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절요에
○ 8월 을축일에 거란의 장수 아아(鵝兒)와 걸로(乞奴)가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영주(寧州 평북 영주(靈州))·삭주(朔州)·정주(定州)·융주(戎州)의 지경을 침범하였다.
이보다 앞서 거란의 군사가 대부영(大夫營)을 치면서 사람을 보내어
북계병마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군량을 보내어 우리를 돕지 않으면 우리가 반드시 너희의 강토를 침범할 것이다.
내가 훗날에 황색 기를 세우거든 네가 와서 황제의 조칙을 들으라. 만약 오지 않으면 너를 칠 것이다.” 하였다.
갑자일이 되어 과연 황색 기를 세웠는데 병마사가 가지 않았더니
그 이튿날 압록강을 건너와서 영주·삭주 등의 진(鎭)을 공격하고,
성 밖에 있던 재물·곡식·축산을 빼앗아 갔다.
병인일에 의주(義州)·정주(靜州)·삭주(朔州)·창주(昌州 평북 창성(昌城))·운주(雲州)·연주(燕州) 등의 주(州)와
선덕(宣德 함남 정평(定平))·정융(定戎)·영삭(寧朔) 등의 여러 진에 난입하여
모두 저의 처자(妻子)를 데리고 다니니 산과 들에 사람이 가득히 찼다.
곡식과 우마를 마음대로 빼앗아 먹고 한 달 동안이나 있다가 먹을 것이 없어지자
운중도(雲中道)로 옮겨 갔다.
기사일에 상장군 노원순(盧元純)을 중군병마사로 삼고,
지어사대사 백수정(白守貞)을 지병마사로 삼고,
좌간의대부 김온주(金蘊珠)를 부사로 삼고,
상장군 오응부(吳應富)를 우군병마사로 삼고,
최종준(崔宗俊)을 지병마사로 삼고,
시랑 유세겸(庾世謙)을 부사로 삼고
대장군 김취려(金就礪)를 후군병마사로 삼고,
최정화(崔正華)를 지병마사로 삼고,
진숙(陳淑)을 부사로 삼아 거란을 방어하게 하였다.
○ 거란의 군사가 창주(昌州)에서 연주(延州)의 개평역(開平驛)·원림역(原林驛) 두 역으로 옮겨 둔치고
종일토록 왕래하여 그치지 않으므로
삼군(三軍)이 신기(神騎)의 장수를 보내어 이를 뒤쫓아 가서 신리(新里)에서 싸워 머리 1백 90급을 베었다.
삼군이 나아가 연주(延州)에 주둔하고,
광유(光裕)·연수(延壽)·주저(周?)·광세(光世)·군제(君悌)·조웅(趙雄) 등 여섯 장수는
사자암(獅子?)을 지키게 하고, 영린(永麟)·적부(迪夫)·문비(文備)의 세 장수는 양주(楊州)를 지키게 하였다.
그 이튿날 아홉 장수가 조종수(朝宗戍)에서 목베고 사로잡은 수가 모두 7백 60여 명이나 되고,
말·노새·소와 패인(牌印)·병장기를 노획한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거란이 다시 군사를 나누지 못하고 개평역(開平驛)에 모여서 둔치니,
삼군이 이미 이르렀으나 모두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우군(右軍)은 서산의 기슭에 웅거하고,
중군은 적군을 들에서 맞이하여 조금 후퇴하여 독산(獨山)에 둔쳤다.
후군병마사 김취려(金就礪)가 칼을 뽑아들고 말을 채찍질하여
장군 기존정(奇存靖)과 더불어 적군의 포위를 돌파하고 드나들면서 후려치니 거란의 군사가 무너졌다.
이를 뒤쫓아 개평역(開平驛)을 지나가자 적이 역의 북쪽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급히 중군을 치므로
취려가 되돌아와서 이를 치니 거란의 군사가 또 무너졌다.
중군병마사 노원순(盧元純)이 밤에 취려에게 말하기를,
“저들은 군사가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으며, 우군도 이르지 않았소.
당초에 3일 먹을 양식만 준비하였는데 지금 벌써 다 떨어졌으니,
물러가서 연주성(延州城)에 웅거하여 후일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요.” 하니,
취려가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여러 번 이겼으므로 투지가 아직 왕성하니,
그 예봉을 이용하여 한 번 싸운 뒤에 의논하기로 합시다.” 하였다.
적군이 묵장(墨匠) 들에 진을 치니, 기세가 매우 강성하였다.
원순(元純)이 빨리 취려를 불러 오고, 또 검은 깃발을 날려 신호를 하니,
사졸들이 시퍼런 칼날을 무릅쓰고 다투어 나아가서 한 사람이 백 명을 당해 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취려가 문비(文備)와 더불어 적의 진을 가로 끊으니, 가는 곳마다 적군이 쓰러졌다.
세 번 싸워서 다 이겼는데, 취려의 맏아들이 전사하였다.
○ 거란군이 동주(東州 강원 철원(鐵原))를 함락하였다.
최충헌이 왕에게 아뢰기를,
“거란군이 동주를 지났으니, 형세가 장차 남쪽으로 내려올 것입니다.
그런데 오군이 머무른 채 싸움을 하지 않으면서, 군량만 낭비하니,
곤외(?外)의 일(장수의 움직임)을 위임한 본의가 아닙니다.
