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53~146 재위기간 93년>
태조대왕[국조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궁이고, 아명은 어수이다.
그는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 재사의 아들이고, 어머니 태후는 부여 사람이다.
모본왕이 죽었으나, 태자가 불초하여 나라를 맡을 수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궁을 맞이하여 모본왕에 이어 왕으로 삼았다.
왕은 태어 나면서 눈을 뜨고 볼 수 있었으며, 어린 나이에도 출중한 면모가 보였다.
그러나 이 때 나이 7세였기 때문에 태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3년 봄 2월,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서 한 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가을 8월, 남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4년 가을 7월,
동옥저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어 국경을 개척하였으니,
동으로는 동해,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렀다.
7년 여름 4월, 왕이 고안연에 가서 낚시를 하다가 날개가 붉은 백어를 낚았다.
가을 7월, 서울에 홍수가 나서 가옥이 물에 잠기거나 떠내려 갔다.
10년 가을 8월, 동쪽 지방에서 사냥을 하여 흰 사슴을 잡았다.
남쪽 지방에 날아다니는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16년 가을 8월, 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항복해왔다. 도두를 우태로 삼았다.
겨울 10월, 우레가 있었다.
20년 봄 2월, 관나부 패자 달가를 보내 조나를 치고, 그 왕을 사로 잡았다.
여름 4월,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22년 겨울 10월, 왕이 환나부 패자 설유를 보내 주나를 치고, 그 왕자 을음을 사로잡아 고추가를 삼았다.
25년 겨울 10월, 부여의 사신이 와서 뿔이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다.
왕이 이를 상서로운 것이라 하여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11월, 서울에 눈이 3자 내렸다.
46년 봄 3월, 왕이 동쪽 책성으로 가는 도중에,
책성 서쪽 계산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책성에 도착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술을 마시면서,
책성 관리들에게 물품을 정도에 따라 하사하였다.
그들의 공적을 바위에 새기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왕이 책성에서 돌아왔다.
50년 가을 8월,
사신을 보내 책성의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53년 봄 정월,
부여 사신이 와서 호랑이를 바쳤는데,
길이가 1장 2척이며, 털 빛깔은 환하고, 꼬리가 없었다.
왕이 한 나라 요동에 장수를 보내 여섯 개 현을 약탈하게 하였다.
요동 태수 경 기가 군사를 동원하여 대항하였다.
왕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가을 9월, 경기가 맥인을 격파하였다.
55년 가을 9월, 왕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다가 자줏빛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 동해곡 수령이 붉은 표범을 바쳤다.
그 표범의 꼬리가 아홉 자였다.
56년 봄에 가뭄이 들었다.
여름이 되자 땅이 붉게 변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57년 봄 정월, 한 나라에 사신을 보내 안제의 성년식을 축하하였다.
59년,
왕이 예맥과 함께 현토를 침범하였다
62년 봄 3월, 일식이 있었다.
가을 8월, 왕이 남해를 순행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남해에서 돌아왔다.
64년 봄 3월, 일식이 있었다.
겨울 12월, 눈이 다섯 자 내렸다.
66년 봄 2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6월, 왕이 예맥과 함께 한 나라 현토를 습격하여 화려성을 쳤다.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생기고 우박이 내려 곡식이 상하였다.
8월,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선량한 사람, 효성스런 사람, 온순한 사람들을 천거하게 하고,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과 늙어서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조사하여,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게 하였다.
---------------------------------------------------------------------------------------------------
69년 봄,
한 나라
유주 자사 풍 환·
현토 태수 요 광·
요동 태수 채 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예맥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병기와 마필과 재물을 모두 약탈하였다.
왕이 아우 수성에게 군사 2천여 명을 주어서, 풍 환·요 광 등과 싸우게 하였다.
수성이 한 나라 군영에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풍 환 등은 이 말을 믿었다.
수성이 곧 험한 곳에 의지하여 대군을 막는 한편
비밀리에 군사 3천 명을 보내 현토·요동의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지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여름 4월,
왕이 선비의 군사 8천 명과 함께 요대현을 공격하였다.
요동 태수 채 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에 나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공조연 용 단과 병마연 공손 포는 자신의 몸으로 채 풍을 엄호하다가,
채 풍과 함께 진영에서 죽었다.
이 때 사망자가 백여 명이었다.
겨울 10월,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를 지내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백성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물품을 주었다.
