나,

 그 추장 고안위(高安慰)는 아직도 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으니,

우리 군사가 이를 포위하였다.

 

 

 이때 태조는 활과 살을 가지고 있지 않아 종자의 활을 가지고 아기살로 적을 쏘았는데

무려 70여 발을 쏘아 모두 그 얼굴을 맞히니

성 안 사람들이 놀라 기운이 빠졌다. 고안위는 밤에 처자를 버리고 줄에 매달려 성을 넘어서 도망하였다

 

 

이튿날 두목 20여 명이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항복하니, 여러 산성도 풍문만 듣고 모두 항복했는데

그 호수가 무려 만여 호나 되었다

 

노획한 소 2천여 마리와 말 수백 필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 주니, 북방 사람이 크게 기뻐하여

저자로 사람들이 몰려가듯 귀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동으로는 황성(皇城)에 이르고

북으로는 동녕부(東寧府)에 이르고

서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모두 텅 비게 되었다.

 

 

○ 여진의 만호 궁대(弓大)가 토산물을 바치고, 부락 1백 호로써 정릉(正陵)에 예속하기를 청하였다

○ 임자일에 지진이 있었다

○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하여 부처의 치사리(부처의 이에서 나온 사리)

호승(胡僧) 지공(指空)의 두골을 보고, 대궐 안에 맞아들였다.

 

 

○ 우리 태조와 서북면 상원수 지용수(池龍壽)와 부원수 양백연(楊伯淵) 등에게 명하여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였다

일찍이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는 원 나라에서 벼슬하여 평장이 되었다.

 원 나라가 망하니, 분사요심(分司遼瀋)의 관원 평장 김백안(金伯安), 우승(右丞) 합라파두(哈刺波豆), 참정(參政) 덕좌불화(德左不花) 등과 함께 망한 원 나라의 남은 무리들을 불러모아 동녕부에 웅거하였는데

그 아버지 기철의 죽음에 원한을 품고 우리나라의 북쪽 변방에 쳐들어와서 원수를 갚으려 하므로

왕이 명하여 이를 치게 하였다.

 

 

 

 

11월 정해일에 

우리 태조와 지용수(池龍壽) 등이 의주에 이르러서

뜬다리를 만들어 압록강을 건넜는데사졸들이 3일 만에 모두 다 건넜다.

 

 이날 저녁에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오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병마사 이구(李玖)가 말하기를, “길조를 어찌 의심하겠는가." 하였다

 

여러 원수가 이유를 물으니, 이구가 말하기를,

 “용이 움직일 때는 반드시 천둥이 치고 비가 오게 마련인데

지금 상원수(지용수(池龍壽))가 그 이름이 용() 자인데

강을 건너는 날에 천둥치고 비가 내리니 싸움에 이길 징조입니다." 하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무자일에 나장탑(螺匠塔)에 이르니요성(遼城)과의 거리가 2일 노정이었다.

군수품 대부분을 그곳에 남겨 두고, 7일분의 양식만 가지고 떠났다

 

비장 홍인계(洪仁桂)·최공철(崔公哲) 등에게 날랜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게 하여

기축일에 나아가서 요성을 습격하였다

 

저들이 우리 군사가 소수임을 보고는 가볍게 싸움에 응했으나

대군이 잇달아 이르니 성 안 사람들이 바라보고 낙담하였다

 

그 장수 처명(處明)이 날래고 용맹함을 믿고 그래도 막아 싸우니,

 태조가 이원경(李原景)을 시켜 그에게 타이르기를,

 

 “너를 죽이기는 매우 쉽지마는, 너를 살려서 쓰고자 하니 빨리 항복하라."고 하였다.

 

 

 그 말을 따르지 않으니 이원경이 말하기를,

 “네가 우리 장군의 재주를 모르기 때문이다.

 네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단번에 쏘아서 가슴팍을 꿰뚫을 것이다." 하였으나

처명이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활을 쏘아 일부러 투구를 스치게하고,

 원경을 시켜 타일렀으나, 역시 그 말을 따르지 않으므로 태조가 또 그 다리를 쏘니

처명이 화살에 맞고 달아났다

 

 

얼마 후에 다시 와서 싸우려고 하므로, 원경을 시켜 타이르기를,

 “네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곧 네 얼굴에 쏠 것이다." 하니

처명이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면서 항복하였다.

 

 

 저쪽의 어떤 사람이 성에 올라 부르짖기를

, “우리들은 대군이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성을 지키는 장수가 강제로 우리들로 하여금 막아 싸우게 하였으니,

 고려 군사가 만약 힘을 다하여 공격한다면 성을 빼앗을 수 있다." 하였다

 

성이 매우 높고 험준하며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지고, 나무와 돌까지 섞여서 쏟아졌으나

우리의 보병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성 가까이 가서 급히 공격하여, 드디어 함락시켰다.

 

 새인첩목아(賽因帖木兒)가 도망하였으므로

김백안(金伯顔)을 사로잡고 성의 동쪽으로 군사를 물러나게 하였다

 

 

이튿날 군사가 성의 서쪽 10리 되는 곳에 주둔하였다.

 

 

 이날 밤에 붉은 기운이 진영을 내리쏘는데 활활 타는 불길 같았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이상한 기운이 진영에 내려쏘이니, 다른 데로 옮겨 둔치면 크게 길하리라." 하였다

 

신묘일에 드디어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왔다

처음에 성을 함락시킬 때, 우리 군사가 창고에 불을 질러 거의 없앴으므로 양식을 취할 데가 없어졌다

 

군중에서 크게 굶주려 소와 말을 잡아 먹게 되니, 진을 칠 겨를도 없었으며

뒤쫓는 군사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사잇길을 따라 돌아오는데

들에서 자면서 사졸들로 하여금 각기 뒷간과 마굿간을 만들게하였다.

 

 

 

나하추 (納哈出)가 이틀이나 뒤를 밟아와서 말하기를,

“변소와 마굿간을 만들었으니, 군사의 행진이 정제(整齊)하다.

그러니 습격할 수 없다."

 

하면서 돌아갔다

 

군사가 안주(安州)에 이르렀을 때 김백안(金伯顔)을 목베었다

그 아버지는 우리나라의 중인데,

통제원(通濟院)의 여종과 사통하여 백안을 낳았다

백안은 원나라에 들어가서 벼슬을 역임하여 평장(平章)에 이르렀다

 

 

○ 정언 이첨(李詹)이 소를 올려 6부와 대성의 관원에게

매월 육아일(六衙日 한 달에 여섯 번 관아에서 일을 보는 날)에 친히 일을 아뢰도록 하고

또 사관으로 하여금 입시하도록 청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여진의 달마대(達麽大)가 사신을 보내어 땅을 바치므로,

달마대를 대장군 진변도호부사(大將軍鎭邊都護府使)로 삼고 의복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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