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대 신대왕<新大王 165~179 재위기간 14년>
-아주 유명하신 명림답부 재상이 있던 시대이야기 입니다.
신대왕의 이름은 백고['고(固)'를 '구(句)'라고도 한다.]이며, 태조대왕의 막내 아우이다.
의표가 영특하고 성품이 인자하며 너그러웠다.
선왕인 차대왕이 무도하여 신하와 백성들이 가까이 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고는 환란이 생기면 자기에게도 해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산골짜기로 도망했었다.
차대왕이 살해되자 좌보 어지류가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여 사람을 보내 백고를 모셔오게 하였다.
백고가 돌아오자 어지류가 무릎을 꿇고 옥새를 바치면서 말했다.
"선왕이 불행하게 돌아가시고, 비록 그 아들이 있으나 나라를 맡길 수 없으며,
인심이 인자하신 당신에게 돌아가므로,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오니, 청컨대 존위에 오르소서."
이에 백고는 엎드려 세 번 사양한 뒤에 즉위하였다.
이 때 나이가 77세였다.
2년 봄 정월에 왕이 명령을 내려 말했다.
왕이 그에게 구산뢰·누두어 두 곳을 주고, 양국군으로 봉하였다.
답부를 국상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올려 패자로 삼아, 내외의 병마사를 맡게 하고,
동시에 양맥 부락을 다스리게 하였다.
좌보와 우보를 국상으로 고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3년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겨울 10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4년[168년],
한 나라 현토군 태수 경 림이 침입하여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이자,
왕이 자진하여 항복하고 현토에 속하기를 요청하였다.
-> 이 글은 주어가 다른 이야기 일겁니다.
-한나라의 대병에 맞서서 싸워 이긴 고구려가 고작 현토군 태수에게 항복을 하다니...
-그리고 현토군에 항복 했다면.. 굳이 대병을 일으킬 필요가 없음
-아마도 굳이 전쟁보다 그냥 강화를 했을 듯...
5년[169년], 왕이 대가 우거와 주부 연인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현토 태수 공손 도를 도와 부산의 적을 치게 하였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왕망(王莽)의 초(初)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고구려가 호(胡)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국경을 넘은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遼西)[군(郡)]의 대윤(大伊)[註@032]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쉽게 말해서 왕망이 병사를 보내라고 협박하자..
오히려 국경을 먼저 공격했으며..
요서군의 장군이 죽은 것이다...
8년[172년] 겨울 11월, 한 나라에서 대병을 일으켜 우리를 향하여 왔다.
왕이 군신들에게 공격과 수비의 어느 쪽이 좋은가를 물었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말했다.
"한 나라 군사들이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경시하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적은 우리를 겁쟁이라 하여 자주 침입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야말로 한 명이 문을 지키면 만 명이 와도 막아낼 수 있는 격입니다.
따라서 한 나라 군사의 수가 많을지라도,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니, 군사를 출동시켜 방어하소서."
그러나 답부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 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습니다. 이제 그들이 강병으로 멀리까지 쳐들어 오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또한 병력이 많은 자는 싸워야 하고, 병력이 적은 자는 수비해야한다는 것이 병가의 법도입니다.
이제 한 나라는 천리길이나 되는 먼 곳에서 군량미를 수송해야 하므로,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성밖에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성밖의 들판에 곡식 한 알, 사람 하나없이 비워 놓고 기다리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열흘 혹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림과 피곤으로 인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이 때 우리가 강한 군사로써 육박하면 뜻대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이를 옳게 여겨 성을 닫고 굳게 수비하였다.
한 나라의 군사들이 공격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장수와 졸병들이 굶주리다 못하여 퇴각하였다.
이 때 답부가 수천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에서 전투를 벌리니,
한 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12년 봄 정월, 군신들이 태자를 정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다.
3월, 왕자 남무를 왕태자로 삼았다.
14년 겨울 10월 그믐 병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15년 가을 9월, 국상 답부가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다.
왕이 직접 가서 애도를 표하고,
7일간 조회를 중지하였다.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례를 지내고, 20여 호의 묘지기를 두었다.
겨울 12월, 왕이 붕어하였다.
고국곡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신대왕이라 하였다.
-공손도[공손탁]은 204년에 죽고, 238년에 토벌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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