숙신의 사신이 와서 자줏빛 여우 갖옷과 흰 매와 흰 말을 바쳤다.
왕이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여 보냈다.
11월, 왕이 부여에서 돌아왔다.
왕이 아우 수성으로 하여금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총괄적으로 맡아보게 하였다.
12월, 왕이 마한과 예맥의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토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시켜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 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대항케 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
70년, 왕이 마한·예맥과 함께 요동을 공격하였다.
부여왕이 군사를 파견하여 한 나라를 구원하고,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였다.
[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하였다 하니,
멸망하였다가 다시 일어난 것인가?]
71년 겨울 10월, 패자 목도루를 좌보로 삼고,
고복장을 우보로 삼아, 수성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72년 가을 9월 그믐 경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한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11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80년 가을 7월, 수성이 왜산에서 사냥을 하며 좌우의 근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이 때 관나부 우태 미유와 환나부 우태 어지류와 비류나조의 양신 등이 남모르게 수성에게 말했다.
"초기에 모본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불초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자 재사를 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재사가 늙었다 하여 아들에게 양보하였다.
이는 형이 늙으면 아우에게 계승케하자는 것이었다.
이제 왕이 이미 늙었으나 양위할 뜻이 없으니, 그대는 대책을 세우라."
수성이 말했다.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천하의 상도이다.
왕이 지금 비록 연로하다고 하지만 맏아들이 있는데
어찌 감히 왕위를 넘볼 수 있겠는가?" 미유가 말했다.
"아우가 현명하면 형의 뒤를 잇는 일이 옛날에도 있었다.
그대는 이를 의심치말라.
" 이 때 좌보 패자 목도루는 수성이 왕이 되고자 하는 생각이 있음을 알고,
병을 구실로 벼슬을 하지 않았다.
86년 봄 3월,
수성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며 7일 동안 돌아오지 않고,
즐기기만 할 뿐 행동에 절도가 없었다.
가을 7월, 수성이 또 기구에 사냥가서 5일 만에 돌아왔다.
그의 아우 백고가 간했다.
"화복은 들어오는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이 불러 들이는 것이다.
지금 형은 왕의 아우라는 친족으로서 백관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지위는 이미 지극히 높고, 공로도 또한 훌륭하다.
따라서 마땅히 충성과 의리를 마음에 간직하고, 예절과 겸양으로 욕망을 억제하여,
위로는 왕의 덕과 같도록 노력하고, 아래로는 민심을 얻어야 한다.
이렇게 한 뒤에야 부귀가 형을 떠나지 않고 화란이 일어 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렇게 행동하지 않고, 향락에 빠져 걱정을 모르고 있으니,
형이 위태롭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수성이 대답했다.
"사람의 감정으로 누구인들 부귀와 환락을 원하지 않으랴만
이것을 얻는 자는 만 명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제 내가 향락을 즐길 수 있는 처지에 있으니,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면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끝내 백고의 말을 듣지 않았다.
90년 가을 9월, 환도에 지진이 있었다.
왕이 밤에 꿈을 꾸었는데, 표범이 호랑이의 꼬리를 물어 끊었다.
왕이 잠을 깨어 좋은 꿈인지 나쁜 꿈인지를 물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호랑이는 모든 짐승의 어른이며, 표범은 호랑이의 한 종류로서 작은 짐승이다.
아마도 왕의 친족 가운데 대왕의 후대를 끊으려고 획책하는 자가 있지 않은가?"
라고 하였다.
왕이 기분이 좋치않아 우보 고 복장에게
"내가 어제 밤 꿈에 본 것에 대하여, 점치는 자의 말이 이러하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라고 물었다.
고 복장이 대답하였다.
"안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것도 변하여 나쁜 것이 되고,
좋은 일을 하면, 재앙도 도리어 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제 대왕께서 나라 일을 집안 일과 같이 걱정하며,
백성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시니,
비록 사소한 이변이 있다한들 무슨 걱정거리가 되겠습니까?"
94년 가을 7월,
수성이 왜산 아래서 사냥하면서 좌우의 근신들에게 말했다.
"대왕이 늙었으나 죽지 않고, 나도 나이가 많으니 기다릴 수 없다.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계책을 꾸미기 바란다."
