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문무왕릉 비문에서 보이는
“투후제천지윤전칠엽(?侯祭天之胤傳七葉)”
-신라 왕족 김씨가 혈연적으로 흉노족인 김일제의 후손
-신문왕대(681~691) 초에 만들어진 문무왕릉비.
-“투후(?侯) 김일제의 후손이 7대를 이어 내려와”
운운한 후 문무왕의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의 출현
2.‘대당고김씨부인묘명
-중국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시 비림박물관에서
신라 김씨 왕실의 시조를 자세히 기록한 재당(在唐) 신라인 여성의 묘지명을 발견
-김씨부인 묘지명은 총 23행에 행당 최대 27자씩 새길 수 있게 면을 나눈 다음 모두 593자를 예서체로 기록했다.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냈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한다.
이는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갖게 된 세조(世祖)다.
그 후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
온 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의 이름은 일제(日?)인데 흉노의 조정에 몸담고 있다가
서한(西漢)에 귀순해 무제 아래에서 벼슬을 했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겼으므로 무제가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亭侯)에 봉했다.
투정후에 봉해진 이후 7대에 걸쳐 벼슬을 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 : 당나라 장안성 일대에 설치한 군으로, 지금의 산시성 시안시)에 정착하게 됐는데,
그러한 것은 역사책에 기록돼 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漢)나라가 덕(德)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 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런 까닭에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문선왕(文宣王 : 당나라 현종이 공자에게 추증한 시호)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에는 성실함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오랑캐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그 도(道)를 역시 행하였는데,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
-신라에서는 6세기 중엽인 진흥왕대에 처음으로 김씨 성을 사용하였고,
그 이전 신라에서는 김씨를 비롯한 어떠한 성씨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라에서 6세기 중엽 이전에는 성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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