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후한 시대는 거의 고구려 태조대왕과 명립답부의 시대이다..
-낙랑에 대한 공격은 없다...
-창해, 살수, 남해.....
-요동과 현도군만 공격...
태조대왕(太祖大王, 47년 ~ 165년)은
고구려의 제6대 왕(재위 53년 ~ 146년)이다.
성은 고(高), 어릴 적 이름은 어수(於漱), 휘는 궁(宮)이며[1],
고구려를 강력한 중앙집권국가 수준으로 끌어 올린 왕으로서
그 업적이 나라를 세운 것에 버금간다고 하여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불렸다.
119살에 붕어하여 한국의 군주 중 가장 오래 산 군주 및
가장 오랫동안(93년) 군림한 군주로 기록되어 있다.
유리명왕(琉璃明王)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로,
어머니인 태후(太后)는 부여 사람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차대왕과 신대왕은 그의 이복 동생(서제)들이라 하나,
후한서에 의하면 차대왕, 신대왕은 각각 아들, 손자라고 한다.
그는 사촌 형 모본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53년부터 146년까지 93년간 재위하는 동안
53년부터 모후인 부여태후(扶餘太后, 고재사의 부인)가
대략 태조대왕(太祖大王)이 18세에서 22세를 전후한 시기까지 섭정(수렴청정)을 한 것으로 추정되며
121년부터 146년 퇴위할 때까지 고수성(훗날 차대왕)이 대리청정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차대왕과 신대왕은 그의 동생들이라 하나,
후한서와 그것을 인용한 신채호의 견해에 의하면
차대왕, 신대왕, 인고(仁固) 3형제가 있으며,
이들 3형제는 태조대왕의 동생이 아니라 서자라고 한다.[2]
즉위[편집]
기록에 따르면 태조대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수 있었고 어려서도 총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태조대왕의 나이가 어려 53년부터 부여태후(扶餘太后, 고재사의 부인)가
섭정(수렴청정)하였다.
태후의 수렴청정 기간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만 대략 태조대왕이
18세에서 22세를 전후한 시기까지 수렴청정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53년 두로(杜魯)가 모본왕(慕本王)을 살해한 후 국인(國人)이 재사를 왕위에 추대했으나
재사가 연로함을 이유로 거절하고
아들인 궁을 추대하여 태조대왕이 7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치세[편집]
55년 요서 지역에 10개 성을 쌓아 후한(後漢)의 침공에 대비하였고
56년에는 동옥저(東沃沮)를 병합하여
동으로는 창해(滄海),
남으로는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에 이르렀다.
68년에
갈사국(曷思國) 왕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그를 우태(于台)에 임명했고,
70년에는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서 조나(藻那)를 병합하였다.
72년에는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병합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고추가에 임명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주변 소국 정벌 활동은 중앙집권화의 흔적으로 보고 있다.
또한 98년에는 책성(柵城)을 순수,
102년에는 책성을 안무(安撫),
114년에는 남해(南海)를 순수하는 등
확장된 영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한편 후한과의 대외관계에서는 평화적인 외교와 적극적인 공세를 함께 펼쳤다.
105년에는 요동군(遼東郡)을 공격하여 약탈했으나,
109년과 111년에는 평화적인 외교를 펼쳤다.
118년에는 예맥과 더불어
현도군과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121년 봄에는 후한이 예맥을 공격하였고
왕은 동생인 수성(遂成)을 보내 막도록 하였다.
수성은 항복을 가장하여 적군을 속인 후 요지를 장악하였으며
몰래 요동군과 현도군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음력 4월에는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수현(遼隧縣)을 공격하여 요동태수 채풍을 살해하였다.
음력 12월에는
마한(馬韓), 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부여왕 위구태(尉仇台)가 한나라 군과 협공을 펼쳐 크게 패하였다.
122년에도 마한, 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쳤으나
부여의 방해로 패배하였다.
121년부터
태조대왕은 수성에게 국정을 돌보도록 하였으며
123년에는
목도루(穆度婁)와 고복장(高福章)을 좌·우보(左·右輔)로 삼아 수성을 보좌하게 하였다.
고복장은 차대왕 즉위 후 차대왕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므로,
그의 정치적 반대파였다.
따라서 태조대왕이 목도루와 고복장을 좌보와 우보로 임명한 것은
수성을 견제하고 왕권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3]
122년에는 후한과 화친하였으나
146년에 다시 전쟁이 벌어져
요동의 신안(新安)과 거향(居鄕)을 약탈하고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생포하였다.
은퇴와 최후[편집]
한편, 수성은 132년 무렵부터 왕위에 욕심을 냈다.
그러나 태조대왕이 죽지 않자
146년 측근들의 부추김을 받아 역모를 도모하였다.
이에 태조대왕은 수성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 후 별궁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다가 165년에 서거하였다.
자연사했다는 주장과 다른 설에는 차대왕 또는 신대왕에게 살해되었다는 전승이 있다.
사후 평안남도, 주로 평양 주변 지역에서 무속의 신의 한사람으로 숭배되었다.
사망년도의 논란[편집]
태조대왕이 죽은 해에 대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모두 165년에 사망하였다고 하였지만,
후한서(後漢書)에는 121년에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에 "궁(宮)이 죽고
그 아들 수성(遂成, 차대왕)이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4]
만약 후한서에 따른다면 재위도 121년에 끝나므로
122년 이후의 사실은 태조대왕의 업적이 아니고
아우(혹은 아들) 차대왕의 업적으로 추정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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