근신들이 모두
"삼가 명령에 따르겠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 누군가가 혼자 나서서
"조금 전에 당신은 자신에게 결코 상서롭지 않은 말을 하였는데,
근신들이 올바른 말로 말리지 않고, 모두 삼가 명령에 따르겠다고 하였으니,
이는 간사하고 아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직언을 하려 하는데, 당신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다"라고 말하였다.
수성이
"그대가 직언을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약이 될 터인데,
무엇을 의심하는가?"라고 대답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우리 대왕이 현명하여, 안팎으로 반역할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는데,
당신이 비록 국가에 공로가 있다고 하지만, 간사스럽고
아첨하는 아랫 사람들을 데리고, 현명한 임금을 폐위시키려고 하니,
이것이 한 오라기의 실로 1만 균의 물건을 매어놓고
거꾸로 끌어당겨 보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만일 당신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충효와 공손함으로 대왕을 섬기면,
대왕께서는 당신의 어진 마음을 깊이 헤아려,
반드시 당신에게 양위할 마음을 가질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화가 미칠 것이다."
수성은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좌우의 근신들이 그의 정직함을 질투하여 수성에게 참소하였다.
"대왕이 나이 많아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울까를 염려하여,
후일에 대한 계책을 도모하려는 것인데,
이 사람이 이와 같이 망녕된 말을 하니,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누설되어 후환을 초래할까 염려된다.
따라서 이 사람을 죽여 입을 닫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수성이 그 말을 따랐다.
가을 8월, 왕이 장수를 보내 한 나라 요동 서쪽 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빼앗아 돌아왔다.
겨울 10월, 우보 고 복장이 왕에게 말하였다.
"수성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청컨대 먼저 그를 처형하소서."
왕이 말했다.
"내가 이미 늙었고, 수성은 나라에 공이 있으니,
내가 그에게 왕위를 주려 한다.
그대는 염려하지 말라!"
복장이 말했다.
"수성은 사람됨이 잔인하고 어질지 못합니다. 아마도 오늘 대왕의 왕위를 물려 받는다면,
내일은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대왕은 다만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만 알고,
죄없는 자손들에게 후환이 미칠 것을 알지 못하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12월, 왕이 수성에게 말했다.
"내가 이미 늙어서 모든 일이 힘들구나. 하늘의 운수가 너에게 있으며,
또한 네가 안으로는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는 군사에 대한 일을 총괄하여,
오랫 동안 나라에 공로를 쌓아 신하와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였으니,
내가 의지하고 일을 맡길 적임자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왕위에 올라 길이 경사를 누릴지어다!"
왕은 곧 왕위를 내어주고 별궁으로 물러났다.
이를 태조대왕이라 하였다.
[[후한서]에는
"안제 건광 원년에 고구려왕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왕위에 올랐다.
이 때 현토 태수 요광이 왕이 죽은 것을 기회로 삼아 군사를 출동하여 치고 싶다고
안제에게 말하니 모두가 찬성하였다.
상서 진충이 말하기를
'전에는 궁이 훌륭하고 영명하여 요광이 칠 수 없었는데, 그가 죽었다
하여 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다.
마땅히 사자를 보내 조문하고, 예전의 죄과를 묻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두었다가,
후일을 도모함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니,
안제가 이 말대로 하였다.
이듬해에 수성이 한 나라 포로를 돌려 보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해동고기]에는
"고구려 국조왕 고궁은 후한 건무 29년 계사에 즉위하니,
이 때 나이가 7세였기 때문에 그 어머니가 섭정하였다.
효환제 본초 원년 병술에 이르러,
동복 아우 수성에게 왕위를 내어주니 이 때 궁의 나이가 1백세로서,
재위 94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건광 원년은 곧 궁의 재위 69년에 해당한다.
[한서]의 기록과 고기의 기록이 서로 다르니,
혹시 [한서]의 기록이 틀린 것이 아닌가?]
'■ 세계-역사 > -0~200; 동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한서...후한서...유주(幽州) 인구분포 및 변화... (0) | 2016.02.08 |
---|---|
제8대 신대왕 때의 이상한 기록... (0) | 2016.02.05 |
태조대왕 3 년(서기 55 년) 요서에 10 성을 쌓아 한병에 대비하였다... (0) | 2016.02.05 |
고6-태조대왕(太祖大王, 47년 ~ 165년)(재위 53년 ~ 146년) (0) | 2016.02.01 |
명림답부(明臨答夫, 67년~179년) - 차대왕7 - 신대왕8 (0) | 2016.02.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