응부를 파면하고 아울러 자서(子壻)의 직을 빼앗아
전군병마사 최원세(崔元世)에게 그를 대신 하게 하고,
상장군 김취려(金就礪)를 전군병마사로 삼으소서."
하였는데, 왕이 이 말을 따랐다.
○ 중군ㆍ전군이 거란병을 충주ㆍ원주(原州) 사이의 법천사(法泉寺 경기 여주(驪州))로 추격하여,
독점(禿岾)에 이차(移次 행군을 옮김)하였다.
최원세가 말하기를,
“내일 나가는 길이 두 갈래인데, 내가 어느 길로 가는 것이 좋겠는가?" 하니,
김취려가 말하기를,
“군사를 나누어 기각지세(?角之勢 양편에서 동시에 들이치려는 작전 태세)를 베푸는 것이 역시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원세가 이 말을 따라, 다음날 맥곡(麥谷)에서 모여 적과 더불어 싸워서 적의 목 3백여 급을 베고,
제주(堤州 충북 제천(堤川))의 냇가까지 바싹 뒤쫓으니,
물에 떠오른 시체가 내를 덮어 떠내려갔다.
사흘이 지나 박달현(朴達峴)까지 쫓아갔는데,
가발병마사(加發兵馬使) 임보도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한데 모였다.
원세가 취려에게 이르기를,
“영상(嶺上)은 대군이 머무를 곳이 못 되니, 산 아래로 내려가 둔치고자 하노라." 하였다.
취려가 말하기를,
“용병(用兵)하는 법은, 비록 인화(人和)가 귀하나, 지리(地利) 또한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
만약 적이 먼저 고개에 웅거하면 우리가 아래에 있게 될 것이니,
적이 들이친다면 날쌘 원숭이[猿?]라도 지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사람임에랴."
하고 삼군이 드디어 고개에 올라 밤을 지냈다.
어둑새벽에 적이 과연 고개 남쪽으로 진군하여,
먼저 수만 명에게 좌우의 봉우리를 두 패로 나누어 올라가게 하여 요해처를 빼앗으려 하였다.
원세 등이 장군 선덕위(申德威)ㆍ이극인(李克仁)에게 왼편을 담당하게 하고,
최준문(崔俊文)ㆍ주공예(周公裔)에게 오른편을 담당하게 하며,
원세와 취려는 가운데에서 북을 치며 기세를 올리니 군사들이 모두 죽기를 무릅쓰고 싸웠다.
삼군이 바라보다가 또한 큰소리를 지르며 앞을 다투어 쳐들어가니,
적이 크게 무너져 노약한 남녀와 병기ㆍ치중을 낭자하게 버리고 달아났다.
적이 이로 말미암아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모두 동쪽으로 달아나자
명주(溟州 강원 강릉(江陵)) 대관산령(大關山嶺)까지 쫓아 갔는데,
장졸이 겁내고 약하기 때문에 물러나 둔쳤다가 열흘 만에야 진군하였더니,
적은 벌써 고개를 넘어갔다.
○ 전군병마사 김취려가 중국의 첩문(牒文)을 받고
정주(定州 함남 정평(定平))로 군사를 옮기어 적을 엿보게 하고 돌아와 말하기를,
“적이 함주에서 우리와 경계를 맞대고 있어서,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린다." 하였다.
취려가 녹각(鹿角) 담을 쌓되 그 황참을 세 겹으로 두르고,
이극인ㆍ노순우(盧純祐)ㆍ신덕위ㆍ박유(朴?) 등 네 장수를 머물러 지키게 하였으며,
자신은 흥원진(興元鎭)으로 옮겨 웅거하였다.
○ 겨울 10월에 황기자군이 인주ㆍ용주(龍州 평북 용천(龍川))ㆍ정주 3주의 경계에 둔쳤는데,
서북면병마사 조충이 싸워서 5백 10여 급의 목을 베었으므로,
곧 조충의 구직을 복직시켰다.
조충이 또 황기자군과 인주 암림평(暗林平)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사로잡거나 죽이고 강물에 빠뜨린 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니, 겨우 3백여 기(騎)가 도망쳐 갔다.
○ 거란병이 여진 군사를 얻어서 다시 성세를 떨쳐 멀리서부터 몰아 들어 왔다.
김취려가 회군하다가 예주(豫州 함남 정평(定平)) 생천(?川 함남 정평)에서 적을 만나 교전하고 물러났다.
김취려가 갑자기 병이 나니 장좌(將佐)들이 청하기를,
“돌아가서 의약(醫藥)으로 다스리십시오." 하였다.
취려가 대답하기를,
“차라리 변성(邊城)의 귀신이 될지언정, 어찌 병을 가지고 수레에 올라 집에서 편안하기를 구하겠는가." 하였다.
병이 심해지자. 서울에 돌아와 병을 고치라는 칙명이 있어,
가마를 타고 서울에 와서 여러 달 만에 병이 나았다.
○ 김취려가 남겨 둔 군사가 거란군과 위주(渭州)에서 싸워 패하였다.
○ 중군과 재추가 의논하여 시로써 생도를 시험해서 80여 명을 뽑고,
합격하지 못한 자들은 모두 종군하게 하였다.
조충을 서북면 원수로, 김취려를 병마사로,
차장군 정통보를 전군으로, 오수기를 좌군으로,
신선주를 우군으로, 이림(李霖)을 후군으로,
이적유(李?儒)를 지병마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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