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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 -0~200; 동한

고15 - 미천왕(美川王, 재위; 300년 ~ 331년)

by 사마르칸트 2016. 2. 1.

 

-아직 백제와의 충돌은 없었다.

 

 

미천왕(美川王, ? ~ 331년, 재위 : 300년 ~ 331년)은

 

고구려의 제15대 군주이다.

 

이름은 을불(乙弗) 또는 을불리(乙弗利), 우불(憂弗) 등이 전해진다.

 

서천왕의 손자이자 고추가(古鄒加) 돌고(咄固)의 아들이다.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한다.[1][2]

 

293년

 아버지 돌고가

백부인 봉상왕에게 반역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자

을불은 도망쳐 신분을 숨기고 고용살이와 소금장수 등을 하면서 숨어 지냈다.

사람들은 봉상왕보다 을불을 더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300년

국상 창조리(倉助利)가 봉상왕을 폐위할 마음을 품고 을불을 찾아 모셨으며

이후 봉상왕을 폐위한 뒤 왕으로 옹립되었다.

 

미천왕은 즉위 초부터 중국 군현 세력과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302년에는 현도군을 공격하여 적 8천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311년에는 서안평(西安平)을 점령하여

낙랑군(樂浪郡) 및 대방군(帶方郡)의 보급로를 끊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따라 313년에는 낙랑군의 군벌 장통(張統)이 요동으로 퇴각하였으며

 

314년에는 대방군을 병합하여 중국 군현 세력을 축출하였다.

 

 

317년에도 다시 현도성을 공격하였다.

 

중국 군현 세력이 축출된 이후 요서 지방에서 선비족(鮮卑族)의 일파인

모용부(慕容部)가 세력을 확대함에 따라 대립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318년 경,

서진(西晉)의 평주 자사(平州刺史)·최비(崔毖)의 작전에 따라

선비족의 다른 일파인 단부(段部)·우문부(宇文部)와 함께

모용외(慕容廆)를 공격하였는데 실패하였으며

이후 모용부가 요동을 장악하면서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되었다.

 

 

319년에는

서진의 최비가 요동을 잃고

고구려로 도망쳐 왔으며

하성(河城)을 지키던 여노(如孥)가 모용부의 공격에 포로로 잡히기도 하였다.

 

이에 미천왕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였으며

모용외 역시 두 아들을 보내 침략해 왔다.

 

이에 미천왕이 휴전을 청하여 잠시 휴전이 성립되었다.

 

 

320년 겨울에도 요동을 침략하였으며 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330년에는 후조(後趙)의 석륵(石勒)에게 사신을 보내 중국 방향에서 모용부를 견제하려 하기도 하였다.

 

331년에 서거하였으며 미천(美川)의 들에 장사지냈다.

 

342년에 고구려로 쳐들어온 전연(前燕)의 군대가 고구려를 위협하려고

미천왕릉을 도굴하여 시신을 가져갔으며 고

 

국원왕은 343년에 많은 공물을 바치고 시신을 돌려받았다.[1][2]

 

 

 

 

-삼국사기-

 

왕3년 9월에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현토군을 치고 8천명을 포로로 하여 평양으로 옮겼다.

 

왕12년 10월에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였다.

 

왕14년 10월에 낙랑군을 쳐서 멸망 시키고 남년 2천명을 포로로 하였다.

 

왕15년에 정월에 왕자 사유를 태자로 봉하고

9월에 남쪽의 대방군을 쳐서 멸망 시켰다.

 

왕16년 2월에 현토군을 쳐서 많은 포로를 잡았다.

 

왕20년 12월에 진(晋)나라의 평주자사 최비(崔毖)가

燕(연)나라 모용외 (선비족)와 싸우다 패하여 구원을 요청하며 도망을 오고

 

고구려 장수 여노자(如奴子)가 하성에 있다가

모용외의 장수 장통(張統)에게 패하여 사로 잡히자

 

왕이 군사를 내어 모용외를 치니 모용외가 아들 모용인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맹약을 맺고 돌아 가서는

또 다시 변방을 소란하게 하였다.

 

왕21년 12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모용인을 쳐서 크게 승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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