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세계-역사/ -0~200; 동한

가야 김수로왕...허황후의 기원...

by 사마르칸트 2015. 11. 6.

 

 

-9간(九干)들이 계욕일(契浴日)에 모여 목욕을 하고 잔치를 벌이는데

 

구지(龜旨)에서 이르기를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고자 하니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어라”고 하였다.

 

9간들이 기뻐하며 그대로 따르니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내려오고

 

그 곳에 붉은 보자기에 쌓여진 금빛 상자가 있었다.

 

이튿날 상자를 열어보니 그 속에 담겨진

 

여섯 개의 알이 사내아이로 변해 있어 사람들은 하례를 하고,

 

그 달 보름에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이름을 수로(首露)라 하였다.

 


왕이 된 수로는 궁궐을 짓고 정사를 돌보았는데,

 

 어느날 홀연히 바다에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실은 배가 나타났다.

 

배에는 신하와 노비들이 있었는데 수로왕은 허황옥과 혼인을 하고 관직과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어 왕과 왕후는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리다가

 

189년에 왕후가 먼저 죽고,

 

10년 뒤에 수로왕이 세상을 떠났다.

 

 대궐 동북쪽에 빈궁을 세우고 장사를 지냈으며 이름을 수릉왕묘(首陵王廟)라 하였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의하면 아직도 나라가 없던 시절에 가락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누어 생활하고 있었는데

 

3월 어느 날 하늘의 명을 받아 9간(九干)과 부족원 수백 명이 구지봉에 올라가 제사를 지내고 춤추며 노래하자,

 

하늘로부터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그릇이 내려왔다.

 

그 속에는 6개의 알이 들어 있었는데 12일이 지난 뒤에 알에서 차례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중 가장 먼저 태어난 아이를 수로라고 했다. 주민들은 수로를 가락국의 왕으로 모셨고,

 

다른 아이들은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수로는 즉위 후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반을 확립했다.

 

그리고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의 왕녀인 허황옥을 왕비로 맞았다.

 


(김수로왕은) 임시로 궁궐을 지어 살면서 나라를 다스렸는데,

 

행동거지가 질박(質朴)하고 검소(儉素)했다. 지붕의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3척(三尺)에 불과했다.

 


이에 김수로왕(金首露王)은 나라를 잘 다스리고 집안을 가지런히 했으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였다.

 

신하와 백성들에 대한 교화(敎化)는 엄숙하지 않았으나

 

위엄이 있었고, 정사(政事)는 엄하지 않았는데도 잘 다스려졌다.(『삼국유사』 「가락국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변한의 구야국에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42년 3월 부족장을 기다리는 구야국의 지도자들에게

 

 "너희의 왕을 내려 보낸다"는 계시와 함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라는 노래를 부르라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하늘의 계시를 들은 부족장들은 가락국의 9간(干) 이하

 

수백 명이 김해의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말대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라고 구지가(龜旨歌)를 불렀다.

 

 

부족 주민들의 수가 늘어나 노래소리가 커지자

 

하늘에서 빛이 나더니 곧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상자가 내려오고,

 

그 안에 둥근 황금색 알 여섯 개가 들어있었다.

 

 

12일 후 이들 알에서 사내아이들이 태어났는데,

 

그 가운데 키가 9척이며 제일 먼저 알에서 깨어난 아이가 수로였다.

 

부족장들은 그를 6가야 중 수도이자 영토가 넓은 가락국의 왕으로 추대하여

 

주민들은 그를 가락국의 왕으로 받들었고,

 

또한 나머지 아이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상세하게 나온다.

 

‘후한의 광무황제 건무 18년(42)에

 

가락의 수장인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등 9인이 백성을 거느리고 계음(禊飮)을 하다가

 

구지봉을 바라보니 이상한 소리와 기색이 있으므로 가서 본즉

 

금함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그 속에 황금빛이 나는 해와 같이 둥근 알이 있었다.

 

 9인이 신성하게 여기고 절을 하고 받들어 아도간의 집에 두었다.

 

이튿날 9인이 모두 모여서 함을 열고 보니 동자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나이는 열 다섯쯤 되고 용모가 매우 거룩하였다.

 

무리들은 모두 절하고 하례 하면서 예를 다했다.

 

십여 일이 지나자 신장이 9척이나 되었다.

 

이달 보름날에 9인이 드디어 받들고 임금으로 모시니 곧 수로왕이다.

 

나라 이름을 가락이라 하고 또는 가야라 일컬었다가 뒤에 금관국으로 고쳤다.

 

그 나라는 동으로 황산강에 이르고, 동북은 가야산에 이르며, 서남은 큰 바다에 다 달았고,

 

서북은 지리산을 경계로 하였다.

 

 

즉위한지 158년 만에 헌제의 건안4년 기묘년(199)에 홍어하였다.

 

9대 손인 구해왕에 이르러 양나라 무제 중대통 4년 임자년(532)에 전해오는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수로왕으로부터 구충(구형)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가진 것이 무릇 491년이었다.’

 

 

 

 

-<삼국유사>에 ‘허왕옥은

 

서기 33년에

 

인도에서 태어나

 

열여섯 나이에 가락국의 수로왕에게 시집오기 위해 머나먼 항해길에 오른다.

 

20여명의 공주 일행을 태운 배는 붉은 돛에 붉은 깃발을 펄럭이고 있었으며,

 

배 안에는 인도에서만 난다는 파사석(婆娑石)이 실려 있었다’고 전한다.

 

파사석은 난파를 방지하기 위해 배 안에 실었던 돌이다.

 

 

 

 

 

 

-문무왕 때 수로왕의 위패를 신라의 종묘에 봉향하고 제를 올린 적이 일시적으로 있었다.

 

문무왕은 김수로왕의 15대 외손에 해당된다.

 

 

이 설에 의하면 김유신 가(家)는

 

"구형왕 - 무력 - 서현- 유신"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형왕 - 세종 - 무력 - 서현 - 유신"으로 이어져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의 내용과 배치된다.[5]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문무왕이 외가의 조상인 가락국의 김수로왕 제사에 관한 교서를 내린 사실을 전하고 있다

 

 

“ 가야국 시조의 9세손인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할 때에 거느리고 온 아들인 세종의 아들이 솔우공(김무력)이고,

 

그 아들인 서운(김서현)의 딸 문명왕후께서 나를 낳으셨다.[5]

 

때문에 시조인 수로왕은 나에게는 15대 조가 된다.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 묘가 아직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사하여 제사를 계속하도록 하라.[5] ”
  
— 《삼국유사》가락국기, 문무왕의 특별교서

 


《삼국유사》가락국기에 따르면 문무왕은

 

가야국의 태조 김수로왕을 신라 왕실의 종묘에 합사하도록 특별교서를 내리면서,

 

자신을 "구형왕 - 세종 - 김무력 - 김서현 - 문명왕후"로 이어지는 외가의 후손으로 칭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김무력은 세종의 아들로 구형왕의 손자가 되는데,

 

이는 김무력을 구형왕의 아들, 세종의 동생으로 보는 통설과는 상반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가

 

불교가 가장 성행했던 1076년(고려 문종)에 편찬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불교 발생지인 인도에서 허왕후가 출발한 것으로 윤색된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